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디 전투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브로디 전투 당시 독일 육군 제11기갑사단의 기동 | ||
날짜 | ||
1941년 6월 23일 ~ 30일 | ||
장소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브로디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막심 푸르카예프|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니콜라이 바슈긴†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이반 무지첸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미하일 포타포프 | ]][[틀:깃발| ]][[미하일 키르포노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히아친트 그라프 슈트라흐비츠 폰 그로스-자우헤운트캄미네츠 |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결과 | ||
나치 독일의 승리 | ||
영향 | ||
소련군이 독일 국방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함 독일 국방군의 공세가 지연되었지만 완전한 방어는 실패 | ||
전력 | 전차 약 3500대 | 전차 약 750대 |
피해규모 | 전차 800대(8 기계화군단만) | 전차 200대(8 기계화군단에 대해서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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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브로디 전투 또는 두브나 전투, 두브노 전투, 로브노 전투, 로브노-브로디 전투는 1941년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두브나, 로브노, 브로디 마을을 잇는 삼각지대에서 독일 1 기갑군단, 3 군단, 68 기계화군단이 소련 5 군단, 제 6군단과 벌인 전투다. 소련 역사학에선 '국경 방어전'의 일부라고 보며,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소련군도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바르바로사 초기 전투에서 가장 격렬한 전차전이었고, 쿠르스크 전투 이전까지 가장 거대한 전차전이었다.2. 서막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키예프를 염두에 두고 1 기갑군단에게 부크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코로스텐과 로브노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리보프-키예프 철도 노선을 장악하기 위해 리보프와 로브노 사이에 2개 군단을 전진 배치하여 소련군 5군과 6군 사이로 전진하였다.미하일 키르포노스의 남서부전선군(Юго-Западный фронт)에는 독일군의 공격 방향과 병력 규모에 대해 매우 부족한 정보만이 주어졌지만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제 3지시로 총반격을 지시하였다. 사령부 대다수는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는 방어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에 모스크바에서 초기 보고서를 작성한 전선군 참모 이반 바그라먄은 "모스크바에서의 첫번째 전투 보고서는 일반적이고 불분명한 지시로 가득 차있다"고 말하였다.
제 3지시 명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헝가리와의 국경을 계속 방어하면서, 5군과 6군은 루블린 방면으로 집중공격하고, 적어도 5개의 기계화부대와 항공 전력을 이용하여 블라디미르-볼렌스키-키르포노스 전선군은 포위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고 6월 24일까지 루블린 주변부를 점령한다.
22일 밤에 주코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테르노필에 있는 남서부전선군의 사령부로 이동했으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조직 부서의 모든 인원이 명령 수행에 동원됐다.
3. 병력 배치
25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한 6개의 소련군 기계화군단은 독일 제1 기갑군단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모였다.목표는 북쪽의 소련군 제5군과 남쪽의 제6군이 두브노 서쪽 방면으로 독일 남부집단군의 제6군과 제17군을 협공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제8기계화군단이 제26군의 명령으로 전선군의 제6군 남쪽에 위치했고 이반 무지첸코의 제6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는 남서부전선의 모든 차량이 키예프를 향하는 클라이스트의 공세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전선에서의 독일군 보병의 첫번째 작전은, 빅토르 폰 슈베들러(Viktor von Schwedler)의 제4군단 휘하의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Carl-Heinrich von Stülpnagel)[1]의 17군이 리보프-키예프 철도를 차단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3.1. 양군 전차배치
1941년 6월 22일 독일 남부집단군과 소련 남서부전선군의 전체 전차 수량은 다음과 같다.독일 군단 | 독일 사단 | 총 독일 전차수[2] | 37mm 주포를 장착한 전차 수[3] | 50mm 이상의 주포를 장착한 전차 수[4] |
제3 기갑군단 | 제13, 14 기갑사단 | 296대 | 42대 | 140대 |
제38 기갑군단 | 제11, 16 기갑사단 | 289대 | 47대 | 135대 |
제45 기갑군단 | 제9 기갑사단 | 143대 | 11대 | 80대 |
남부집단군의 기타 병력 | 0대 | 0대 | 0대 | |
총합 | 728대 | 100대 | 355대 |
소련 군단 | 소련 사단 | 총 소련 전차수 | T-34와 KV-1 |
제4 기계화군단 | 제8 기갑사단 | 300대 | 100대 |
제8 기계화군단 | 제7 사단 | 899대 | 171대 |
제9 기계화군단 | 제131 사단 | 316대 | 0대 |
제15 기계화군단 | 제10, 37 기갑사단, 37, 212 보병사단 | 749대 | 136대 |
제19 기계화군단 | 제40, 43, 213 사단 | 453대 | 5대 |
제22 기계화군단 | 제19, 41, 215 사단 | 712대 | 31대 |
다른 사단의 병력 | 소총병 사단 등 | 포함하지 않음 | - |
총합 | 3429대 | 443대 |
위에 표기된 소련군의 수치는 실제 모든 병력을 반영하지 않았고 작전 가능한 병력만을 표기했다. 그리고 작전 가능한 병력조차도 일부는 침공 당시에도 구성되어 배치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병력하고는 차이가 있다.
제15, 19, 22 기계화군단은 전쟁이 시작되기 불과 몇달 전에 창설되었기 때문에 훈련이 부족하여 효과적인 전투준비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제4, 8, 9 기계화군단조차도 이 시기 기준으로 창설된 지 1년도 되지 않았다. 또한 소련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탄약과 예비부품 부족으로도 가동 가능한 전차의 수가 크게 적었다. 조준경의 미비로 준비된 탄약으로도 정확하게 사격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반면 독일 기갑 대대들은 이미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 3년동안 폴란드와 유럽전역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하였고, 소련군에 비해 뛰어난 지휘, 통제, 통신, 임무 및 풍부한 보급까지 받고 있었다.
4. 공중전
소련 남서부전선군의 항공기들은 침공 징후를 보고를 하고도 경계 태세를 거부한 이오시프 스탈린의 방심으로 인해 지상에서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아르키펜코 중위의 제17 전투기 연대는 지상에 방치되었고 결국 전쟁 발발 3일만에 전멸했으며, I-153 10대와 MiG-1 1대만이 로브노 근처의 예비 비행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그래도 소련군은 살아남은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제4 항공함대 소속 JG 3는 하루만에 24대의 투폴레프 SB-2를 격추시켰다. 전사자 중에는 제86 폭격편대 사령관 소로킨 중령과 제89 폭격편대 사령관 포드폴코프니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251대를 자랑하던 SB-2는 20대만 남긴채 큰 피해를 보았고 독일군 역시 28대가 격추되고 23대가 파손되는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He 111와 Ju 88 8대 포함).
소련 공군의 노력이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서부전선 공군은 523번 출격하여 폭탄 2500개를 투하하였고 독일 제11 기갑사단의 제15 기갑연대장 구스타프 쉬로뒤크(Gustav Schrodek)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6월 24일 새벽, 연대가 러시아 폭격기의 첫 공격을 받았다. 오늘 한 번만이 일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 연대에 몇몇의 사상자가 생겼다.
이렇게 나마 분전하였지만 루프트바페에게 제공권을 내줘 소련 공군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5. 동원
남서부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는 북쪽의 6개의 기계화사단을 휘하에 둔 5군과 남쪽의 6군을 포함한 공격명령을 내렸다.5군 지휘하에 있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제9 기계화군단과 페클렌코의 제19 기계화군단이 로브노 북서쪽에 배치되는 동안 제22 기계화군단은 루츠크 북동쪽에 집결하였다. 남쪽에서는 6군의 지휘아래의 드미트리 랴비셰프의 제8 기계화군단과 카르페조의 제15 기계화군단이 브로디 남서쪽과 북동쪽에 배치되는 동안 안드레이 블라소프의 제4 기계화군단은 제15 기계화군단 좌익의 라데히프 사이에 배치되었다.
이 계획은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 된지 36시간만인 6월 23일 22시에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개시되었으며, 빠르게 진격하는 제11 기갑사단이 후방의 지원군으로 교두보를 형성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지휘부는 통신 장애와 독일 공군에 의한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렸고 차량 부족과 엄청난 수의 피난민, 패잔병들이 도로에 가득차 반격 목표까지 도달하는 게 어려워졌다. 또한 전선군 지휘부와 각 군의 통신은 대체로 원활하였지만 전방 부대와의 통신은 민간 전화와 전신망을 사용했기 때문에 심각한 통신 장애가 있었다.
또 독일 육군의 전투공병과 독일 공군의 공습,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파르티잔들은 이 통신 시스템을 박살내는데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소련 최전방의 지휘관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했고, 이로 인해 소련군의 지휘 및 통제 효율성이 크게 감소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제22 기계화군단 하의 제41 전차사단 사령관은 전쟁 전에 계획됐던 부대 지침에 따라 사단을 코벨로 이동시켜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다른 고질적인 문제로는 기계화군단들의 보병 장비와 이동 수단의 부족이 있었다. 이름만 기계화된 이 부대들의 대부분은 편제된 이동 수단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각 군단의 지휘관들은 모든 병력을 집결지로 데려오기 위해 즉석에서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로코솝스키는 세페티프카의 지역 예비군으로부터 200대의 트럭을 징발하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그의 병력들은 전차에 매달려서 이동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럭은 중요한 군수품과 보급품을 수송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병력들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실제로, 제22 기계화군단의 야포들은 끌고갈 트랙터가 없어 그대로 뒤에 남겨졌다. 제19 기계화군단은 뒤쳐지는 보병보다 훨씬 먼저 기갑부대가 도착하여 보병지원 없이 싸워야 했다.
제8 기계화군단의 사령관인 랴비셰프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의 야포들은 끔찍하게 느린 트랙터로 이송중이어서 그에 맞춰서 군단의 진격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렇게 썼다.
행렬은 최고 속도로 전진중이다. 불행하게도 몇몇 야포 트랙터 수송 군단이 심각하게 뒤쳐졌으며 이 속도의 차이로 병력 집중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독일군의 돌출부에서 빠른 전진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한 소련군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만다. 6월 22일과 24일 사이에 제8 기계화군단은 집결지점을 3곳이나 받았는데, 하나는 전선군에게서 온 것이었고, 새로운 명령은 제6군 사령관에게서, 24일에는 다시 전선군에게서 왔다. 이 때문에 제8 기계화 군단은 브로디에 도착하기 전에 왔던 길을 여러 번 되돌아 가는 등 혼란을 겪었다. 나중에 랴비셰프는 이렇게 썼다.
6월 25일 정오 쯤에 군단이 브로디 북서쪽에 배치됐다. 500km에 달하는 행군동안 적의 공습과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반 정도의 구식전차와 상당부분의 야포와 대전차포를 잃었다. 남아있는 전차들도 다양한 문제로 인해 수리가 필요했고 장거리 주행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군단은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로 인해 병력 집결 시간은 6시간 초과된 6월 24일 새벽 4시로 지연됐다. 6월 23일 저녁에 이러한 결정이 이뤄질 때까지 전쟁은 시작된지 48시간이 막 흘렀고 독일 11 기갑사단은 이미 16 기갑사단을 따라 소련 영내 64km를 돌파하였다. 13 기갑사단과 14 기갑사단은 스티르 강(Styr River)에 도달하기 위해 루츠크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고 있었고 제 44, 298, 299 보병사단은 진격을 굳히기 위해 전진 중이었다.
반격 일정이 미뤄졌음에도 병력 증원이 이틀 뒤에나 완료됨에 따라 공격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제 4, 8, 9, 19 기계화군단은 여전히 행군중이었고 이를 지원할 보병군단은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하일 키르포노스의 참모총장인 막심 푸르카예프는 이를 두고 남서부전선 정치장교인 니콜라이 바슈긴과 논쟁했지만 공격은 지연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주코프와 바슈긴의 뜻이 관철되었다. 남쪽의 15 기계화군단 2개 사단과 북쪽의 22 기계화군단 1개 사단만이 24일 공격이 시작되었을때 위치에 있었다.
6. 소련군의 반격
제 4, 8, 15 기계화군단에는 현대화되고 강력한 T-34와 KV 전차가 717대가 배치되어 있었고 이는 소련 전체 T-34와 KV-1의 생산량(약 1600대)의 반에 이르렀다.전투 내내, 계획된 작전의 규모와 군단들의 정확한 역할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아예 전달되지 않았다. 랴비셰프는 "군단의 전투 지시는 오직 자신만의 작전 목표만을 말하였다."고 적었다. 개별 군단 사이에서는 조정을 하기 위한 통신은 적거나 아예 없었다.
6.1. 10 전차사단[5]
1941년 6월 22일에 전방 대대는 독일 보병으로부터 라데키프를 점령했고 2대의 전차를 잃었다. 다음 날에는 11 기갑사단과 싸워 20대의 전차를 파괴하고 6대의 T-34와 20대의 BT 전차를 잃었다. 이 부대는 탄약부족으로 인해 순차적으로 후퇴했다. 1941년 6월 26일에는 라데키프 근처에서 23대의 전차와 독일 보병 대대를 격파했으며 13대의 KV-1과 12대의 BT-7을 상실하였다.6.2. 15 기계화군단[6]
15 기계화군단은 136대의 T-34와 KV-1을 포함해 749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일관성 없는 명령들로 인하여 군단은 라데히프-브로디-부스크 삼각지대에서 혼란스럽게 이동해가면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10 전차사단의 2차례 전투를 제외하면 딱히 전투 중은 아니었다. 1941년 7월 7일에 국경으로부터 300km 떨어진 브레조프카에서 9%의 전차만이 남았다고 보고하였다.6.3. 제22 기계화군단[7]
6월 24일에 22 기계화군단은 보이니차를 향해 공격했고 6월 29일에는 전체 전차의 19%만이 남았다고 보고하였다. 7월 1일에는 1개 연대가 두브노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였다. 7월 15일에는 22 기계화군단은 전체 전차의 4%가 남아 사실상 소멸하였다. 세묜 콘드루세프 소장은 6월 24일에 볼린)의 알렉산드롭스카 마을 근처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하였다.6.4. 제19 기계화군단[8]
6월 26일에 북쪽에서 두브노를 공격했으나 몇 킬로미터를 진격하고 공격이 돈좌되었다. 6월 29일에는 원래 453대였던 전차가 32대 밖에 남지 않았다.6.5. 제8 기계화군단
랴비셰프의 8 기계화군단은 6월 25일에 드디어 전선에 도착했다. 6월 26일에는 11 기갑사단의 일부와 맞서 브로디-베레스테츠코 방면으로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무모한 준비와 어려움에 불구하고 소련의 공격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고, 전투준비가 되지 않은 독일군을 붙잡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전차는 48 기갑군단에 소속된 오토바이 대전차병력들을 급하게 정리하였다.나중에 8 기계화군단은 니콜라이 포펠 그룹과 랴비셰프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6.5.1. 12 전차사단
이 사단의 56대의 KV 전차와 100대의 T-34는 두브노 근처를 공격하던 중 연료와 탄약이 떨어지고 말아 작전이 중단되고 만다.6.5.2. 포펠 전차대
포펠 그룹은 100대 이상의 T-34와 KV-1을 포함한 약 300대의 전차를 보유하였다. 6월 27일에는 제11 기갑사단의 후방을 공격하여 중요한 거점인 두브노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독일 선봉 기갑부대(제11 기갑사단)의 보급선을 끊어버려 이 전투 중에 가장 성공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포펠과 사령부간에 통신이 끊어져서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효과적으로 이를 이용하지 못했다. 포펠 그룹은 두브노에서 대기하던 중 주도권을 잃어 방어를 준비해야 했다. 이 상황은 독일 최고사령부에게 꽤나 큰 문제였던 것 같다.남부집단군 1 기갑군단의 오른쪽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8 기갑군단은 우리 전선을 효과적으로 돌파하여 현재 11 기갑사단의 후방에 있다. 이 돌파로 인해서 브로디와 두브노 사이의 후방 지역에 큰 장애가 생겼다. 적은 남서쪽에서 두브노를 위협하고 있으며... 적은 제11 기갑사단의 매우 큰 후방에서 여러 개의 전차부대를 기동하였다.
- 프란츠 할더의 일기에서
- 프란츠 할더의 일기에서
독일군은 6월 28일까지 엄청난 수의 병력을 모았다. 포펠 전차대는 제16 기계화사단과 제75 보병사단, 그 외 2개 보병사단, 제16 기갑사단의 공격을 받아 7월 1일까지 방어하다 후퇴한다.
6.5.3. 랴비셰프 전차대
랴비셰프 전차대는 49대의 T-34-76과 46대의 KV-1을 포함한 303대의 전차를 보유 중이었다. 6월 28일에 포펠그룹을 따라가기 위해 독일 16 기갑사단의 일부 뿐만 아니라 제57 보병사단과 제75 보병사단을 공격했다. 하지만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소련군은 신속하게 후퇴했다. 7월 1일, 랴비셰프는 타르노폴에서 31대의 T-34-76과 43대의 KV-1을 포함한 207대의 전차가 남았다고 보고했다.[9]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던 8 기계화군단은 코지아틴으로 이동했고 1941년 7월 7일에는 전쟁 전 전력의 5%에 불과한 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6.6. 제4 기계화군단[10]
4 기계화군단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가장 강한 군단이었고 313대의 T-34와 101대의 KV-1을 포함해 총 979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에 너무 천천히 반응하여 공격을 위해 모여있지 못하였다. 6월 28일에는 독일 보병으로부터 15 기계화군단의 퇴각로를 확보하는 성과를 냈지만, 비전투 손실이 심각하여 전투가 없었음에도 7월 12일에는 KV-1의 6%, T-34의 12%, 경전차의 4%만을 소유할 지경이었다. 이 밖에도 소련의 눈에 띄는 반격은 없었다.6.7. 제22 기계화군단, 제41 전차사단
핵심 전력인 KV-1이 늪에 빠지는 바람에 31대가 상실되었다.7. 소련군의 혼란
6월 27일의 망설임과 지휘의 혼란이 전투의 결과와 우크라이나 전역에 끼친 영향은 가늠하기 어렵다. 소련군이 두브노를 점령하여 독일군 주 선발공격을 차단했을 때, 키르포노스는 바로 그 독일군이 남쪽에서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측면에서 공격하여 포위할 위협이라 생각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공격을 멈추게 하고 전선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후퇴 명령을 내리게 했고, 바그라먄에 따르면 6군과 26군의 후방으로 적 전차집단이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전선 사령관과 참모들 사이의 토론 이후 주코프는 이러한 명령을 즉시 취소하고 두 시간 뒤에 새로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브로디 전투에서의 소련 지휘부 내의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북쪽에서 공격하던 9 기계화군단의 사령관인 로코솝스키는 이 새로운 명령을 꺼렸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반격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적이 수적으로 우세하여 반격 중지를 명령하고 준비된 방어로 적을 맞는 개인적인 책임을 떠맡았다.
한편, 남쪽 8 기계화군단의 랴비셰프는 명령에 따라 공격을 재개하였다. 랴비셰프는 당시 주코프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격이 지연없이 계속됐더라면 소련군은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키르포노스의 생각과 일치하였는데, 공격은 시기상조였으며 전 전선에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 소련의 반격이 완패한 직후에는 세묜 부됸니가 남서부 및 남부전선을 통합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만 전투에서 참사가 일어나 10만명의 소련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두브노 전투동안 얻어낸 진지에서 남쪽으로 우회하던 남부전선군의 26군, 12군, 18군이 재공격하던 중 포위되어 10만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이는 키르포노스가 두브노 역습의 효율성에 대해 주코프와의 토론 중에 예측했던 결과이다.
키르포노스와 주코프간의 대립으로 주코프는 남서부전선군 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염려스럽게도 여기 사령관은 매우 나약한 것 같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키르포노스에 대한 공격은 결코 답을 받을 수 없었는데, 이후의 키예프 전투(1941년)에서 포위된 후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8. 전투 결과
브로디 전투당시 격파된 T-26. T-26 전차는 당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다수가 격파되었다. |
KG 51, KG 54, KG 55 독일 전투폭격대(Kampfgeschwader)들은 소련의 지상 목표물에 대하여 강력한 저공 폭격을 가했다. 15 기계화군단의 사령부는 이로 인해 파괴되었고 지휘관 이그나츠,카르페조 소장은 부상을 입었다. 독일 공군은 이 지역에서만 201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5개의 소련군단은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잘못 처리되었다. 독일군은 각 군단을 고립시켜 각개격파하려했다. 한편 전장을 장악한 독일 공군은 지원 보병들을 이탈시켜 연료와 탄약 보급을 막았다.
계획과 조율이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군의 반격은 두브노에서 합류하지 못하였다.
9. 전투 이후
독일 1 기갑군단은 두브노 근역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작전 가능한 정도는 됐다. 소련군도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대부분의 군단이 작전 불능이 되었다. 이러한 방어성공은 소련군의 반격으로 공격이 상당히 지연됐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계속 진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8 기계화군단은 피해가 너무 막심하여 해체하고 예속 부대는 남서부전선의 다른 곳으로 분배되었다.10. 여담
▲ 이 전투를 레고로 재현한 용자가 있다. 장비 등 고증이 상당히 뛰어나다.독일 다포탑 전차 노이바우파초이크가 이 전투에서 모두 투입되었지만 격파되었다.
[1] 나중에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발키리 작전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후,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실패했고,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롬멜"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롬멜이 자살하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 비전투 '지휘 전차'와 구식 1호 전차, 2호 전차 포함[3] 38(t) 전차와 3호 전차 포함[4] 3호 전차 G형과 4호 전차 포함[5] 15 기계화군단에 예속[6] 카르페조 소장이 지휘[7] 콘드루세프(С.М. Кондрусев) 소장이 지휘[8] 니콜라이 페클렌코 소장이 지휘[9] "1941년 7월 1일 현재 12 기갑사단과 7 기계화사단으로 구성된 8 기계화군단의 작전 가능 병력은 19000명, 장갑차 21대와 43대의 KV-1, 31대의 T-34, 69대의 BT-7, 57대의 T-26, 7대의 T-40을 포함한 전차 207대이다." 랴비셰프의 자서전 '랴비셰프 2002'에서 쓰인 바로는, 이 병력들은 랴비셰프의 38군으로 개편되게 된다.[10]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