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레바논 전역 | ||
1941년 6월 26일 다마스쿠스 기차역 밖에 있는 자유 프랑스 체르케스 기병대 | ||
시기 | ||
1941년 6월 8일 ~ 1941년 7월 14일 | ||
장소 | ||
시리아 및 레바논 | ||
원인 | ||
크레타섬 전투 이후 추축국의 레반트 침공 가능성 |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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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결과 | ||
자유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차지함 | ||
피해 | 4,652명 사상 | 6,352명 사상 |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6월부터 7월까지 영국군이 비시 프랑스가 통치하던 시리아와 레바논을 침공한 작전으로 작전명은 엑스포터 작전(Operation Exporter)이다.2. 배경
1940년 6월 25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괴뢰정부인 비시 프랑스가 들어섰다. 한편 1941년 중순 경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리스를 침공한 뒤 점령하였다. 그 이후 독일이 크레타 전투에서 승리하자 영국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스령이던 시리아와 레바논을 이집트 공격을 위한 기지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즈음 이탈리아가 당시 본인의 식민지였던 리비아에서 이집트를 침공하자 이러한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만약 리비아와 레반트에서 동시에 추축국이 공격하면 영국은 꼼짝없이 이집트를 빼앗길 것이고 이는 수에즈 운하를 사용하지 못해 아시아에 위치한 영국 식민지와의 연결이 끊어진다는 것과 동일하였다.이러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와중에 파시즘에 영향을 받은 이라크 민족주의자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가 1941년 4월 1일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독일 항공기가 시리아에 위치한 비시 프랑스 비행장을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모술에 위치한 이라크 민족주의자에게 무기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결국 영국은 시리아와 레바논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3. 전개
1941년 6월 8일 영국군은 팔레스타인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개시하며 시리아 남부 국경을 넘어섰고, 자유 프랑스군도 병력 일부를 동원해 지원했다. 동시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전진했다. 1941년 6월 9일 레바논 남부로 진격하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리타니 강을 건너려고 시도했다. 리처드 페더 중령이 지휘하는 영국 제11스코틀랜드 특공대가 강 어귀 근처의 다리를 점령하기 위해 야간 기습 상륙을 시도했지만, 상륙 예정지 해변의 거친 파도로 지연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리타니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였고 이에 비시 프랑스군은 장갑차와 구축함을 동원해 이들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시돈을 향해 진군하였다. 시돈은 베이루트 남쪽 약 40km에 위치한 전략적 해안 도시로, 해상 보급과 연안 교통에 중요한 거점이었다. 3일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시돈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시돈을 점령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베이루트와 다마스쿠스를 잇는 내륙 도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메르자윤을 향해 진군하였다. 6월 11일 작전 초기에는 비시 프랑스군의 저항이 약해, 도시 점령에 성공하였으나 6월 15일 비시 프랑스군은 기갑부대와 중포병을 동원해 강력한 반격을 개시해 메르자윤을 다시 빼앗겼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병력을 재집결해 측면 기동 및 포병 지원 강화하였고 여러 차례 공격 끝에 6월 24일 경 메르자윤을 완전히 재탈환하였다.한편 팔레스타인에서 북쪽으로 진군하던 영국군은 쿠네이트라와 다라를 점령한 뒤 다마스쿠스를 향해 곧장 진격하려고 했다. 그러자 비시 프랑스군은 다마스쿠스 남쪽에 위치한 키수에에서 영국군을 막으려고 했다. 6월 15일 영국군 제5인도여단과 자유 프랑스군 일부가 키수에 남쪽에서 접근하여 교전 개시하였다. 비시 프랑스군은 고지대를 중심으로 방어하며 강력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군은 포병 화력과 항공 지원을 동원해 키수에 방어선에 대한 집중 포격 실시하였고, 인도 보병 부대가 측면 우회 공격을 시도하며 고지를 향해 돌진하자 이틀 뒤인 6월 17일 비시 프랑스군은 키수에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키수에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곧장 다마스쿠스를 향해 북상하였다. 연합군은 다마스쿠스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 남쪽에서 진입을 시작하였다. 시가전 형태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영국군은 시청, 병참 창고, 주요 도로 등 전략 거점을 하나씩 확보하였다. 비시 프랑스군은 병력 부족과 보급 차단으로 인해 방어선 유지 불가하였으며 결국 6월 21일 후퇴를 시작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확보하였고 작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영국군은 곧장 북상해 시리아 중부 사막에 위치한 도시인 팔미라를 향해 진군하였다. 6월 21일 영국군 사막기동부대가 팔미라 주변 사막 지역을 통한 기동 작전을 개시하였다. 비시 프랑스군은 소수 병력으로 요새화된 방어를 시도했으나, 보급과 증원 차단으로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7월 3일 영국군에 항복하였다. 이 즈음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베이루트 남쪽 약 20km 지점에 있는 해안 도시인 다무르를 점령해 베이루트로 가는 길이 열리자 비시 프랑스의 앙리 덴츠 장군은 더 이상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영국군에 휴전을 제의하였다. 7월 10일, 호주 제21여단이 베이루트에 입성하기 직전 아크레 외곽에 위치한 시드니 스미스 병영의 장교 식당에서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 이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앙리 덴츠 장군은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과 자유 프랑스군에 양도하는데 서명하였다.
4. 결말
시리아-레바논 전역에 승리한 영국은 수에즈 운하, 중동 유전지대, 팔레스타인 영토 등 영국에 핵심적인 전략 지역을 보호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자유 프랑스가 처음으로 실질적으로 영토를 확보함으로서 중동에 자유 프랑스군 재편 및 훈련 거점이 마련되었다. 연합군이 전역 종료 후 두 나라에 독립을 약속했으나, 실질적 독립은 전후에야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자유 프랑스와 현지 민족주의자 간의 긴장 고조되었고 이는 레반트 위기로 이어졌다.[1] 상륙을 지원한 리처드 페더 중령은 상륙 작전 중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