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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9:59:36

폴 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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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아돌프 볼커 주니어
Paul Adolph Volcker Jr.
파일:폴 볼커.jpg
<colbgcolor=#00001b><colcolor=#ffc224> 출생 1927년 9월 5일
미국 뉴저지 주 케이프 메이
사망 2019년 12월 9일 (향년 92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재임 기간 제12대 연방준비제도 의장
1979년 8월 6일1987년 8월 11일
학력 티넥 고등학교 (졸업) (-1945년)
프린스턴 대학교 우드로윌슨 스쿨 (경제학 / B.A.) (1945-1949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정치경제학 / M.A.) (1949-1951년)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1951-1952년)
정당

[1]
경력 미국 재무부 국제담당 차관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1979년 8월 6일1987년 8월 11일)
대통령 경제회복 자문위원회 의장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제12대 연방준비제도 의장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에 임명된 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에도 연임하여 8년간 재임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기,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해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폭등하던 스태그플레이션 시기에 통화 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이름에는 인플레이션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실상 세계 경제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구성원들은 성향에 따라서 매파(Hawk), 비둘기파(Dove), 박쥐파(Swinger)로 분류되는데, 통화정책 결정에서 매파는 물가안정 및 경기안정을 중시하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 긴축을 선호하고, 반면 비둘기파는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더라도 완전고용과 경기부양을 강조하는 '완화' 선호 인물을 뜻한다.

2. 상세

The Federal Reserve...is in the position of the chaperone who has ordered the punchbowl removed just when the party was really warming up.
중앙은행의 역할은 파티가 한창일 때 접시를 빼는 것이다.
폴 볼커가 존경한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주니어 전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이 한 말.[2]
파일:TAEDAQGV2GOQPERSWMX2WEL2LE.jpg
한국에서 묘하게 유명한 볼커의 불주먹. 인플레이션 파이터였던 그의 캐릭터가 투영된 이미지라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70~8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던 고물가 인플레이션을 잡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70년대 초반과 후반 닉슨 쇼크와 1·2차 오일 쇼크로 찾아온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 물가가 급등하자 취임 2개월만인 1979년 10월 긴급 연방 공개 시장 위원회(FOMC)를 개최해 한 번에 금리를 무려 400bp 올리는(11.5% →15.5%) 초강수를 시작으로 미친듯이 금리를 폭풍 인상, 기준 금리를 연 20%대까지 끌어올리는 초고금리 정책을 썼다. 이 사건을 볼커 쿠테타, 제2의 토요일 밤의 학살(Saturday Night Massacre)라고 부를 정도.[3] 오죽하면 전 세계의 경제인들이 볼커가 자기 키만큼 금리를 올렸다는 농담을 할 정도이다.[4] 볼커가 올린 금리와 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들과의 비교.[5]

브레턴 우즈 체제가 시작된 1944년부터 닉슨 쇼크가 발발하기 전인 1971년까지, 미국 정부는 미국 달러 35달러 당 1온스의 금으로 교환해 줌으로써 미국 정부가 발행한 피아트 머니(Fiat Money, 명목 화폐=종이 화폐)에 대한 보증을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막대한 전쟁 비용이 필요했다. 즉 금 수입은 없는 데도 불구하고 미국 달러 화폐는 계속 찍어내어 그것으로 월급을 주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미국 달러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불신이 생긴 프랑스 등 몇몇 나라들은 자국이 보유한 외환 보유액인 미국 달러를 미국에 돌려줄 테니 즉시 금으로 인출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이에 닉슨은 금과 달러의 교환을 못해 주겠다는 선언에 이른다. 닉슨 쇼크 이후 1980년까지 금 1온스의 가치는 기존의 미국 달러 35달러에서 미국 달러 1,000달러까지 치솟았다. 즉 미국 달러는 믿을 수 없다라는 불신이 전 세계 투자자들을 지배했다. 금 1온스 당 미국 달러의 가격이 30배가 올랐다는 것은 미국 달러의 가치가 1/30 토막이 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구원자가 폴 볼커였다. 1979년에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통화 긴축을 통해 결과적으로 1980년 기준 금리를 연 20%대까지 끌어올리는 초고금리 정책을 편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10% 정도인데 금리를 20%대로 올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미국 달러 예금만 해도 20%나 되는 이자를 주는데 굳이 금에 투자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서 끊임없이 추락하던 달러의 위상을 회복시켰다. 여기에 헨리 키신저의 '페트로 달러 시스템'의 확립 또한 달러의 세계 패권을 지켜내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

물론 폴 볼커의 초고금리 정책은 처음부터 지지받던 정책은 아니었다.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면서 물가가 이미 폭등했는데 볼커의 초고금리 정책으로 경기마저 침체되자 당시 미국 중소기업의 40%가 도산했을 정도였으며, 실업률이 10%를 넘나들 정도로 실업자가 속출하는 등 단기적으로 엄청난 불황을 초래하였다. 상황이 이렇자 볼커를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으로 앉힌 지미 카터는 당연히 날아갔고(...), 이때 오일 쇼크로 침체였던 미국의 제조업 쇠퇴에 가속도가 붙었는데 오죽하면 이 당시 일본 경제력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말이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지하게 논의되었을 정도였다. 1981년부터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지만 경기는 침체해, 민주당을 경제 문제로 공격해 정권 교체했던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폴 볼커에 대한 비난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1983년 초반까지만해도 레이건의 재선 여부는 불확실했으며, 볼커는 살해 위협을 당했고, 그 때문에 볼커는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곡소리에도 불구하고 볼커는 초고금리 정책을 계속 이어갔다.[6]

파일:time-19820308.jpg
볼커의 얼굴을 실은 타임지 1982년 3월 8일자 표지. '금리의 고통(Interest Rate Anguish)'.

볼커의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하였고 미국 경제는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볼커가 초고금리 정책을 펼친 덕분에 정부의 개입 없이 부실 기업들은 저절로 정리되면서 거품을 방지해낼 수 있었으며 이는 일본 거품 붕괴 사태, 아시아 금융 위기 때 미국 경제가 별 타격을 받지 않고 조용히 넘어 갈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초고금리 정책을 '볼커 쿠데타'라고 하는데 이후로 실업률 억제대신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표로 하는 통화주의(monetarism) 기조가 지배하였다.

볼커의 통화 긴축은 경제학사면으로 케인스학파에 대한 통화주의의 완벽한 승리로도 해석된다. 통화주의는 인플레이션을 통화 증가의 결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했다. 그때까지 여전히 학계를 주름잡던 케인스학파는 실업과 인플레이션의 상충 관계(필립스 곡선)에 집착해 스태그플레이션에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놓지 못했다. 볼커의 인플레이션 퇴치 이후 통화주의는 전 세계 중앙은행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볼커는 긴축 정책이 단기적으로 투자 억제 및 불황을 초래하지만, 기업 구조조정 촉진, 실업률 증가, 임금 인상 억제 등을 통해 장기적으로 생산성 향상 및 이윤율 상승을 가져온다고 보았다.[7]
볼커는 1979년 10월 6일 경기 침체 상황임에도 기준 금리를 15.5%로 4%포인트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 불렀다. 그러자 일반 은행금리는 무려 20% 가까이 뛰어올랐다. 볼커의 고금리정책에 대해 카터 행정부는 몹시 불쾌해했다. 그럼에도 카터는 대통령이었지만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주기 위해 볼커의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다.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고 대신 레이건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볼커는 고금리 정책을 더욱 독하게 밀어붙였다. 1981년 6월에 기준 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무서운 결단이었다. 볼커 의장은 '철의 볼커'라는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통령을 포함,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을 꺾지 않고 강력한 금리 인상 드라이브를 걸었다. 당시 레이건의 참모들은 “볼커 연준 의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카터처럼 연임에 실패한다”는 경고를 쏟아냈지만, 레이건은 연준의 독립성을 지켜 개입하지 않았다. 볼커는 1981년 기준 금리를 21.5%까지 올렸다. 이렇게 고금리는 3년이나 지속되었다.

1981년, 빚더미에 앉게 된 미국 농민들이 대거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으로 상경했다. 이들은 도심 한복판을 행진하고 연준 건물을 봉쇄하며 볼커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사상 초유의 고금리 직격탄을 맞고 소속 회사가 문을 닫자 앙심을 품은 한 남자는 연준(FRB) 건물에 무기를 들고 난입하는 소동을 벌였다. 키가 2m가 넘는 볼커는 재직 중에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 정도로 온갖 시위와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이자율이 20% 선으로 치솟으며 실업률은 10%를 넘어섰다. 이로 인해 미국인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소비는 급락했다. 자동차 회사들이나 건설회사 등은 파산 상태로 내몰렸다. 그러나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인플레이션을 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는 장래가 없다는 것이 볼커의 생각이었다.

1981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이자가 높으니 돈들이 은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준 금리 21.5%와 그 무렵의 인플레이션 14% 차이만 해도 7%포인트가 넘는 고금리였다. 시중 유동성이 줄어드니 인플레이션이 잡히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율이 한 해 전의 14.6%에서 9%로 꺾였다. 1982년에는 4%로 잦아들었고, 이듬해에는 2.36%까지 떨어졌다. 연준은 긴축통화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이겨냈다. 폴 볼커가 경제가 충분히 고통받았다는 판단 아래 긴축을 풀자 경제는 힘차게 되살아났다. 1980년 4월 817포인트까지 내려갔던 다우지수가 1983년 3월 1130포인트까지 상승했다. 불안한 시기가 지나자 시장은 미국 200년 역사상 최고라 할 정도의 강세장이 시작되었다. 주식투자자들은 꾸준히 늘어나 1985년 말에는 4000만명을 넘어서면서, 1987년 1월 8일에는 다우지수 2000선을 돌파했다. 1000선을 돌파하는 데 76년이 걸렸고, 2000선을 돌파하는 데는 14년이 걸렸다. 이때가 미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였다. 볼커는 1987년까지 8년 동안 연준 의장을 지냈다. 그의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볼커가 이루어 놓은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토대로 경쟁력 있게 미국 경제를 이끌었다.
출처

볼커가 유발한 국제적 금융 긴축은 이미 한계선에 있던 소련의 경제 상황에 치명타를 가하면서 소련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평이 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서방권에서 돈을 빌려 경제를 꾸려가던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8]이 볼커의 강력한 긴축으로 인한 강달러 전환으로 줄줄이 외채 상환 부담에 직면하며 경기 침체가 심해지게 되었는데 경제를 지원해 줘야할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휘말리던 상황인데다가 1985년과 1986년에 이르는 유가 폭락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참사로 재정에 부담이 심해진 상황이라 이들 국가에 대한 경제 원조를 축소 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결과적으로 동구권 붕괴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 즉,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더라도 소련의 부담을 가중시킨 공로는 있다고 할수있다. 따라서 '볼커 쿠데타'#는 미국이 양강이 아닌 제 1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만든 계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실, 볼커덕에 레이건은 카터를 꺾고 당선되긴 했지만 당선과 함께 급냉각됐던 미국 경제 상황을 물려받았던 레이건 대통령이 볼커를 재신임하고 8년간 임기를 보장한 것도, 사실 국내사정 외에도 총 한 발 쏘지 않고도 미국의 통화 정책으로 소련을 말려죽일 수 있겠다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을 정도다.

반면 금리를 인상하면서 중남미와 동유럽, 아프리카 상당수 국가들의 달러가 전부 미국으로 회수됨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외채 부담이 상상 이상으로 커지면서 국가 부도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제3세계와의 외교를 중시하는 쪽에서는 고금리 정책을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나라가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이집트, 소말리아 등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소련 재정의 부담만 아니었다면 냉전의 흐름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당시 중국이 개혁 개방 정책을 펴면서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안 와서 망정이었지... 당장 한국만 해도 외채 망국론이 퍼질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특히 당시 멕시코의 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미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유가가 하락하기 시작하면서[9] 외채 상환 부담이 늘면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으며, 그 후유증이 오랜기간 이어졌다.[10] 이 당시 금융 위기의 여파로 멕시코의 주요 기업들이 파산하거나 구조조정에 나섰고, 국가 예산 또한 외채 상환에 우선적으로 할당되고, 복지 예산은 삭감당하는 바람에 실업과 빈곤이 크게 늘며 멕시코의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그러하니 자연히 실업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가려는 멕시코인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는데 미국 전체 인구에서 멕시코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으며, 멕시코 마피아들도 실업자들과 빈민들을 대거 끌어들이며 세를 늘리게 되었다.[11] 미국 달러화와 경제는 살렸지만 그 대신에 멕시코의 경제와 사회를 희생시켰고, 마약 문제에 있어서 또 하나의 골칫덩어리를 만들어 버렸으니 부작용이 어지간히 만만치 않다는 얘기라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정권 시기 2009년부터 2011년까지 경제회복자문위원 위원장을 맡았다. 이때 글래스-스티걸 법 폐기 이후 10년만에 불거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금산분리를 다시 강화하는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의 입안과 설계에 관여했고, 2010년 버락 오바마가 발표한 상업은행이 고수익을 추진하기 위해 자기자산이나 차입금으로 채권과 주식,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행위를 제한하는 강도높은 상업은행의 고위험 투자 감시 및 금지 법안을 관철했다. 이것이 일명 볼커 룰.#.

1993년에 출간된 회고록으로 'Changing Fortunes:The World's Money and the Threat to American Leadership'이 있다(국내에는 2020년에 '달러의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서평

그가 남긴 사진 중에 타임에 올라올 정도로 시가를 피우는 사진이 많은데 간지가 쩔어준다. 검색 맨 앞에 나오는 사진은 당시 연방의회 청문회에 출석했을때 재킷 앞주머니에 시가 4개를 꽂아넣고 이거 다 태울때까지 할 말 하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어디까지나 공무원으로 급여는 2019년 기준으로 20만 달러 정도로 연방 정부 최고위 공무원 중에서 크게 높지 않은 편[12]이라 일반 가게에서 파는 최하급 시가를 주로 피웠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까지 적은 액수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개인성향이 검소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옷도 기성복을 오랫동안 입고 다녀서 빤짝빤짝하게 빛났다는 후문도 있다.# 오죽하면, 이 사람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8년 임기를 채우고 퇴임할 때 연임 제안이 있었지만 포기하면서 한 말이, 시가 때문에 양복 주머니를 자꾸 태워 먹어서 그거 수선하느라 돈을 다 써서라고 농담을 던졌을 정도.

[1] 당적과 별개로 정치적 성향상으로는 보수주의자로 분류된다. # 볼커가 현역일 당시에는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 성향의 민주당원들의 세가 어느정도 남아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대통령들의 성향이 중도~진보였던 것과는 반대되기는 했어도 특이한 건 아니었다.[2] # 그는 1951년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을 쟁취한 인물이다.[3] 제1의 토요일 밤의 학살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각되어 특별검사와 법무장관이 줄사표를 쓴 날이다. 이날은 토요일이라 당시 그 어떤 언론사도 취재를 나오지 않았고, 당시 미국의 주요 이슈는 이날 있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백악관 방문이었다. 이날 대뜸 기자들을 소집하는 바람에 언론들은 투덜대면서 뭔 큰일이 있길래라며 연방준비제도 브리핑룸에 들어갔더니... 그 이후 교황의 백악관 방문은 완전히 묻혀버린 발표가 이어졌다.[4] 이 사람의 키는 무려 201cm였기 때문. 미국에서의 별명도 Tall Paul.[5] 이 짤방(볼커 201cm, 그린스펀 180cm초, 버냉키 170cm초, 옐런 155cm 내외) 의 예언은 제롬 파월(키 약 180cm 초반)이 0.25%였던 기준 금리를 1년만에 5.5%까지 올리면서 실현되었다.[6] 이렇게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기가 침체하면 당연히 지지율은 추락한다. 그래서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은 이런 금리 상승 국면에서 정치권의 압력을 꽤나 많이 받는데,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을 주장하며 밀어붙인 상황에서의 대통령은 대부분 떨어졌다. 볼커 이전에 윌리엄 마틴 의장이 1968년 린든 존슨의 금리 인하 압박을 거절하고 밀어붙이면서 린든 존슨은 재선 출마조차 못했고, 반대로 리처드 닉슨 시대 아서 번즈 의장은 닉슨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저금리를 유지하여 1972년 닉슨의 재선에는 영향을 미쳤지만, 이때 키운 인플레이션이 결국 오일 쇼크와 겹치며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확장되는 동안 공화당 눈치만 보면서 아무것도 안하다가 결국 후임 볼커가 카터 정권을 날릴(...) 각오까지 하고 고금리로 전환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만들었다.[7] 반면 당시 미국 정부의 재정 정책은 팽창적이여서 통화주의의 원칙과는 배치되었다. 미국, 영국 정부의 경우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예산 축소 및 균형 재정을 목표로 내세우고 예산을 축소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은 정부 지출 규모(GDP 대비 비중)를 꾸준히 증가시켰고, 또한 세제 구조 개편 및 적자 재정에 기초한 예산(특히, 군비 지출) 증가 형태의 팽창적 재정 정책을 사용하였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시기에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과 영국의 대처 정권은 감세가 노동 의욕 제고와 투자 촉진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는 가설을 근거로 소득세율을 일률적으로 내리거나 최고세율을 대폭 인하하는 방식으로 부유층에 유리한 역진적 세제 개편을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상속세율의 인하 추세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혹은 레이거노믹스의 결과는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 소위 쌍둥이 적자로 이어졌다.[8] 아무리 냉전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경제 교류는 생각보다 활발했다. 서구권 국가에서 소련에서 가스와 석유를 수입하고 소련도 서구권 국가에서 일정수준의 농축산물을 수입해나가는 구조였다.[9] 이 당시 멕시코는 유가 상승에 따라 인프라 투자를 위해 외채를 대규모로 빌렸는데, 1981년도부터 유가가 고점을 찍고 하락했고, 이것이 금리 인상과 겹치면서 멕시코 경제에 엄청난 타격이 되었다.[10] 아닌게 아니라 멕시코의 월 최저 임금이 2020년대가 되기 이전까지 미화 200불이 안되었다. 당시 멕시코 정부에서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임금을 억눌렀는데 그 여파이다.[11] 다만 이 시대에는 파블로 에스코바르라는 콜롬비아 마피아가 껌 좀 씹던때라 콜롬비아 마피아가 메이저였고, 멕시코 마피아는 중간 도매상 정도의 위상이었다. 멕시코 마피아들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것은 콜롬비아 마피아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21세기의 일이다.[12] 참고로 대통령이 40만 달러 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