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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11:38:35

겐리흐 야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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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e400>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Genrikh Grigorievich Yagoda
파일:1930_jagoda.jpg
본명 게나흐 게르셰노비치 야고다
(Генах Гершенович Ягода)[1]
출생 1891년 12월 7일
러시아 제국 리빈스크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야로슬라블 주 리빈스크)
사망 1938년 3월 5일 (46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신장 170cm
직업 정치인, 군인
정당
[[소련 공산당|]]
배우자 이다 레오니도브나 아베르바흐
주요 서훈[2] 레닌훈장
적기훈장 (2회)
노력적기훈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1. 일생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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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

소련의 정치인.

그는 리빈스크라는 도시에서 시계 제작자이던 유대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으며, 10월 혁명 이후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 아래에서 2대 부부장이 되었고, 제르진스키 사후에는 뱌체슬라프 멘진스키 아래에서 부위원장이 되었다.
파일:야고다와 예고로프와 보로실로프와 투하쳅스키와 가마르니크.jpg
왼쪽부터 야고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얀 가마르니크
이후 멘진스키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야고다는 1920년대부터 NKVD를 지휘하기 시작했지만 1931년 제 2위원장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934년 7월 10일. 멘진스키가 죽은 뒤 2달만에 NKVD의 위원장이 되었다. 이 시기 야고다의 최대 만행이자 업적(?)은 바로 소련의 강제수용소인 굴라크의 설립과 운영이다. 또한 수감자들을 강제 동원해 발트해-바렌츠해 운하를 파는 등 온갖 사업을 전두지휘했다.[3]

이후 대숙청 때 야고다도 최후를 맞이하는데, 이 대숙청의 도화선이 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 하지만 키로프 암살설은 스탈린이 지시했다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근래의 정설이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흘레브뉴크에 따르면 키로프 암살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의 목록 조작해 조사를 한 건 바로 니콜라이 예조프이다.

그는 후에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등이 기소된 첫번째 공개 재판을 수행했다. 하지만 중앙당은 이 때부터 야고다를 불신했다. 1932년부터 눈치 까고 있던 이들 블록을 수사하고 재판하는 게 너무 더뎠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이오시프 스탈린이 "야고다 동무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패당을 수색하기엔 능력이 모자란다"라고 말한 뒤 해임당하고, 예조프에게 밀려 NKVD 위원장에서도 밀려났다.

1937년 3월, NKVD에서 밀려난 뒤 우편통신부부장을 맡고 있던 그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이유는 그가 이전의 각본 재판에서 '피고인들의 죄는 단지 스탈린의 적이었기 때문이다'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고, 8년 전에도 니콜라이 부하린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 스탈린에게 밉보인 적이 있던 탓이었다.

1938년 3월에 야고다는 21명의 재판이라 불리는 각본 재판에서 독일의 첩자로 국가에 대한 반역 및 음모행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직후 바로 처형되었다. 당시 예조프는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처형 직전 옷을 모두 벗긴 알몸 상태로 만들어 그의 고환을 고문했다고 한다.

야고다는 죽으면서 자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형할 때 언젠가는 당신도 비슷한 꼴을 당할 거라는 경고를 수도 없이 받았는데 그걸 무시했다가 결국 똑같은 꼴이 됐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그리고 예조프에게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말대로 예조프는 2년만에 결국 같은 꼴이 되었다.

숙청 당시 그의 죄목 중에는 멘진스키고리키를 독살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다만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이었으니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 훗날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집권한 뒤 스탈린 집권기의 피해자들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야고다에 대한 복권도 언급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논의 끝에 야고다는 복권하지 않기로 결정되었고, 1988년과 2015년에 두 번이나 심의를 더 거쳤지만 역시 복권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대체적으로 수렴된 의견은 '사법살인을 저지르다 자신도 그 피해자가 된 야고다는 복권할 수 없다'였다. 다만 이 의견을 낸 사람들도 야고다의 사형 판결에서 그에게 씌워진 혐의 자체는 거짓이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후대의 인물인 예조프와 베리야와는 다르게 야고다에 대한 조사는 여러모로 난감했다. 91년생인 야고다는 1907년부터 볼셰비키의 일원이었고 제르진스키가 직접 발탁한 체카의 엘리트이자 1920년부터 체카 상무회의 일원, 1923년부터 체카의 3인자였다. 레닌시절부터 고위직에 있던지라 소련 정치권 입장에서는 야고다에 대한 복권과 전면적 재조사를 하는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2. 여담



[1] 야고다(Я́года)는 러시아어로 '딸기류'를 뜻하기도 하지만 인명 야고다(Яго́да)의 경우에는 강세가 다르기 때문에 이디시어 인명인 예후다(יהודה)가 변형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가명 겐리흐(Ге́нрих)는 독일어 이름 하인리히(Heinrich)를 러시아어식으로 옮긴 이름이다.[2]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전량 박탈[3] 다만 이 운하사업은 니콜라이 예조프의 '업적'이 더 많다. 훗날 예조프가 숙청될 때에도 마지막까지 유지했던 자리가 '수운인민위원장'인데, 운하 건설자에 맞는 자리이기도 했다.[4] 무슨 말이냐면 예조프가 야고다를 죽이고 싶어 환장했는데 이상성욕을 갖고 있고 서구 자본주의의 부패와 타락에 빠진 인간이며 그들에게 포섭되어 인민의 적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날조도 나름 그럴듯한 증거가 나와야 먹히는데 그 재료를 야고다 스스로 만들어준 셈.[5] 초반에는 임의적으로 제거할수 없으며 대숙청이 끝나서 정지척 편집증이 제거 되어야 정치고문을 바꿔서 해임시킬수 있고 아니면 내전을 일으켜서 제거 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다른 NKVD 수장 2명도 동일하다.[6] 소련의 중점을 통해서 고정적으로 숙청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NKVD의 수장들 전부 저 목록에 존재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니콜라이 예조프도 죽지 않고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