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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22:04:28

굼비넨-골다프 공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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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비넨-골다프 공세
러시아어: Гумбиннен-Гольдап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Gumbinnen-Goldaper Operation
영어: Gumbinnen Operation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파일:굼비넨 작전.jpg
▲ 지도 중앙, 굼비넨 작전을 진행하는 제3벨라루스전선군
날짜
1944년 10월 16일 ~ 10월 30일
장소
동프로이센 동부, 굼비넨 일대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소련|]]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이반 체르냐홉스키|
이반 체르냐홉스키
]]
(제3벨라루스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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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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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헬무트 바이틀링|
헬무트 바이틀링
]]
(제41기갑군단장)
결과
독일 국방군의 방어 성공
영향
1944년 하계 공세 종료
소련군의 동프로이센 진입
전력 병사 377,300명
전차/자주포 300대
피해 규모 전사/실종 16,819
부상 62,708명
전사 2,499명[1]
실종/포로 3,260명
부상 12,500명

1. 개요2. 1944년 가을의 중부 전선3. 전투 서열
3.1. 독일군3.2. 소련군
4. 전개
4.1. 공세 준비4.2. 소련군의 동프로이센 진입4.3. 독일군의 반격
5. 결과

[clearfix]

1. 개요

굼비넨 작전 혹은 굼비넨-골다프 공세는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작전과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시작된 1944년 하계 공세의 마지막 공세이며 소련군은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독일군의 반격으로 막히면서 전선이 고착화된다. 이후 1945년 1월에 동프로이센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전선은 큰 변화가 없었다.

2. 1944년 가을의 중부 전선

소련군은 6월부터 바그라티온 작전, 7월부터 발트 3국을 향한 공세를 시작하면서 독일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바그라티온 작전 결과, 마지막 단계로 샤울라이 공세를 진행한 제1 발트 전선군은 7월 말, 리가 서쪽에서 북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 사이를 차단했으나 이어진 3기갑군의 도펠코프 작전으로 좁은 회랑으로 다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8월 초,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을 진행하던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은 뱌르샤바 근방의 랴지민 전투에서 선봉 기갑부대가 섬멸되면서 진격이 멈췄다. 대신 카우나스 공세를 진행한 제3 벨라루스 전선군과 오소베츠 공세를 진행한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이 끝날 때까지 동프로이센 국경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폴란드를 향한 공세는 멈췄지만 발트 3국을 향한 공세는 성공적이었고 9월부터 소련군은 본격적으로 발트해 공세를 시작했다. 발트해 공세 결과 북부 집단군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동부에서 탈출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쿠를란트에 갇혀버렸다. 10월 10일, 제1 발트전선군이 메멜 근방에서 발트해에 도달하면서 16군과 3기갑군 사이의 전선이 끊어졌다. 그러자 스타브카는 이 성과에 힘입어 좌익에 있던 제3 벨라루스 전선군에게 동프로이센에 진입하여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체르냐홉스키는 굼비넨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3. 전투 서열

3.1. 독일군[2]

3.2. 소련군[3]

4. 전개

4.1. 공세 준비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은 북쪽부터 39군, 5군, 11근위군, 31군을 배치했으며 후방에 보유중인 28군과 2근위전차군단을 포함해 35개 소총사단과 2개 전차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구역을 담당하던 독일군은 4군 좌익의 3개 군단으로 북쪽부터 26군단, 27군단, 41기갑군단이었다. 공세 전면의 독일군은 9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 1개 기갑여단을 보유중이었고 4군 좌익의 3기갑군 소속 9군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양측의 전선은 수다르가(Sudargas)-빌라비스키스(Vilkaviškis)-리우바바스(Liubavas)로 이어지는 축선에 걸쳐 있었으며 소련군은 동프로이센 국경에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제1 발트 전선군과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을 연결하던 5군은 이미 동프로이센에 진입해 있었다.

10월 5일부터 시작된 제1 발트 전선군의 공세로 틸지트(Tilsit) 북쪽에서 소련군이 동프로이센 국경으로 점점 다가오자 독일군은 급히 동프로이센으로 증원군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예비대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타 지역에서 병력을 차출해야했고 4군에서 1개 보병사단과 1개 보병연대를, 북부집단군에서 1개 보병사단을 3기갑군으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바르샤바에서 소련군을 막아냈던 제1 헤르만괴링 강하기갑사단과 신편된 제2 헤르만괴링 강하기갑척탄병사단을 합쳐 헤르만괴링 강하기갑군단을 편성해 틸지트에 배치했다. 덕분에 제1 발트 전선군의 공세는 동프로이센 바로 북쪽에서 정체됐지만 이번엔 동프로이센 동쪽에서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을 넘어 프로이센 시기부터 이어진 독일의 정신적 중심지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타넨베르크 전투 당시 동프로이센을 지키기 위해 서부 전선의 병력을 이동시켰을만큼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제국이 사라진 제2차 세계대전 시점에서도 동프로이센의 가치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고 독일은 이 지역 전선 안정화에 사활을 걸었다. 열악한 소련 땅과는 달리 이 지역은 독일 본토로 비행장이 콘크리트로 되어있어 날씨에 상관없는 출격이 가능했으며 도로와 철도 역시 상태가 좋아 병력의 빠른 재배치가 가능했다. 또한 전간기부터 건설된 요새가 지역 전체에 깔려있어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다. 그렇기에 1개 전선군이 단일 축선으로 이 요새 지대를 돌파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4]

4.2. 소련군의 동프로이센 진입

소련군은 공세 시작 며칠 전부터 수색부대들이 전방의 거점들을 제거하고 무력 정찰을 시도하면서 표병 관측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6일 오전부터 11근위군과 5군의 구역에서 대대적인 포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됐다. 주공인 11근위군을 막기 위해 26군단의 546, 561국민척탄병사단은 곧바로 밀려났지만 지연전을 펼치며 다음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11근위군 사령관 갈리츠키 상장은 1근위소총사단과 213전차여단을 추가로 투입했지만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공세 첫 날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11근위군은 10km의 전선에서 최대 10km까지 진격했지만 원하는 만큼의 돌파구를 형성하지 못했고 153전차여단은 큰 피해를 입었다. 우익의 5군 역시 비슷한 성과를 거뒀다.

그렇다고 독일군이 여유롭게 막은 건 아니었다. 17일에 4군은 103기갑여단을 중심으로 반격을 시도했으나 소련군에게 막혔고 소련군은 31군이 공세에 가세했다. 독일군은 급히 헤르만괴링 강하기갑군단을 증원했으나 18일이 되자 11근위군은 35km의 전선에서 최대 30km까지 돌파했고 남북의 31군과 5군도 20km 깊이까지 파고들면서 독일군 전방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됐다. 소련군은 동프로이센에 진입하면서 1단계 목표에 도달했다.

19일에 체르냐홉스키는 11근위군에 2근위전차군단을 투입했다.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굼비넨크라스나야강이었다. 11근위군은 북쪽부터 8, 16, 36근위소총군단을 배치했고 제일 짧은 전선을 담당한 중앙의 16근위소총군단은 2근위전차군단과 함께 주공을 담당했다. 독일 영토에 진입하면서 전투는 양 쪽 모두에게 힘든 싸움이 되었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적에 맞서 처절한 방어전을 이어나갔으며 소련 역시 요새를 중심으로 구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을 한겹한겹 벗겨나가면서 싸워야했다. 소련군은 소총 중대에 포병,공병,전차 및 자주포를 지원한 소규모 돌파 집단을 만들어서 적의 요새를 공격했고 전투는 마치 시가전처럼 이어졌다. 좌익과 우익의 31군과 5군이 거의 진격하지 못하면서 측면이 위험해졌지만 독일군 역시도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였다.

독일군의 반응도 신속했다. 독일군은 반격 그룹을 2개로 구성해서 1강하기갑사단과 102기갑여단은 네스테로프에 배치하여 남쪽의 8근위소총군단과 동쪽의 5군을 상대했으며 2강하기갑척탄병사단과 5기갑사단을 굼비넨에 배치하여 굼비넨 바로 남쪽까지 진격해 온 16근위소총군단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독일군 역시도 소련군이 네스테로프 후방으로 진격하여 포위될 위험이 있었으나 20일까지 8근위소총군단의 공세가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양 측 모두에게 측면이 지나치게 길어진 전선이 고착화됐다.

체르냐홉스키는 공세가 지지부진해지자 28군을 11근위군과 5군 사이의 네스테로프 방면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네스테로프 방면의 독일군은 이미 충분히 강력해진 상태였고 28군은 차후 공세를 위해 2개 군단을 예비로 보유하고 1개 군단을 먼저 투입시키면서 결과적으로 축차투입이 되면서 25일이 되어서야 네스테로프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사이 21일부터 1전차군단[5]을 증원받은 소련군이 공세를 재개했다. 전선군 우익에서 네스테로프를 북쪽으로 우회한 5군은 1전차군단을 앞세워 공격했고 28군도 도시를 남쪽에서 우회했다. 이 지역은 네스테로프-굼비넨-인스터부르크(Insterburg)-쾨니히스베르크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공세는 지지부진했고 28군을 투입했음에도 전선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중앙에서 2근위전차군단은 강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고 굼비넨 남쪽 3km까지 진출했으나 좌익의 31근위소총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2개 여단을 지원하면서 독일군은 도시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소련군이 다시 굼비넨으로 돌아왔을 때는 1강하기갑사단과 102기갑여단이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였다. 같은 날 남쪽에서는 11근위군 좌익의 36근위소총군단과 28군이 골다프(Gołdap) 방면으로 공세를 개시했으나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독일군은 두 번째 반격을 위해 총통척탄병여단[6]을 중부집단군에서 골다프로 배치했다.

4.3. 독일군의 반격

22일에 독일군은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북쪽에서는 50대의 전차를 보유한 5기갑사단이, 남쪽에서는 80대의 전차를 보유한 총통척탄병여단이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후방을 크게 위협하면서 11근위군의 절반과 2근위전차군단을 포위하려고 시도했으나 소련군은 예비군에 대전차포와 전차를 증원하여 독일군을 막아내면서 후방 차단에는 실패했다. 5기갑사단 동쪽에서는 70대의 전차를 보유한 102기갑여단이 공세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1,16근위소총사단은 북쪽에서 원래 위치까지 독일군을 밀어냈고 5,83근위소총사단은 남쪽에서 독일군을 밀어내면서 독일군은 큰 피해를 입고 반격에 실패했다.

후방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이에 돌출부 북쪽에 있던 2근위전차군단은 굼비넨 남쪽에서 11근위소총사단과 함께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7] 안그래도 요새 지대인데 시가전까지 겹치니 소련군은 진격이 극도로 어려웠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 끝에 도시는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36근위소총군단은 골다프를 공격했고 22일 밤에 도시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서 체르냐홉스키는 공세를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11근위군에게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갈리츠키는 독일군의 전력이 이미 다 소진됐으며 아직 공세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8] 또한 공세를 지속해야 적을 묶어둘 수 있어 측면에서 전선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했다. 2근위전차군단은 23일에 아직도 100대의 전차와 27대의 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그러나 체르냐홉스키는 11근위군은 방어로 전환하고 측면에서의 공세만 지속하기로 했다.

23일에 11근위군과 2근위전차군단은 방어로 전환했고 남쪽에서 31군은 골다프 서쪽으로 10km정도 진격하긴 했으나 곧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을 멈추고 방어로 전환했다. 북쪽에서는 5군과 28군이 네스테로프를 공격하여 3일간 치열한 전투 끝에 25일에 도시를 점령했다. 독일군도 계속해서 반격을 가해왔다. 남쪽에서 총통척탄병 여단의 남은 전력과 102기갑여단은 25일에 골다프를 탈환했고 북쪽에서도 505중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은 5기갑사단이 24일에 굼비넨을 탈환했다. 26일까지 소련군은 계속 독일군 방어선을 두들겼으나 기갑사단 5개를 포함해 16개 사단과 3개 전투단, 11개의 기갑여단 및 돌격포여단으로 증강된 독일군은 다 막아냈고 공세 능력이 소진된 소련군은 공세를 중단했다.[9] 공세 중단 이후에도 28일에 31군이 골다프를 점령했으나 북쪽에서 이동한 5기갑사단이 11월 3일에 다시 탈환했다.

5. 결과

굼비넨 작전에서 소련군은 큰 피해만 입고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며 쾨니히스베르크나 인스터부르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나 굼비넨-쾨니히스베르크 도로 중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했고 심지어 굼비넨도 독일군이 탈환하면서 소련군이 거둔 성과는 말 그대로 동프로이센 진입이 전부였다. 굼비넨 작전의 종료와 함께 카렐리야 작전을 시작으로 동부전선 전체로 확대된 소련군의 하계-춘계 공세가 마무리됐다. 이 이후로 동부 전선은 다음해 1월의 비스와-오데르 공세가 시작될 때까지 큰 변동 없이 고착화된다.

1944년 11월 시점에서 독일 북부집단군은 쿠를란트에 갇혀 제2 발트 전선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치루고 있었으며 중부집단군은 동프로이센에서 바르샤바를 거쳐 폴란드 중부까지 1 발트, 1,2,3 벨라루스 전선군을 상대하고 있었다.[10] 전선 중앙에서는 A 집단군이 폴란드 남부부터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산맥에 걸쳐 1,4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상대중이었고 남부에서는 슬로바키아 동부-부다페스트-세르비아에 걸쳐 남부 집단군이 2,3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상대중이었다.
[1] 독일 측 피해는 11~31일까지 4군의 인명피해 보고 기록이다.[2] 10월 13일 기준[3] 10월 1일 기준[4] 독소전쟁 기간동안 소련군은 전력이 아무리 압도적이라 해도 측면 우회나 다수의 축선을 통한 공세가 아닌 적의 방어구역에 정면으로 단일 축선으로 공세를 진행하여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다.[5] 1발트 전선군에서 이동[6] 기갑척탄병여단[7] 만약 독일군이 포위망을 닫았다면 포위되는 상황이었는데도 2근위전차군단장은 공세를 강행했다.[8] 실제로 이 시점에서 26군단은 예비 전력이 전혀 없어 다음 방어선으로 철수하겠다고 보고한 상태였다.[9] 스타브카는 23일에 독일군이 상당히 증강됐다고 판단했으나 갈리츠키의 판단대로 그 당시의 독일군은 증원할 여력이 없었고 26일에서야 유의미하게 증원된다.[10] 이 전선은 현대 폴란드-벨라루스 국경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