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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크라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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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Искра»[1]
독일어: Zweite Ladoga-Schlacht[2]
영어: Operation Spark[3]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일부
파일:1942년 레닌그라드.jpg
▲ 1942년 말, 레닌그라드 전역의 전선[4]
시기
1943년 1월 12일 ~ 1943년 1월 30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의 근방, 네바 강 동쪽과 라도가 호 남쪽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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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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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스타브카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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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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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브카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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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고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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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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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볼호프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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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퀴힐러|
게오르크 폰 퀴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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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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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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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린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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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군 사령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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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에른스트 폰 라이저
(제26군단장)
결과
소련군의 승리
소련군이 라도가 호 남쪽 좁은 회랑 탈환
영향
497일 만에 레닌그라드의 육상 통로 봉쇄가 풀림
전력 병사 302,800명
포 4,600문
전차/자주포 500대
항공기 815기
병사 60,000명
포 700문
전차 20대
항공기 250기
피해 규모 전사/실종 33,940명
부상 81,142명
야포 417문
전차/자주포 41대
항공기 41기 혹은 181기
글랜츠
전사/실종 12,000명
부상 32,570명
국방군 보고서
전사 3,467명
실종 2,073명
부상 13,401명

1. 개요2. 1943년 겨울의 북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전개
4.1. 양측의 전력4.2. 1단계 : 회랑 탈환4.3. 2단계 : 시냐비노 탈환 실패
5. 결과6. 여담

[clearfix]

1. 개요

이스크라 작전은 소련군이 레닌그라드 봉쇄를 풀기 위해 시냐비노를 향한 주요 공세 중 네번째 공세로 제4차 시냐비노 공세라고도 한다. 이 작전으로 소련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마침내 라도가 호 남쪽 좁은 회랑을 탈환했으며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육상 통로를 개척했다. 그러나, 주변을 감제할 수 있는 시냐비노 언덕을 탈환하는데는 실패하여 여전히 이 통로를 이용하기에는 위험한 상태였으며 이 감제고지들은 9월에 진행한 므가 공세에서 탈환하게 된다. 국가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른데 러시아에서는 이스크라 작전, 독일에서는 제2차 라도가 호수 전투라 부르고 영어로는 스파크 작전, 한국어로는 불꽃 작전이 된다.

2. 1943년 겨울의 북부 전선

2.1. 소련군

천왕성 작전으로 남부 전선의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레닌그라드에서도 새로운 공세를 준비중이었다. 작년 시냐비노 공세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목표는 네바강 서쪽의 좁은 회랑을 탈환하여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육상 통로를 뚫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쪽에서는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67군, 동쪽에서는 볼호프 전선군의 2충격군 그리고 8군의 우익 일부가 공세에 참여했다. 스타브카에서는 보로실로프 연방원수[5]주코프 대장[6]을 각각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으로 파견하여 작전을 조율하도록 했다.

고보로프는 저번 시냐비노 공세의 실패가 네바 강 너머 교두보 확보 실패를 이유로 판단하고 네바 작전 그룹을 증강해 67군을 창설[7]했다. 43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레닌그라드 전선군은 북쪽 핀란드군을 막기 위해 23군을, 서쪽 오라니엔바움 교두보를 지키기 위해 연해주 기동 그룹을 배치했으며 이 지역들은 큰 피해를 입은 부대들이 휴식차 배치되는 곳이었다. 레닌그라드를 방어할 네바 강 방어선에는 서쪽부터 42군, 55군, 67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메레츠코프는 이번에도 2충격군을 주력으로 8군의 우익이 조공을 펼치기로 계획했고 남쪽에는 볼호프 강을 따라 54군, 4군, 59군, 52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2충격군은 류반 공세에서 괴멸되고 시냐비노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고도 또다시 재건되어 공세의 선봉이 되었다. 소련군은 강과 늪지대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공세를 위해 저번보다 포병, 기갑 전력을 증강했으며 특히 공병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공세 계획은 동서에서 공격하여 만난 뒤 남쪽 시냐비노로 진격하는 간단한 것이었다.

2.2. 독일군

1941년 9월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모든 육상통로가 차단되고 18군은 1년 4개월동안 소련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린데만이 이끄는 18군의 내선 방어는 독소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성공적인 방어작전 중 하나였으며 이토록 긴 시간동안 전선의 변화가 없는 것은 레닌그라드가 거의 유일한 경우였다. 그러나 방어 작전의 성공은 독일군 사령부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북부 집단군에서 타 전선으로 계속 정예 병력을 차출하고 신편된 부대들이 들어오면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공군야전사단들은 번듯한 편제와 좋은 장비를 보유중이었으나 사령관들이 공군 출신이므로 육군 작전 지휘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동일한 규모의 육군 사단들보다 훨씬 낮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41년 가을에 4기갑집단을 차출하여 태풍 작전에 투입한 이후 긴시간동안 북부집단군에게 증원이 이루어진 적은 42년 9월에 세바스토폴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고 올라온 만슈타인의 11군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 때조차도 소련군의 시냐비노 공세를 막느라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향한 공세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이제 훨씬 약해진 독일군은 훨씬 강해진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다. 43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18군은 50군단과 3공군야전군단을 오라니엔바움 교우보 전면에, 54군단을 네바강에, 26군단을 네바강과 볼호프 전선군 사이의 회랑에, 볼호프강에 26, 1, 38군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3. 전투 서열[8]

3.1. 소련군

3.2. 독일군

4. 전개

4.1. 양측의 전력

소련군은 2.5개 야전군 휘하 20개 사단과 15개 여단을 공세에 동원했으며 300,000명의 병력과 4,600문의 포[16], 500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서부 그룹은 67군[17] 휘하 6개 소총사단[18]과 4개 소총여단[19], 3개 전차여단[20], 2개 스키여단[21], 1개 해병여단[22]을 보유중이었으며 12월부터 강 건너 교두보를 만들기 위한 훈련을 거듭했다. 동부 그룹은 2충격군 휘하 12개 소총사단[23]과 2개 전차여단[24], 2개 스키여단[25], 8군 우익의 2개 소총사단[26], 1개 해병여단[27]을 보유중이었다. 67군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12월 내내 훈련을 거듭했다. 소련군은 이전 공세들에서 교훈을 얻어 늪지대에서 대규모의 병력 집중보다는 소규모의 보병, 기갑, 공병을 합쳐 만든 분견대들이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또한 동계전에서 유용한 스키여단을 비롯하여 동계 부대를 대폭 증강했다. 소련 공군은 항공기 815기[28]를 보유중이었다. 13항공군이 207기, 14항공군이 374기, 발틱함대가 223기를 보유중이었으며 이 중 전투기가 441기[29]로 전투기를 집중시킨 상태였다.

소련군은 지난 제3차 시냐비노 공세에서 시냐비노 남쪽에서 만나 포위망을 형성하려다 남북으로 협공당했던 것을 기억하고 시냐비노 북쪽에서 만나는 것으로 과감하게 목표를 축소했다. 포위 될 독일군의 병력은 훨씬 줄었지만 덕분에 북쪽에서의 반격 규모는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그렇지만 시냐비노는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10-15km 너비의 좁은 회랑은 대부분 늪지대로 평평한 편이었으나 시냐비노(Sinyavino) 언덕은 주변보다 150m가 높아 주변 일대를 전부 감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군이 회랑을 탈환해도 시냐비노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통로는 여전히 독일군 포병의 위협을 받아야하는 상황이었다. 전략적으로 소련군의 최종 목표는 므가의 탈환이었다. 므가(Mga)에는 볼호프(Volkhov)-레닌그라드를 잇는 철도가 있었고 므가의 탈환은 레닌그라드 봉쇄가 완벽하게 풀린다는 의미였다.

독일군은 26군단 휘하 5.5개 사단의 60,000만 명이 회랑을 지키고 있었다. 18군 전체로 보면 26개 사단이 450km의 전선을 지키고 있었으며 당연히 전 전선을 지키는 것을 불가능했기에 거점 방어를 하고 있었다. 거점 방어는 독일군이 매우 선호한 방식이기는 했으나 그게 가능하려면 강력한 예비대가 필요했다.[30] 그러나 18군은 전선도 넓은데 병력이 계속 타 전역으로 차출되면서 그러한 예비대가 없었다. 예비대랍시고 선정해 놓은 부대들도 전부 전선에 투입되어 있었고 각 사단들도 각자 가진 예비대가 1개 대대 수준이었다.[31] 독일 1항공함대는 450기를 보유중이었으나 16군에 대한 지원도 해야했으므로 레닌그라드 근방에는 절반 정도의 기체만 지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투기를 보유한 부대가 연대급인 54전투항공단[32]뿐으로 전투기의 열세가 심각했다.[33]

1943년 1월 현재 26군단은 5산악사단의 일부와 170사단을 네바강 방어선, 227, 1보병사단과 223보병사단의 일부를 볼호프 전선군 방면에 배치한 상태였으며 므가 근체에 북부 집단군의 거의 유일한 전술 예비대인 96보병사단과 5산악사단의 일부, 그리고 502중전차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12기갑사단이 잠시 중부집단군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502중전차대대가 북부 집단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이었다. 방어 준비 자체는 42년 8월의 시냐비노 공세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차이점이라면 42년 8월의 북부집단군은 41년 6월 다음으로 강력한 전력을 보유중이었다. 세바스토폴 공방전을 마치고 레닌그라드 점령을 위해 올라온 11군이 증원되었기 때문이다.[34] 레닌그라드 점령은 실패했지만 증원 병력 덕에 시냐비노 공세 자체는 쉽게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43년 1월의 북부집단군은 정예 사단들이 이동하고 너덜너덜해진 사단들이 온 걸 제외하고 생각해봐도 훨씬 약해져있었다. 10월에 11군이 중부집단군으로 이동했고 9개 보병사단이 차출된 상황이었다.

4.2. 1단계 : 회랑 탈환

{{{#!wiki style="margin:-15px -10px"<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
파일:이스크라 작전.jpg
파일:1943년 1월 레닌그라드.jpg
소련군의 공세 진행도[35] 양 측의 전선 변화[36] }}}
원래 공세 시작일은 1월 1일이었으나 강이 충분히 얼지 않아 미뤄졌고 1월 13일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67군은 4개의 전방 사단들이 공세를 시작했고 86소총사단과 136소총사단이 고로독(Gorodok) 2와 실리셀부르크(Schlüsselburg)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86소총사단이 가한 북쪽 실리셀부르크로의 공격은 227보병사단 328척탄병연대[37]에 막혀 실패했고 45근위소총사단이 남쪽에서 고로독 1로 진행한 공세는 강을 건너긴 했으나 5산악사단 100산악연대가 막아냈다. 이에 소련군은 중간에 확보한 교두보를 활용하기로 하고 전차를 투입하기 위해 위해 부교를 건설했다.

같은 날, 서쪽에서 2충격군과 8군이 벌인 공세는 덜 성공적이었다. 서쪽 그룹이 훨씬 강력한데다가 강을 도하하는 작업도 필요없었음에도 2충격군의 북쪽 그룹인 128, 256, 372소총사단은 227보병사단 2개 연대가 방어하는 방어선을 밀이내기는 했으나 립카(Lipka)를 비롯한 거점들을 점령하는데 실패했고 남쪽 그룹인 314, 327, 276소총사단의 공세는 크루글라야 숲(Kruglaia Grove)을 점령한 327소총사단의 전선에서 그나마 성공적이었다. 8군은 80, 256소총사단과 73소총여단을 투입했으나 1보병사단에게 바로 격퇴됐고 이후 공세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5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즉각 예비대를 투입했다. 96보병사단과 502중전차대대[38]를 합쳐 전투단을 편성하여 고로독 2의 170보병사단에 증원했고 타 전선에 있던 61보병사단, 5산악사단, 1보병사단, 4SS경찰사단의 일부를 차출하여 동쪽의 227보병사단에 증원했다. 14일부터 양 측 모두에게 힘든 싸움이 이어졌고 소련군은 독일군 방어선을 하나씩 차근차근 돌파했다. 독일군은 이제 예비대가 없었지만 소련군은 2선 제대들을 투입했고 후방에는 전선군 직할 예비대가 추가로 있었다. 동쪽 교두보에서 북쪽으로 86소총사단과 61전차여단은 실리셀부르크를 공격했고 도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남쪽에서는 45근위소총사단과 13소총사단이 고로독 1을 공격했으나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일에 소련군은 라도가 호수에 12스키여단을 투입했고 128소총사단과 만나 립카를 고립시켰다. 15일이 되자 실리셀부르크도 고립됐고 중앙에서 착실히 진격한 소련군은 18일에 마침내 123소총사단과 372소총사단이 만나면서 레닌그라드 포위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육상통로를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4.3. 2단계 : 시냐비노 탈환 실패

소련군의 양쪽 그룹이 만나면서 북쪽에는 약 8,000명의 독일군이 갇혔다. 린데만은 즉시 탈출할 것을 명했고 61보병사단장 베르너 휘너 중장은 소련군을 돌파하고 시냐비노의 방어선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했다. 17일까지 이어진 지연전 덕분에 린데만은 남쪽 전선에서 11, 21, 28보병사단을 차출하고 5산악사단과 4SS경찰사단을 투입해 시냐비노에 방어선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21일까지 북쪽의 독일군을 소탕했고 시냐비노와 므가를 점령하기 위한 2단계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10일간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거의 전진하지 못했으며 시냐비노 탈환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이 조그만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5. 결과

소련군은 497일만에 마침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육상 통로를 탈환했다. 20일간의 공사 끝에 2월 6일부터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철도가 새로 개통됐다. 소련군에게 이 공세의 성공은 중요한 것이었다. 제한적이나마 레닌그라드 근방에서 소련군이 진행한 공세 중에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제 레닌그라드로 중장비가 이동할 수 있게 되어 레닌그라드 방어와 공세 준비가 훨씬 강력해졌다. 스탈린 역시 레닌그라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공세의 성공으로 고보로프와 주코프가 진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냐비노를 탈환하는데 실패하면서 독일군이 여전히 주변을 감제할 수 있었기에 여전히 이 통로는 포격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매우 위험했다. 또한 공세 과정에서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3~6배 많은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공세가 제한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소련군의 목표는 여전히 시냐비노와 므가였다. 소련군은 즉각 북극성 작전을 준비했으며 이는 3개 전선군이 북부집단군 전체를 포위하려 하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정확히 1년 전 류반 공세의 계획과 유사했으며 독일군의 상황도 중부집단군이 엄청나게 밀려나던 그 당시와 남부집단군이 괴멸될 위기에 쳐한 현재가 비슷했다. 북극성 작전의 1단계는 므가와 시냐비노의 독일군을 섬멸하는 크라스노보르 공세와 데미얀스크의 독일군을 섬멸하는 데미얀스크 공세였고 2월 10일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될 예정이었다.[39]

6. 여담

게오르기 주코프가 노획한 티거 전차를 시찰하는 사진에 나오는 전차가 이때 노획된 것으로 502중전차대대 소속이다. 다만, 티거는 9월부터 계속 전장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첫 출전은 아니다.
[1] 이스크라 작전[2] 제2차 라도가 호수 전투[3] 스파크 작전[4] 좌측 붉은색이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이고 우측 상단의 하늘색 부분이 라도가 호수(Ладожское озеро)이다. 호수 바로 아래, 67군과 2충격군 사이의 좁은 초록색 구역이 셀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로, 이스크라 작전의 최대 격전지가 된 구역이다.[5] 41년부터 북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6] 1월 18일에 연방원수로 진급[7] 42년 10월 10일에 편성[8] 1월 1일 기준[9] 휘하 야전군 중에 67군과 공군만 공세에 참여[10] 1월 15일에 상장으로 진급[11] 레닌그라드 서쪽 오라니엔바움 교두보를 담당[12] 2충격군과 공군, 8군의 일부만 공세에 참여[13] 군단의 순서는 군의 좌익부터 우익으로[14] 아직 제4SS경찰기갑척탄병사단이 되기 전이다.[15] 18군 소속 6개 군단 중에 26군단만 이스크라 공세의 방어작전에 참여했다.[16] 67군 1,800문, 2충격군과 8군 2,800문[17] 남쪽의 46소총사단과 11소총여단은 참여하지 않았다.[18] 45근위,13,86,123,136,268[19] 55,102,123,136[20] 61,152,220[21] 34,35[22] 142[23] 11,18,71,128,157,191,239,256,314,327,372,276[24] 88.122[25] 12,13[26] 80,265[27] 73[28] 가동기 651기[29] 13항공군 127기, 14항공군 204기, 발틱함대 110기[30] 반대로 전수방어를 선호한 장군으로는 발터 모델이 있다. 그렇다고 모델이 거점 방어를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모든 방어전술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는 것이 맞다. 당장 르제프 공방전에서 적재적소에 예비대를 투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31] 3각 편제의 구성에서 보통 1개 보병 연대를 예비대로 보유하는 것이 정석이긴 하나 당시 남부 집단군을 제외한 독일 보병사단들은 휘하에 보병 대대가 6개뿐이었다.[32] Jagdgeschwader 54 Grünherz[33] 다만, 1항공함대의 전투기 부대는 바르바로사 작전기부터 54전투항공단을 중심으로 타 항공단의 대대 혹은 중대 몇 개를 추가로 지원받은 수준의 전력을 보유중이어서 큰 차이는 없었다. 문제는 소련군의 전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었다는 것이다.[34] 게다가 11군의 보병사단들은 42년 중반부터 6개 보병대대와 3개 포병대대로 감편된 북부, 중부 집단군의 사단들과 달리 여전히 9개 보병대대와 4개 포병대대를 보유한 강력한 전력이었다.[35] 북쪽에 있는게 라도가 호(Ладожское озеро)이고 호수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강이 네바 강(Нева)이다. 강과 호수가 만나는 곳이 실리셀부르크(Шлиссельбург)이며 지도 중앙, 철도의 교차점이 므가()이고 므가에서 철도따라 위로 올라가다 보면 근방에서 유일한 고지대인 시냐비노(Синявинская)가 있다.[36] 각각 1월 12일, 18일, 22일 순이다.[37] 1942년 10월부터 보병연대의 명칭이 척탄병연대로 변경됐다.[38] 이때 보유한 티거가 단 4대였다.[39] 결과적으로는 또다시 실패했고 다시 1년이 지난 1944년 1월,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에서 간신히 목표를 달성한다. 그러나 이 때에도 북부 집단군 섬멸에는 실패했다. 참고로 시냐비노는 1943년 9월에 진행한 제2차 므가 공세(제1차 므가 공세와 합쳐서 그냥 므가 공세라고도 한다.) 혹은 제6차 시냐비노 공세에서 탈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