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Bonus Army1932년 대공황의 영향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모임을 만들어 시위한 사건. 이들은 대공황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지자 약속되었던 추가수당을 예정보다 일찍 달라고 시위했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사상자까지 냈다.
전역 군인들의 생계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준 좋은 사례이며 맥아더의 의 큰 오점인 두 사건 중 하나[1]이기도 하다.
2. 전개
2.1. 배경
2.1.1. 참전군인 추가수당 (보너스) 제도
미군은 미국 독립 전쟁 시절부터 참전 용사에게 전역 후에 추가수당을 지급했는데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느라 상실한 수익을 보상하기 위함이었다. 독립전쟁에 참전한 병사 중 일병은 80달러와 100에이커의 토지를 받았다.[2] 계급이 높거나 소득이 높았음을 입증한 병사는 더 많이 받았다.[3] 해당 제도는 미국-스페인 전쟁 때 폐지되었다.2.1.2.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추가수당
보너스 제도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부활했다. 문제는 바로 미군은 10만 명 이상의 전사자 및 실종자, 그리고 그의 몇 배에 달하는 부상자를 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미국의 경제력이 막강하고 참전 기간이 짧았어도 이 많은 군인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줄 수는 없었다. 참전 용사들은 각자 60달러를 받았으나 인플레이션을 제외하고도 140년 전 독립전쟁 때보다 액수가 줄어들었으니 심각하리만큼 부족한 액수였다.물론 정부도 참전 용사들이 받은 보상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원은 국내 복무자에게는 1일당 1달러로 계산하여 최대 500달러, 파병 군인에게는 1일 1.25달러로 계산하여 최대 625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반대했지만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누르고 법안을 통과시켰다.[4]
추가 지급 대상자는 약 360만 명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총액은 약 36억 달러[5]였다. 이 어마어마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의회는 20년짜리 신탁기금을 창설했다. 해당 기금이 완성되어 돈이 지급되는 것은 1945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2.1.3. 대공황
그런데 1929년에 대공황이 터지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 파산으로 인해 극빈층으로 전락해서 판자촌[6]에서 연명하게 되었다.[7] 이들 중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상이군인이 되었거나 대전 기간 동안 참전하여 업무 공백 등이 있는 퇴역병의 수가 많았다.2.2. 진행
2.2.1. 보너스 군대의 발족
퇴역병들은 자연스레 참전수당을 당장 받으려고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던 하원 의원 라이트 패트먼이 이들의 고통에 공감해 보너스를 당장 지급하라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원칙과 재정상의 이유로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퇴역병 2만 5천은 가족까지 대동하고 워싱턴 D.C.에 상경했다. 이들은 포토맥 강가에 판자집을 짓고 지내면서 지급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매일 벌였고 스스로를 보너스 원정대(Bonus Expeditionary Force)라고 불렀는데 대중은 이들을 보너스 군대라고 불렀다. 당시 주류 언론은 이들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계급 혁명을 시도하며 공산주의를 부추기는 사회 불온 세력이라고 보도했고 소위 높으신 분들도 이들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폭도로 생각했으며 미군 정보부의 인식도 마찬가지였다.[8]지급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기각되었고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기차표를 주면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이에 약 6천여 명이 수긍하여 돌아갔으나 나머지는 계속 시위했다. 시위가 한 달 넘게 계속되자 정부는 경찰에 해산을 명령했지만 경찰은 시위대가 대규모인데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라 진압을 시도하면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정부는 진압을 계속 명령했고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진압 중 시위대는 경찰관 두 명을 붙잡아 어느 건물에 감금했는데 감금당한 한 경찰관이 겁을 먹고 발포하는 바람에 시위자 둘이 사망했다.
2.2.2. 맥아더의 유혈 진압
결국 후버 대통령은 미 육군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이 직접 나섰다. 맥아더는 시위대 중 진짜 참전 용사는 1할 이하이며 나머지는 소련과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체제전복과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빨갱이 폭도라고 주장했고 부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무장 시위대 진압에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던 조지 S. 패튼[9] 소령을 지명했다. 맥아더는 보너스 시위대가 공산 혁명을 노리는 폭도라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에 폭도를 초강경 제압하려고 호전적인 패튼을 앞세운 것이었다.
진압군은 패튼의 3기병대를 선두로 6대의 전차와 1개 보병연대까지 동원했으며 패튼은 기대에 부응해 6대의 M1917 경전차를 앞세우고 최루가스를 뿌리면서 기병이 돌격하며 그 뒤를 착검한 보병이 뒤따르면서 비무장 시위대를 판자촌으로 밀어넣었다. 패튼이 지휘하는 무장 병력은 판자촌에 돌진해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쓸어 버렸다.
후버 대통령은 맥아더가 이렇게 막나갈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경악하여 중지를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 진압을 강행했다. 발포는 하지 않았다지만 맥아더의 진압 때문에 두 아기가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한 임산부는 유산했으며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시위대 진압 후의 조사 결과 주류 언론이나 정부의 인식과는 달리 시위대의 95% 이상이 극빈층 퇴역병과 가족들로 밝혀졌다. 나머지 5%는 신원확인 불가자 혹은 군인의 처지에 동감해서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사회운동가들이었다.
또 사건이 끝난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퇴역병 중에는 패튼 본인의 은인인 전우도 있었다.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장병은 1차대전 당시 패튼이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자 직접 부축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주었으며 패튼도 그를 '미군에서 이보다 더 용맹한 군인은 없다'며 극찬했다. 그런데 조 안젤로도 실업자가 되어서 다른 퇴역병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고를 당한 것이다.
2.3. 결과
2.3.1. 후버 대통령과 공화당
"내가 요구한 연봉이 허버트 후버와 대관절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게다가, 내 올해 성적은 그 자보다 훨씬 좋지 않소?"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 베이브 루스, 1930년에 연봉 8만 달러는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했던 대답이다. 실제로 후버의 연봉은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 베이브 루스, 1930년에 연봉 8만 달러는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했던 대답이다. 실제로 후버의 연봉은 7만 5천 달러였고 미국은 막 대공황의 불황으로 접어든 상태였다.
대공황이라는 역대급 악재[10]로도 모자라 이 사건까지 겹치자 평판이 크게 떨어진 공화당은 같은 해 대선에서 대참패를 겪고 후버는 불명예스러운 퇴임을 했으며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압도적인 지지 하에 정권 교체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세 번 재선에 성공하고 부통령 트루먼이 루즈벨트가 3번째 재선 직후에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계승한 데다 재선에까지 성공했기 때문에 공화당은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까지 약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야당으로 지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으로 출마한 목적은 민주당이 20년 이상 장기집권하는 것을 견제하고 독주를 깨기 위해 대선에 출마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2.3.2. 루즈벨트의 문제 해결과 조기 지급 법안 통과
보너스 군대는 유혈 진압 이후에도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고 루즈벨트가 당선되자 재차 워싱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루즈벨트도 원칙과 재정 문제로 조기 지급에 반대했으나 일단은 아내 엘리너를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대와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서 어울려 그들의 분노를 달랬다.루즈벨트는 보너스 군대에게 조기 지급 대신 뉴딜 정책 산하의 공공건설 일자리를 제안했다. 퇴역병들은 썩 만족하지는 않았으나 조기 지급을 요구한 근본적인 원인이 참전 군인들의 가난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플로리다키스 제도의 도로 건설에 참여했다.
그런데 1935년에 플로리다에 허리케인[11]이 덮치는 바람에 도로를 건설하던 퇴역병 3백여 명이 사망했다. 때문에 퇴역병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었고 다음 해 의회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고 조기지급 법안을 가결했다.
2.3.3. 맥아더의 이후 행보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사태를 만든 맥아더의 평판은 당연히 급락했으며 FDR 행정부 때 군비 감축으로 대통령에게 항명하고 의회와 싸우면서 군의 주류파에서 밀려났다. 곧바로 잘리지는 않았지만 1935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에서 물러나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쫓겨났다.[12]필리핀은 맥아더가 어릴 적 지내고 이전에 복무했던 곳이었으니 맥아더에게는 그렇게 나쁜 곳은 아니었다. 맥아더의 아버지는 필리핀의 3대 총독이었으며 필리핀의 대통령 마누엘 케손은 맥아더의 죽마고우였다. 맥아더는 필리핀군의 육군 원수 계급을 받았는데 이걸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지 2차대전에서 미 육군 원수 계급을 받은 후에도 필리핀 육군 원수의 모자를 쓰고 다녔다. 게다가 좌천된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급습하여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바람에 보너스 군대 유혈진압이라는 만행은 맥아더의 출세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맥아더의 몰락은 후일 6.25 전쟁 중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보여준 삽질과 대통령의 명령에 대한 항명으로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훗날 대통령들에 대해 평할 때 다른 대통령들은 깠지만 후버만은 나쁘지 않았다고 평했다.
한편 5년간 맥아더의 부관으로 근무한 아이젠하워는 당시에는 그저 힘없는 영관이었던지라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갈 때 덤으로 끌려가서 4년이나 더 맥아더의 부관 노릇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데려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자 절망했다고 한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대대장 노릇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중령 시절까지 같이 필리핀에서 보냈다. 그래도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진급 추천서 같은 것은 다 써 줬다고 한다.
2.3.4. 강화된 문민통제
미군은 이 일을 계기로 군인에게 끌려다니면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더욱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미국 같이 강력한 국가에서 아직도 군부가 정부를 상대로 제대로 행패를 부리지 못할 정도로 문민통제가 공고화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다.2.3.5. 제대군인 원호법
보너스 군대 덕에 제대 군인의 생계 문제 해결 필요성을 깨달은 의회는 1944년에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을 만들었다. 해당 법안은 제대군인부(군사원호부)를 설치하여 참전 용사에게 연금, 주택, 의료 보험, 고등 교육 지원, 직업 훈련을 비롯한 광범위한 혜택을 주었다. 미국 정부는 제대군인 원호법으로 수령을 지원할 사람이 많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역자 230만 명이 혜택을 보았다.제대군인 원호법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의 사회 재적응 및 전후 경제 공황 예방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고등 교육 지원은 젊은 참전 용사들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주요 노동자 계층 및 중산층이 되어 1950년대에 미국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완전 고용 대호황기를 열어 지미 카터 시대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오기 전까지 미국 최대의 경제적 호황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당 법안은 단순히 전역자의 삶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 미국의 교육 수준을 한 단계 올리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13]
또 제대군인 원호법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효과를 낳았는데 수많은 미국 대학들은 전역자들의 대거 입학과 막대한 국가재정 지원 덕에 기초 학문보다는 응용 학문에 신경을 쓰는 일종의 직업 학교로 변화했다. 해당 학교의 운영진들은 부모 대신 학생들을 돌본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내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UC 버클리를 시작으로 투쟁하여 신좌파 계열 사회운동들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신좌파 운동의 성공에 고무된 여성들은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 이하 NOW)를 창설해 완전한 성평등을 요구했는데 이들의 요구 중 하나는 바로 참전 용사에게 그랬듯이 여성에게도 교육비를 지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NOW를 비롯한 당대 여성 운동가들은 기술의 발달로 여성의 가사 노동은 편리해졌지만 인생의 목적이나 자기계발 등의 동기가 결여되어 있어 여성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14] 당시 케네디 정부는 여성 지원은 이미 충분하고 여성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받는다고 발표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2.4. 부록: 길거리로 내몰리는 퇴역 군인들
위키백과 - 전직 미군 출신 노숙자들.한국에 알려져 있는 미군의 위상이나 복지와 달리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조국을 위해 복무한 수많은 전직 미군들이 안타깝게도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군인 출신 노숙자의 텐트촌이 지금까지도 흔히 보일 정도다. 미국 대도시 길거리에서 채이는 그 많은 약쟁이 노숙자 거지 중 60대 이상 중에는 태반 꾀질꾀질한 옷 사이로 베트남전 당시 소속 부대마크와 훈장이 그대로 달려 있는 복무자들이 많고 젊은 거지들 중에는 반대로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복무자들이 많다.
특히 미국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노숙자가 되는 경향이 많이 나타나는데 추축국이라는 미국 입장에서의 명백한 악을 막는 대의명분이 있었던 제2차 세계 대전, 공산권의 침략에게서 민주주의 신생국을 구해야 한다는 명확한 책임과 의식을 가지고 유엔의 동의를 받아 참전한 한국 전쟁[15]과 달리 베트남 전쟁은 끝도 없이 수렁에 빠지던 전쟁과 여론전에서의 실패로 엄청난 국내외적 반전 여론을 폭발시켰고 많은 군인들이 금의환향은 커녕 유아 살해자(Baby Killer)라고 매도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다시피 하면서 이들에 대한 지원도 대부분 끊겨 버렸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과 달리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PTSD에 걸려서 알콜 중독에다가 마약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16] 이를 다룬 노래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명곡인 Born in the U.S.A.인데 당시 앨범이 2,000만장 이상 팔렸을 정도로 큰 센세이션을 얻었다.
PTSD를 비롯한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제대 군인들에 대한 원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17][18]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의 참전 용사들도 베트남 전쟁의 참전 군인들만큼은 아니지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여론은 정부의 삽질로 미래를 잃은 희생자라는 식으로 동정적이지만[19] 불행히도 나라의 곳간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있다.
3. 기타
-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 가열화되는 시위, 그에 따른 혼란, 그리고 참모총장 짝퉁 군부 인사가 주축이 된 미국의 파시즘 혁명을 다룬 싱클레어 루이스의 디스토피아적 소설 "있을 수 없는 일이야"(It Can't Happen Here)가 나왔다. 1980년대에 나치 독일의 영국 통치로 설정을 바꾸어서 해당 소설의 드라마화가 시도되었으나 무산됐다. 대신 이 시놉시스를 외계인으로 수정해서 등장한 드라마가 바로 다이애나가 쥐 잡아먹는 V다.
- 2015년 4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 대체역사 소설인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보너스 아미 사건이 좀 더 커진 우유원정대 사건으로 나온다.
[1] 다른 하나는 6.25 전쟁 당시의 무모한 작전과 항명.[2] 약 40헥타르로 40만 제곱미터에 달해 국제 축구장 56개를 넣고도 좀 남는 크기다. 당시 미국은 인구보다 땅이 훨씬 넓었기 때문에 이런 게 가능했다. 특히 독립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미국의 국경확장이 시작됐기 때문에 당시에는 남아도는 게 땅이었다.[3] 소장 계급은 1,100에이커를 줬으며 부농으로 유명했던 한 대위에게는 소장과 같은 1,100에이커를 지급한 기록이 있다.[4] 미국 헌법에 의하면 양원 재적 의석의 2/3 이상 찬성이면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할 수 있다.[5] 2020년으로 치면 약 545억 달러.[6] 이런 판자촌을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Hooverville, 후버촌)이라고 불렀다.[7] 자유방임주의가 절정에 이른 당시에는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 같은 건 없었고 가난하면 자선 단체의 선의에 의존하든가 굶어 죽어야 했다. 제대로 된 사회복지제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등장했다.[8] 후일 매카시즘으로 나타나게 되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나 사회운동가의 저항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은 이미 한참 전부터 존재했다.[9] 중위 시절 멕시코 혁명에 개입할 때에도 사살한 적 장군의 시체를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다니는 기행을 선보인 적도 있었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우리의 피에 굶주린 전장의 미친개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사실 패튼에겐 이런 일화가 수도 없이 많아서 이 정도는 기행이 아니라 그냥 일상사였다.[10] 후버는 타임즈지가 매년 선정하는 역대 최악의 미국 대통령 10명 중 1명으로 영원히 기록되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본인도 생전에 "나의 정적들은 후버가 혼자서 전세계적인 대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환상적 지성과 경제적 위력을 지녔다고 칭송했다"며 푸념했다. 대공황의 책임은 경제 구조 자체의 문제에 있었고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더라도 캘빈 쿨리지까지가 한계였으며 그마저도 책임을 전적으로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후버의 문제는 정부는 시장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만을 신봉하여 대공황으로 경제가 난리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시장 문제에 정부의 개입을 요구하는 케인스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당시 경제학으로서는 정부가 개입할 이론적 근거가 없었다.[11] 그냥 허리케인도 아니고 1935 노동절 허리케인이라고 불리는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강한 허리케인이었다.[12] 정부의 승인을 받고 필리핀 원수 계급장을 단 것이기 때문에 명목상은 승진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좌천은 전세계적으로 흔하다. 당장 기업들의 예를 들자면 서울에서 일하는 차장이 지방 팀장으로 발령받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즉 계급만 높지 실권은 거의 없는 한직에 영전되듯 좌천되는 것이다.[13] 이들이 일구어 놓은 가장 큰 덕을 본 것은 바로 미국 최고의 황금 세대이자 현재 미국 복지 예산 고갈의 주범으로 꼽히는 베이비 부머 세대였다.[14] 보다 자세한 내용은 여성의 신비 문서 참고.[15] 이 때문에 국가보훈처와 외교부에서도 유엔군으로 참전해 공산군과 맞서 싸운 참전용사들에 대한 지원에 상당히 공을 들이며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오늘날 선진국으로 우뚝 선 대한민국을 방문한 참전용사들은 하나같이 "참전한 보람이 있다"며 감개무량해한다.[16] 미국의 어두운 현대사를 다룬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주인공의 베트남 전쟁 시절 상관이 두 다리를 잃고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찌들어 비참하게 살아가는 장면이 나온다.[17] 이 문제를 그린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소설 람보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영화 람보 시리즈의 영향으로 단순 액션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1편의 원작이 된 소설은 베트남 전쟁을 거친 PTSD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 존 람보의 고뇌를 그리며 이를 영화화한 1편도 마찬가지다.[18] 사실 람보 시리즈는 미국 만세 국뽕 마초 영화로 유명하긴 하지만 실제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을 까는 것이다. 애시당초 미국이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삽질한 것을 람보가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 람보 시리즈 영화들의 주 내용이다.[19] 사실 엄밀히 말해서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도 이렇다. 도미노 이론에 매몰되어 무지성적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했지만 당초에 제대로 된 손익계산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기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제대로 된 노력을 해 보지도 않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베트남 전쟁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수렁에 빠지면서 애꿏은 참전용사들이 욕을 제대로 얻어먹었다. 이게 그냥 유럽 같은 곳에서 정규군과 치르는 전쟁이면 모를까 동남아시아 정글과 베트콩이라는 게릴라가 득시글거리는 곳이다 보니 대민범죄가 많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심지어 미국은 이 전쟁에서 2차대전 같은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대전략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