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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의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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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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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8DC><colcolor=#000> 영국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
Mary of Teck
파일:Queen_Mary_by_William_Llewellyn.jpg
이름 빅토리아 메리 어거스타 루이즈 올가 폴린 클로딘 아그네스
(Victoria Mary Augusta Louise Olga Pauline Claudine Agnes)
출생 1867년 5월 26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사망 1953년 3월 24일 (향년 8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말버러 하우스
신체 168cm[1], O형(Rh-)
배우자 조지 5세 (1893년 결혼 / 1936년 사망)
자녀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메리, 헨리, 조지,
아버지 테크 공작 프란츠
어머니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형제 첫째 남동생 아돌푸스, 둘째 남동생 프랜시스, 막내 남동생 알렉산더
종교 성공회
서명 파일:테크의 메리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어린 시절3.2. 약혼3.3. 요크 공작부인3.4. 웨일스 공비3.5. 왕비3.6. 왕대비3.7. 대왕대비, 사망
4. 평가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6. 창작물에서의 모습7. 여담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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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국왕 조지 5세의 왕비. 에드워드 8세조지 6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의 친할머니이자 현 영국 국왕인 찰스 3세의 외증조할머니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는 흔히 메리 왕비(Queen Mary)라고 부른다. 메리라는 이름과 철자 및 발음이 비슷한 메이(May)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2]

2.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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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문장

3. 생애

3.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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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33px-Family_of_Teck.jpg
1867년 5월 26일, 켄싱턴 궁전에서 당이모인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났던 방과 같은 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천상혼 가문 출신인 테크 공작 프란츠였다. 할아버지였던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방계 왕족[5]이었으나 할머니 클라우디아는 통치 가문의 후손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로 조지 3세의 7남 아돌푸스 프레더릭 왕자의 막내 딸이였다.[6]

어린 시절 켄싱턴 궁전에서 자랐으며, 앨버트 왕세자의 자녀들과 또래였기 때문에 종종 어울려 놀기도 했다. 어머니 메리 애들레이드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 했고, 메이에게 빈민가를 방문하게 하는 등 여러 자선 활동을 경험하게 했다.

조지 3세의 증손녀로서 영국의 왕족이긴 했지만 귀천상혼 가문의 공녀였기 때문에 재산이 거의 없었다.[7] 어머니 테크 공작부인이 외할머니인 케임브리지 공작부인으로부터 매년 돈을 받긴 했지만, 함부로 많은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해 버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다. 결국 테크 공작은 많은 빚에 시달렸고 1883년 돈을 절약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지내야 했다. 그들은 잠시 이탈리아피렌체에 머무른 적이 있었는데 메이는 그곳의 예술을 즐겼다고 한다.

1885년에 메이의 가족은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고, 이후 메이는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지냈다. 또한 이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대공비 아우구스타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메이는 거의 평생을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3.2. 약혼

1886년, 성인이 된 메이는 사교계에 데뷔했고 궁중에 소개되었다.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 아닌 유일한 여성 왕족으로서 7촌인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신붓감으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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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w137822.jpg
메리와 앨버트 빅터 왕세손의 약혼사진
1891년 12월, 메이와 앨버트 빅터 왕세손은 약혼했다.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이 메이의 강인한 성격과 사명감을 좋아했고, 결국 귀천상혼 가문의 공녀임에도 왕세손비로 낙점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약혼한 지 6주 만에 앨버트 빅터 왕세손이 인플루엔자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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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ictoria_Mary_of_Teck.jpg
결혼식 직전의 테크의 메리
앨버트 빅터 왕세손을 이어 왕세손이 된 요크 공작 조지 왕자는 애도 기간 중 눈에 띄게 메이와 가까워졌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여전히 메이를 손주며느리로서 마음에 들어했다. 1893년 5월, 조지 왕세손은 메이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에 빠졌고 조지 왕세손은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썼으며, 아버지 에드워드 왕세자와는 달리 절대 정부를 두지 않았다.

3.3. 요크 공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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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w157278.jpg
결혼 사진
메이는 조지 왕세손과 1893년 7월 6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8][9] 두 사람은 신혼을 노퍽의 요크 코티지에서 보냈고, 사이에서 슬하 5남 1녀(에드워드, 앨버트, 메리, 헨리, 조지, )를 두었다.

메리와 조지는 다정하지 않은 부모로 비춰지기도 했지만[10] 아이들에게 음악과 역사를 가르친 재미있는 어머니였다.[11]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공들여서 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1901년 1월 22일 시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여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올랐다. 1901년 11월까지 메이는 콘월과 요크 공작부인으로 불렸으며, 8개월 동안 영연방을 순방했다.[12]

3.4. 웨일스 공비

1901년 11월 9일, 긴 순방을 마친 왕세자 부부는 마침내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의 작위를 얻었다.[13] 1905년 메리는 마지막 아이인 존을 난산으로 얻었는데, 이후 존 왕자는 간질과 호흡 질환을 앓게 된다.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1905년 10월부터 또 8개월 동안 순방을 하며 각종 의무를 이행했다.

시아버지인 에드워드 7세는 아들 조지가 왕세자(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책봉된 이후 정무 경험을 주려고 했다. 이는 에드워드 7세 그 자신이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결정으로 왕세자 때 국정 운영을 경험하면서 승계 이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 수많은 서류를 아들과 같이 공람했는데 여기에 메리까지 동참시켰다고.

3.5.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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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ry of Teck_Queen of British.webp
1910년 5월 6일,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여 남편 조지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5세는 아내의 이름인 빅토리아와 메리 중 어떤 이름으로 불릴 것인지 아내에게 물었고, 그녀는 시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우려해[14] 메리를 선택했다. 대관식은 1911년 6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됐다.[15]

왕비 재위 시기 초반에는 시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대비와 갈등을 빚었다. 두 사람은 친하긴 했지만, 알렉산드라 왕비에겐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었다.[16] 알렉산드라 왕비는 버킹엄 궁전에서 빨리 떠나지도 않았고, 메리에게 줘야 할 보석들을 주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메리 왕비는 궁전을 지키며 다친 병사들을 방문했다. 독일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영국 내의 반독 감정은 점점 심해졌고, 심지어 조지 5세의 친한 사촌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아내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망명이 거절됐다.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자 영국 내에서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친정 테크 가문 또한 독일의 가문이었기 때문에 제1 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케임브리지[17]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쟁은 1918년 독일의 패배와 빌헬름 2세의 폐위 및 망명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두 달 후에 간질을 앓고 있던 막내 아들 존 왕자가 1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 왕자는 간질 뿐만 아니라 지적장애까지 앓고 있어 대중에게 거의 감춰졌으며,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지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일기에 적어놓았고, 이 일기는 훗날 메리 왕비가 사망한 후 발간되었다.[18]

메리는 영국의 왕비로서 남편 조지 5세의 연설을 돕고, 끊임없이 조언하는 등 충실히 내조했다. 조지 5세 또한 아내의 지성과 판단력을 신뢰했다. 하지만 1920년을 기점으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메리는 그를 간호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19]

3.6. 왕대비

1936년 1월 20일, 남편 조지 5세가 사망했다. 메리 왕비의 장남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계승했고 메리 왕비는 왕대비가 되었다. 하지만 Queen mother로 불린 것은 아니었고, Queen Mary로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해가 지나기도 전에 에드워드 8세는 두 번이나 이혼한 미국의 여성 월리스 심프슨과 결혼하겠다며 남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에게 양위해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들을 사랑하고 지지했던 메리 왕대비였지만, 그녀는 왕실의 의무를 저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선택한 장남을 이해할 수 없었다.[20][21] 메리는 이전에 심프슨 부인을 본 적은 있었으나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차남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메리 왕대비는 아들 조지 6세대관식에 참여했으며[22] 그녀의 두 손녀들이었던 엘리자베스 공주마거릿 공주의 양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손녀들을 데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에 방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차남 조지 6세는 메리 왕대비가 런던을 떠나 피신해 있길 바랐다. 메리 왕대비는 이를 꺼렸으나 결국 조카와 함께 글로스터셔에서 지내기로 한다. 그녀가 머물렀던 배드민턴 하우스는 너무 좁아서 하인들이 불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2년, 4남 조지 왕자가 복무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한 후에야 메리 왕대비는 말버러 하우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메리 왕대비는 열정적인 보석 수집가이기도 했는데[23] 그녀가 수집한 보석들은 현재까지 남아있어, 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 및 왕실 일원들이 착용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가장 최근에는 메건 마클이 결혼식 때 메리 왕대비의 다이아몬드 방도 티아라를 착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트레이드 마크인 러버즈 낫 티아라도 원래 메리 왕비의 티아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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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7e7444fd54219a3a302baaab180f36a.jpg
왼쪽부터 메리, 엘리자베스 2세, 다이애나 스펜서, 캐서린 미들턴
메리 왕대비는 예의범절과 의례를 매우 중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현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공주이던 시절에 이런 일화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인 조지 6세는 자녀들을 무척 아껴서 자신의 딸들[24]에게 사석에서는 무릎절(curtsy[25])을 올리는 예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할머니인 메리 왕대비가 자리에 함께할 때면 조지 6세의 공주들은 무조건 메리 왕대비에게 커트시와 함께 예를 갖춰야 했다고 전해진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무조건 티아라를 착용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런던에 공습이 일상화되었을 때에도 평소와 다름 없이 완벽하게 옷을 갖추어 입고 진주 보석으로 치장한 다음 꼿꼿이 앉아 시녀와 낱말 맞추기 게임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3.7. 대왕대비, 사망

1952년, 둘째 아들인 조지 6세가 사망하여 손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 대왕대비는 세 아들들이[26]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며 한탄하고, 차남 조지 6세가 사망한 이후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편 이 때 왕조의 명칭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위에 나왔듯이 영국 왕실은 1917년 윈저 왕조로 명칭을 바꾸었는데,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면서 왕조의 명칭을 엘리자베스의 남편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성을 따 마운트배튼 왕조로 바꾸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윈저 왕조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건지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립의 외숙인 루이 마운트배튼도 이를 잘 몰라서[27] 언론에서 나온 이 질문에 대해 "아마 마운트배튼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추측해서 대답해야 했다.

이에 대해 메리는 "이미 이전에 영구히 윈저 왕조라고 명칭을 정한다고 결정되었으며, 이는 이후 여왕이 즉위해도 왕조의 이름이 여왕의 남편의 이름으로 바꾸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실하게 답을 내려줬다. 이를 루이 마운트배튼과 엘리자베스-필립 부부가 수용함으로서 왕조의 명칭 논란은 일단락할 수 있었다.

이 논란을 두고 루이가 경솔하게 '이젠 마운트배튼 왕실이라고 불러야 한다'라고 입방정을 떨어서 메리가 격노해 '다시는 윈저 왕조에서 이름이 바뀌는 일이 없을 거다!'라고 말했다는 야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위에 나왔듯이 루이는 그 자신도 해당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단순히 추측을 했을 뿐 입방정을 떤 일은 없고, 메리도 이에 확답을 내려줬을 뿐이지 격노할 일은 없었다.

1953년 3월 24일, 손녀의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메리 대왕대비는 85세의 일기로 자던 중 사망했다. 이미 노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무를 수행하는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등, 평생 영국을 위해 헌신한 것. 생전 그녀의 뜻으로 손녀의 대관식은 연기되지 않았다. 그녀의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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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Queen_Mary's_Coffin1.jpg
장례식

4. 평가

투철한 의무와 책임감으로 왕실과 나라를 지켜내면서, 아들 조지 6세를 영국의 명군으로 만든 킹 메이커였고, 손녀 엘리자베스 2세의 중요한 조언자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리하여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영국을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승리로 이끌었고, 손녀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킨 군주로 남는 데 공헌했다.

테크의 메리는 강한 성격과 풍부한 교양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남편 조지 5세를 도와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위기에 처했던 영국 왕실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현대적이고 친근한 영국 왕실의 기틀을 세워 그 표본을 보여준 왕비였다.

메리의 여장부처럼 강인한 성격과 총명함, 책임감있는 태도는 일국의 왕비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시할머니 빅토리아 여왕과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도 상당히 원만했고, 남편 조지 5세와도 서로를 헌신적으로 사랑했으며 그 결과 5남 1녀를 낳을 만큼 금슬도 좋았다.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으나 그만큼 자녀들을 매우 아끼기도 했다.[28][29]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났으며 경제관념도 뚜렷했다. 이러한 메리의 품성은 여러 왕가들이 인정할 정도.[30]

또 어떤 일이건 남편 조지 5세를 가장 우선 순위에 뒀다. 후에 메리 왕비가 조지 5세에 대해 ''나의 남편이면서 나의 국왕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등 남편에 대한 내조와 충심을 함께 보여주었다.

가장 긍정적인 면은 아낌 없는 조언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인한 정치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 예시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웨일스 공비 시절엔 시아버지 에드워드 7세의 서류 공람을 남편과 같이 했으며[31],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엔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남편 조지 5세와 함께 전선에 있는 병사와 국민들을 위문, 독려했고, 인도아일랜드의 독립문제에 대해서도 늘 신경을 썼다고 한다.[32]

메리의 이러한 면모는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헤센의 알릭스 공녀[33]보다 매우 뛰어났다. 메리와 알릭스의 경우 모두 독일 출신이며, 어머니들이 영국의 공주였으며[34]남편과의 금슬이 좋았고, 각각 막내 자녀가 매우 허약했다는[35]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행보와 처신은 매우 달랐는데 메리는 직접 겪은 수많은 경험 덕분에 상황에 대해 매우 잘 알아 외치와 내치에 남편 조지 5세를 어느 정도 도와준 반면, 알릭스는 평생을 매우 안온하게 살아왔던지라 정치적 감각이 매우 부족해 일개 성직자내지 괴승인 그레고리 라스푸틴에게 내치를 맡겨버려 러시아 제국의 파멸을 부르고 말았다.

그 결과 메리는 자신의 손녀를 이어 외증손자가 현재까지도 영국의 국왕으로 재임하며 자손이 이어지고 있는 반면, 알릭스는 본인과 남편과 자식들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가 폐위되어 총살당하면서 목숨을 잃으면서 후손 전체가 끊겨버렸다. 이에 대해 남편 조지 5세는 매우 고마워했다고 한다.

독일 출신 왕비임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책임감으로 독일과 맞서 싸웠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위기에 처했던 영국을 구하기 위해 남편 조지 5세와 함께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승리해서 왕실 또한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다.

조지 5세의 서거 후 잠깐 위기가 있었지만[36] 차남 조지 6세는 영국의 국왕이 되어 언어 장애를 극복하면서, 아내인 엘리자베스 왕비와 함께 영국과 국민을 위해 나라를 지켜 제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이끈 명군이 되었다. 이러한 메리 왕비의 책임감 있고 의무를 다하는 노력은 오늘날 영국 왕실이 현대까지 이어지게 만든 비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테크의 메리
(Mary
of Teck)
<colbgcolor=#FFF3E4,#331c00>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colbgcolor=#FFFFE4,#323300> 뷔르템베르크의 알렉산더 공작
(Duke Alexander of Württemberg)
<colbgcolor=#E4FFEC,#00330f> 뷔르템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작
(Duke Louis of Württemberg)
나사우베일부르크의 헨리에테 공녀
(Princess Henriette of Nassau-Weilburg)
클라우디아 레데이 폰 키스레데 여백작
(Countess Claudine Rhédey
von Kis-Rhéde)
라슬로 레데이 폰 키스레데 백작
(Count László Rhédey von Kis-Rhéde)
인즈디 아그네스 폰 나지바라드 여남작
(Baroness Agnes Inczédy von Nagy-Várad)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
(Prince Adolphus, Duke of Cambridge)
조지 3세
(George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여공작
(Duch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카셀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Augusta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공자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37]
나사우우징겐의 카롤리네 공녀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1894년 6월 23일 1972년 5월 28일 월리스 심프슨
2남 조지 6세
(George VI)
1895년 12월 14일 1952년 2월 6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슬하 2녀[38]
1녀 프린세스 로열 메리
(Mary, Princess Royal)
1897년 4월 25일 1965년 3월 28일 제6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래슬스

슬하 2남[39][40]
3남 글로스터 공작 헨리 왕자
(Prince Henry, Duke of Gloucester)
1900년 3월 31일 1974년 6월 10일 앨리스 몬태규 더글라스 스캇
슬하 2남[41]
4남 켄트 공작 조지 왕자
(Prince George, Duke of Kent)
1902년 12월 20일 1942년 8월 25일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42]
슬하 2남 1녀[43]
5남 존 왕자
(Prince John)
1905년 7월 12일 1919년 1월 18일

6. 창작물에서의 모습

6.1. 영화 및 드라마

6.1.1. 킹스 스피치

6.1.2. 더 크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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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게임

6.2.1. 도미네이션즈

메리 공주 선물 상자와 메리 공주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가 유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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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편과 키가 같다.[2] 마침 생일도 5월이다.[3] 흔히 공녀로 알려져 있지만 정식 독일 명칭은 Fürstin, 즉 여후작이다.[4] 독일의 귀족들 중 공작(Herzog/Duke)(다만, 일국의 군주로서의 공작은 Highness를 사용한다)과 후작(Fürst/Prince), 그리고 그들의 가족 구성원들이 사용하는 존칭이던 Durchlaucht의 번역어로 독일 기준으로는 Highness보다는 격이 낮은 경칭이다. 그녀의 아버지인 테크 공작 프란츠 역시 Serene Highness를 사용했으나 빅토리아 여왕에게 Highness 경칭을 받았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독일 출신의 귀족들에 대한 작위, 존칭 등이 전부 폐지되면서 현재는 H.S.H를 사용하는 귀족은 영국에는 없다. 다만 아서 웰즐리의 후손인 現 웰링턴 공작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워털루 공 (Prince of Waterloo)이기도 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Serene Highness로 불린다.[5] 알렉산더 공작의 할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으로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에게는 여러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훗날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초대 왕이 되는 프리드리히, 차남이 알렉산더 공작의 아버지, 루트비히 공작이었다. 뷔르템베르크가 왕국으로 승격되기 전에 태어난 공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뷔르템베르크 공작 (Duke/Duchess of Württemberg)을 칭했고 뷔르템베르크가 왕국으로 승격된 이후 태어난 왕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뷔르템베르크 공/공주 (Prince/Princess of Württemberg)를 칭했다. 참고로, 뷔르템베르크 왕가는 왕국 멸망 직후인 1921년에 직계가 끊어져 방계인 알츠하우젠 분가(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7남 계통이다.)가 새롭게 종가가 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남계 후손은 모두 뷔르템베르크 공작을 칭하고 있어 현대에는 더 이상 이런 구분이 사용되지 않는다.[6] 메리 애들레이드는 영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귀천상혼 가문이 아니라 더 좋은 가문으로 시집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팻메리 "Fat Mary(뚱뚱한 메리)"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 뚱뚱해서, 30살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적극적으로 신랑감을 찾아주어 테크 공작과 결혼할 수 있었다.[7] 적어도 영국의 상속 체계는 남성 장자상속제이기 때문에, 혈통상 상속과는 거리가 멀었다.[8] 결혼을 한 후 얻은 정식 작위는 요크 공작부인이었다.[9] 이 때 이종사촌인 니콜라이 2세가 피로연에 참석했는데 조지 5세의 얼굴과 너무 닮아서 신랑 대신 축하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10] 당시 여느 상류층이 그랬듯 아이들을 유모들에게 전적으로 맡겼고, 간질을 앓고 있던 막내아들 존 왕자를 멀리 보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시대 상류층의 부모 자식 관계는 현재와 상당히 달랐는데, 자식들에게 부모란(일국의 왕과 왕비라면 특히) 단순히 '나를 낳아준 사람들'이였다.[11] 아이들이 프랑스인 가정 교사의 토스트에 올챙이를 올려놓는 장난을 치자 이를 꾸짖기는 커녕 지켜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12] 이때 메이는 해외순방으로 자녀들과 떨어지는 것에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힘들어 했다.[13] 프린스 오브 웨일스 작위를 뒤늦게 받은 것은 아마 먼저 죽은 앨버트 왕자를 고려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4] 영어로는 둘 다 Queen Victoria가 되기 때문이다.[15] 이날 메리가 착용했던 왕관은 훗날 증손자 찰스 3세대관식에서 카밀라 왕비가 재사용했다. 물론 왕관의 아치가 8개에서 4개로 줄어드는 등 약간의 변형은 있었다.[16] 시어머니인 알렉산드라 왕대비는 처녀 때 유전성 귀 경화증으로 인해 점점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다.[17] 메리의 어머니인 메리 애들레이드의 영지 이름이다.[18] 존 왕자가 사망한 이후, 윈저 왕조의 후손들은 '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전부터 존 왕의 영향으로 그닥 선호되는 이름은 아니었으나 왕자의 이름으로는 간혹 사용되기는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에드워드 7세의 막내 아들이었던 알렉산더 존 왕자는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요절했다.[19] 조지 5세가 자신을 살린 것은 메리 왕비라고 대답할 정도였다.[20] 항상 왕실의 의무를 가장 중요시했던 메리의 영향을 받은 손녀이자 전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생전에 양위하지 않았다. 결국 찰스 3세는 어머니의 서거 후 즉위했다.[21] 장남 에드워드 8세가 퇴위 당시 메리 왕대비는 이러다간 정말 루마니아 꼴이 나겠군! 라고 말했다고 한다. 카롤 2세 참조. 카롤도 낮은 신분의 정부 마그다 루페스쿠와 놀아나 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엘레니를 내팽개쳤다. 게다가 저 당시 시점에서는 메리 왕대비가 몰랐을 사실이지만, 그렇게 무책임하게 왕위를 내던진 아들 에드워드 8세는 나치에 부역하고 나치가 패망한 이후에도 동생 조지 6세와 조카 엘리자베스 2세를 사사건건 방해하며 영국 내에서 영향력을 되찾으려 했다가 축객령을 당해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다. 저대로 에드워드를 내버려두었다간 루마니아 꼴이 났을 거라는 메리 왕대비의 선견지명이 맞았던 것이다.[22] 당시 영국 왕실에서 왕대비는 선왕의 부인이라 대관식에 참여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초로 왕대비로서 대관식을 참관했다.[23] 당대에 몰락한 왕족이나 귀족들에게서 싼값에 사들인 보석들로 영국 왕실의 빈약했던 보석 컬렉션을 늘린 장본인이다. 취미와 시대상이 맞아 떨어진 것.[24] 엘리자베스 2세마거릿 공주.[25] 유럽 문화권에서 여성들이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왕족에게 올리는 예법으로, 한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 뒤로 뻗고 무릎을 굽혀 하는 인사다. 흔히 여성 가수들이 무대에서 관객에게 이 인사를 올리기도 한다.[26] 상술했듯이 이전에 막내 존 왕자가 요절했고 사남 조지 왕자가 비행기 사고로 급사했다.[27] 영국 왕실에서 윈저로 명칭을 고정하는 결정을 내릴 당시, 루이는 겨우 10대 소년이었고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이런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자세히 모를 수밖에 없었다.[28] 자식들과 떨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공무로 인한 해외순방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떨어져야 할 때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29] 자녀들 중 특히 차남인 조지 6세를 많이 아꼈다고 한다. 조지 6세는 눈물도 많고 여리고 얌전한 성격이었지만 조지 5세 부부의 좋은 면모를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가정을 꾸린 뒤에는 왕족의 의무를 다해서, 마찬가지로 의무를 중시했던 조지 5세와 메리 왕비가 많이 편애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8세의 퇴위로 갑작스럽게 왕위를 물려받게 된 조지 6세가 부담감 때문에 어린 아이처럼 서럽게 울자 말없이 달랜 적도 있다. 결국 조지 6세마저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겪은 잦은 스트레스와 폭연으로 폐암에 걸려, 1952년에 자신보다 먼저 사망하자 이를 한탄했고 아들을 뒤따르듯 1년 후에 자신도 사망했다. 그만큼 둘째 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30] 비슷한 사례는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1세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가 있다.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 왕국의 후손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조카였다. 엘리자베트는 비록 독일 출신 왕비였지만 그 독일과 적을 맞서 싸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남편을 도와 전선을 자주 방문했으며,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는 명분으로 영국에 기밀 서류를 전달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당시 왕대비였던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거처를 영국군 사령부로 쓰라고 허락했을 정도로 벨기에를 위해 노력하였다.[31] 이는 에드워드 7세 본인이 당시 기준 노령에 즉위하여 언제라도 아들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느리까지 공람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32] 남편과 함께 인도 번왕들을 모은 황제 대관식 델리 더바에도 참석했다. 유일한 인도 황제의 대관식.[33] 우연찮게도 니콜라이는 남편 조지 5세의 이종사촌이고 알릭스 역시 조지의 고종사촌이었다.[34] 메리의 어머니는 조지 3세의 손녀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알렉산드라의 어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영국의 앨리스 공주.[35] 메리의 막내아들인 뇌전증 환자였고 알릭스의 막내이자 고명아들인 알렉세이혈우병 환자였다.[36] 장남인 에드워드 8세가 재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동생 요크 공작 앨버트에게 양위를 했다.[37] 조지 2세의 외손자이다.[38] 엘리자베스 2세,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39] 조지 래슬스, 제럴드 래슬스.[40] 메리 공주의 가계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고 구성원이 많은 편이다. 사생아들도 상당한 데다가 다들 자식들을 비교적 많이 낳았기 때문. 사생아의 사생아라는 가계도 있다.[41] 윌리엄, 리처드.[42]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의 세 딸 중 막내. 필립 공의 사촌이기도 하다.[43] 켄트 공작 에드워드 공자, 아너러블 레이디 오길비 알렉산드라 공녀, 켄트의 마이클 공자[44] 간단히 말해 '왕'(Crown)을 '책무'(duty)로, '이기다'(win)를 '우선하다'(comes first)로 바꿔서 읽으면 의미가 더 자연스럽게 된다. "군주로서의 책무가 반드시, 항상 우선해야 한다"는 뜻.[45]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도 남편인 조지 5세가 사망했을 때 메리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바로 옆에 있던 아들 에드워드 8세에게 무릎을 굽혀 절을 한 것이었다.[46] 메리 이전의 영국 왕비들은 모두 외국 왕녀들이었다.[47] 장남 에드워드 8세후두암으로 1972년에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차남 조지 6세폐암으로 어머니 메리보다 1년 먼저 1952년에 향년 5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8] 아버지 프란츠의 고모할머니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가 남편 파벨 1세보다 키까지 큰 당대의 미녀로 유명했고, 그녀의 3남 니콜라이 1세가 모후의 큰 키와 미모를 물려받아 로마노프 가문이 미모로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49] 빅토리아 여왕의 얼빠 기질은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손주들의 외모 품평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예쁘고 잘생긴 손주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했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 여왕이 메리를 손자며느리로 낙점할 정도로 총애한 이유는 외모가 아닌, 그녀의 강인한 성격과 사명감만 보고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이다.[50] 특히 저 모여라 눈코입 때문에 정면 사진은 다소 못나게 찍힌 게 많다. 그나마 측면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무척 지적이고 기품있어 보여서 좀 나은 편.[51] 사실 메리의 시어머니 알렉산드라 왕비의 미모를 물려받은게 가장 크다.[52] 다만 측면으로 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메리와는 달리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빅토리아 여왕이 딸 앨리스 공주에게 너랑 똑 닮았다고 할 정도로 인물이 없었다. 참고로 헤센의 빅토리아의 어머니 앨리스 공주도 빅토리아 여왕을 닮아 박색이었던 걸로 유명했다. 결국 원인은 빅토리아 여왕(…) 그래도 셋 다 박색임에도 초특급 미남과 결혼해서 자녀들과 후손들 중에서 미남미녀가 많아지긴 했다.[53] 당시에는 하노버 왕조 및 색스코버그고타 왕조.[54] 앨버트 공은 상당한 미남이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박색이라 자녀들의 외모는 대체적으로 빅토리아 여왕보다는 훨씬 낫긴 한데 앨버트 공의 발끝에는 못 미쳤을 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가 막강했다.[55] 찰스의 눈썹은 외할머니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 귀는 할아버지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에게서 물려 받았다. 탈모는 증조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에게서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