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요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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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d164a,#FFC224> 부통령 후보 | 비고 | |||
공화당 | 리처드 닉슨 | 1위 | ||
스피로 애그뉴 | 당선1 | |||
민주당 | 조지 맥거번 | 2위 | ||
사전트 슈라이버 | 낙선 | |||
1 현직 미국 정·부통령 2 선거운동 도중 사퇴 및 후보 교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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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 상원의원 (사우스다코타 주 클래스 3) | ||||
87대 조지프 H. 버텀 | ← | 제88~96대 조지 맥거번 | → | 제97~99대 제임스 앱드너 |
1972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 |
미합중국 제88-96대 연방 상원의원 조지 스탠리 맥거번 George Stanley McGovern | |
<colbgcolor=#0044C9><colcolor=#fff> 출생 | 1922년 7월 19일 |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에이번 | |
사망 | 2012년 10월 21일 (향년 90세) |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 수폴스 | |
국적 | 미국 |
가족 | 배우자 엘레노어 맥거번 (결혼: 1943, 사별: 2007) 슬하 자녀 5명 |
학력 |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 (B.A.) 노스웨스턴 대학교 (Ph.D. M.A.) |
종교 | 개신교(감리회) [1] |
정당 | |
경력 | 연방 하원의원 (1957~1961 / 사우스다코타 1구) 평화를 위한 식량 총책임자 (1961~1962) 연방 상원의원 (1963~1981 / 사우스다코타) 1972년 대선 민주당 후보 (1972) 주UN 식량 및 농업 위원회 대사 (1998~2001)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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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2년 5월 1주 호 타임지 표지[2]Here Comes the Prairie Populist(여기 대평원의 대중주의자가 온다).] |
미국 진보좌파 진영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조지 맥거번 이전에도 유진 매카시, 헨리 A. 월리스, 로버트 라폴레트,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진보 정치가들은 많았지만, 맥거번은 반전평화운동, 기아퇴치운동, 마리화나 합법화, 기본소득제 시행, 인종 및 성별 불평등 문제 등 보다 현대적인 의제를 내세웠으며, 무엇보다 기존의 뉴딜동맹 지지층을 탈피하는 다인종-청년-여성-성소수자-도심 거주자 계층을 핵심적인 지지 세력으로 규합하였기 때문에[4] 이렇게 평가받는다. 여러모로 반대 진영의 배리 골드워터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5]
2. 생애
2.1. 정치 입문 이전
1922년 7월 19일, 사우스다코타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목사 조셉 맥거번 아들로 태어났다[6]. 캐나다 사람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잠시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 다시 사우스다코타로 돌아왔다. 학창시절에는 수줍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토론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웅변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1940년에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에 진학하여 웅변 장학금을 받으며 다니던 도중 미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하여 제2차 세계 대전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 B-24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했다.[7] 폭격기 조종사로 활동하면서 여러번 죽을 위기도 넘겼고, 비행기 조종을 잘해서 훈장까지 받는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때 구호물품을 조달했던 경험이 정치 입문 이후 빈곤 퇴치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바탕이 된다.
제대 이후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1946년에 학사 학위를 따고 잠시 신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1949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역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모교인 다코타 웨즐리안 대학교로 돌아가 역사 교수로 부임하던 도중 박사 논문 집필을 병행하여 1953년에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해리 S. 트루먼의 냉전적 사고를 비판하면서 헨리 A. 월리스를 따라 진보당에 입당하지만 얼마 안가 탈당한다.
2.2. 정계 입문
이미 학자 시절부터 진보 성향을 보이다가,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연설에 깊이 감명받아 정치의 꿈을 꾸게 된다. 스티븐슨을 지지하는 사설들을 지역 신문에 자주 투고하자, 그의 글들을 인상깊게 본 사우스다코타 민주당에서 1953년에 맥거번을 당 총무로 스카우트 해간다. 친구들과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맥거번은 종신 재직이 확실시되던 교수직까지 내팽겨치고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당시 사우스다코타의 민주당은 주의회의 110석 중에서 단 2석밖에 당선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발로 뛰어 유권자들에게 다가가는 전략으로 1년만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낸다.1956년에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는데, 뼈빠지게 뛰어다니며 만들어놓은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저예산 캠페인을 펼친 맥거번은 세간의 예상을 뒤엎고 당선된다. 농업이 주요 산업인 사우스다코타의 의원 답게 농업 및 식품업 진흥에 관련된 활동을 주로 하였고, 이전부터 주시하던 식량빈곤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1958년에 공화당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한다.
1960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다가 낙선한다. 하지만 이내 새로 출범한 케네디 정부의 부름을 받아 대통령 직속 "평화를 위한 식량 (Food for Peace)" 프로그램의 첫 총책임자로 임명된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제3세계 국가들로 향하는 인도적 지원을 대폭 확대시켜 미국 외교의 큰 축으로 만드는 정책을 시행중이었는데, 이 계획의 식량 관련 임무를 하원 내 농업 및 식량복지 관련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던 맥거번에게 맡긴 것이다.
맥거번은 단 1년 반만에 미국의 잉여 농산품을 전세계의 총 3천5백만명에게 공급하는 활약을 펼친다. 이 공로로 맥거번은 요한 23세 교황을 알현하는 등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고, 훗날 노벨평화상을 타게 되는 유엔세계식량계획의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고향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처리하기 곤란해서 썩혀버리던 수확을 정부가 좋은 취지로 후한 값을 쳐줘서 사주니 아쉬울 것 없었다.
2.3. 상원의원 시절
"이 방에 있는 모든 상원의원들이 너무 일찍 묻힌 미국 청년 50,000명을 파병한데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이 방에서 피비린내가 납니다.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거나, 성기가 없거나, 얼굴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청년들의 피비린내가."
1970년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투표 이전에 한 연설. 결과적으로 투표는 55대 39로 맥거번의 패배였다.
1970년 맥거번-햇필드 수정안 투표 이전에 한 연설. 결과적으로 투표는 55대 39로 맥거번의 패배였다.
1962년 다시 한번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겨우 597표 차이로 당선된다. 상원 활동 초창기에는 하원 경력과 비슷하게 농민들의 권리를 적극 대변하며 농업 정책 전문가로 평가받았다. 동료 초선의원이자 대통령의 동생이었던 테드 케네디도 농업 관련 법안에는 적극적으로 맥거번의 조언을 구했다. 한편 핵전쟁 시대의 국방정책을 탐탁지 않게 여겨 지속적으로 국방예산의 감축을 제안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소극적인 반대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1965년 남베트남 순방 도중 생지옥을 목격하고는 상원 전체에서 가장 급진적인 반전(反戰) 의원으로 거듭난다. 꾸준한 반전 연설로 재야 반전 운동권 인사들의 주목을 받아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경선출마 하라는 권유를 받는데, 상원 재선을 준비해야 했던 맥거번은 처음에는 고사하지만 재선 전망이 좋지 않자 뒤늦게 출사표를 던진다. 경선에서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에게 밀려 낙선하지만 상원의원 선거에서 전직 주지사였던 공화당 후보를 생각보다 여유로운 득표 차로 제치며 재선에 성공, 의정활동을 이어나갔다.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야합에 가까운 후보선출 방식 때문에 폭력사태를 초래하자, 경선과정을 전폭적으로 바꾸는 특별 위원회가 맥거번을 필두로 출범한다. 직접선거인 프라이머리 방식을 확대 추진하고 흑인, 여성 및 청년 할당제를 신설하는 개혁안은 현재도 거대양당이 모두 따르고 있다. 한편 상원에서는 국내 빈곤을 다루는 영양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닉슨 정부와 푸드 스탬프 제도를 놓고 대립각을 세운다.
하지만 대표적은 행보는 여전히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활동이었다. 닉슨의 베트남 정책을 가장 먼저 공식적으로 비판한 상원의원이 되었고, 평화적인 반전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얼굴을 보였다. 그의 반전 행보는 1970년 국방예산안에 "1년 이내 미군의 베트남 완전 철수"를 추가할 것을 건의한 '맥거번-햇필드 수정안'으로 절정을 찍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와 지상파 TV 토론 방송 자금을 마련하는 등 맥거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 수정안은 미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만, 상원에서는 큰 표차이로 통과하지 못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맥거번의 전쟁 혐오는 극에 달하여 남베트남 정치인들을 비난하거나 호찌민을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는 위험한 발언들을 하기도 한다.
2.4. 대통령 후보
"맥거번 후보는 톰 이글턴을 1,000 퍼센트 지지합니다."
맥거번 후보 공보관의 공식 성명. 6일 후 맥거번은 이글턴을 사퇴시켰다.
맥거번 후보 공보관의 공식 성명. 6일 후 맥거번은 이글턴을 사퇴시켰다.
1971년 1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했다. 이례적으로 본 선거에 약 2년이나 앞서 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는 당시 민주당 측의 최고 유력 후보였던 에드먼드 머스키 상원의원을 따라잡기 위해 일찍 유세를 시작하겠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른 유세의 성과를 별로 신통치 않았다. 1년이 지난 1972년 1월에도 지지율이 3%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머스키가 1968년에 바뀐 새 경선 룰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군다나 가족까지 건드리는 리처드 닉슨의 더러운 방해공작에 고전하며 일찍 후보 사퇴해 버린다. 이에 맥거번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반전 운동가와 젊은 진보층의 열정을 잘 이용해서 발로 뛰어 유권자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이른바 풀뿌리 (grassroots) 캠페인으로 세를 불린다. 여기다 맥거번은 병역기피자 전면 사면, 국방예산 대폭 삭감, 1000달러 기본 소득제 등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공약들을 내세워 중서부 블루칼라 서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급진적 진보 세력을 대표하던 맥거번을 민주당의 터줏대감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당의 중진들은 전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를,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 계열에서는 조지 월리스를 내세워 맥거번을 집중포격했다. "Amnesty, Abortion, Acid (사면, 낙태, LSD[8])"라는 자극적인 구호를 앞세워 맥거번을 마치 히피들의 선봉장으로 몰아갔지만, 맥거번은 결국 경선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본 선거에서 맥거번은 그야말로 망했어요(...). 그냥 망한게 아니고 역대급으로 망했다. 일단 당내에 편이 없다보니 부통령 후보 지목에서도 난항을 겪었다. 이름있는 정치인들은 모두 퇴짜를 놓은 관계로 급하게 미주리 상원의원이던 토머스 이글턴(Thomas Eagleton)을 지목했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이 조울증 때문에 전기충격요법 치료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정신질환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제대로된 연구가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던 터라 대통령 유고시 과연 이 사람이 대통령 권한대행 업무를 볼 수 있는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처음에 맥거번은 무조건 지지 선언을 했지만, 논란이 커지자 이글턴의 자진사퇴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존 F. 케네디의 매부인 사전트 슈라이버(Sargent Shriver)[9]를 대체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이미 맥거번의 상황 판단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말바꾸기 이미지가 전국에 퍼진 상태였다. 오히려 빠르게 교체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된 셈.
부통령 지명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다른 문제들도 참혹하긴 마찬가지였다. 경선 내내 맥거번의 발목을 잡던 당은 후보 지명 이후에도 좀처럼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당내 원로들과 민주당의 믿는 구석인 노동조합들이 지지선언을 거부했고, 존 코널리를 필두로 하는 남부 민주당원,보수주의 민주당원들은 '닉슨을 위한 민주당'을 만들어 아예 닉슨을 지지해 버렸다.
한편 리처드 닉슨은 이미 경선 도중 맥거번에게 덮어씌워진 급진좌파 프레임을 적극 이용했고, 도청까지 마다하지 않는 더러운 방해공작으로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결국 본 선거에서 매사추세츠[10]와 워싱턴 D.C. 고작 두 곳에서 이기고 선거인단을 겨우 17명 확보하며 참패했다. 맥거번은 자신의 홈 스테이트인 사우스다코타에서도 닉슨에게 45.5% vs 54.2%로 패하는 굴욕을 맛봤다.
2.5. 다시 상원으로
치욕적인 패배의 충격이 너무나 커 현직 상원의원 신분으로 이민까지 고려했으나 결국 해탈하여 셀프디스를 시전하는 경지에 올랐다. 당내 입지는 말할 것도 없이 찬밥신세로 전락했지만, 닉슨 정부에게 독설을 종종 날리며 간간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워싱턴에서의 신세와는 달리 사우스다코타에서의 인기는 아직 괜찮아서, 197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농업 관련 업적들을 인정받아 손쉽게 연임에 성공했다.1975년에 드디어 숙원이었던 베트남 전쟁 종전이 이루어졌지만, "북베트남 정부가 종전 후에 민간인을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으니 남베트남 난민들을 다시 돌려 보내는 것이 인도주의적인 행동"이라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보트피플들의 베트남 귀환을 적극 권장하는 법안을 제출했다가 좌우막론하고 욕을 얻어먹었다. 잠시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했지만,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정치 경력의 대부분을 동남아시아 문제의 군사적 개입에 극렬히 반대해온 그지만, 1978년에 크메르 루주 정권 치하 킬링필드의 참상에는 맥거번도 개입을 찬성했다.
한편 식량 관련 행보에서는 여전히 두각을 나타냈다. 1977년에 성인병 예방을 자신이 이끌던 상원 영양특별위원회의 주요 과제로 선정했으며, 이 사업의 일원으로 지방 섭취를 지양하고 탄수화물과 섬유질 섭취를 권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카터 정부가 적극 채택하여 건강한 식단에 대한 경각심을 대통령이 나서서 강조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미국 농무부에서 제작/배포하고 있는 '미국 국립 식단 가이드라인'의 시발점이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을 필두로 한 보수세력이 공격적인 지변확장에 나섰는데, 이때 맥거번이 필수 낙선 타겟 중 한명이 된다. 상대 후보였던 제임스 앱드너는 오랜 시간 사우스다코타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농업 행보에 맥거번과 필적할 만한 경력을 쌓았고, 낙태나 종교 등 사회적인 이슈에 보수적인 사우스다코타의 도덕적 코드에 훨씬 더 적합한 인물이었다. 맥거번은 의외로 경합적인 모습을 보이며 적극적인 유세를 펼쳤지만, 결국 낙선하여[11] 정든 의회를 떠난다.[12]
2.6. 말년
이후 맥거번은 원외에서 진보 정치인들을 도와 펀드레이징을 하며 레이건의 기독교 우파 세력에 맞선다.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한번 더 출마하는데,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맥거번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무리하게 돈과 사람을 쓰지 않았다. 그의 진짜 목표는 국내외적으로 개혁적인 공약들을 내세워 민주당의 전반적인 정책방향을 더욱 진보적으로 끌고오는 것으로, 이러한 용감한 시도는 경선 경쟁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여생을 이런저런 싱크탱크의 회장직을 맡고 집필활동에 몰두하며 보냈지만, 1998년에 빌 클린턴 대통령의 권유로 주UN 식량 및 농업 위원회 대사로 임명되며 잠시나마 정계로 복귀한다. 케네디 정부 시절 추진한 제3세계 식량 지원 프로그램을 다시금 총괄하게 되는데, 공화당의 밥 돌 상원의원의 도움으로 상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돌 상원의원과 파트너십을 맺어 함께 다수의 식량빈곤 사업을 추진한다. 이외에도 설립에 큰 기여를 한 WFP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모교인 다코타 웨즐리안을 위해 기부금을 모으고 민주당의 원로로서 가끔씩 목소리를 내며 활발하게 황혼기를 보냈다.
2012년 10월 21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90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숨을 거둔다.
3. 인물됨과 일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상원의원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정의감이 뛰어나서 베트남 전쟁 평화운동, 여성운동, 기아 퇴치운동은 물론 모교 기부금 모금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러한 맥거번의 행보는 후일 미국 진보 정치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다.그러나 다소 다혈질적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독설을 퍼붓는 성격이었는데 이 때문에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다. 개인 인품은 나쁘지 않았다할지라도 정치인으로서 높은 자리에 가기 적합한 성격은 아니었던 셈.
-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조지 맥거번의 다혈질적인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선거였다. 조지 맥거번은 리처드 닉슨을 히틀러로 비유하고, 헨리 키신저의 "명예로운 평화" 선언에 폭격기가 여전히 베트남에 날라다니고 있는데 무슨 얼어죽을 평화냐고 응수하며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너무 극단적인 수식어를 사용한다는 인상을 줬다. 또 대선 후보자와 대담을 갖는 TV 쇼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정책을 공격하자 유권자인 그 여성에게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서 자신의 평판을 더욱 떨어트렸다.
- Kiss My Ass 사건: 선거 막판에 터진 망언으로, 리처드 닉슨 지지자가 맥거번을 비난하자 맥거번이 이에 응수해서 Kiss my ass("ㅈ까" 정도의 뉘앙스)라고 쏘아붙인 사건을 의미한다. 즉시 "Kiss my ass"의 이니셜인 "KMA"라고 적힌 배지가 나돌았고 맥거번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치닫는다. 루머라는 말도 있었는데 후일 제임스 이스트랜드 상원의원이 맥거번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보길, 사실이었고 또 자신은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 1976년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를 뽑았다. 이유는 민주당 지도부와의 불화[13] 및 지미 카터의 보수성[14]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또 포드와 맥거번은 사적으로 친한 사이였고 이 역시 맥거번이 포드를 뽑은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 대선에서는 레이건을 막아야한다는 이유 때문에 카터를 뽑았다. 의외로 닉슨 사면도 지지했다.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필요시 선거인단) | 당선 여부 | 비고 |
1956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사우스다코타 | | 116,516 (52.40%) | 당선 (1위) | 초선 |
1958 | 미국 연방 하원의원 선거 | 107,133 (53.44%) | 당선 (1위) | 재선 | ||
1960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45,261 (44.88%) | 낙선 (2위) | |||
1962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27,458 (50.15%) | 당선 (1위) | 초선 | ||
1968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58,961 (56.79%) | 당선 (1위) | 재선 | ||
1972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29,178,222 (37.50%, 17명) | 낙선 (2위) | ||
1974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사우스다코타 | 147,929 (53.04%) | 당선 (1위) | 3선 | |
1980 |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 | 129,018 (39.40%) | 낙선 (2위) |
5. 여담
- 성인 McGovern에서 Govern은 "통치"를 의미하기도 하기에 맥거번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McGoverning"이 되었을탠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재유머가 미국 내에서 꽤 유명하다. 그와 별개로 맥거번의 좌파적인 정치 철학, 그리고 주류 민주당으로부터 받는 소외[15] 등을 빗대어 McGovern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생전에는 우파 성향 미국인들로부터 Mad McGovern(미친 맥거번)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음악가 존 레논이 생전에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존 레논의 좌파적인 성향을 감안한다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무엇보다 닉슨이 존 레논을 미워해서 그를 미국에서 추방시키려 했기에[16], 현실적인 이유에서도 지지했다. 문제는 존 레논은 진지하게 조지 맥거번이 대선에서 승리할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1972년 대선에서 맥거번이 압도적으로 패배하자 격노한 존 레논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오노 요코를 내버려두고 섹스와 마약을 진탕 했고 이 때문에 요코와 사이가 나빠져 몇년간 별거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 존 레논 말고도 많은 록 음악가들이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 밥 딜런, 제퍼슨 에어플레인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지지가 기성 세대의 히피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켜 1972년 대선의 참패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1] 맥거번의 평화주의와 인도주의적 사상은 감리회적 사회복음에서 기반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된다. #[2] 커버 스토리는[3] 그의 지역구인 사우스다코타 클래스 3은 뜬금 없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강력한 선거구로 평가받는데, 맥거번 외에도 민주당 원내대표 톰 대슐과 가장 유력한 차기 공화당 원내대표 후보군으로 꼽히는 존 튠 원내총무의 지역구였기 때문이다.[4] 이 선거동맹은 이후 하워드 딘을 거쳐 버락 오바마때 정립되어 현재까지도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으로 자리잡고 있다.[5] 두명 모두 대선 후보로서는 선거에서 대참패하며 실패했지만 자신의 정당의 강경파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비슷하다는 것이다.[6] 조셉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이민자였다. 그렇지만 알코올 중독자였다[7] 맥거번은 자기 인생에서 제일 어려웠던게 B-24 폭격기 조종법 배우는거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8] 히피 문화와 관련이 깊은 환각제류의 마약. 흔히 acid라는 은어로 불린다.[9] 린든 B. 존슨 대통령 시절 주불 미국 대사를 지낸 바 있다.이후 반낙태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전 장인이기도 하다.[10] 테드 케네디의 지원으로 승리[11] 앱드너 58.2%, 맥거번 39.4%로 최종 스코어에서는 꽤 차이가 났다. 우연히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비슷한 구도가 나온건 덤.[12] 앱드너 의원은 6년 후 맥거번의 지지를 받은 톰 대슐 후보에게 패하면서 맥거번은 간접적으로나마 설욕에 성공한다. 대슐 의원은 이후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직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으나 2004년 존 튠에게 접전 끝에 패배했고, 이후 오바마의 대선출마 초창기부터 오바마를 지지하며 선거캠프 중책으로 오바마의 당선에 공헌하여 복지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세금 문제가 걸려 불명예스럽게 사퇴 후 정계를 은퇴한다.[13] 휴버트 험프리와 월터 먼데일 등 맥거번과 사이가 안좋았던 민주당 당권파가 지미 카터를 밀어줬다.[14] 지미 카터는 대중적인 인식과 달리 재정보수주의자였고 인종과 환경, 성별 문제 등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안에서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원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다. 72년 대선에서 카터는 맥거번 지지를 거부했다.[15] 특히 2016년 대선 직후, 미국 민주당의 주류로부터 소외받은 버니 샌더스와 맥거번을 비교하는 칼럼들이 많이 나왔다.[16] 존 레논은 영국 국적이었지만 말년에는 미국을 영국보다 더 좋아해서 쭉 뉴욕에서 살았다. 아예 1980년대에는 미국 국적을 따고 영국 국적을 버리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