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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16:35:51

스몰렌스크 전투(1943)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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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렌스크 전투(1943)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ern_Front_1943-08_to_1944-12.png
연한 노란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1943년 말까지의 소련군 공세선이다.
날짜
1943년 8월 7일 ~ 10월 2일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스몰렌스크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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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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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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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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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안드레이 예료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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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소콜롭스키
]](서부 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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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폰 클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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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폰 클루게
]](중부 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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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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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제3기갑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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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제4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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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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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모델|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발터 모델
]](제9군 사령관)
결과
소련군의 승리, 서부 러시아 SFSR 전역의 수복
영향
모스크바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제거.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의 발판이 됨.
전력 병사 1,252,600명[1]
포 2만 문
전차 1,430대
항공기 1,100대
소련측 추측
병사 85만여 명
포 8,000문
전차 500대
항공기 700기
피해규모 총 피해 451,466명
전사/실종 107,645명
부상/질병 343,821명
전차 및 자주포 863대
야포 243문
항공기 303기
총 피해 70,593명
전사 12,984명
실종 6,298명
부상 51,311명[2]

1. 배경2. 편제
2.1. 독일군2.2. 소련군
3. 스파스-데멘스크 공세4. 옐닌스코-도로고부즈 작전5. 두홉쉬친스코-데미도브 작전과 스몰렌스크-로슬라블 작전6. 결과

[clearfix]

1. 배경


당시 독일측 선전영상. 전사한 소련군 시신과 소련군 포로, 파괴된 전차들도 등장하는데 이 정도로 소련군은 큰 희생을 치렀다.

독일군은 쿠르스크 전투를 기점으로 전선 유지능력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스타브카와 스탈린은 남부와 중부 양쪽에서 공세를 개시해 독일군을 계속 밀어낸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독일군은 비록 르제프 돌출부에서 철수했지만 여전히 스몰렌스크를 비롯한 서부 러시아에 주둔중인 독일 중부집단군 병력은 모스크바에 대한 전략적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스탈린은 하루 빨리 이들을 몰아내고 싶어했다.

문제는 해당 지역에는 상당한 늪지대와 숲이 있었으며 전차의 기동에 제약이 있었다. 게다가 수 없이 많은 강이 지나갔기 때문에 만약 독일군이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다면 도하를 시도하는 소련군에게 상당한 소모를 강요할 수 있었다. 남부 전선의 드네프르 강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동부 방벽 건설이 시도되었으나 견고한 방벽을 지었다간 병사들이 제대로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히틀러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허술하게 만들어진 방어선은 소련군에 의해 쉽게 돌파당했다. 반면, 중부 전선의 중부집단군은 지형적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하고자 어마어마한 규모의 참호와 지뢰밭, 해자, 대전차장애물을 몇 겹으로 설치해버렸고 고지대의 방어진지는 진격해오는 소련군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 유리함을 제공했다.


드네프르 강 상류가 위치한 스몰렌스크. 이외에도 많은 강이 주변 지역에 위치해 천연방벽의 역할을 했다.

현대에 스몰렌스크 늪지대에서 발견된 T-34-76 전차. 곳곳에 있는 늪지대는 전차의 기동을 방해했다.
게다가 OKH는 소련의 공격기도를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은 갖가지 기만전술을 사용했는데도 독일은 항공정찰을 통해 소련군의 공격 방향을 정확히 파악했다. 그렇기에 중부집단군 병력들은 만반의 대비태세에 돌입했다.

2. 편제

2.1. 독일군[3]

2.2. 소련군[4]

3. 스파스-데멘스크 공세

8월 7일, 스파스데멘스크를 탈환하기 위해 소련의 5군, 10근위군, 33군이 공세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에 공격은 돈좌되었고 소련군은 공병과 포병을 집중 동원해 독일군의 방어라인을 하나하나씩 벗겨내느라 하루에 불과 4km 밖에 진격하지 못했다.

로슬라블을 돌파할 수 없음을 확인한 소련군 지휘부는 예비대로 돌려진 68군을 투입해 오룔을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독일군도 이에 맞서서 오룔에 2기갑사단과 36보병사단, 54보병사단을 추가로 증원했다.

8월 8일, 소련군은 오룔과 야르체보를 돌파구로 삼아 공세를 했지만 여전히 독일군의 저항은 강력했다. 치열한 격전끝에 56 근위소총사단은 코셀리키와 델랴기노, 드보르시를 해방했고 119 전차연대와 65근위소총사단은 223 고지의 독일군을 돌파하기 위해 공격을 가했으나 독일군 1개 대대병력의 완강한 방어에 돈좌되었다. 한편 222 소총사단은 즈유지키와 라즈키를 해방했고 164 소총사단은 호틸로브카를 해방했다. 그리고 160 소총사단은 슬루즈나의 독일군 요새를 포위섬멸했다.

8월 9일,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에도 소련군은 돌파구를 확대해나갔고 8월 10일에는 소련군이 드디어 223 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방어하던 독일군 대대 병력은 전멸하고 만다. 223 고지의 점령으로 인해 독일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독일군은 황급히 철수작전에 돌입한다.

8월 13일, 소련군은 드디어 스파스-데멘스크를 해방하는데 성공했다. 소련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돌파구를 확대해 38개의 촌락을 해방하고 일부 분견대가 고속도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8월 14일에는 소련군이 233.1 고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면서 셰브티-다르나 지역에서 돌파구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15일에는 보급이 부족해진데다가 독일군이 기갑사단으로 방어하면서 레스코프에선 철수해야 했다.

8월 16일과 17일에는 소련군이 퇴각하는 독일군을 추격하는 와중에 독일군 기갑사단이 이를 지연시키면서 독일군의 퇴각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소련군 입장에서 안타깝게도 독일군 주력을 포위섬멸시키는데에는 실패하고 만다. 결국 8월 20일, 소련군 서부전선군은 40km 까지 진격한채 작전을 종료한다.

4. 옐닌스코-도로고부즈 작전

전력을 재편한 소련군은 옐냐와 스몰렌스크를 목표로 2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심한다. 소련군은 일주일 간 공세 준비를 마친 뒤 8월 28일 부터 10근위군, 21군, 33군을 동원해 옐냐에 대한 공세에 돌입했다. 90분 간의 강력한 포격과 소련공군의 공습은 독일군의 견고한 방어선을 파괴하는데 성공했고 소련군은 그 덕에 다음 날까지 폭 30km 깊이 15km 규모의 돌출부를 형성하는데 성공했다. 돌파구로 2근위전차군이 쇄도해들었고 옐냐에 주둔한 독일군 병력들은 그대로 포위되어버린다. 독일군은 결국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한 채 결국 8월 30일, 옐냐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브랸스크

한편, 브랸스크에 위치한 고지대의 독일군 병력들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대로 브랸스크 전선군에 의해 신속하게 점령되었다. 이에 따라 1벨라루스 전선군의 병력 투입이 용이해졌고 결국 독일군은 브랸스크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6일까지 소련군의 공세는 지속되었으나 야르체보와 옐냐 근처 숲에서 벌여지는 격렬한 교전으로 인해 소련군 소총사단의 전투력은 저하되었고 결국 공세는 종료되었다.

5. 두홉쉬친스코-데미도브 작전과 스몰렌스크-로슬라블 작전

스타브카는 9월 7일 부터 9월 14일 까지 소련군의 전력을 재편시킨 뒤 스몰렌스크, 비텝스크, 오르샤의 탈환을 목표로 3차 공세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예비 포격이 있은 뒤 칼리닌전선군 주력 병력과 서부전선군 일부 병력이 동원되었다. 칼리닌전선군은 전투 4일 뒤 스몰렌스크로 향하는 교도부인 두홉시나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 서부전선군 병력들은 스몰렌스크-로슬라브 작전을 가동해 스몰렌스크의 철도 교통의 요충지인 야르체보를 탈환하는데 성공했고 그 결과 스몰렌스크에 주둔한 독일군 9군 병력들이 포위 위협에 노출되었다. 결국 9군은 더 이상의 위치를 고수할 수 없었고 부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9월 25일, 격렬한 시가전 끝에 스몰렌스크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고 로슬라블도 탈환되었다. 소련군은 비텝스크오르샤도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거듭했으나 소련군의 공세 역량 급감과 독일군의 전력 재편으로 인해 공세는 돈좌되었고 결국 10월 2일, 공세 작전은 종료되었다.

소련군은 네 번째 작전기간 동안 100~180km를 진격했다.

6. 결과

소련군의 출혈도 컸지만 독일군은 이 작전으로 모스크바를 노리는 것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다. 게다가 스몰렌스크에서의 공세와 남부전선에서의 공세가 같이 진행되면서 독일군의 전력은 분산되었고 그 덕에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소련군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독일군은 전선을 겨우 안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지속적인 전투력의 소모로 인해 병력의 열악한 상태, 예비 병력의 부족, 단위 부대의 담당 전선의 확장 등이라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산업능력으로는 이러한 손실을 결코 복구할 수 없었고 결국 이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중부집단군 전체가 통째로 파괴되어버리는 재앙으로 이어지게 된다.

스몰렌스크는 이 전투의 영향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농촌의 50%가 파괴되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게다가 아인자츠그루펜이 자행한 전쟁범죄로 인한 피해도 있었다.


[1] 칼리닌 전선군 428,400명, 824,200명[2] https://web.archive.org/web/20130525020822/http://ww2stats.com/cas_ger_okh_dec43.html[3] 8월 5일 기준[4] 8월 1일 기준[5] 8월 27일에 대장으로 진급[6] 8월 27일에 대장으로 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