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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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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생성된 전투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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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화성 작전
영어: Second Rzhev-Sychevka Offensive Operation/Operation Mars
러시아어: Рже́вско-Сычёв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операция «Марс»[2]
독일어: Zweite Rschew-Sytschowka-Offensive[3]/Operation Mars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르제프 공방전의 일부
파일:Operation-Mars.jpg
▲ 화성 작전 진행도[4]
날짜
1942년 11월 25일 ~ 12월 20일
장소
독일군 르제프 돌출부 북서부 지역
원인
소련군의 독일 제9군 섬멸 시도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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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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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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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푸르카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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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닌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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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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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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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후댜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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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항공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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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체레비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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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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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고르도프
]]
(제33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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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카투코프|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미하일 카투코프
]]
(제3기계화군단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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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폰 클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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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폰 클루게
]]
(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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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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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
(동부 공군 사령부 사령관)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발터 모델|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발터 모델
]]
(제9군 사령관)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틀:깃발|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문서명
]] 카를 힐페르트
(제23군단 사령관)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틀:깃발|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문서명
]]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제39기갑군단 사령관)
결과
독일군의 승리
영향
독일군이 르제프와 데미얀스크에서 철수 준비 시작
병력 병력 817,000명
전차 2,352대
병력 350,000명
전차 1,615대
피해규모 전사/실종 7~10만 명
부상 14만~23만 명
전차/자주포 1,847대
야포 1,100문
항공기 120기
전사 6,025명
실종/포로 1,676명
부상 21,070명



1. 개요2. 1942년 겨을의 중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3.2. 독일군
4. 전개
4.1. 벨리 공세 : 41군
4.1.1. 소련군의 공세4.1.2. 독일군의 반격
4.2. 루체사 공세 : 22군4.3. 몰로도이 튜드 공세 : 39군4.4. 시쵸브카 공세 : 20군과 31군
4.4.1. 1차 공세4.4.2. 2차 공세
5. 결과

[clearfix]

1. 개요

화성 작전 흑은 제2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는 9군을 섬멸하기 위해 서부 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이 펼친 공세로 9군이 방어에 성공하면서 독일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소련군의 의도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천왕성 작전을 위한 조공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쟁이 있긴 하지만 규모가 너무 크고 주코프가 직접 주도한 점을 봐서 최근에는 천왕성 작전과 동일한 중요도를 가진 전략적 공세라고 보는 관점이 우세한 상태이다. 그리고 중부 집단군이 예비로 보유한 3개 기갑사단[5]이 남쪽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주요 성과라고 볼 수 있다.[6]

2. 1942년 겨을의 중부 전선

2.1. 소련군

11월 시점에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대규모 반격을 준비중이었음에도 실제 전력은 중앙에 훨씬 몰려있었다. 천왕성 작전에 투입될 남서,돈,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병력 1,103,000명, 야포/박격포 15,501문 전차/자주포 1,463대, 항공기 928기를 보유하여 소련군 전체 전력 중 병력의 18%, 포병의 20%, 기갑의 20%, 항공의 30%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화성 작전의 주역이 될 칼리닌,서부 전선군과 모스크바 방어지구는 병력 1,890,000명, 야포/박격포 24,682문, 전차/자주포 3,375대, 항공기 1,170기로 소련군 전체 전력 중 병력의 31%, 포병의 32%, 기갑의 45%, 항공의 39%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중 화성 작전에는 817,000명의 병력과 2,352대의 전차/자주포를 투입할 예정이었다. 이 중 최전선에는 730,000명의 병력과 1,718대의 전차/자주포를 배치했으며 그 중에서 작전의 2단계인 목성 작전[7]에 415,000명의 병력과 1,265대의 전차/자주포가 투입될 예정이었다.[8]

소련군의 공세는 2단계로 나누어 진행 될 예정이었으며 1단계가 화성 작전, 2단계가 목성 작전[9]이었다. 화성 작전의 목표는 9군 섬멸, 목성 작전의 목표는 르제프 돌출부 제거였으며 돌출부 서쪽에는 칼리닌 전선군 좌익의 3개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북쪽부터 39군,22군,41군이 배치되어 3개의 공세를 진행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공세는 3기계화군단을 앞세운 22군과 1기계화군단을 앞세운 41군이 진행할 벨리 방면 공세였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칼리닌 전선군 좌익의 전력은 다음과 같다.
||<tablewidth=100%>|| 22군 || 39군 || 41군 ||
병력 70,275 92,135 116,743
전차/자주포 272 227 300

돌출부 동쪽에는 서부 전선군 우익의 6개 군이 배치되어 북쪽부터 30군,31군,20군,29군,5군,33군이 공세를 진행했다. 이 중 앞의 4개군이 화성 작전에 참여했으며 5군과 33군은 2단계인 목성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면서 직접적인 공세에 나서진 않았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서부 전선군 우익의 전력은 다음과 같으며 후방에 2개 기병군단과 4개 전차군단[10], 3근위전차군이 추가로 대기하고 있었다.
||<tablewidth=100%>|| 5군 || 20군 || 29군 || 30군 || 31군 || 33군 ||
병력 71,249 95,602 54,073 50,199 78,496 78,496
전차/자주포 73 301 93 63 90 196


2.2. 독일군

독일 최고 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반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부 집단군은 강력한 예비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히려 동부 외국군 정보국에서 소련군의 반격은 중부집단군을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9군과 중부 집단군은 기갑 전력을 전부 르제프에 집중한 상태였다. 그 여파로 9군 좌익의 벨리키예루키와 우익의 3기갑군 전선은 매우 약한 상태였으나 소련군의 대공세는 중부 집단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인 9군에게만 향했기 때문에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다.

9군은 벨리즈부터 시쵸브카까지 5개 군단을 배치했으며 르제프 돌출부 방어의 핵심전력이자 명실상부 중부 집단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서쪽부터 벨리즈에 6군단, 벨리에 41기갑군단, 올레니노에 23군단, 르제프에 27군단, 시쵸브카에 39기갑군단을 배치했고 9군 예비로 4개 기갑사단[11]과 2개 차량화보병사단[12]이 대기중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집단군 예비로 3개 기갑사단[13]이 더 있었다. 르제프 전역에는 동부 독일군 전체 전력 중에 보병사단의 26%, 기갑/차량화사단의 42%가 배치되어 있었다. 모델의 9군은 18개 보병사단, 1개 공수사단, 1개 공군야전사단, 3개 기갑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2개의 돌격포대대 및 여러개의 독립전차연대들을 보유중이었다.

11월 18일 기준으로 중부 집단군이 보유한 기갑전력 중 작전가능 차량[14]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작전가능대수는 444대로 돌격포와 단기수리[15]차량을 합치면 생각보다 강력한 전력을 보유중이었다.
||<tablewidth=100%>|| 1기갑 || 2기갑 || 5기갑 || 9기갑 || 19기갑 || 20기갑 || GD ||
지휘 전차 4 1 7 2 3 6 3
2호 전차 3 11 15 26 7 4 7
38(t) 전차 7 - - - 37 22 -
단포신 3호 전차 16 10 23 30 8 14 1
장포신 3호 전차 8 8 10 32 - - -
75mm 3호 전차 6 12 7 - - - -
단포신 4호 전차 5 4 10 7 3 11 7
장포신 4호 전차 6 8 6 5 10 5 12
합계 55 54 78 102 68 57 30

3. 전투 서열

3.1. 소련군[16]

3.2. 독일군[18]

4. 전개

파일:external/www.geocities.ws/OperationMars.jpg
소련의 공세는 4개 방면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서쪽에서는 22군과 41군이 각각 루체사와 벨리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41군의 공세가 주공이었다. 르제프 북쪽에서는 39군이 조공을, 르제프 동쪽에서는 20군과 31군이 시쵸브카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4.1. 벨리 공세 : 41군

4.1.1. 소련군의 공세

서쪽에서 공세를 시작한 칼리닌 전선군의 주공은 1기계화군단과 6소총군단을 보유한 41군으로 11만 6천명의 병력과 30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이에 맞서 이 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건 41기갑군단이었다. 11월 25일에 시작된 공세는 시작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전차/자주포 224대[22]를 보유한 1기계화군단을 벨리 남쪽에 투입하여 26일까지 30km 넘게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측면의 공세가 지지부진해 선도부대와 후방부대가 따로 싸우기 시작했고 12월 1일까지 모든 예비대를 투입했음에도 9군 후방으로 전략적 돌파구를 여는데 실패했다.

4.1.2. 독일군의 반격

나머지 3개의 공세가 전부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클루게와 모델은 벨리 전역이 가장 중요한 전역임을 재빨리 파악했다. 9군의 예비 전력은 북쪽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클루게는 집단군 예비 전력을 벨리 근방으로 집결시켰다. 원래 레닌그라드에서 점령 작전인 북극광 작전[23]을 진행할 예정이던 30군단[24]은 6군단과 41기갑군단 사이로 재배치되어 벨리 돌출부 남쪽을 담당하게 됐고 클루게는 북쪽의 41기갑군단에 1기갑사단과 12기갑사단을, 남쪽의 30군단에 19,20기갑사단과 SS기병사단을 증원했고 12월 6일부터 반격에 나섰다. 12기갑사단이 1기계화군단의 진격을 막는 사이 GD차량화보병사단의 연대를 증원받은 1기갑사단과 19,20기갑사단이 소련군 후방을 차단하면서 7일이 되자 1기계화군단과 6소총군단을 포함한 41군의 주요 병력이 벨리 남동쪽에 갇혀버렸다. 일주일간 저항하던 소련군은 16일에 간신히 돌파구를 뚫고 서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인명피해가 심한 것은 물론이고 중장비를 대부분 손실했다.

4.2. 루체사 공세 : 22군

41군 북쪽에서는 22군이 루체사 강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22군은 8만명의 병력과 27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중이었고 이 구역은 41기갑군단과 23군단의 경계구역이었다. 공세 목적은 올레니노-벨리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북쪽으로는 39군과 만나 23군단을 포위하고 남쪽으로는 41군과 만나 41기갑군단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고속도로까지는 약 20km정도의 진격이 필요했다. 그러나 25일부터 시작된 공세는 첫 날부터 쉽지 않았다. 3기계화군단의 2개 기계화소총여단의 지원을 받아 공세에 나섰으나 지형이 계곡과 숲이라 기동부대의 이동이 매우 힘들어 첫날 겨우 2km 진격하는데 그쳤다.

다급해진 소련군은 남은 1개 기계화소총여단 및 전차연대들을 전부 투입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둘째날도 겨우 1km 진격했고 독일군은 즉각 그로스도이칠란트 차량화보병사단의 일부 연대들을 투입했으나 착실히 진격해 12월 3일이 되자 고속도로에서 5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게 한계였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동부대가 이동하기 힘든 지형임을 이용해 적재적소에 예비대를 투입했고 3일 시점에서 22군은 공세 시작 당시 보유한 270대의 전차/자주포 중 200대를 손실한 상태였다. 결국 12일까지 공세를 지속했음에도 고속도로를 차단하는데는 끝내 실패했다.

4.3. 몰로도이 튜드 공세 : 39군

칼리닌 전선군의 제일 좌익에 있던 39군은 르제프 북쪽에서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조공이었기 때문에 칼리닌 전선군의 3개 공세 중 가장 약한 전력이었으며 9만명의 병력과 227대의 전차/자주포를 투입했다. 목표는 몰로도이 튜드-르제프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올레니노를 탈환하여 22군과 만나는 것이었다. 이 구역의 방어를 담당한 23군단은 지역 특성상 9군 휘하 군단중에 가장 약한 전력을 보유중이었으나 대신 9군은 올레니노에 강력한 예비군을 집중한 상태였는데 9기갑사단과 14,GD차량화보병사단이 대기중이었다. 39군은 공세 방향을 세 축으로 정해 주공인 중앙에는 4개 소총사단과 2개 전차여단을 배치하고 후방에 1개 소총사단과 1개 기게화소총여단을, 우익에는 1개 소총여단과 1개 소총연대를, 좌익에는 1개 소총여단, 2개 소총연대와 3개 전차연대를 배치했다.

공세는 타 공세와 마찬가지로 25일에 시작됐다. 23군단은 모든 전력을 전선에 배치한 상태였음에도 전선을 커버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39군의 공세 전력 역시 타 전역에 비하면 포병과 기갑 전력[25]이 약했기 때문에 39군의 공세가 집중한 중앙 구역에서는 방어에 성공했다. 대신 39군 좌익[26]의 공세는 생각보다 성과를 거두면서 23군단의 전방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39군은 공세 주력을 좌익으로 변경하려고 했다. 그러나 칼리닌전선군 사령관 푸르카예프는 어차피 39군의 공세는 조공이기 때문에 후방으로의 돌파 대신 주력을 그대로 중앙에 두어 독일군을 붙잡아두라고 명령했다. 28일이 되자 공세 부대는 병력과 전차의 절반을 손실했고 결국 11월 말까지 이어진 공세는 거의 성과없이 끝났다.

이에 주코프는 12월 7일부터 시작될 2차 공세에서는 주력을 르제프에 조금 더 가깝게 좌익으로 변경하라고 명령했고 이번에도 전방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2개 전차여단을 투입했으나 독일군의 대응도 신속했다. 독일군은 즉각 14,GD차량화보병사단을 투입해 돌파구를 막았다. 17일이 되자 소련군의 공세는 역시 실패로 막을 내렸다.

4.4. 시쵸브카 공세 : 20군과 31군

4.4.1. 1차 공세

벨리 공세가 칼리닌 전선군의 주요 공세였다면 시쵸브카 공세는 서부 전선군의 주요 공세였다. 서부 전선군은 이 공세에 주요 전력을 전부 집결시켰기 때문에 4개 공세 중 가장 큰 규모의 공세가 되었으며 20군과 31군, 5전차군단과 2근위기병군단이 투입됐다. 르제프 동쪽에 있던 31군은 줍초프 방면으로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고 주공은 시쵸브카 방면으로 공세를 진행할 20군이었다. 공세의 목적은 르제프-시쵸브카 철도를 차단하고 시쵸브카를 탈환한 뒤 41군과 만나 9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공세는 타 공세들과 마찬가지로 25일에 시작됐다.

31군은 르제프 방어를 담당하는 27군단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으며 3개 소총사단과 2개 전차여단을 투입했으나 공세 첫날 정오가 되자 인력의 절반과 전차의 대부분을 손실하고 곧바로 공세를 중단했다. 좀 더 남쪽에서 주공을 담당한 20군은 7개 소총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8근위소총군단[27], 8개 전차 여단을 포함해 11만 4천명의 병력, 1300문의 야포/박격포, 15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20군은 4개 소총사단과 5개 전차여단을 1제대에, 8근위소총병군단을 2제대에, 1개 차량화소총사단과 3개 전차 여단을 예비로 배치했으며 추가로 돌파구를 형성하면 투입될 기병-기계화 그룹이 대기중이었다. 이 그룹에는 2근위기병군단, 1근위기계화 소총여단과 166대의 전차/자주포[28]를 보유한 6전차군단이 배속되어 매우 강력한 전력을 보유중이었다.

시쵸브카 방면에서는 39기갑군단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20군의 공세 축선에는 102보병사단과 5기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공세 시작 직전에 5기갑사단의 전선을 인수할 78보병사단이 도착한 상태였다. 그러나 날씨 때문에 포병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20군의 공세 역시 첫날에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20군이 26일에 2제대와 후방 예비대를 전부 투입했음에도 공세는 지지부진했다. 31군의 공세가 실패하고 아직 29군이 공세를 펼칠 예정이 없는 상태에서 코네프는 다급해졌다. 따라서 26일에 6전차군단을 겨우 확보한 깊이 1.5km에 폭이 겨우 3km정도인 교두보에 투입했다. 그러나 20군 측면의 부대들이 전부 막힌 상태에서 무리한 기갑부대의 투입은 바로 실패했고 하루만에 6전차군단은 전차의 60%를 손실했다. 그나마 1개 전차대대가 철도에 도달이라도 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코네프는 이어서 27일에는 전차 200대를 보유한 5전차군단을 투입했고 2근위기병군단까지 투입했으나 39기갑군단은 5기갑사단과 더불어 9군 예비에서 9기갑사단을 증원받아 전선을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고 12월 5일이 되자 공세를 중단했다.

4.4.2. 2차 공세

주코프는 8일, 칼리닌 전선군과 서부 전선군에 공세를 재개할 것을 명령했다. 서부 전선군은 이번에도 20군에 주공을 맡겼으며 이번엔 29군의 우익 일부도 공세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후방 기동 제대들은 1차 공세 당시보다는 못해도 어느 정도의 전력을 보충받았다. 6전차군단은 101대의 전차/자주포[29]를 보유하여 2근위기병군단과 함께 르제프-시쵸브카 철도를 향한 공세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며 5전차군단은 160대의 전차/자주포[30]를 보유하여 시쵸브카를 향한 공세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차 공세보다 기습의 이점도 없고 전력도 약해진 상태에서의 공세는 당연히 성공할 리가 없었다. 11일에 시작된 공세는 20일에 중단될 때까지 철도를 일부 차단하긴 했으나 독일군에게 곧바로 밀려났다.

5. 결과

양측의 피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소련군은 약 30만~50만 명의 인명피해와 1300~1800대의 전차/자주포 손실이 발생했고 독일군은 약 4만 명의 인명피해와 최대400대의 전차/돌격포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9군 섬멸은 커녕 루체사 방면과 르제프 북서쪽 39군 공세 지역에서 약간의 영토를 얻은 걸 제외하면 성과가 전혀 없었으며 이에 따라 2단계인 목성 작전도 취소됐다.

그렇지만 동부 전선 전체로 보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쳤는데 중부 전선만 보면 9군과 중부집단군의 예비 전력을 전부 끌어들여 벨리키예루키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중부집단군은 르제프 돌출부를 유지하기 굉장히 곤란해졌고 3기갑군은 9군과 4군 사이에서 르제프 돌출부 동쪽을 담당하다가 휘하 부대들을 대부분 9군과 4군에 넘기고 새로 증원받은 부대들과 함께 16군과 9군 사이로 이동해 홀름-노보소콜니키-네벨-벨리즈 전선을 담당하게 되고 이후로도 비텝스크에서 44년 6월까지 방어를 담당한다. 르제프에 홀로 남은 9군은 다음해인 43년 1월 25일에 히틀러의 허가를 받아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31] 이어서 르제프 돌출부를 포기하면 가치가 없어지는 데미얀스크 돌출부 역시 1월 31일에 허가를 받아 16군이 곧바로 포기하고 철수를 시작했고 두 돌출부의 독일군은 각각 3월 말, 2월 말까지 안전하게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화성 작전은 엄청난 규모에 걸맞게 남부 전선으로 가야할 육군최고사령부의 예비사단들을 중부 전선으로 향하게 했는데 중부 집단군의 예비 전력을 제외하고도 1개 차량화보병사단과 4개 기갑사단을 포함한 15개 사단이 르제프로 증원됐다. 특히 기갑사단의 증원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기갑전력을 절반으로 줄여버리면서 남부 전역에서의 큰 성공에 많은 기여를 했다. 화성 작전이 실패해서 그 위상이 격하된 것인지[32] 아니면 실제로 천왕성 작전을 돕기 위한 규모만 큰 조공이었는지[33] 논란이 있어도 어쨌든 화성 작전은 분명 천왕성 작전에 도움을 줬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독일군이 스스로 철수하도록 만들었으니 피해규모를 제외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전략적 성과를 달성하긴 했다.

독일군으로서는 완벽한 승리였다. 전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소련군을 완벽하게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인명피해의 교환비가 거의 10대1에 달하고 기갑장비 역시 3~5대1에 달함에도 독일군은 이 손실을 극복하지 못했다. 남부 전선으로 가야할 전력을 투입하여 방어에는 성공했으나[34] 또다시 대공세가 펼쳐진다면 중부집단군도 더 이상 소련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특히나 동부 전선 전체로 보면 벨리키예루키와 B집단군 전체를 손실한 상태라 승리의 빛이 바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만슈타인이 5월에 쿠르스크를 향해 공세를 펼치자고 주장했을 때, 남부 집단군은 지속된 격전에 지쳐 그럴 여력이 없었지만 중부 집단군 역시 화성 작전의 여파를 반년이 지난 7월까지도 극복하지 못했다. 보병사단들의 인력들도 그렇지만 기갑장비의 손실도 극복하기 쉽지 않았는데 1기갑사단은 곧바로 동부전선에서 철수한 뒤 거의 1년이 지난 11월에야 우크라이나로 복귀했으며 12,19,20기갑사단은 7월 성채작전이 시작될때까지도 편제상 완편 기준의 절반~2/3정도만을 채운 상태였다.
[1] 르제프-시쵸브카 공세 작전[2] 화성 작전[3] 제2차 르제프-시쵸브카 공세[4] 단대호에 야간의 오류가 있는데 기갑군단이 아닌 9,20,23,27,30군단이 전부 기갑군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군단들은 그냥 보병군단들이다.[5] 12,19,20[6] 당장 만슈타인이 반격 당시 가용 가능한 기갑사단이 온전치 않은 기갑사단 3개(6,17,23)뿐이었다.[7] 화성 작전의 실패로 실행되지 않아 작전명이 확정되지 않았으며 목성 작전 혹은 해왕성 작전으로 명명될 예정이었다.[8] 화성 작전이 지지부진하면서 33군과 5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력이 화성 작전에 지원됐다.[9] 혹은 해왕성 작전[10] 이 중 5,6전차군단은 공세에 참여했고 9,10전차군단은 목성 작전에 참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작전이 취소되면서 공세에 나서지는 않았다.[11] 1,2,5,9[12] 14,GD[13] 12,19,20[14] 보유한 차량의 수가 아니다[15] 2주 이내[16] 11월 1일 기준[17] 우익의 4개군만 참여, 5군과 33군은 서부 전선군의 초기 공세가 실패하면서 공세에 참가하지 않음[18] 11월 5일 기준[19] 나중에 제8SS기병사단 "플로리안 가이어"로 개칭[20] 12월 1일부터 로버트 마르티네크 중장으로 교체, 아르님은 12월 3일에 상급대장으로 진급한 뒤 제5기갑군 사령관으로 영전하여 튀니지로 이동[21] 제2항공함대가 지중해로 이동하면서 중부 집단군 지원을 위해 제5항공군단 사령부로부터 창설되었으며 쿠르스크 전투 직전에 제6항공함대로 재편된다.[22] 10대의 KV전차와 119대의 T-34전차[23] Operation Nordlicht[24] 11군 소속[25] 46기계화소총여단이 유일한 예비 전력이었다.[26] 지도상으로는 동쪽[27] 1개 소총사단과 2개 소총여단[28] KV전차 18대, T-34전차 85대, T-70전차 30대, T-60전차 33대[29] KV전차 7대, T-34전차 67대[30] KV전차 21대, T-34전차 46대[31] 비공식적으로 이미 철수 계획은 수립된 상태였다.[32] 회고록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주코프가 전선군 사령부에 머문 기간이나 명령들에서는 분명 천왕성 작전을 최우선으로 본 것이 맞긴 하다.[33] 다만 그렇다기엔 규모가 너무 크긴 하다.[34] 이는 천왕성 작전과 화성 작전의 규모와는 별도로 중부 전선의 소련군이 훨씬 강력했던 것처럼 독일군 역시도 스탈린그라드보다도 르제프가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