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د افغانستان د خلق دموکراټیک ګوند[파슈토어] حزب دموکراتيک خلق افغانستان[다리어]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 |
<colbgcolor=#cc0000> 약칭 | PDPA (영문) |
서기장 |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1965년~1979년) 하피줄라 아민 (1979년) 바브라크 카르말 (1979년~1986년)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 (1986년~1987년) 모하마드 나지불라 (1987년~1992년) |
창당 | 1965년 1월 1일 2022년 (무장단체로 부활) |
해산 | 1992년 4월 16일 |
당원 | 약 160,000명 (1980년대 후반) |
이념 | 아프가니스탄 내셔널리즘 좌익 내셔널리즘 세속주의 진보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1965년~1987년, 2022년~) 국가 무신론 (1965년~1979년) 이슬람 사회주의 (1979년~1992년) |
스펙트럼 | 좌익 극좌 (1965년~1987년, 2022년~) |
승계정당 | 아프가니스탄 국민연합당 (할크파) 아프가니스탄 조국당 (파르참파) 아프가니스탄 국민이슬람운동 (튀르크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무장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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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5년부터 1992년까지 활동한 아프가니스탄의 공산주의 정당. 소련의 괴뢰국이었던[3]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집권당이자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다. 1992년 모하마드 나지불라 정권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다.2. 역사
아프가니스탄 왕국 시대이던 1965년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바브라크 카르말에 의해 카불에서 창당되었다. 창당 직후인 1965년 치러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3명의 의원을 당선시켰고, 이후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도시 지역과 군부를 중심으로 하여 지지세를 넓혀나갔다.1967년 타라키와 카르말 및 그 지지자들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인민민주당은 타라키를 따르는 파슈툰 족 주도의 농촌 기반 파벌인 할크(Khalq)[4]와 카르말을 지지했던 도시 중하류층 기반의 파벌인 파르참(Parcham)[5]의 두 파벌로 분리된다. 다수파였던 할크파는 강경한 스탈린주의 성향으로 즉각적인 폭력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의 수립을 주장하였고 파르참파는 아프가니스탄이 혁명을 하기에 충분한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입장에서 통일전선 전술을 통한 인민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우선시하였기에 두 파벌 간의 노선 대립은 자명했다.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무혈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붕괴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이 들어선다. 인민민주당은 초기에 새로운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였으나 다우드 칸이 좌파를 탄압하자 지지를 철회하였다. 이후 1978년 인민민주당은 사우르 혁명(Saur revolution)이라 불리는 할크파 장교들 중심의 쿠데타로 공화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 때 할크파의 대표격인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초대 혁명평의회 의장을 맡아 국가원수에 취임하게 된다.
혁명에 성공했으나 이후 인민민주당의 내분은 가속화된다. 타라키의 심복이던 하피줄라 아민은 단기간 내 정부와 당의 요직에 있던 파르참파 대부분을 숙청하였고, 이후 타라키와 아민 간의 관계 역시 악화되어[6] 혁명 1년만인 1979년 아민은 타라키를 살해하고 혁명평의회 의장직에 취임했다. 더불어 국가 무신론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종교지도자와 이슬람 지식인들의 상당수를 숙청한 타라키와 아민의 스탈린주의적 공포정치는 현재의 탈레반으로 이어지는 무자헤딘의 발흥을 불러왔고,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소련의 군사개입으로 이어져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아프간 침공 당시 무자헤딘 소탕과 더불어 소련의 괴뢰 역할로 만족하지 않으려 했던 아민 대통령을 제거하고자 했고, 결국 아민은 국가원수가 된 지 채 몇 달 만에 소련군에 의해 사살되고 만다.
아민을 숙청한 이후 소련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혁명전술을 지지했던 파르참파의 지도자 바브라크 카르말을 혁명평의회 의장직에 앉히고 아프간의 내정에 대한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한다. 일각에서는 카르말이 인민민주당의 지도자가 된 1979년 후반부터 1992년까지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만을 소련의 괴뢰국으로 칭하기도 한다.[7] 한편 소련의 지원으로 집권한 카르말은 할크파 소속의 장교들과 정치인들을 숙청하지 않고 당 내에 남겨 두었으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무자헤딘과 싸웠으나 CIA 및 이란, 중국,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들을 상대로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이후 1986년 사임하고 소련으로 망명한 카르말의 뒤를 이어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가 1년간 의장을 맡았지만 이후 1987년 파르참파의 후계자이자 아프간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던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서기장 및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한다. 나지불라는 공산정권의 통치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완화하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1990년 인민민주당의 당명을 '조국당(Watan Party)'으로 개칭하는가 하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다당제 허용과 제도권 정치 참여를 전제조건으로 무자헤딘 측에게 유화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편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나지불라 정권은 당시 소련의 지원 아래 무자헤딘 반란 세력들과 내전을 치르며 1990년대 초반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나, 1991년 나지불라 정권을 지원하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결국 이듬해인 1992년 4월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후 인민민주당은 모든 권력을 잃고 해산되었으며, 이후 대부분의 당원과 전직 정부군 인사들은 압둘 라시드 도스툼의 무장단체이자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국민이슬람운동으로 흡수되거나 1990년대 말 탈레반 정권이 수립되자 탈레반 정권에 대항하는 북부동맹에 합류하여 당시 북부동맹을 지휘하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와 부르하누딘 라바니, 모하마드 파힘 등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과거 적대 세력이었던 옛 무자헤딘 출신의 지도부 인사들과 함께 탈레반과 싸웠다.
3. 부활?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로 아프간 전역이 탈레반의 손에 들어간 이후 아프가니스탄 내전이 한창인 2022년, 부활한 인민민주당을 자칭하는 무장단체가 영상을 업로드했다.# 이들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은 현재 부활하여 반 탈레반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으며, 수도 카불에서 무장 봉기를 준비하며 각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중이고 아프가니스탄 국민저항전선 및 아프가니스탄 마오주의 공산당과 일시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다만 해당 영상을 제외하면 근거가 빈약한 상태이며, 아프가니스탄의 현재 상황으로 인해 단체의 실존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까지 인민민주당이 분명한 실체로 부활했다 단정짓기는 힘든 상황이다.4. 역대 서기장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1 |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 1965년 1월 1일 ~ 1979년 9월 14일 |
2 | 하피줄라 아민 | 1979년 9월 14일 ~ 1979년 12월 27일 |
3 | 바브라크 카르말 | 1979년 12월 27일 ~ 1986년 11월 24일 |
4 | 하지 모하마드 참카니 | 1986년 11월 24일 ~ 1987년 9월 30일 |
5 | 모하마드 나지불라 | 1987년 9월 30일 ~ 1992년 4월 16일 |
5. 같이 보기
[파슈토어] [다리어] [3] 1979년 이후.[4] 파슈토어와 다리어로 '인민'을 의미한다.[5] 파슈토어와 다리어로 '깃발'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공산주의자 전체에 대한 비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악역 인물이 공산주의자들을 욕하며 "파르차미 도당"이라 칭하는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6] 타라키는 당내의 민주적 균형 유지를 위해 파르참파 인사들을 남길 것을 주장했으나 아민은 파르참파에 대한 자비는 없다며 강경책을 주장했다.[7] 이전 할크파 정권은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는 위성국이었으나 그 내정 및 외교에 있어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