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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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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봉기
파일:체코 국기.svg 체코 저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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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
러시아어: Днепровско-Карпат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Dnepr-Karpaten-Operation
영어: Dnieper–Carpathian offensive
제2차 세계 대전동부전선의 일부
파일: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jpg
우크라이나 SSR로 진격하는 소련군
날짜
1943년 12월 24일 ~ 1944년 4월 17일
장소
소련 우크라이나 SSR 서부
루마니아 왕국 북부
폴란드 인민공화국 동부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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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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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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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왕국
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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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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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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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군부사령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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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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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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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투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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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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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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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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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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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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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톨부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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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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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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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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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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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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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우크라이나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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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쇠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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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크라이나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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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레 두미트레스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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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전력 병사 2,406,100명
전차/자주포 1,900대
포 31,500문
항공기 약 2,37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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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 953,000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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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차/자주포 2,20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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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 21,80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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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기 1,56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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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병사 50,000명
피해 규모 전사/실종 270,198명
부상 839,330명
전차 4,666대
대포 7,532문
항공기 67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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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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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전사 37,634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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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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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실종/포로 46,758명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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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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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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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명
]] 부상 160,795명
결과
추축군의 패배
소련의 서부 우크라이나 탈환
영향
독일 국방군독소전쟁 개전 당시 국경까지 밀려남
소련의 루마니아 진입
소련이 폴란드 진입

1. 개요2. 1943년 겨울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2.2. 독일군
3. 전투 서열
3.1. 소련군
3.1.1. 1944년 1월 1일3.1.2. 1944년 4월 1일
3.2. 독일군
3.2.1. 1944년 1월 1일3.2.2. 1944년 4월 15일
4. 우크라이나 우안 해방
4.1.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공세 : 히틀러와 만슈타인의 대립4.2. 독일군의 반격4.3. 키로보그라드 공세4.4.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4.5. 소련군의 폴란드 진입4.6. 니코폴 : 전략 광물자원 상실
5. 카르파티아와 루마니아를 향해
5.1.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5.2. 독일 남부 집단군의 분할5.3. 루마니아까지 밀려난 독일군5.4. 폴란드 공세
6. 우크라이나 상공에서의 전투7. 결과8. 여파

[clearfix]

1. 개요

드네프르 강 전투의 결과로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동안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이어서 드네프르 서안,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지속하게 된다. 그 결과,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일부 구역에서는 독소전쟁 개시선보다 서쪽으로 밀려났으며 소련군은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또한, 동시기 소련군은 북쪽과 남쪽에서 두 개의 공세를 추가로 진행했고 레닌그라드와 크림반도에서도 독일군을 몰아냈다.

2. 1943년 겨울의 남부 전선

2.1. 소련군

소련군은 지속된 공세로 지친 상태에서 조금의 시간을 들여 부대를 재편했으며 다시 공세를 펼칠 전력을 확보했다. 독일군의 반격으로 지토미르와 크리보이로그에서 약간 밀려났으나 이미 수백km를 진군한 상태였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사단은 5개월 전 반격을 시작할 때보다 1/3로 줄어있었고 소련군조차도 인력을 계속 보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물자가 풍부한 상태였고[4] 독일군의 인력 부족이 훨씬 심각했기에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2.2. 독일군

전 전선에서 밀리고 있던 독일군은 재편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전선을 제대로 구축할 수가 없었다. 전선에 모든 병력을 부어도 모자라지만 소련군의 공세가 어느 곳에서도 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각 제대는 예비대를 확보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전방 사단들은 대부분 연대급으로 전력이 감소한 상태였고 심한 경우 대대급인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직전 전투의 마지막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힘이 또다시 빠진 반면 소련군은 부대를 재편할 시간을 벌 수 있었기에 더 암울한 상황이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5]

3.1.1. 1944년 1월 1일

3.1.2. 1944년 4월 1일

3.2. 독일군

3.2.1. 1944년 1월 1일

3.2.2. 1944년 4월 15일

4. 우크라이나 우안 해방[20]

소련군은 공세의 첫 단계로 드네프르 강 서안, 우크라이나 우안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순차적으로 5개의 공세를 진행했으며 대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되었다. 순서대로 보면 키예프에서 진격하는 지토미르- 베르디체프 공세(Житомирско-Бердичев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키로보그라드에서 적을 포위하고 도시를 점령하려는 키로보그라드 공세(Кировоград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체르카시에서 적을 포위하려는 코르순-셰브첸코프스키 공세 (Корсунь-Шевченков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남부 집단군과 중부 집단군 사이의 공백을 파고드는 로브노-루츠크 공세(Ровенско-Луц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적의 자원지대를 빼앗으려는 니코폴-크리보이로그 공세(Никопольско-Криворож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로 이어지게 된다.

소련군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땅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남부집단군 측면을 우회하여 남부 집단군과 A 집단군 전체를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만슈타인의 남부 집단군은 4기갑군, 8군, 1기갑군 휘하 43개 보병사단과 15개 기갑사단, 7개 기갑척탄병 사단을 보유중이었으며 이는 독일군이 보유한 기갑 전력 중 절반 이상이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21] 클라이스트의 A 집단군은 6군, 루마니아 3군, 17군 휘하 8개 독일사단과 10개 루마니아 사단을 보유중이었다.

4.1.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공세 : 히틀러와 만슈타인의 대립

제2차 키예프 전투가 끝난 직후, 독일의 반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소련군은 다시 지토미르를 되찾기 위한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공세를 준비했다. 독일군은 간신히 전선을 재구축했으나 키예프를 빼앗기고 완전히 밀려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며 반격 과정에서 예비대를 소모하는 바람에 전선은 더욱 빈약해진 상태였다.
파일:키예프와 자포로제.jpg
▲ 지도 좌측 하단, 제2차 키예프 전투의 결과로 형성된 전선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부터 13군[22], 60군, 4근위전차군단, 5근위전차군단, 1근위군, 3근위전차군, 18군, 38군, 1전차군, 40군, 27군을 배치한 상태였으며 2개 전차군과 7개 제병협동군의 63개 소총사단, 3개 기병사단, 6개 전차군단 및 2개 기계화군단 휘하 831,000명의 병력을 보유 중이었다. 이 중 작전에 동원된 것은 18군, 3근위전차군, 두 개의 전차군단과 38군, 1전차군 휘하 452,000명의 병력과 1,1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5,830문의 화포[23], 그리고 2항공군 휘하 700기의 항공기였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라우스의 독일 4기갑군은 북쪽부터 59군단, 48기갑군단, 13군단, 42군단, 7군단, 24기갑군단을 배치했으며 6개 군단 휘하 300,000만의 병력과 600대의 전차 및 자주포, 3,500문의 포와 4항공함대의 항공기 500기를 보유 중이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서쪽으로는 13군과 60군이 3개 전차군단의 지원과 함께 코로스텐을 거쳐 폴란드 국경으로, 남서쪽으로는 1근위군, 18군, 38군과 2개 전차군이 파스토프를 거쳐 지토미르-베르디체프-카자틴 축선의 적을 섬멸하고 즈메린카-빈니차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전선군 좌익에서는 27군과 40군이 남쪽 코르순 방면으로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다. 전략적으로는 남쪽에서 1차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만나 적을 포위섬멸하며[24] 궁극적으로는 남부집단군 전체를 후방에서 포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파일: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고속도로를 지나는 소련군.jpg
파일:베르디체프에 진입하는 소련군.jpg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간 고속도로를 건너는 소련군 베르디체프 외곽에 진입하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병사들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width=48.25%>
파일:베스페 자주포.jpg
||
파일:베르디체프에 매복중인 소련전차.jpg
||
지토미르 서쪽에서 파괴된 베스페 자주포 베르디체프 부근에서 매복중인 소련군의 T-34-76 전차

12월 24일,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1전차군과 1근위군은 14개 소총사단과 4개 전차/기계화 군단을 앞세워 진격했으며 소련군은 1km당 20대의 전차와 200문에 달하는 포를 투입했다. 25일, 소련군은 악화된 기상에도 불구하고 20km나 전진했고 브루실로프(Брусилов)를 탈환했다. 3근위전차군과 4근위전차군단은 라도미쉴(Радомышль)에서 지토미르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고 1전차군은 브루실로프에서 카자틴(Казатин)으로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 26일 정오, 북쪽의 60군은 4근위전차군단의 지원과 함께 조공으로 적의 측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 날, 1근위군은 라도미쉴을 탈환했고 29일, 13군이 코로스텐(Коростень)을 탈환했다.

만슈타인은 우선 라우스에게 48기갑군단을 후방으로 뺀 다음 반격을 위해 준비시킬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전선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예비대라도 확보할 목적이었다. 또한 OKH에 최소 6개 사단이 추가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 우선 집단군 우익의 전선을 단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7일에 히틀러는 일부 교두보를 포기하는 것은 허가했으나 단편적인 해결책이었으며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버렸다. 히틀러는 A 집단군에서 1개 사단을 이동시키도록 했으나 17군의 크림 반도 포기는 거부했으며 6군의 니코폴 포기도 거부했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이 1기갑군이 이동한다면 크림 반도가 위험해질 것이며 만슈타인이 크림 반도 포기에 대한 정치적인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전선에만 신경쓴다고 비난했다. 29일에 히틀러는 북부집단군을 판터 라인으로 퇴각시켜 12개 사단을 확보하는 것에 대해 자이츨러와 논의했다. 히틀러 입장에서도 핀란드보다는 크림, 니코폴, 크리보이로그가 훨씬 중요했다. 그러나 퀴흘러는 몇 년간 오라니엔바움 교두보와 레닌그라드, 볼호프 강을 따라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어있다면서 거부했다. 이후 히틀러도 마음을 바꿨다.[25]

만슈타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히틀러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4기갑군 제일 좌익에 있던 59군단이 코로스텐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바로 남쪽의 13군단과 55km에 달하는 간격이 발생했다. 더 뒤로 밀리면 리보프-테르노필-프로스쿠로브-즈메린카로 이어지는 철도가 장악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 철도는 폴란드에서 남부 집단군으로 향하는 마지막 남은 주요 철도로 이 철도가 끊기면 남부 집단군의 보급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우회하여 루마니아를 거쳐야 할 상황이었다. 4기갑군 우익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13군단과 42군단은 남서쪽으로 밀려나 베르디체프-카자틴 축선을 간신히 방어하고 있었으나 파스토프-카네프 축선을 지키고 있는 7군단, 24기갑군단과 70km 간격이 벌어진 상태였다. 4기갑군은 사실상 3개의 그룹으로 나눠져 버렸으며 라우스는 이 간격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각 그룹이라도 전선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보고했다. 후방으로 빠진 48기갑군단은 적의 선봉 부대만 간신히 저지할 수 있었을 뿐 근본적으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이제 누가 더 전력을 빨리 집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간 싸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련군이 돌파구를 활용하지 않고 각각의 그룹 전면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26]

전선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허가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만슈타인은 1월 1일에 1기갑군 사령부를 크리보이로그 지역에서 우만으로 재배치하고 8군에서 3기갑군단 사령부와 2개 기갑사단을 차출하고 거기에 A 집단군에서 1개 기갑척탄병사단과 1개 엽병사단을 차출해 추가로 배속시켰다.[27] 또한 남쪽으로 밀려나서 4기갑군과 너무 멀리 떨어진 7군단과 42군단[28]도 1기갑군에 배속시켜 4기갑군의 부담을 줄였다. 4기갑군에도 46기갑군단 사령부와 3개 사단을 증원했다.[29]

독일이 간신히 모은 전력으로 반격을 가해오자 바투틴은 지토미르를 우회해버렸다. 지토미르 북서쪽에서는 60군과 4근위전차군단이, 동쪽에서는 1근위군이, 남동쪽에서는 18군과 3근위전차군이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간 도로를 차단하려 공격해왔다. 포위당할 위기에 처한 독일군은 도시에서 후퇴했고 지토미르는 31일에 소련군에게 넘어갔다. 1월 5일에는 독일 2개 기갑사단과 5일간의 격전 끝에 1전차군과 18군이 베르디체프를 탈환했다. 북서쪽에서 13군과 60군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방이 차단될 위기에 처한 독일군은 예비대를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했고 강력한 반격을 계속해서 가했다. 13일부터 13군과 60군은 방어로 전환했다. 남쪽에서 27군은 독일군을 계속 밀어냈고 부크린 교두보와 전선을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4.2. 독일군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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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빈니차 부근 독일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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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빈니차에서 티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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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니차 부근의 1SS기갑사단 "LSSAH" 병사들 빈니차 부근 LSSAH 사단 소속 티거 전차

만슈타인은 서쪽으로 진군하는 군대와 남쪽으로 진군하는 군대를 다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남쪽에 집중했다. 서쪽으로 진격하던 소련군의 진격이 조금씩 느려지자 1월 3일에 48기갑군단은 59군단의 우익으로 이동해 13군단과의 간격을 틀어막았고 새로 배치된 46기갑군단이 1전차군의 서쪽에 배치됐다. 남쪽에서 강력한 타격 집단이 될 3기갑군단의 4개 사단은 좀 늦어졌지만 빈니차 동쪽에서 집결중이었다. 이 두 군단 사이는 여전히 비어있는 상태로 바투틴은 이곳으로의 전과 확대를 위해 6일부터 주력을 1전차군과 40군으로 설정하고 진격 방향을 남쪽으로 틀었다. 만슈타인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여전히 북쪽에서 로브노셰페토프카로 진격하거나 남쪽에서 즈메린카로 진격할지 선택할 수 있으나 후자가 가능성이 더 높고 남부 집단군에게 훨씬 위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만슈타인의 계획은 우선 1단계로 3기갑군단이 북쪽으로 진격해 7군단과의 전선을 연결한 뒤 7군단과 42군단을 남쪽으로 후퇴시켜 전선을 단축시킨 뒤 일주일 이내로 서쪽에서 46기갑군단의 전력이 집결하면 2단계로 3기갑군단이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46기갑군단과 함께 1전차군의 측면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히틀러는 7일에 이 계획을 승인했으나 42군단과 7군단을 후퇴시키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이 때문에 이후 42군단은 동쪽, 북쪽, 서쪽의 3면에서 소련군에게 둘러쌓인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30] 1전차군은 계속해서 46기갑군단과 3기갑군단 사이를, 40군은 3기갑군단과 7군단 사이를 파고들었다.

1월 10일, 소련군이 빈니차와 우만까지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3개 기갑사단과 2개 돌격포 대대, 506중전차대대[31]를 동원해 강력한 반격을 가했다. 3기갑군단은 좌익에 기갑수색대대만 남기고 17기갑사단을 우익으로 이동시켰고 후방에 16기갑사단이 있었다. 나머지 2개 사단은 키로보그라드에서 진행되고 있던 소련군의 공세 때문에 아직 오지 못하고 있었다. 2개 기갑사단이 공세를 시작하자 7군단은 좌익으로 무리하게 담당구역을 늘리면서까지 공세에 도움을 주었다. 14일에 소련은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로 전환했다. 15일까지 3기갑군단은 7군단과의 연결에 성공했으며 46기갑군단과의 2단계 공세를 위해 북쪽으로 선회했다. 이어서 독일군은 더 큰 반격을 준비했다. 독일군은 1월 말까지 5개 기갑사단, 5개 보병사단을 집결시켰다. 서쪽의 4기갑군은 48기갑군단 휘하 1기갑사단과 1SS기갑사단을 보유중이었고 남쪽에 새로 배치된 1기갑군은 3기갑군단 휘하에 6, 16, 17 기갑사단과 506중전차대대를 보유중이었다.

1월 24일에 드디어 전력을 집결시킨 독일군은 바투틴 작전을 시작했다. 18포병사단의 지원과 함께 1SS기갑사단 "LSSAH"를 앞세운 46기갑군단이 1전차군 서쪽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25일에는 방향을 동쪽으로 바꾼 3기갑군단이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선 것은 동쪽에서 시작된 소련군의 코르순-셰브첸코프스키 공세였다.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공세는 26일에 40군 좌익의 6전차군이 1기갑군의 7군단과 8군의 42군단 사이를 돌파하면서 시작됐다. 8군은 당연히 막을 힘이 없었고 서쪽에서 공세를 진행중이던 3기갑군단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28일에 포위망이 완성되면서 42군단과 11군단이 갇혀버렸다. 그러자 독일군은 계획을 축소해 포위망을 닫았고 1전차군의 선봉 부대가 괴멸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공세 역량이 고갈되면서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포위망이 정리되기도 전에 3기갑군단은 코르순 포위망으로 이동했으며 독일군의 보고에 따르면 반격 기간 동안 소련군의 전차/자주포를 700대 파괴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격퇴당해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로브노빈니차까지 접근했으며 지토미르주키예프주를 완전히 해방하고 로브노주빈니차주까지 진입했다. 그 결과, 드네프르강 중류의 독일군은 동쪽의 소련군 뿐 아니라 북쪽과 북서쪽에서 밀려오는 소련군도 방어해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독일군에게 다행인 것은 대규모 반격 작전으로 연속된 전선을 다시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공세 중 전사 및 실종 23,165명을 포함해 100,018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4.3. 키로보그라드 공세

파일:체르카시와 키로보그라드.jpg
▲ 지도 우측 상단, 키로보그라드를 포위하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탈출하여 반격하는 독일 제8군

지토미르와 베르디체프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사이에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남동쪽에서 키로보그라드 공세(Kirovograd Offensive)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전 공세에서 키로보그라드 근처까지 진출에 있었던 소련군은 키로보그라드의 독일 기갑전력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원래 드네프르 강 하류의 3,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를 도와 남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으나 스타브카는 지토미르 공세가 성공하면서 계획을 수정했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목표는 이제 키로보그라드를 거쳐 8군을 포위하고 이어서 남쪽으로 진격해 6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12월 중순에 소련군이 공세를 중단한 시점에서 전선은 체르카시-즈메린카-알렉산드리아에 걸쳐 있었고 1월 시점에서는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남쪽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7개 제병협동군, 1개 전차군, 8개 기동군단[32] 휘하 550,000명의 병력과 7,130문의 포, 500대의 전차[33]와 제5항공군 휘하 5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고 이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뵐러의 제8군은 420,000명의 병력과 5,100문의 포, 500대의 전차와 제4항공함대 휘하 500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코네프는 북쪽부터 52군, 4근위군, 53군, 5근위군, 5근위전차군, 7근위군, 57군, 37군을 배치했고 뵐러는 북쪽부터 11군단, 47기갑군단, 3기갑군단을 배치했다.

소련군의 전략적 목표는 8군의 포위섬멸이었다. 이를 위해 위 지도의 하얀색 화살표를 따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우만으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남부크 강으로 진군하여 페르보마이스크에 교두보를 확보한 뒤 적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34] 여기서 1차 목표가 키로보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섬멸하면서 남부크 강으로 이어지는 적 전선에 구멍을 뚫으려는 것이었다. 코네프는 이를 위해 도시 북동쪽으로 53군과 5근위군, 7근위기계화군단을, 남동쪽으로 5근위전차군과 7근위군을 투입했다. 4근위군과 52군은 우익에서 코르순 방면으로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다. 코네프는 추가로 1기계화군단, 8기계화군단, 5근위기병군단[35], 20전차군단을 보유중이었다.

1월 5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북쪽에서는 공세가 순조로웠지만 남쪽은 약간 달랐다. 남쪽으로 밀려오는 7 근위군을 막아선 것은 47기갑군단이었다. 11기갑사단과 14기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사단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이들은 포위를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코네프는 이 사단들을 어떻게든 포위하려 했다. 만슈타인은 빈니차로 가야 할 3기갑군단의 2개 기갑사단과 6군 좌익의 52군단을 8군에 증원했다. 소련군에게는 도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선을 담당하는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36] 압도적인 전력 앞에 독일군은 밀려났고 7일, 도시가 포위되면서 4개 사단[37]이 갇혀버렸다.

3기갑사단장 프리츠 바이엘라인 소장[38]은 기갑전력이 방어를 위해 묶여있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활약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포위망을 뚫기로 결심했다. 다른 사단장들은 히틀러의 사수 명령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바이엘라인의 의지는 강력했고 마침, 상부와 통신도 끊겨 명령을 받을 수 없다는 핑계도 있었다. 8일 새벽, 독일군은 북쪽에서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했고 바이엘라인은 곧장 방향을 돌려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적의 뒤를 공격했다. 독일군은 2개 기계화군단을 분쇄하고 도시에 있는 아군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같은 시각, 보만 장군의 47기갑군단 사령부는 적의 습격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통신장비를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만 장군은 주변 전화교환소로 가서 지휘하면서 키로보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다. 24시간 뒤, 히틀러로부터 후퇴 허가가 떨어졌고 독일군은 탈출하기 시작했다. 8일, 키로보그라드는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독일군은 10일까지 도시에서 서쪽으로 후퇴했다.[39]

코네프는 즉시 추격을 명했지만 남쪽에서 올라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과 3SS기갑사단 "토텐코프", 그리고 루델을 필두로 한 공군의 공격 때문에 진격이 멈춰버렸고 16일, 공세를 중단했다. 소련군이 키로보그라드를 점령하면서 코르순의 독일군은 3면이 소련에게 둘러쌓인 상황이 되어버렸고 소련군은 남부크강으로의 진격을 중단하고 코르순에서 작은 포위망을 만드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2주간 최고사령부 통신문을 장식하던 키로보그라드는 사라지고 갑자기 체르카시 남서쪽이 등장했다.

4.4.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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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부터 2월 17일까지 이어진 코르순-셰브첸코프스키 공세 (Korsun–Shevchenkovsky Offensive)에서 제1,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코르순에서 군단규모의 적을 포위하는데 성공했고[40] 비록 이번에도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독일군은 중장비를 거의 다 잃었을 뿐 아니라 기갑예비대가 또다시 소모되어버렸다. 소련군은 공세 기간 동안 전사 및 실종 24,248명을 포함해 80,188명의 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적을 포위한 뒤 공백이 생긴 전선으로 곧장 진격하지 않았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부와 스타브카에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부전선에서 소련군은 지속적으로 적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돌파한 전선 후방으로 파고들고 있던 점을 볼 때 아이러니하다. 이는 소련군이 아직도 기갑전력의 운용에서 독일군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독일군 사령부가 제4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아크티르카에 생긴 전선의 공백과 전선이 아예 무너져버린 드네프르 강으로의 후퇴 당시 기갑전력을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사령관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독일군이 괴멸할 수도 있었다는 평가를 내린 것으로 확인 가능하다. 소련군에게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은 남부 집단군을 제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소규모 포위전에 불과했고 이는 소련군도 알고 있었다. 토성 작전[41]에서 소토성 작전[42]으로 계획을 바꿀 수 밖에 없던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와는 달리 소련군의 전력도 충분한 상태였다. 어찌 되었든 키로보그라드 전투가 도시 자체보다 그 안에 갇힌 독일군 섬멸이 더 중요했던 것처럼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도 그 안에 갇힌 독일군보다 거대한 포위망에 가둬버릴 수 있는 8군과 6군이 더 중요했으나 소련군은 이를 놓치게 된다.

4.5. 소련군의 폴란드 진입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공세가 한창 진행중이던 1월 6일, 만슈타인은 로브노를 향한 북쪽 공세와 즈메린카를 향한 남쪽 공세 중에 남쪽을 막기로 선택했다. 그 여파로 북쪽 넓은 구역을 고립된 59군단 혼자 담당하고 있었다. 노보그라드-볼린스키가 소련군에게 넘어가면서 소련군은 각각 루브노와 셰페토프카로 향하는 도로 2개를 확보했다. 59군단은 셰페토프카의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남서쪽으로 후퇴했고 13군단이 남쪽에서 루브노로 이동했다. 소련군은 13군이 로브노로, 60군이 셰페토프카로 진격하고 있었다. 13군단은 습지대 바로 남쪽을 담당하면서 북쪽의 454보안사단과 C분견군단을 배속받았으나 21일에 파르티잔의 도움을 받아 습지대로 진격하는 소련 기병대를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43]
파일:로브노-루츠크 공세.jpg
지토미르 공세 이후 재편중이던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우익은 남부 집단군 좌익으로 로브노-루츠크 공세(Ровенско-Луц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를 개시했다.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과 동시에 진행됐으며 목표는 로브노와 루츠크였다. 소련군은 작전 개시 시점에서 13개 소총사단과 2개 기병군단 휘하 190,000명의 병력과 2,800문의 포, 14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했고 독일군은 3개 군단[44] 휘하 8개 보병사단[45]과, 4개 기갑사단[46], 2개의 사단급 경찰부대[47]를 보유중이었다. 독일군은 병력 186,000명, 포 900문, 전차 및 자주포 240대가 있었다.

전력은 크게 밀리지 않았으나 이곳은 습지대였고 전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48] 따라서 거점을 활용한 수비를 해야했고 예비대의 투입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파르티잔의 도움[49]을 받고 공세 지점을 선택할 수 있는 소련군이 훨씬 유리했다. 특히, 2개 기병군단은 이런 지형에서 매우 유용했다.

1월 27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휘하 13군[50]과 60군[51]이 폴란드 동부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주력인 13군은 우익에 77소총군단, 좌익에 76소총군단을 배치했으며 60군은 우익에 23소총군단을 배치하여 공격을 보조했으며 좌익에는 15, 30소총군단과 4근위전차군단, 25전차군단을 배치하여 적의 강력한 기갑전력을 묶어두려했다. 60군은 첫 날 적 전선을 15km나 돌파해 나아갔다. 만슈타인은 가장 북쪽 59군단을 서쪽이 아닌 남서쪽으로 후퇴시켜 셰페토프카의 철도를 보호하고 13군단을 로브노로 이동시켰다.

로브노 근처에 다다르자 바투틴은 1근위기병군단과 6근위기병군단을 13군 남쪽으로 돌려 도시 북쪽에서 공세를 하도록 지시했다. 두 기병군단은 이틀간 70km를 진군했고 1월 31일, 로브노-루츠크 도로를 차단했다. 2월 2일, 소련군은 로브노를 탈환하고 다음 날 루츠크를 탈환했다. 13군단은 북쪽으로 우회당하면서 포위될 위험이 생기자 두브노로 후퇴했다. 9일이 되자 소련군은 두브노에 다다랐다. 만슈타인은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이 없었다. 더 밀리면 남부집단군으로 향하는 철도가 완전 차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슈타인은 48기갑군단을 13군단 북쪽의 루츠크로 이동시키고 13군단에 340보병사단을 증원했다. 소련군은 2월 10일, 다시 공세에 나섰고 11일, 셰페토프카를 탈환하며 공세를 종료했다.

22일부터는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유일한 예비였던 7기갑사단과 함께 48기갑군단은 소련군을 밀어내고 27일까지 코벨-루츠크-두브노-셰페토프가 라인에 전선을 구축했다. 정말 오랜만에 집단군 좌익에서 적을 밀어내고 중부 집단군과의 간격을 좁혔지만 남쪽의 군단들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13군단과 59군단 사이에는 여전히 50km에 달하는 간격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2월 28일, 바투틴이 우크라이나 파르티잔에게 습격당해 부상을 당하면서 주코프가 전선군을 직접 지휘하게 된다.[52]

로브노-루츠크 공세에서 소련군은 이제 폴란드 영내로 진입했고 또다시 남부집단군 후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제 로브노주를 넘어 볼린주도 거의 소련군의 손에 들어왔다. 집단군 사이의 이 공백 지역은 만슈타인이 크림반도에서 17군을 빼내어 투입할 것을 주장했으나 무시당했고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에서 독일군이 포위당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 공세는 독일군이 체르카시로 추가 투입되는 것을 막고 되려 주변 독일군 10개 사단을 추가로 끌어들였다. 소련군의 공세중에는 드물게도 거의 비슷한 전력으로 공격했지만 습지에서의 기병 활용을 통한 기동, 파르티잔의 활약 덕분에 적의 정찰을 차단하고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4.6. 니코폴 : 전략 광물자원 상실

파일:니코폴 공세.jpg
▲ 니코폴에서 공세를 가하는 제3,4 우크라이나 전선군

북쪽에서 연일 격전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국방군최고사령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니코폴이었다. 이 근방의 광산은 독일의 무기 생산에 필요한 원료 공급 중 30%에 달하는 비중을 갖고 있었다. 이곳은 1943년 10월부터 40기갑군단 사령관이 된 페르디난트 쇠르너 산악대장이 주변 부대들을 흡수해 니코폴 전투단[53]을 편성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이전 공세의 결과로 소련군에게 둘러쌓여 반원형이 된 전선은 남서쪽에서만 아군과 연결되어 있었다. 1월 내내 소련군은 지속적으로 니코폴을 압박했지만 독일군은 24기갑사단의 활약으로 적을 계속 격퇴하고 있었다. 1월 초에 1기갑군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6군이 1기갑군 담당 구역을 인수한 상태였다.

이에 소련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준비한다. 니코폴-크리보이로그 공세(Никопольско-Криворож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의 주력인 말리놉스키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부터 37군[54], 46군, 8근위군, 6군 그리고 후방에 17항공군과 4근위기계화군단[55]을 보유중이었고 톨부힌의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부터 3근위군, 5충격군[56], 28군, 2근위군 그리고 후방에 8항공군, 2근위기계화군단을 보유중이었다. 이에 맞선 독일 6군은 6개 군단[57] 휘하 17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 1개의 기갑척탄병사단, 1개의 전차대대와 8개의 돌격포대대를 보유중이었고 그 중에 니코폴에 배치된 건 8개 보병사단과 3개 돌격포대대였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전선에 19개의 소총사단과 1개 전차군단을 배치시키고 있었고 전면의 독일군은 북쪽부터 57기갑군단, 30군단, 17군단을 배치시킨 상태였다.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전선에 22개 소총사단과 3개 기병사단, 2개 기계화군단을 배치시켰고 독일군은 니코폴 전투단의 17군단 우익과 4군단, 29군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6군은 후방에 추가로 40기갑군단을 예비로 보유중이었다. 드네프르 강 끝자락에서는 A 집단군의 44군단과 루마니아 3군이 28군, 2근위군과 대치중이었다.

이 두 전선군을 현장에서 조율하고 있던 바실렙스키 원수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로 니코폴이 돌출부가 되자 독일군이 퇴각할 것으로 판단하고 12월에서 1월사이 남부크 강으로 진군할 것을 목표로 했으나 적이 후퇴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하자 새로 공세를 준비한다. 소련군은 공세 직전까지 계속 산발적인 공격을 하면서 북쪽이 주공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소련군은 두 전선군 합쳐 707,000명의 병력과 7,800문의 포, 238대의 전차/자주포, 1,333대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고 독일 6군은 540,000명의 병력과 2,416문의 포, 327대의 전차/자주포, 4항공함대 1항공군단 휘하 7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1월 10일, 말리놉스키는 니코폴 북서쪽에서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이 니코폴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아포스톨로보까지는 남쪽으로 약 40km였다. 8근위군은 9개 소총사단이 80대의 전차를 앞세워 7km정도의 전선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2개 기갑사단이 곧장 막아섰고 전차의 2/3가 파괴됐다. 5km 진격한 소련군은 다시 밀려나 실질적으로 진격한 거리는 1.5km에 불과했다. 3일간 소련군이 공세를 이어나갔지만 보병만으로는 독일군을 뚫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소련군의 압력이 심각해지자 훌리트는 니코폴 남쪽 교두보에서 24기갑사단을 차출했다. 그러자 이번엔 톨부힌이 교두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훌리트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했다. 북쪽을 막자니 니코폴 교두보는 드네프르 강 동쪽에 남은 독일군의 유일한 교두보였고 여기를 택하면 북쪽의 소련군이 6군의 후방을 차단할 수가 있었다. 훌리트는 교두보를 택했고 소련군은 양 쪽 모두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6일에 공세를 중단했다.

16일부터 소강상태가 이어졌지만 소련군은 강해지고 독일군은 약해졌다. 바실렙스키는 니코폴 북쪽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근위기계화군단과 2개 근위소총군단을 이동시켜 전력을 증강했고 톨부힌은 이러한 전력의 이동을 숨기기 위해 크림반도로의 교통량이 늘어난 것처럼 위장했다. 훌리트는 전선에 배치 되어 있던 4개 기갑사단을 예비로 확보한 다음 북쪽에 배치했다. 그러나 24일부터 1개 보병사단이 17군으로, 2개 보병사단이 8군으로 이동했으며 특히 가장 강력한 전력이던 24기갑사단[58]도 8군으로 이동했다. 이제 예비로 보유할 수 있는 전력은 9기갑사단뿐이었고[59] 독일군은 평균 인력이 1개 연대가 안 되는 20개 사단으로 소련군의 51개 사단과 2개 기계화군단, 2개 전차군단을 막아야했다.

1월 30일, 소련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엄청난 포격[60]과 함께 8근위군과 46군이 니코폴 방면에 맹렬한 공격을 가했고 6군은 측면에서 니코폴로 조공을, 37군은 크리보이로그로 조공을 펼쳤다. 이번에는 소련군이 보병을 앞세워 공세를 시작했기 때문에 프레터피코의 30군단은 8근위군을 간신히 막아냈다. 다음 날에 말리놉스키는 130대의 전차/자주포와 300기의 항공기를 투입해 공격해왔다. 이번에도 소련군이 4km 정도 진격한 상태에서 간신히 막았지만 독일군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훌리트는 교두보에서 1개 보병사단과 9기갑사단을 동원해 반격을 가하려고 했다. 그사이 5충격군과 3근위군이 교두보 남쪽에서 4군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훌리트는 히틀러때문에 억지로 지키고 있던 이 교두보를 더이상 지키려다간 북쪽에서 밀고 내려올 소련군에 의해 6군이 궤멸될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교두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2월 1일부터 북쪽에서 30군단의 전선이 돌파되었다. 소련 6군 방면을 주공으로 판단했던 훌리트는 여기에 9기갑사단과 23기갑사단을 투입했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8근위군은 전선을 쉽게 돌파했고 4근위기계화군단이 돌파구로 쏟아져들어왔다. 독일군은 적의 움직임을 놓쳐 허를 찔렸다. 물론 히틀러가 니코폴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에 예비대가 없는 훌리트는 방법이 없었다. 적을 막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쇠르너는 히틀러의 명을 무시하고 2월 2일, 독단적으로 준비해온 후퇴작전 "아가씨 실례합니다.(Meine Damen, entschuldigen Sie)"작전을 개시했다. 같은 날, 잠시 남부집단군에 배속된 상태였던 6군은 다시 A 집단군에 배속됐다.[61] 히틀러는 그제서야 후퇴를 허가했으나 독일군은 이미 철수를 시작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철수를 통해 전선이 단축되면 2개 사단을 여전히 니코폴에 남겨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중이었다.

다시 서쪽으로 돌아와서 훌리트는 23기갑사단을 다시 서쪽으로 보내 8근위군을 막아섰으나 2월 4일, 46군이 아포스톨로보의 철도 교차로까지 진격해왔다. 9기갑사단이 소련군을 막아섰다. 이 도시가 넘어가면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이었다. 4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 후방으로 최대 60km까지 진군한 상태였다. 5일, 9기갑사단은 3일간 방어하던 아포스톨로보(Apostolovo)에서 밀려났다. 6군은 2개로 분할되었고 클라이스트는 더이상 니코폴 교두보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상황이 악화된다면 철수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했고 클라이스트는 즉시 후퇴를 명령했다. 이제 독일군에게 남은 통로는 남서쪽의 아포스톨로보와 드네프르 강 사이의 작은 틈새 뿐이었다.

7일에 드네프르강 동쪽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독일군이 강을 넘었다. 2월 8일, 소련 6군이 니코폴을 탈환했다. 동시에 3근위군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 니코폴 남쪽을 공격했다. 46군은 서쪽에서 인훌레츠 강을 건넜다. 독일은 남부 집단군 예비해서 차출한 24기갑사단이 간신히 퇴로를 방어하고 있었고 17군단이 이 통로를 통해 탈출했다. 도시를 마지막까지 방어하던 302보병사단은 4군단에서 마지막으로 서쪽으로 후퇴했다. 11일, 독일은 퇴로를 방어하고 아군의 후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이는 46군과 8근위군의 교차점을 위협하고 아포스톨로보의 소련군도 위협했으나 그게 한계였다. 이어서 퇴로를 끝까지 방어하던 쇠르너와 병력들도 후퇴했다. 16일, 니코폴에서는 탈출 작전이 끝났다. 독일 6군은 간신히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거의 모든 중장비와 차량을 잃고 말았다.

니코폴의 해방으로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담당은 크리미아로 줄어들었다. 3근위군과 5충격군은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에게 넘어갔고 28군은 해체됐다. 클라이스트와 만슈타인은 자이츨러의 암묵적인 지원과 함께 전선을 부크 강까지 물릴 것을 줄기차게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차후 반격을 위해 교두보들의 필요하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소련군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17일부터 소련군은 크리보이로그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57기갑군단 휘하 5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을 투입했다. 2월 19일, 독일군은 도시 동쪽에서 후퇴했고 21일에 37군과 46군이 북동쪽과 남동쪽에서 도시에 도달했다. 22일, 37군과 46군은 크리보이로그를 탈환했다. 그제서야 히틀러는 인훌레츠 강으로의 퇴각을 승인했으나 여전히 남쪽의 부대들은 드네프르 강에서 후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서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의 37군은 도시 서쪽으로 46군은 도시 남쪽으로 진격했다. 25일에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인굴레츠(Ингулец) 강에 도달했다. 이어 8근위군과 6군, 5충격군과 3근위군도 강 너머에 전선을 구축했고 29일 공세가 끝났을 때 독일군은 전 전선에서 드네프르 강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나 있었다. 만슈타인은 8군 우익의 52군단이 코네프의 57군의 공세로 남쪽으로 밀려나자 52군단을 다시 6군으로 배속시켰다.

5. 카르파티아와 루마니아를 향해

소련군은 공세의 첫 단계에서 목표대로 드네프르 강 서안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제 소련군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서 서부 우크라이나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진행했다. 이번에도 5개의 공세를 진행했으며 첫 단계와 비슷하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되었다. 순서대로 우크라이나 북서부에서 1기갑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프로스쿠로프-체르노프시 공세(Проскуровско-Черновиц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우크라이나 남서부에서 8군을 밀어내고 남부집단군을 남북으로 분단시키며 적을 카르파티아로 밀어내는 우만-보토샤니 공세(Уманско-Ботошан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해안을 따라 6군과 루마니아군을 루마니아로 몰아내는 베레즈네고바토예-스니기레프카 공세(Березнеговато-Снигирев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코벨을 점령하기 위한 폴란드 공세(Полес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 오데사와 흑해 연안을 해방시키기 위한 오데사 공세(Одес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로 이어진다.

이 5개의 공세 중 앞의 3개 공세는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각각 제1,2,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독일 1기갑군, 8군, 6군과 루마니아 3군을 상대했다. 마지막 2개의 공세는 전선의 북쪽과 남쪽에서 전과확대를 위해 나중에 진행되었다.

여전히 소련군의 전략적 목표는 적을 몰아내는 것이 아닌 남부집단군을 후방에서 포위하고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1기갑군을 포위하려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은 이 목표 달성을 위한 과정이었다.

공세 결과, 독일군은 자연국경인 프리피야트 습지대 양 옆으로 중부 집단군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카르파티아산맥 남북으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이 배치되며, 독일군은 독소전쟁 개시선까지 밀려났고 소련군은 폴란드 남동부와 루마니아 북서부까지 진군하게 된다.

5.1.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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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부터 4월 17일까지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기갑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프로스쿠로프-체르노프시 공세(Проскуровско-Черновиц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를 진행했다.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1,4 전차군과 3근위전차군은 계속 독일군의 후방으로 파고들며 독일 1기갑군을 포위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탈출의 대가로 독일군은 또다시 중장비와 차량을 모두 잃었고 1기갑군은 당시 동부전선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이었기 때문에 타 군이 잃은 장비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8군이 1기갑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계속 남서쪽으로 밀어냈다.

소련군은 3월 17일에 두브노를 탈환하고 브로디[62]에 접근했다. 이어서 3월 19일에 크레메네츠, 3월 20일에 빈니차즈메린카, 3월 25일에 프로스쿠로브, 3월 29일에 체르니우치, 3월 30일에는 호틴, 4월 15일에는 테르노필을 해방했다. 이 지역들은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독일 후방 거점이 있는 곳들이었다. 소련군은 이제 코로스텐-로브노-루츠크-테르노필-체르니우치 라인까지 진출했다.[63] 소련군은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도달했고 독일군은 카르파티아를 기준으로 남북 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분할됐다. 카르파티아 산맥은 헝가리 제1군이 담당하게 된다.

5.2. 독일 남부 집단군의 분할

북쪽에서 1기갑군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던 것과 동시에 남쪽에서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8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코네프의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7개 제병협동군[64], 3개 전차군[65], 1개 항공군[66]을 보유중이었다. 여기에 5근위기병군단과 7, 8기계화군단을 포함해 56개 소총사단, 3개의 기병사단, 3개의 기병군단, 4개의 기계화군단, 6개의 전차군단 휘하 691,000명의 병력과 8,800문의 포, 670대의 전차 및 자주포, 55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이를 방어해야하는 남부 집단군 휘하 8군은 230,000명의 병력과 3,500문의 포, 400대의 전차 및 자주포[67], 4항공함대 휘하에 500기의 항공기가 있었다. 여기에 A 집단군 휘하 6군[68] 좌익의 170,000명 정도의 병력을 합쳐 이 구역을 16개 보병사단과 4개 기갑사단, 2개 기갑척탄병사단이 방어중이었다.

겨울이 끝나고 다시 해동기가 되었고 진격로에는 강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공세에는 여러 준비가 필요했지만 공세 준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 역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코네프는 우익의 40, 27, 52, 4근위군을 서쪽의 우만 방향으로 진격시키고 3개 전차군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며 좌익의 5근위군과 7근위군은 키로보그라드에서 남쪽으로 조공을 펼칠 예정이었다. 53군은 전선군 예비로 있었다. 공세의 목적은 1기갑군의 탈출로로 예상되는 남쪽을 차단하고 8군의 지원을 막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집단군 우익의 8군이 좌익의 4기갑군, 1기갑군과 분할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3월 5일, 우만-보토샤니 공세(Уманско-Ботошан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가 시작되었다. 공세 첫날 소련군은 60km 길이의 전선을 돌파해 최대 30km나 진격해 들어갔으며 코네프는 바로 2전차군과 5근위 전차군을 투입했다. 3월 8일, 소련군은 고르니 티키치강을 건넜고 키로보그라드에서 5근위군과 7근위군이 52군단을 상대로 공세를 시작했다. 3월 10일, 5근위전차군의 29전차군단이 7군단을 밀어내며 우만 북동쪽에 도달했고 같은 날에 5근위전차군과 2전차군, 52군은 우만을 탈환했다.

3월 15일, 빈니차 남쪽 부근에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우익이 남부크 강을 건넜다. 덕분에 남쪽의 40군은 도하하기가 훨씬 수월했으며 코네프는 여기에 6전차군을 투입했다. 3월 17일, 소련군 선봉은 드네스트르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어서 6전차군의 5근위전차군단은 27군의 35소총군단과 함께 19일, 모힐리브-포딜스키를 점령하고 드네스트르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몰도바 영내로 진입했고 8군이 1기갑군과 분리되었고 남부 집단군도 남북으로 분할됐다. 육군 최고 사령부는 8군을 A 집단군 소속으로 변경했다.

전선군 좌익에서는[69] 3월 17일, 5근위군과 7기계화군단의 16기계화여단이 노보우크라이나카를 해방시켰다. 53군의 공격도 북쪽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되었고 29일, 발타를 점령했다. 같은 날, 53군, 5근위군, 7 근위군은 몰도바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어서 스타브카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지원을 위해 공세 계획을 바꿨다. 1기갑군이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라 생각한 소련군은 그 방향으로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진격시켰다. 6전차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던 1기갑군 골닉 군단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차단했다.

코네프는 40군을 북서쪽으로 돌렸다. 3월 26일, 드네스트르강을 건넌 소련군은 몰도바 제2의 도시인 발티를 탈환했다. 이어서 3월 28일, 40군, 27군, 7근위군은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 영내로 진입했고 4월 3일 소련군은 카메네츠-포돌츠크 남쪽의 호틴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1기갑군이 서쪽으로 탈출했으므로 북쪽에서의 공세[70]에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4월 7일 루마니아 도시인 보토샤니가 40군에게 점령됐고 17일, 소련군은 카르파티아 산맥에 도달했다. 52군은 이아시키시네프로 진출했다. 독일군은 전선의 붕괴를 막기 위해 6군에서 8군으로 7개 사단을 이동시켰으며 루마니아군에서 7개 사단과 2개 여단을 8군에 추가로 증원하고 8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루마니아 4군을 새로 편성해 8군 우익에 배치시켰다.

히틀러는 3월 30일, 남부 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과 A 집단군 사령관 클라이스트를 해임했다. 3월 31일, 남부 집단군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발터 모델 상급대장이 원수로 진급하며 사령관이 되었고 여기에는 1기갑군과 4기갑군, 헝가리 1군이 포함되었다. A 집단군은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페르디난트 쇠르너 산악대장이 사령관이 되었고 여기에는 8군과 6군, 루마니아 3군과 4군이 포함되었다. 독일군은 전선의 붕괴를 막기위해 루마니아 4군을 포함한 18개 사단과 3개 여단을 투입했다. 4월 초,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을 중심으로 독일군이 반격을 가했다. 4월 중순, 독일군의 저항이 강력해지면서 17일,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이아시 서쪽 100km, 키시네프 북서쪽 40km 지점의 두버사리에서 공세를 마무리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는 잠시 멈췄지만 이어서 제1차 야시-키시네프 공세로 이어지게 된다.

5.3. 루마니아까지 밀려난 독일군

파일:헤르손.jpg
▲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작전 지도[71]

남쪽에서도 소련군의 공세가 동시에 이어지고 있었다. 말리놉스키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니코폴에서의 공세가 끝나자 곧바로 다음 공세인 베레즈네고바토예-스니기레프카 공세[72](Березнеговато-Снигирев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를 준비했다. 1차 목표는 니콜라예프였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전력을 넘겨받아 굉장히 강력해진 상태였으며 7개 제병협동군[73]과 1개 기병-기계화 집단[74], 17항공군 휘하 57개 소총사단, 1개 기병군단[75], 2개 기계화군단[76]과 1개 전차군단[77]을 보유중이었고 500,000명의 병력과 7,184문의 포, 573대의 전차/자주포, 593기의 항공기가 있었다. 말리놉스키는 우익의 57군과 37군에게는 서쪽으로 조공을, 좌익의 6군, 5충격군, 28군은 드네프르 강에 독일 6군 우익과 루마니아 3군을 고정시켜두는 역할을 맡기고 중앙의 46군과 8근위군에게 주공을 맡겼다. 주공은 크리보이로그 방면에서 남서쪽의 인훌레츠 강으로 이어질 예정이었으며 북쪽의 46군에게는 23전차군단을, 남쪽의 8근위군에는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78]을 배속시켜 돌파구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기동성을 확보했다. 공세 전면의 독일 A 집단군은 6군과 3루마니아군이 북쪽부터 52, 57기갑, 29, 4, 17, 44, 72군단을 배치했으며 후방에 30군단과 루마니아 3군단을 예비로 보유하고 있었다. A 집단군은 기갑사단 4개와 기갑척탄병 1개를 포함한 33개 사단과 2개 전차대대[79], 8개 돌격포여단 휘하 500,000명의 병력과 3,386문의 포, 359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중이었으며 4항공함대가 6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독일군은 인훌레츠 강에서 적을 막으려 했으나 공세가 시작되기도 전에 8근위군이 3월 3일, 기습을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버렸다. 3월 6일,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 57기갑군단과 29군단은 강에서 적을 막는데 실패했다. 46군과 8근위군이 교두보에서 적을 돌파했고 말리놉스키는 46군의 돌파구로 23전차군단을, 8근위군의 돌파구로 4근위기병군단과 4기계화군단을 보유한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을 투입했다. 8일에는 6군, 5충격군, 28군이 남쪽에서 72군단과 44군단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8일이 되자 기병-기계화 집단은 노비 부흐에 도달했고 23전차군단을 추가로 배속받아 12일에 스니기레프카에 도달해 적을 포위했다. 독일군은 13개 사단이 포위당했지만 소련군은 이 포위망을 유지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8근위군은 독일군의 저항때문에 진격이 느려졌고 5충격군의 37소총군단은 아직 재배치중이었다.

남쪽에서는 11일부터 28군 2근위기계화군단의 지원과 함께 49근위소총사단과 295소총사단을 선두로 헤르손 근방 드네프르강 너머에 교두보를 만들기 시작했고 13일에 헤르손을 해방했다. 같은 날, 훌리트는 포위망을 뚫고 서쪽으로 탈출할 것을 명령했고 독일군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그 과정에서 중화기를 잃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클라이스트는 인굴 강도 포기하고 남부크강까지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37군과 57군도 8군과 6군의 교차점에서 성공적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18일까지 46군은 남부크 강을 넘어 여러 교두보를 확보했고 공세가 마무리되었다. 소련군은 니콜라예프 근방까지 접근했고 북쪽의 37군은 24일에 보즈네센스크를 탈환하고 남부크 강을 건넜다. 3월 25일, 훌리트 상급대장이 해임됐고 지그프리트 헨리치 기갑대장[80]이 6군 사령관이 됐다. 이어서 30일, A 집단군도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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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사 공세 작전 지도

3월 26일,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를 마무리 지을 소련군의 마지막 공세, 오데사 공세(Одесское наступление)가 시작됐다. 목표는 오데사와 흑해 연안의 해방이었다.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공세 사이 일주일 간 다시 전력을 보충했다. 이전 공세와 같은 수의 제대를 유지하면서 470,000명의 병력, 435대의 전차와 자주포, 12,700문의 포와 436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해군과 해병대도 항구 도시 공격에 참여했다.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의 독일 6군과 루마니아 3군은 방금 전의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16개의 독일 사단과 4개의 루마니아 사단, 8개의 돌격포여단, 2개의 전차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병력 350,000명과 포 3,200문, 전차와 자주포 160대의 전력이었다. 제4항공함대는 1항공군단이 400기, 루마니아 항공군단이 150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남부크강과 드네스트르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강을 활용해 방어작전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3월 26일 밤, 소련군은 남부크 강의 교두보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전선군 우익의 37군과 57군은 드네스트르강을 향해 적의 후방으로, 8근위군과 46군은 오데사 북서쪽으로 우회할 예정이었으며 23전차군단과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이 지원할 예정이었다. 6, 5충격군, 28군은 니콜라예프로 향했다. 28일까지 57군과 37군은 남부크 강에 45km의 전선에 걸쳐 최대 20km까지 돌파했다. 우익의 공세가 성공적이자 말리놉스키는 23전차군단을 37군 방향으로 투입했다. 그날 저녁, 61근위소총사단과 243소총사단이 북쪽에서 인굴강을 건너 니콜라예프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도시 동쪽에서 강을 건넌 5충격군의 130소총사단, 남쪽에서는 28군이 공격을 가해왔다. 소련군은 해병대가 상륙을 시도했으며 공수부대까지 투입했다. 독일군 5공군야전사단과 302,304 보병사단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후퇴했다. 28일 니콜라예프는 소련군에게 넘어갔고 독일 6군과 루마니아 3군은 포위를 피하기 위해 드네스트르강까지 계속 후퇴해야했다.

37군, 57군과 23전차군단의 진격으로 독일군은 또다시 남북으로 분할됐다. 북쪽 2개 군단[81]은 서쪽의 티라스폴로 후퇴했고 남서쪽의 나머지 그룹[82]은 기병-기계화 그룹에 의해 오데사에서 다시 포위될 위기였다. 4월 5일, 말리놉스키는 기병-기계화 그룹을 남동쪽으로 이동시켰고 7일, 드네스트르 강에 도달했다. 6일부터 오데사에 갇힐 위기의 독일군은 티라스폴을 향해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37군의 82소총군단이 막아섰지만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퇴로를 뚫었다. 간신히 탈출한 병력들은 37군의 추격으로 일부만 강을 건너 서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9일부터 5충격군의 86근위소총사단, 248, 320, 416소총사단이 오데사 북쪽으로 진입했고 8근위군와 6군의 일부는 북서쪽에서 도시로 진입했다. 262야간폭격사단과 244폭격사단이 항구를 폭격했고 9혼성항공군단은 적의 수송선을 폭격했다. 10일, 오데사는 소련군에게 해방됐다. 그러는 와중에 8일부터 막시밀리안 데 앙겔리스 포병대장이 6군 사령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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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하는 소련 포병대[83] 도하를 준비하는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병사들[84] 해방된 오데사에서 개선행진을 하는 소련군
5충격군과 6군은 2선으로 빠지고 12일부터 소련군은 드네스트르 강 서쪽 교두보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37군은 같은 날 티라스폴을 탈환했다. 13일, 스타브카에서는 공세를 중단할 것을 지시했고 14일까지 진군한 소련군은 방어로 전환했다. 소련군은 몰도바 북쪽의 절반 이상을 탈환했으며 발칸과 루마니아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렇지만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과 달리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루마니아로 진입하는 데는 실패했다.

5.4. 폴란드 공세

3개의 전선군이 한창 공세를 진행중던 3월 15일, 드네프르 전역 북쪽에서는 전과확대를 위해 파벨 쿠로치킨 상장의 제2 벨라루스 전선군[85]폴레스스코에 공세(Polesskoe offensive)를 개시했다. 목표는 교통의 중심지인 폴란드의 코벨이었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61군[86], 70군[87], 47군[88], 7근위기병군단, 6항공군을 보유중이었고 추가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북쪽 끝 13군의 우익 2개 사단도 투입했다.

이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은 발터 바이스 보병대장의 2군 좌익의 7보병사단과 헨레 집단, 아그리콜라 집단이었다. 4기갑군의 213보병사단과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에서 탈출한 5SS기갑연대[89]도 여기 있었다. 오토 길레 SS중장의 5SS기갑사단 "비킹"은 재편되어 남부집단군 예비가 되었고 전선 뒤에는 추가로 5개의 헝가리 사단[90]도 있었다. 로브노-루츠크 공세의 여파로 예비대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빈약한 전력이었다.

여기는 습지대라서 폴란드 공세는 드네프르 전역의 모든 공세 중에 가장 소규모의 작전이 되었다.[91] 3월 4일에 스타브카가 공세 계획을 세우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쿠로츠킨은 북쪽부터 61군은 프리퍄트 습지대 남쪽의 독일군을 밀어내고 70군은 브레스트-코벨 철도를 차단하기 위해 서쪽으로, 주력인 47군은 70군과 평행하게 코벨 방면으로 진격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하여 6일에 승인받았다. 소련군이 공세 일자를 앞당겼기 때문에 시작할 당시 보유한 25개 사단 중 13개 사단만 동원할 수 있었으며 149,400명의 병력과 3,039문의 포, 120대의 전차/자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6항공군도 14기의 Yak-9과 18기의 Il-2만 동원할 수 있는 상태였다.[92]

3월 15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70군은 카민-카쉬르스키로 47군은 코벨로 진격했다. 16일부터 북쪽에서는 61군이 프리피야트 습지대에 지원 공격을 가했다. 40km를 진격한 소련군은 18일에 코벨에 도달했고 47군 77소총사단은 3개 사단[93]으로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에는 길레가 주변 잔병들을 모아 7,000명 정도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코벨 수비대가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신속하게 대응했다. 3월 19일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23일부터는 56기갑군단[94]의 4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95], 2개 돌격포여단과 1개 중전차대대를 투입했다. 그만큼 코벨은 중요한 곳이었다. 4월 1일, 포위망의 소련군은 6개 소총사단으로 늘어났고 계속 증강됐지만 독일군도 곧 9개 사단[96]과 5개 돌격포 여단으로 증강됐다. 3월 28일, 4기갑군 좌익의 42군단[97]은 남부집단군에서 중부집단군으로 이동했고 루프트바페도 2개 항공사단[98]을 투입해 일시적으로 근방의 제공권을 장악했다. 4일, 독일군은 4, 5, 5SS기갑사단을 선두로 포위망의 적을 몰아냈고 칼 니콜루시-렉 SS중령[99]이 이끄는 전투단[100]이 5일에 도시의 아군과 연결됐다.

소련군은 최대 50km 서쪽으로 진군하긴 했지만 결국 코벨을 탈환하는데 실패했고 코벨 서쪽에 전선을 구축했다.[101] 이는 작전 기간 중 10개의 공세 중에 유일한 목표 달성 실패였다. 독일군은 반격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했고 소련도 같은 생각이었다. 소련군은 지나치게 지형의 특성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넓은 구역에서 진격했으며 적의 반격 능력을 과소평가해 전과 확대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처음에 절반 정도의 전력으로 공세를 시작한 덕에 공세가 끝날 시점에서는 197,400명의 병력과 4,142문의 포, 191대의 전차/자주포, 181기의 항공기로 오히려 전력이 증강됐으나 추가된 전력들은 공세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했다. 도시 포위전에서 제대로 지휘하지 못한 47군 사령관은 공세 이후 소환되어 문책당했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제1 벨라루스 전선군과 합쳐졌고 로코솝스키 휘하의 벨라루스 전선군이 되었다.[102] 그렇지만 이제 소련군은 폴란드에서도 독소전쟁 개시선까지 도달했다.

6. 우크라이나 상공에서의 전투

공세 기간동안 우크라이나 상공에서도 치열한 항공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세 시작 시점인 1943년 12월에 소련 공군은 8,800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고 공세를 지원할 2, 5, 17, 8항공군은 2,370기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맞선 독일 공군은 4,700기의 군용기를 보유중이었고 동부 전구 남부 전선을 남당하고 있는 4항공함대는 1,360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쿠르스크 전투에 비해 훨씬 큰 규모였다.[103]

독일군은 44년이 시작 될 당시, 보유한 군용기 중 연합국의 전략폭격을 방어하기 위해 25%에 달하는 전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투기만 따지면 그 비율은 훨씬 커졌다. 논쟁 작전이 진행되고 본토 상공에도 연합국의 전투기가 등장하자 독일은 전투기들을 계속 서부로 이동시켜야 했다.[104]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인적 자원이었다. 동부전선은 소수의 정예 조종사들이 간신히 지키고 있었지만 에이스들은 계속해서 서부로 차출되었고 조종사 소모율은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44년 1월, 제국 항공함대[105]는 무려 17%의 조종사를 잃었다. 항공기야 만들면 되지만 조종사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동부전선의 에이스들은 본토 상공에서 사라져갔고 이는 전반적인 질적 하락으로 이어졌다. 서부전선의 항공전은 동부전선의 항공전과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106]와 프랑스[107]에서도 압도적인 연합국의 공군력에 대항해야했으며 무르만스크에서 아조프 해까지 동부전선은 넓어도 너무 넓었다. 동부전선에는 5[108], 1[109], 6[110], 4[111]항공함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당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부전선의 항공기 중 55%의 전력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1월 초, 지토미르 공세 중 빈니차에서 독일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할 때, 항공력을 집중한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두 배의 수적 우세를 가질 수 있었지만[112] 소련 2항공군은 4,200회의 출격을 통해 독일군의 반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5항공군은 키로보그라드에서만 1,100회 출격했다.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당시 이 지역의 2, 5항공군은 768기의 전투기를 보유중이었다. 독일군은 1,000기의 항공기를 집중했지만 1월 24일, 소련 4전투항공군단은 적의 첫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전투 내내 소련군은 독일군의 항공 보급을 방해했다. 전투 뿐 아니라 항공 정찰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전 전선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항공 정찰을 통해 진격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고 공세 기간동안 소련 공군은 이를 훌륭히 수행했다. 소련군을 괴롭힌 것은 해빙기에 비포장 비행장들이 무력화되어 버린 것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항공 연대가 같은 비행장을 사용해야 했고 항공군 사령부는 이를 잘 조율해야했다.

빠른 진격으로 인해 보급로가 신장되고 라스푸티차로 인해 도로와 철로가 엉망이 되면서 전차군의 진격을 유지하기 위해 항공 보급이 매우 중요해졌다. 2항공군은 2전차군과 6전차군의 보급을 위해 326야간폭격항공사단을 배정했다. 소련군은 지상 지원에 전력의 67%를 집중했으며 4개 항공군은 두 달 간 공격을 위한 13,176회를 포함하여 31,836회 출격 했다.

독일군은 계속해서 남부전선으로 증원했다. 그만큼 이 전역은 독일군에게도 굉장히 중요했다. 3월이 되자 4항공함대는 1,475기의 항공기를 보유중이었다. 4개월간의 공세동안 소련 공군은 66,000회 출격했으며 독일 공군은 31,000회 출격했다.

7. 결과

공세의 결과, 독일군은 폴란드와 루마니아로 밀려났다. 중부집단군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사이에는 거대한 습지대가 있어 전선이 사실상 단절되어 버렸고 여기엔 중부집단군의 2군이 배치되었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과 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사이에는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어 역시 전선이 단절되었고 헝가리 1군이 산맥의 방어를 담당하게 된다.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은 폴란드 동남부 갈리치아를 담당했고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은 루마니아를 담당하게 되었다. 카르파티아를 기준으로 두 집단군이 단절되면서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향하는 보급품은 발칸반도와 루마니아의 철도를 통해야 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때문에 보급의 어려움이 가중됐다

4개월 간 양측의 인명 피해는 심각했고 독일군의 경우 10개 사단과 1개 여단은 궤멸되어 해체되었다. 7개 보병사단과 1개 공수사단, 2개 기갑척탄병 사단은 재편을 위해 서부로 옮겨졌다. 나머지 사단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A 집단군의 경우 39개 사단중 18개 사단이 전투단이 되어 있었다.[113] 독일군은 최선을 다하면서 싸웠음에도 히틀러에 의해 수많은 사령관들이 직위해제되고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히틀러는 서부전구의 전력을 강화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 물자와 인력 및 완편 사단들을 서부에 우선 배치하려 했으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는 이런 계획 자체를 망가트렸다. 히틀러조차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남부집단군에 증원을 해야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발칸, 폴란드, 덴마크, 독일 본국과 중부집단군, 북부집단군에서 34개 사단 550,000명, 853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 전력으로도 소련군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른 작전에 비해 드네프르 공세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독일군의 예비 전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결과 이어지는 하계 공세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소련군과 연합군의 큰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8. 여파


[1] 3월부터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대리[2] 1943년 공세 시작 당시 남부집단군 700,000명, A 집단군 253,000명[3] 독일군 피해는 부대가 괴멸되는 과정에서 중간중간 보고가 누락된 부분이 있어서 말 그대로 최소치이다. 국방군 보고서에서는 3월 말의 8군 사상자와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당시 제1기갑군의 피해에 관한 보고가 빠져있다.[4] 그렇다고 보급이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 해에는 라스푸티차가 빨리 찾아와 차량과 비행장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5] 스타브카 대리로 파견된 주코프가 1,2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조정하고, 바실렙스키가 3,4,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조정했다.[6] 2월 28일, 파르티잔에게 피습당해 주코프가 대신 지휘[7] 3월 5일, 상장으로 진급[8] 2월 20일, 소연방 원수로 진급[9] 4월 25일부터 제1근위전차군[10] 소련군에서 병과원수와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며 서방권의 대장, 독일 상급대장과 동급이다. 소련에서는 타국 원수와 동급인 소연방 원수가 되려면 대장을 거쳐야 했는데 대장 계급은 보병과 해병을 비롯한 일부 병과만 진급할 수 있었고 소연방 원수가 되기 어려운 항공, 전차병, 통신병, 공병, 포병 이 다섯 병과는 대장 대신 상장에서 바로 병과원수와 병과상원수가 될 수 있었다.[11] 4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 종전 직전 독일 남서부에서 G 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12] 집단군 사령관이 되면서 원수로 진급[13] 4월 20일, 다이아몬드곡엽검 기사철십자 훈장 서훈과 함께 상급대장으로 진급했으나 다음날,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14] 독일의 병과대장, 소련의 상장과 동급[15] 군집단(Armeegruppe)은 집단군(Heeresgruppe)과는 다른 것으로 야전군 몇 개를 소속 야전군 사령관 중 한 명이 맡아 지휘했다. 군단(Armee-Korps) 여러 개를 뭉쳐 지휘하나 야전군(Armeeoberkommando)에는 못 미치는 분견군(Armeeabteilung)과 비슷한 느낌이다.[16] 다른 예시로는 1942년 하계 공세에서 남부 집단군을 두 개의 군집단(Armeegruppe)로 나눈 적이 있다. 참고로 A,B 집단군과는 다른 것이지만 이 군집단들이 A,B 집단군의 모체가 되긴 했다.[17] 독일의 병과대장, 소련의 상장과 동급[18] 독일의 상급대장, 소련의 대장 및 병과원수와 동급[19] 4월 8일부터 지휘[20] 실제로는 드네프르강 왼쪽이다. 우안 우크라이나, 드네프르강이 흑해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 방향으로 바라보면 오른쪽이라 역사적으로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21] 동부 전선 3개 집단군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발칸의 모든 기갑 전력을 다 합쳐도 이보다 약했다는 이야기다.[22] 25전차군단 배속[23] 76mm 박격포 이상의 포만 따진 것으로 50mm 박격포를 포함시 약 11,000문[24]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25] 사실 레닌그라드 전선이 전력 대비 굉장히 길기는 했으나 전선이 긴 만큼 소련군도 엄청나게 많이 투입되어 있었다. 또한 북부 집단군은 당시 독일군 내에서 가장 약한 전력으로 가장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 중이었다.[26] 이는 독일군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소련군의 고질적인 문제로 바그라티온 작전시기가 되어서야 어느정도 비슷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27] 히틀러가 3면이 포위된 니코폴 교두보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여 병력을 더이상 차출할 수가 없었다.[28] 1일에 24기갑군단과 위치를 바꿨다.[29] 북부, 중부, A 집단군에서 기갑, 보병, 산악사단을 1개씩 차출했다.[30] 이 돌출부에는 42군단 우익의 11군단도 함께 있었으며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의 원인이 된다.[31] 1기갑군 소속, 4기갑군에는 509중전차대대가 있었다.[32] 전차군단 3개, 기병군단 1개, 기계화군단 4개[33] 1월 1일 시점에서 전차 265대와 자주포 127대 보유[34] 키로보그라드 전투의 결과로 이는 실패했고 회색 화살표를 따라 다음 공세에서 조금 더 작은 포위망인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야전군 포위에서 군단 포위로 규모가 줄어들었다.[35]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부터 이동[36] 물론 도시도 중요하긴 했다. 키로보그라드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공업 중심지이면서 교통 요충지이고 독일군의 후방 보급 거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키로보그라에는 독일의 금속 가공 공장이 있었다.[37] 3, 14기갑사단과 10기갑척탄병사단 376보병사단[38] 롬멜의 휘하에서 아프리카 기갑군, 아프리카 집단군 참모장을 지냈으며 잠시 아프리카 군단장 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후 기갑교도사단장으로 롬멜과 다시 만나게 된다.[39] 3개의 기갑사단과 1개 보병사단을 구해낸 바이엘라인의 결단은 결과적으로 소련군이 계획까지 틀어버릴정도로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바이엘라인에게 훈장을 줄 생각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령부의 미사여구 외에는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 속으로 능력 자체는 인정한 것인지 서부 전선에서 단일 사단으로는 최강의 전력을 가진 기갑교도사단장으로 임명하게 된다.[40] 사단들이 연대급으로 줄어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전력은 절반 정도였다.[41] 로스토프에 먼저 도달하여 코카서스의 A 집단군 섬멸[42] 겨울 폭풍 작전을 개시하며 포위망을 뚫으러 오는 독일군 섬멸[43] 사실 이 지역은 전쟁 기간 내내 독일군이 제대로 장악한 적이 없었다.[44] 59군단, 13군단, 48기갑군단[45] 291, 96, 208, 340, 183, 217, 339, 371[46] 2SS, 7, 8, 19[47] 454보안사단[48] 양측 모두 전선 길이에 비해 상당히 적은 병력을 투입했는데 독일군의 경우는 습지대에서 공세를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이고 소련군은 이동과 보급의 한계 때문이다.[49] 보급로 차단과 통신선 차단, 후방 교란 등등[50] 8개 소총사단과 6개 기병사단[51] 9개의 소총사단과 4근위전차군단, 25전차군단[52] 4월 15일에 결국 사망했다.[53] 4군단, 17군단, 29군단 포함[54]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에서 증원[55]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에서 증원[56] 2월 10일부터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으로 이동[57] 57기갑, 30, 17, 4, 40기갑, 29[58] 2월 4일에 다시 6군으로 돌아온다.[59] 이 시점에서는 전차가 13대뿐이었다.[60] 1시간동안 30,000발의 포탄을 발사했다.[61] 만슈타인은 남부 집단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토미르 방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에 니코폴을 지키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62] 독소전 초기, 브로디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63] 문서 상단 지도에서 전선이 서쪽으로 평행하게 이어지다 갑자기 90도로 꺾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지역이다.[64] 4근위, 5근위, 7근위, 27, 40, 52, 53[65] 2, 6, 3근위[66] 5항공[67] 절반 이상이 수리중이었다.[68] 3월부터 다시 A 집단군에 배속[69] 공세 방향에서 보면 좌익이지만 지도로 보면 오른쪽이다.[70]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71] 남쪽의 빗금쳐진 지역이 흑해이며 서쪽으로 얇게 이어지는 부분이 드네프르 강(Днепр)이다. 흑해가 드네프르강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헤르손(Херсон)이 있고 흑해에서 북쪽 남부크강(Южный Буг)으로 올라가면 니콜라예프(Николаев)가 있다.[72] 이 두 도시는 크리보이로그헤르손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다.[73] 57, 37, 46, 8근위, 5충격, 6, 28[74]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 나중에 1근위 기병-기계화 집단이 된다.[75] 4근위[76] 2근위, 4근위[77] 23[78] 4근위기병군단과 4근위기계화군단[79] 93, 560중구축전차[80] 자포로제 전투 당시 40기갑군단장[81] 9개 사단과 2개 돌격포 여단[82] 10개 독일 사단, 2개 루마니아 사단, 2개 돌격포 여단, 2개 전차 대대[83] 해빙기라 진군이 쉽지 않았다. 라스푸티차는 독일군뿐만 아니라 소련군도 괴롭혔다.[84] 우크라이나 남서부에서의 공세는 강을 상당히 많이 연속적으로 건너야 하는 작전이었다.[85] 1943년 11월 20일에 북서전선군이 해산되고 예비로 빠져있던 사령부로 제2 벨라루스 전선군 사령부를 구성했기 때문에 사령관도 그대로 쿠로츠킨이 맡았다.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은 2월 24일에 만들어져서 딱 이 공세만 진행하고 4월 5일에 해산됐다가 4월 24일에 다시 만들어져 종전때까지 독일 본토로 진격하게 된다.[86] 9근위소총군단과 89소총군단을 포함해 8개 소총사단과 1개 전차여단, 2, 7근위기병군단[87] 96, 114소총군단 휘하 4개 소총사단[88] 77, 125, 119소총군단 휘하 11개 소총사단[89] 5SS기갑사단 "비킹" 소속[90] 1, 9, 12, 19, 23[91] 양측의 기록에 따르면 코벨 전투 기간동안 양측 합쳐 사상자가 15,000명 정도였다.[92] 기타 항공기 90기가 더 있긴 했다. 또한 이러한 항공기들은 눈에는 안 띄어도 정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93] 60, 260, 143소총사단[94] 9군 소속[95] 4, 5기갑사단[96] 4, 5기갑사단 포함[97] 5SS기갑사단, 헝가리 19사단, OKW 예비인 131보병사단[98] 1, 4항공사단[99] 상급돌격대지도자[100] 판터 17대를 보유하고 있었다.[101] 이후 바그라티온 작전 진행 중에 루블린-브레스트 공세에서 7월 7일 소련군에게 해방된다.[102] 4월 24일에 다시 1,2 벨라루스 전선군으로 나눠진다.[103] 물론 전역의 크기 대비 전력의 집중은 쿠르스크가 압도적이다.[104] 전략폭격의 효율성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독일 전투기부대를 본토 상공에 묶어둔 것은 엄청난 성과였다.[105] 독일 본토 담당[106] 2항공함대[107] 3항공함대[108] 핀란드[109] 레닌그라드[110] 벨라루스[111] 우크라이나[112] 부족한 전력을 일부 전역에 집중시켜 수적 우세를 확보하는 것은 나폴레옹이 즐겨쓰던 방식이다.[113] 사단의 구실을 할 전력이 안 되어 몇 개 사단을 합쳐 운용했다.[114] 투입이 너무 빠르면 전투에 휘말리고 너무 늦으면 상대 예비대가 방어라인을 갖출 시간을 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