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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9:56:12

발레리 사블린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 발레리 미하일로비치 사블린
Вале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аблин
파일:Вале́рий_Миха́йлович_Са́блин.jpg
출생 1939년 1월 1일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사망 1976년 8월 3일 (향년 37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학력 프룬제 해군 사관학교, 레닌정치학교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3. 스따라졔보이 함 반란 미수 사건4. 어록5. 사후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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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해군 정복 차림의 발레리 사블린.jpg
(정복 사진.)
파일:해군용 방한 코트를 입은 발레리 사블린.jpg
(코트근무복 사진.)

소련의 군인이다. 레닌주의자로 호위함 스따라졔보이 호의 선상 반란을 주도한 반란자이며, 소련 인민들과 함께 무장하여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이후에 소련의 변혁과 재구성, 그리고 그의 숙원인 새로운 러시아 혁명을 실현하려 했었다.

최종 계급은 소령.

2. 생애

1939년, 대조국전쟁이 벌어지기 3년전에 레닌그라드의 해군 장교 가문에서 태어난 사블린은 어린 시절을 살벌하고 험악한 전시의 레닌그라드의 시가지 폐허에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생활하며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 자기 스스로의 미래 진로를 가업[1]에 따라 해군 장교가 되기로 결정한 사블린은 1955년, 16살의 나이에 프룬제 해군 사관학교에 사관생도 자격으로 입학하여, 해군 소속 정치장교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파일:사관생도 시절의 발레리 사블린.jpg
(생도 시절.)

1959년, 20살의 나이에 연인 관계인 니나와 결혼하여 가족을 꾸렸고, 슬하에 아들인 미하일을 두게 되었다.

사블린은 어린 학생일 때부터 원칙주의자이자 모범적인 우등생이였고, 선한 성품의 인격자였으며, 항상 주변의 부모님과 친구, 동료들로부터 유난히 고매한 인품을 가진 인간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길 원하는 사람이였다.

이에 흐루쇼프 시대인 1962년에 사블린은 23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과 부패로 가득한 공산당제거해야합니다."라며 편지를 '직접' '당의 제1서기'인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보냈었다.

당시에 이런 위험한 내용이 담긴 편지에 대해 제1서기인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에 대해 벙찌긴했으나 파문을 일으킬만한 편지를 보낸 사블린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이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는 않는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그 정도의 강력한 용기와 담력,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가졌던 사블린은 당 최고지도자에게 보낸 편지와 그 내용이 공산당과 정부 기관에 검열 과정에서 드러나자 그가 소속된 프룬제 군사학교의 해군 사관학교로부터 강한 책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문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장교가 될 자질이 있다는 최종 재평가를 받고, 1960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우등생으로서 졸업이 허가되어 발트 함대에 소속된 작은 기지 중 한 곳에 자신의 목적에 가까워지게 될 계기, 즉 자대배치를 명 받았다.

파일:사관생도 사열 중의 발레리 사블린.jpg
(생도 사열식 사진. 사진 속 두번째 사관생도가 사블린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사블린은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그의 오래된 목표,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치장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당 정치사업 활동 중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하는 당 정치사업들을 많이 거치면서 그가 진심으로 믿었던 공산주의에 더더욱 경도되었다.

사블린이 임관한 시기는 흐루쇼프~브레즈네프를 거치며 소련 사회 전반이 보수화되고 경직되어 갔기 때문에 소련 정부와 전연방공산당은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개념을 점진적으로 도입하고 있을 때였다.

이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과 각종 부조리, 그러한 악영향들의 실체화인 '노멘클라투라'들을 지켜보면서 사블린은 다시 소련 체제는 혁명가들이 아닌 관료들이 지배하는 체제가 되었으며, 이는 카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이상에 어긋났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일생 최대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파일:야간 당직 근무를 서는 발레리 사블린.jpg
(대위 시절에 촬영된 사진.)

1969년, 30세에 그는 구축함 함장 자리를 제의 받았으나, 그러한 출세 가도에 대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급 사상 교육 과정을 위해 레닌정치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고급이라 여겨지던 교육기관, 레닌정치학교 안에서도 배우거나 볼 수 있는 있는 지식이나 서적들이 당과 정부에 의해 검열되어 제한 및 한정되어 있음을 깨닫고, 결국 소련은 점진적 변화보다는 다시 10월 혁명과 같은 강력한 사회적 파장으로 바뀌어야한다는 생각을 단단히 굳히게 되었다.

3. 스따라졔보이 함 반란 미수 사건

파일:스따라졔보이 호 사진과 발레리 사블린의 서명.jpg
(1974년에 사블린이 서명한 스따라졔보이 함 사진.)
파일:스따라졔보이 호의 수병들과 카드 놀이를 하는 사블린.jpg
(스따라졔보이 함 승조원들과 휴식 시간에 갑판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

1975년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2]에 사블린은 자신이 근무하던 스따라졔보이 함이 정박한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수도이자 최대 항만 도시인 리가에서 동조자들을 모아 11월 8일에 함상 반란을 일으켰다.

사블린은 레닌그라드로 향해 혁명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아브로라함과 포템킨 반란을 본받아 기존 공산당과 정부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새로운 공산당과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인민들의 무장 혁명 참여와 혁명 의식 각성을 촉구하고 호소할 계획이었으며, 이에 따라 장교 투표를 통해 혁명 계획에 찬성한 8명의 장교를 제외한 나머지 반대표를 던진 장교 7명에 대하여, 장교들이 당직 근무 중 음주 행위를 한 것에 책임을 물어봐야 할 점이 있다며 함내 창고로 유인하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승조원들을 동원해 빠르게 무력화, 제압 및 감금하는 대응 조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은 운 좋게 사블린 충성파들에게 잡히지 않고, 발트해 바다에 뛰어들어 리가의 모항으로 수영해 도망쳐서 곧바로 이들의 반란 소식을 정부에 신고하였고, 나머지 함내에서 사블린의 반란 계획에 반대하던 소수의 승조원들이 그의 계획을 방해[3]하면서 그의 혁명 계획은 점차 실패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파일:스따라졔보이 호를 추격하는 발트 함대와 해군 항공대.jpg
(스따라졔보이 함의 반란을 진압하려 추격 중인 발트 함대 수상함들과 항공기들. 당시의 급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윽고 반란과 국가 반역에 대한 신고 제보를 들은 소련 해군KGB는 사블린 충성파들이 몰고 있는 스따라졔보이 함을 추격하였고, 처음엔 같이 진압 작전에 참여한 소련 해군 항공대가 이를 망설이듯이 거부했으나, 결국 사태가 사태인만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소련 해군 항공대와 함선의 공격에 함선은 무력화 되었고 KGB 특작부대와 소련 해군 육전대 특수부대들이 사블린파 장병들, 그리고 반란분자의 지도자인 발레리 사블린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불에 타며 발트해 한 가운데에 멈춰버린 스따라졔보이 함에 강습, 승함한 직후 이윽고 빠르게 반란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함선 창고에 사블린과 그의 일당들이 유인하여 무력화 내지 감금하였던 장교들이 진압 작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사블린은 진압하고자 달려드는 함장의 권총에 다리에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후 진압군 특수부대에 의해 스토로제보이 함 선내 창고로 끌려가 부상당한 상태에서 거꾸로 밧줄에 매달린 채로 무력화된 사블린은 동조자들과 함께 말 없이 다른 함선이 스따라졔보이 함을 견인, 본대로 긴급 복귀를 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신세가 되면서, 그의 혁명은 실패하였다.

6시간 만에 실패로 끝나버린 사블린의 반란은 사블린 본인에게는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따라 움직인 실천론적인 혁명적 움직임이였으나, 소련의 지도부이자 지배층인 노멘클라투라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명백한 반란 행위이자 정적 제거와 반대파들을 향해 본보기로 삼기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그가 공산주의 이념에서 기인한 혁명을 실천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KGB를 시켜 존재하지도 않는 자신들과 연결된 서방의 첩보기관이나 반체제단체에 대한 정보를 모진 육체 고문과 정신 심문으로 캐내려했으나, 사블린은 고문과 심문으로 발생하는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부정하고, 입을 열기를 거부하면서 완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후 열린 기밀 군사재판에서 발레리 사블린은 본래라면 반란 혐의와 내란 선동 혐의 등등으로 혁명에 대한 완전한 실행까지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교화형 15년형을 선고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법정의 논의가 있었으나, 사회주의 전위대의 엘리트 중 하나인 정치장교소련을 향해 '수정주의'를 단죄하고, 소련을 변혁하고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했다는 소식이 서방에 퍼지지 않도록 이 사건과 관련하여 정보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였음에도 수많은 소련군신호스웨덴의 군용 조기 경보 및 레이더 감시망과 서방의 대소련 감시망에 잡하면서 서방의 추문이 이어지자, 사블린의 행동 계기와 목적이 단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숨겨진 전 발레 무용수 애인처럼 소련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망명하려 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 술책은 당국에게는 아주 편리했다. 사블린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그를 잡범으로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금전적인 문제로 서방으로 탈출을 기도한 자로 몰면 되었다. 이러한 술수들은 이 사건의 의의를 축소시켰기 때문에 편리했다. 그의 행위는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라 단순히 범죄에 불과했다고 말하면 되었다.[4] 그리고 소련 지도부의 위신과 명예에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했다는 점 때문에 당시 소련 서기장이였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악을 박박쓰며 내린 처형 요구에 군사법정은 혐의로는 노동교화형 이상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법률적 근거와 판단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도부는 그의 국가 반역죄에 대한 행동에 책임을 반드시 지게하겠다며, 온갖 직권을 남용한 끝에 법정에서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하였다.

파일:처형 직전에 찍은 발레리 사블린의 사진.jpg
(1976년, 처형 직전에 찍은 머그샷.)

그 후 1976년 8월 3일에 발레리 사블린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그의 시체는 으레 높으신 분들에게 혁명이란 승부수를 걸려고 했던 실패한 혁명가들의 말로가 그러하듯이 KGB에 의해 비밀 매장지에 묻혔고, 그의 행보가 완전히 풀린 소련 해체 이후에서야 스따라졔보이 함 반란을 사블린이 주도하였다는 소련 공산당과 정부에 의해 기밀처리된 역사가 공개되었다.

그가 소련 정부에 의해 처형된 이후에 소련 당국에서는 사블린의 함선이 NATO 영향권 내에 있던 스웨덴 쪽으로 배를 몰았던 것을 근거로 들어 서방과 소련 인민에게 도망치듯이 망명하려던 반역자라고 발표하였다.

사회적 파급 효과를 우려해서 반란에 참여했던 다른 가담자들은 비교적 낮은 형기의 노동교화형이나 사회봉사형을 선고받았다. 공범인 알렉산드르 셰인(Александр Шеин)의 경우에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 결정적으로 반란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교화형 10년을 선고받았다.

4. 어록

"난 왜 이런 행동을 하려할까? 나는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야.

편안한 부르주아의 삶이 아니라 모든 정직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불어넣는 밝고 진실된 삶을 나는 사랑하지.

나는 확고하게 믿어. 58년 전인 1917년과 같이 나라에는 혁명적 의식이 빛을 발할거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이뤄낼거야."

- 1975년 11월 7일, 반란 실행 전에 아내, 니나 사블리나에게 보낸 편지.
https://saint-juste.narod.ru/Sablin_radio.html

- 1975년 11월 8일, 반란 당일에 소련 전 인민에게 보내는 혁명 참여 및 독려 호소를 위한 무선 라디오 선언문 전체(러시아어, 장문.)
"친애하는 동무들,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이 편지를 쓰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마도 불안과 고통, 분노와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행동은 오직 하나의 갈망에 따른 것이였습니다. 우리 인민, 선하고 강인한 인민들정치적 겨울잠에서 깨어나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갈망 말입니다.

- 1975년 11월 8일. 체포 과정에서 압수되었던 고향의 친구와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
"역사는 사건들을 정직하게 판단할 것이다. 너는 아버지가 한 행위에 대해 결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을 굳게 믿어라.

비판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결코 되지 말아라. 이런 사람들은 위선자들이다.

자신의 신념행동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나약하고 쓸모 없는 인간들이다.[5]

아들아, 용기를 가져라. 이 삶이 훌륭하다고 굳게 믿거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혁명이 언제나 승리할거라 믿거라."

- 1976년 8월 3일. 처형 전, 자신의 아들, 미하일 사블린에게 보낸 편지.
"저는 혁명 의식이 우리 인민들 사이로 널리 퍼져 불붙을 것이라 믿습니다."

- 1976년 8월 3일. 처형 전, 자신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

5. 사후

파일:발레리 사블린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 사진.jpg
(중위 시절, 아버지 미하일 사블린 해군 대령과 찍은 사진.)
파일:발레리 사블린과 그의 아내, 아들.jpg
(아내 니나 사블리나와 아들 미하일 사블린과 찍은 가족사진.)

그가 총살형을 선고 받고 형이 집행되어, 죽은지 8년 후인 1984년에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이 출간되었고, 죽은지 14년 후에 해당 소설 기반의 영화가 개봉하게 되었다.

이렇듯 붉은 10월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 마르코 라미우스의 설정과 붉은 10월 호 선상 반란을 주제로 한 이야기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소련 관료집단에 의해 날조된 정보에 기반하긴 하였으나, 점차 본래 역사적 기록대로 그의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6. 기타

23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랴티야 지역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그에 못지 않은 이상과 이를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며,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 공산주의자 오토 브라운 등의 인물들이 협조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서 이상을 포기하고 권위주의 독재자로 타락하거나[6], 끝까지 이상을 유지하며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할수도 있다.
이퀘스트리아를 지배하던 공주들이 실종되자 공산당이야 말로 최고의 파티[7]라면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이후 공주들이 귀환하자 공주들에게 인정을 받아 총리자리에 취임한다.[스포일러]
나중에 같은 공산주의자인 스타라이트 글리머와 결혼하는 해피엔딩.


[1]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군 장교이자 해군 복무자였었다.[2] 혁명 전까지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써서 10월 25일이지만, 그레고리력은 11월 7일이다.[3] 그의 혁명 계획에 반대하던 무전병이 사블린의 혁명에 대한 참여와 지지 호소를 하던 것을 중간에서 민간 전파에서 군용 전파로 바꾸어, 소련 지도부가 때아닌 새벽에 깨자마자 당과 해군사령부가 발칵 뒤집힌 점 등[4] 러시아의 역사학자, 미콜라이 체르카쉰.[5] 마르크스주의 정파들에서는 이념에 기반한 행동적 실천론을 강조한다. 발레리 사블린의 입장에서 노멘클라투라들은 현실과 타협하고 소련이 부정부패와 온갖 부조리로 국가와 인민이 천천히 질식해 죽어가는데도, 소련의 건국과 존재를 위한 이상을 부정하고 수정주의의 길로 들어서려 한, 한 마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면피와 명분 삼아 인민들의 편의와 복지는 대충 챙긴 뒤에 후순위으로 두고 자기들의 이권을 챙기기 급급한 반동분자들로 보고 있었던 듯하다.[6] 이 루트로 가도 부국강병은 가능하지만 이를 위해 이상을 포기했다는 점이 계속해서 강조된다.[7] 정당을 뜻하는 파티와 축하파티가 영어로는 동의어인것을 이용한 언어유희.[스포일러] 참고로 스테이블린이 아닌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 세계관의 진짜 발레리 사블린 역시 차원 이동을 통해 등장하여 해군제독으로 평행세계의 자신의 혁명을 직접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