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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인민공화국 제5대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 허를러깅 처이발상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 |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 | |
출생 | 1895년 2월 8일 |
청나라 치하 몽골 허를러깅 두가르 (現 몽골 히를러깅 두가르) | |
사망 | 1952년 1월 26일 (향년 56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 |
국적 | [[몽골 인민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묘지 |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묘지 알탄 울기 |
정당 | 몽골 인민혁명당 (1920년~1952년) |
재임 기간 | 1929년 1월 24일 – 1930년 4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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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을 갖춰 입은 모습 | 인민복 차림 | 색을 입힌 그의 살아생전 모습 |
1. 개요
몽골 인민공화국의 독재자. 1929년 1월 24일부터 1930년 4월 27일까지 몽골 국가소후랄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어서 1939년 3월 24일부터 1952년 1월 26일 죽을 때까지 몽골의 내각수상을 지냈다.20세기 담딘 수흐바타르 등과 함께 몽골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와 집권 기간 전무후무한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대량 숙청, 학살을 주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몽골의 스탈린이라고도 불렸는데 실제로 둘은 말년을 제외하면 관계가 돈독했다.
몽골 인명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로마자 표기인 Khorloogiin Choibalsan을 직역한 초이발산으로 오역되는 일이 많으며 심지어 한국 이름 비슷한 최발산으로 오역되기도 한다.
2. 생애
2.1. 권력을 쥐기까지
1895년 동몽골 지역에서 미혼모 허를러의 네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어린 시절 이름은 ‘두가르(Дүгар)’[1]였으나 13세 때 티베트 불교 수도승으로 출가하면서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즉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란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 법명이 붙여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은 몽골어가 아닌 티베트어로, '처이'는 다르마를, '발상'은 '광대함'을 뜻하는데 각각 티베트어 원어로는 chos(ཆོས, 최)와 dpal bzan(དཔལ་བཟང, 빤상)에 대응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남다른 면모가 있었는지 동료 승려들은 그를 법명과 발음이 비슷한 '초노'(늑대)라는 몽골어 별명으로 불렀다.
5년 뒤에 사원에서 도망쳐(이유는 불명)[2] 수도 후레, 현재는 울란바토르라고 불리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가 그를 가엽게 여긴 부랴트인 러시아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서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어 전문학교에서 통역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914년 러시아로 유학했을 때 러시아 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해 몽골의 독립을 취소하자 귀국 후 중국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몽골 인민당 초기 멤버로 참여하였다. 1921년 몽골에 주둔하던 중국군과 러시아 반혁명 잔당인 운게른 남작의 군대를 수도에서 모두 몰아내고 복드 칸을 복위시켜 독립 선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그는 혁명가 담딘 수흐바타르의 동료로 몽골의 독립 운동에 참여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권력을 잡았다.
몽골의 독립영웅 담딘 수흐바타르(왼쪽)와 처이발상(오른쪽). |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고 독립군을 지휘한 2살 위 형님 뻘인 담딘 수흐바타르 장군을 스승처럼 따랐다. 그래서인지 수흐바타르도 그를 아꼈고 1922년 혁명정부의 급격한 풍습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군중반란이 일어나 군무성 부상이었던 그가 처형을 당할 처지였는데 수흐바타르가 그를 보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흐바타르는 만 30살의 나이인 1923년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칸도 1924년 사망했다.
그는 소련으로 유학해 군사교육을 받았고 귀국 후 몽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2.2. 독재의 시작
복드 칸 사후 1924년 공화국이 된 몽골을 보며[3] 1928년 스탈린과 국방인민위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소련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 몽골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몽골이 소련의 안보를 보위하기 위해 몽골을 철저히 스탈린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8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수흐바타르 사후 몽골의 지도자였던 담바도르지를 재교육을 명분으로 모스크바로 압송하고 토지 몰수와 불교 사원의 박해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지도자로 처이발상을 지목해 11월 28일에 그를 담바도르지의 후계자로 옹립했다. 덕분에 그는 이후 몽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아직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군에서 예편한 후 그를 몽골인민혁명당 총비서로 추대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당내의 반대 때문에 몽골인민혁명당 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하지만 스탈린은 1934년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잠빈 뤽베를 숙청하는데 성공한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스탈린은 몽골 수상 겸 몽골인민혁명당 서기 펠지딘 겐덴에게 그를 부수상에 임명하라고 지시하였는데 겐덴은 이 지시에 불만을 표시했다가 가차없이 1936년에 해임당해 1937년 11월에 처형당했다. 스탈린은 그를 몽골군 원수로 진급시키고 1936년 2월 26일 몽골 내무상에 임명하였다. 내무상으로 그는 1936~1938년 사이에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는데 이 때문인지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로 유명했으며 정치 행보도 비슷해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통치하던 중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37~1939년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티베트 불교 말살을 들 수 있다.
1936년에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 사원을 없애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한 펠치딘 겐덴(Пэлжидийн Гэндэн) 인민위원장 일파를 기습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을 기점으로 65명의 고위직을 전격 체포한 후 18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1936년부터 39년까지 대숙청(Их Хэлмэгдүүлэлт)을 벌여 겐덴 전 인민위원장과 아난딘 아므르(Анандын Амар) 전 인민위원장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들을 처형했다. 혁명 원로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이 대숙청에서 당과 정부의 수뇌부 인사 중 25명이 처형되었으며 군 지휘부 중 187명이, 중앙위원회 위원 51명 중 36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에다가 굴라크까지 건설하여 사람을 잡아넣었다. 그야말로 동시대 소련 대숙청의 작은 복제판이였다.
승려는 세 부류로 나눠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비지식인층은 당장의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총 10만에 달하는 승려들이 입적했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불상과 조형물은 녹여서 소련의 무기 공장으로 보내졌다. 다만 일부 사원은 군사용으로 쓰여서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때 불교 신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불교에서 내려준 법명이니 참 웃지 못할 일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신학생 출신으로 정교회 때려잡는 데 열심이었으니 이 점도 비슷하다. 췌언하자면 스탈린은 사람들 감시하고 가두고 벌 주는 걸 신학교에서 당하면서 배웠다. 차이점이라면 스탈린은 나중에 정교회 탄압을 멈추고 형식적이나마 정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처이발상은 티베트 불교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18,000명의 지식인층 승려가 처형당했으며 몽골 각지에 있던 746개 사원이 파괴되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쫓겨났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본산격인 간단 사원도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폐쇄되었다고 한다.[4] 수천 명의 반혁명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다수의 부랴트족, 카자흐족들도 ’혁명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5] 정도로 추산되는데 당시 몽골의 인구가 80~9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몽골인과 튀르크인의 전통 머리 모양인 알타이식 변발이 외몽골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처이발상 정권 때의 일이다. 물론 복드 칸국 시절에도 중화민국, 러시아 제국, 소련으로부터 서구화된 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외몽골인들이 변발을 자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변발이 자취를 감춘 것은 처이발상의 몽골 문화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변발을 계속 유지하려 한 외몽골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변발이 잘렸으며 상술한 부랴트족과 카자흐족도 외몽골의 주류 민족인 할하족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 외몽골 내 어웡키족의 퉁구스식 변발도 이러한 변발 문화 탄압의 예외가 되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엄청난 숙청 때문에 몽골에서 반소 감정이 지나치게 높아지자 그는 대숙청을 집행한 실무진들이 좌경 오류를 범했다고 이들을 역으로 숙청하고 이것이 1938년 8월부터 1939년 초까지 있었던 자신의 소련 외유 기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자신은 몰랐다면서 사과했다. 1940년 1월 3일 그는 욤자깅 체뎅발과 함께 다시 소련을 방문하였고 스탈린은 그에게 레닌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는 자신과 수흐바타르의 우상화를 실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기 시작하였다.
2.3. 근대화
몽골은 그의 치하에서 상당히 근대화되어 포장도로가 국토 곳곳에 깔리고 통신선이 개통되었고 광공업이 발전했으며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도 낮아졌다. 상기했듯 변발 같은 구시대 관습도 자취를 감췄다. 몽골 동부에 위치한 인구 4만여 명 규모의 몽골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인 투멘(Баян Түмэн)은 그의 이름을 따서 처이발상이라고 개칭되었고 지금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그는 몽골 민족주의자였고 몽골 인민공화국이 소련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더불어 내몽골과의 통일도 꿈꿨다.[6]
그런데 몽골 민족주의자임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몽골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가 이후 러시아어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갈아치웠다. 중국, 라오스, 북한 등 여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화 후에 문자 개혁을 한 예는 있어도 자신의 전통 문자를 폐지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더 특이한 사항이다.[7]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우선 몽골 민족주의자나 어학자 입장에선 원수 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옹호론자들은 몽골 전통 문자가 세로쓰기인 데다가 좌서로 읽고[8] 아랍 문자처럼 어두형, 어중형, 어미형, 단독형으로 나뉘고 정서법도 옛날 그대로라 이걸 현대에 적용하기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즉 문맹률 증가의 한 원인이라 아예 갈아치웠다는 주장을 한다. 설사 가로쓰기로 바꾼다고 해도 전산화가 문제다. 그래서인지 현재도 몽골은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9][10]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엔 일본 제국의 정복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1945년 만주 공세 당시, 일본에게 선전포고한 뒤 몽골군에게 장자커우와 청더 등 만리장성 부분까지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 몽골 민족주의자인 그는 몽골이 2차대전에서 소련을 지원해 준 대가로 내몽골을 기대하였고 내몽골에서의 부추김을 통해 내몽골에서도 일시적으로 몽골 인민공화국과의 통합론이 우세해졌지만 스탈린이 그것을 지지해 주지 않자 그는 스탈린에게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이는 점점 악화되어 나중엔 스탈린의 70번째 생일 축하 행사에도 욤자깅 체뎅발을 대리로 파견하고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2.4. 사망
처이발상은 신장암에 걸렸고, 몽골에는 현대적인 의료시설이 부족했기 떄문에 1952년 모스크바로 와서 치료를 받으려 했는데, 1주일간의 열차여행이 환자에겐 무리였는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병사했다. 그 전부터 처이발상과 스탈린의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에 MGB(KGB의 전신)이 암살했다는 음모론도 있다.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의 병사는 의심많은 스탈린이 자신의 주치의들에게 의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들을 숙청하게 한다. 결국 이 숙청은 1953년 스탈린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처이발상과 스탈린이 말년에는 사이가 나빠졌다고 하지만 적어도 서로가 서로를 완전한 적으로 여길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처이발상의 죽음은 스탈린의 입장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망후 유해는 레닌식으로 엠버밍되어 울란바타르시의 수흐바타르 옆에 묻혔으나, 공산정권 몰락후인 2005년 철거되고 유해는 티베트 불교식으로 화장되었다. 그 자리에는 칭기즈칸 기념관이 세워졌다.
3. 평가
공산 정권 시기부터 격하운동이 있었고, 공산정권 몰락후 영묘가 철거되는 등의 굴욕은 겪었지만, 현대 몽골에서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당장 몽골 국립대학에는 그의 동상이 서있으며,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몽골에서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인 처이발상시도 공산정권 몰락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2017년에는 몽골은행이 그를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하였다. #그는 몽골 인민들을 규합하여 러시아 백군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나 중국 군벌을 물리쳐 이웃 대국인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노선을 교묘히 이용하고 외교적 줄타기를 잘해서 새로 탄생한 소련으로부터 몽골의 독립을 확약받고, 소련 공산당을 업고 이후 중화민국의 몽골 재흡수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일본이 패망하자 몽골군을 남진시켜 내몽골까지 점령하여 몽골을 통일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장제스 정권의 눈치를 본 소련의 반대로 실패로 끝났다. 청나라부터 독립한 티벳, 위구르, 그 이후 일본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분리된 만주나 내몽고, 그리고 소련으로부터 한때 독립했던 투바 인민공화국이 모두 다시 중국이나 소련으로 귀속되고 독립이 실패로 끝났음을 생각하면 그는 어쨌든 외교적 줄타기에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몽골 인민공화국은 중국이나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정권으로 유지되어 현재까지 이를 수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처이발상을 냉전적 시각으로 스탈린의 꼭두각시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며, 현실적으로 강대국인 소련의 눈치를 보면서도 몽골민족주의를 강하게 추구해 자국의 독립을 유지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티베트 불교가 지배하던 몽골 사회를[11]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변화시켜 정교분리를 확립했고, 신분제 폐지, 토지개혁, 산업화. 의무교육 확립, 남녀평등 확립 등등의 여러가지 현대화 시책을 펼쳐서 그의 집권 이전과 이후의 몽골공화국은 확연히 달라지게 되었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위에서 거론한 대로 몽골의 종교 문화 파괴와 불교 승려 학살을 들어 비판한다. 특히 샤머니즘이나 티베트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몽골인들이라면 더더욱.
칭기즈 칸을 무시하고[12] 몽골 문자를 버렸다는 이유로 몽골 민족주의자에게 욕을 먹지만 정작 자신은 몽골의 소련 편입 반대, 내몽골 합병으로 몽골 통일 시도 등 죽을 때까지 몽골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당시 국제정세상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나라에 치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몽골의 국체를 어떻게든 보존하는데 성공했으니 그 점은 몽골 독립주의자 입장에선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떠나서 그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데 그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도 스탈린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그가 권력을 잡기 전 스탈린에게 미움을 사거나 해서 몽소관계를 망친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초기 몽골 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 한둘이 아니다.
그의 사후 후임으론 그의 부하였던 욤자깅 체뎅발이 집권했는데 이 사람도 독재자긴 했지만 처이발상처럼 철권통치를 벌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허나 친소 일변도 정책으로 몽골 민족주의자들에겐 더 욕을 먹는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1962년 1월 체뎅발은 처이발상이 지나치게 숙청을 남발했다면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하였듯이 그를 격하하였다.
4. 여담
4.1. 처이발상이 성씨를 말소시켰다?
몽골인들이 과거 성씨를 쓰다가 그가 집권한 후 전통문화 파괴를 목적으로 폐지 및 금지시켜서 몽골인들이 성씨를 쓰지 않는다라는 풍설이 돌기도 한다. 정확한 것은 내용이 좀 복잡하긴 한데 몽골에는 성(姓)씨와 유사한 기능도 있지만 명확히 따지면 부족을 뜻하는 오복(Obog)이라는 것이 있으며[13] 이것의 사용을 공산정권이 계급사회의 잔재라는 이유로 막긴 했지만 그 시기는 그의 집권 이전인 1925년이었다.게다가 오복조차 이미 공산당 집권 당시엔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지 않았다. 청나라 시절부터 몽골인들의 이름에서는 오복을 찾아볼 수 없었다.[14]
굳이 몽골의 성씨 문제와 관련하여 몽골 인민공화국을 비판할 부분이 있다면 오복을 폐지하면서 정작 오복을 대체할 성씨 개념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는 게 옳을 것이다. 몽골에서 성씨 폐지 때문에 근친혼을 못 막아 막장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헛소문이지만 성씨나 그에 준하는 다른 개념[15]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사회에 비해 근친혼 방지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16]
칭기즈 칸의 후손들을 학살해서 보르지긴 후손이 거의 없다는 말도 보이는데 이것도 헛소문이다. 유사이래로 귀족을 제외하면 일단 몽골인 대부분이 성을 쓰는데 익숙하지 않았으며, 1920년대 공산혁명후 성이 폐지되었다가 1995년 다시 부활했지만, 대부분의 몽골인은 조상의 성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수가 칭기즈칸의 성인 보르지긴을 자기 성으로 사용했다. 이외에도 내몽골에 남은 보르지긴씨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호적에 등록하기 위해 중국이름을 만들 때 포(鮑)를 사용했고 이 성을 가진 내몽골인은 대체로 보르지긴씨라고 보면 된다.
4.2. 도시전설
투바 인민공화국을 소련에 가입시킨 투바 공산당 제1서기 살차크 토카(Салчак Калбак-Хөрекович Тока)가 이후 몽골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처이발상 앞에서 "여러분들도 소련에 가입하시죠?"라고 했다가 그 자리에서 뺨을 맞았다는 도시전설이 있다.[1] 몽골에서는 흔한 이름이다. 한국으로 치면 철수 이미지다.[2] 쉽게 생각하면 10대라는 어린 나이에 엄격한 수도 생활을 못 견뎌서 절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지금도 종종 불가에서는 출가했다가 승려 생활에 적응을 못해 절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3] 물론 이전에도 형식상일 뿐 칸의 실권은 없었다. 입헌공산군주제?[4] 그나마 간단 사원은 몽골 티베트 불교에서 상징하는 의미가 큰 사원인지라 1944년에야 유일하게 국가에서 운영하는 사원으로서 재개관되었다. 폐쇄된 기간 동안 소련군의 관리를 받았고 사격장, 마구간, 탄약고로 개조되었으며 관세음보살상이 파괴되는 등 여타 티베트 불교 사원들처럼 수모를 겪었다.[5] 일부에서는 사망자를 1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참고로 당대 소련에서는 많아도 200만 명 정도가 죽은 걸로 추산되는데 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율적으로는 몽골이 더 엄청나다.[6] 다만 정말로 내몽골과의 통일이 성사되었다면 몽골어의 몽골 문자 표기가 내몽골에서도 명맥이 끊어졌을 것이다.[7] 물론 중앙아시아처럼 소련에 의해 문자를 갈아치운 경우는 존재했지만 이전에 썼던 아랍 문자도 따지고 보면 외래문자였다. 몰도바는 라틴 문자에서 키릴 문자로 문자를 바꾸었지만 몰도바의 루마니아어는 아주 예전에 키릴 문자를 썼다는 명분이 있었고 전통 문자를 가졌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스탈린 시절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전통 문자라는 이유로 잘 썼고 전통적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했던 발트 3국도 소련의 지배 기간에도 라틴 문자를 계속 유지했다. 애초에 소련은 소수민족 문자교육을 장려했지만 중앙정부는 키릴 문자를 쓴다는 실용적 이유로 키릴 문자가 밀어낸 것이다.[8] 세로쓰기 문화가 있던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우종서다.[9] 1990년대 민주화 이후 몽골 민족주의자들과 어학자, 역사학자들이 다시 몽골 문자 표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 때문인지 호응은 적은 편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한자도 가르치듯이 몽골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몽골 전통 문자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한글처럼 표음문자라서 배우기 어려운 것은 아니고 대부분 몽골인들은 몽골 문자도 읽을 줄 안다. 2024년까지 몽골 문자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10] 참고로 중국 영토인 내몽골 지역에서는 전통 몽골 문자를 사용하며 몽골식 키릴 문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내몽골과 외몽골의 사이가 안 좋은 것과 별개로 양쪽의 교류 자체는 활발해서 내몽골인들이 일부러 외몽골식 키릴 문자 몽골어를 배우는 경우도 있다. 사실 키릴 알파벳 몇십개는 맘 먹고 외우면 하루이틀에 다 외우고 그 다음은 언어는 같기 때문에 내몽골인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11] 1918년 통계 기준 외몽골 할하 몽골인 성인 남성의 44.5%가 티베트 불교 승려였다. 강희제 시절 청나라 조정이 외몽골 부족들 간의 상쟁을 중지시킨 것을 계기로 부족 간 전쟁이 사라지자 실업자가 된 유목민 남성 상당수가 승려가 되었던 영향이다. # 처이발상이 티베트 불교가 몽골의 낙후의 원인이라고 본 것은 사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12] 처이발상의 후견인이던 소련의 중심국가인 러시아는 칭기즈칸을 악마화했다. 처이발상이 칭기즈칸을 고평가한다면 당장 소련이 처이발상을 내칠 수도 있었다.[13] 성씨로 알려진 보르지긴이 사실 오복의 하나다.[14] 오복이 폐지되기 전에 죽은 담딘 수흐바타르도 그냥 이름에 부칭이 전부고 내몽골 출신인 데므치그돈로브도 그 유명한 칭기즈 칸의 직계후손인 황금씨족임에도 앞에 보르지긴을 붙이지 않았다.[15] 아랍식 풀네임에서 본인의 이름 뒤에 아버지, 할어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이름 순으로 조상들의 이름들이 붙는 게 대표적이다.[16]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정확히는 유교가 보편화된 후)에서 유목민 문화권은 정주민 문화권에 비해 근친혼에 관대한 편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 황실 직계 혈통이 단절된 이유들 중 하나로 청나라 황실에서 일어난 근친혼이 제기될 정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