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 Stefano Treaty(영어) 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 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러시아어) Ayastefanos Muahedesi or Ayastefanos Antlaşması(튀르키예어) |
1. 개요
1877~1878년의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의 편을 든 발칸 반도 여러 민족의 독립군[1]들은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고 오스만의 수도 이스탄불 코앞까지 진격했다. 오스만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종결을 위해 1878년 3월 3일 코스탄티니예 서쪽에 위치한 오스만 제국의 산 스테파노(San Stefano)[2][3]에서 이 조약을 체결하였다.2. 내용: 러시아의 과욕
조약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전쟁이 러시아 연합군의 대승리로 끝났으므로, 패전한 오스만에게 매우 가혹한 조약을 요구했다.
- 명목상 오스만의 종속국이자 자치정부인 불가리아 공국을 세운다.[4] 또한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며 불가리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러시아 군대가 2년 이상 주둔한다.
-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며 이들에게 역시 일부 지역을 할양한다.[5]
-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북부 도브루자 지역과 바투미, 올투, 카르스, 아르다한 등의 아르메니아 일부 지역을 할양한다. 이 때 루마니아는 러시아가 오스만이 러시아에게 할양한 북부 도브루자 지역을 루마니아에게 양도하는 조건으로 크림 전쟁 때 얻은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을 러시아에게 반환한다.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자치 정부를 수립한다. 이외에도 크레타와 에피루스, 테살리아 등지에 자치적인 지방정부를 세울 것을 허용하는 조약안이 명시된다. 또한 기존에 오스만 정부가 약속했던,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하는 내용의 개혁안을 수립할 것을 보장한다.
- 오스만 제국은 전쟁 배상금으로 14억 1천만 루블을 러시아 제국과 그 동맹국들에게 지급한다.
-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모든 중립국에게 개방된다.
3. 결과: 베를린 회의 개최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른 각국의 영토 변화(왼쪽)와 베를린 회의를 통해 확정된 각국의 영토 변화(오른쪽)
전반적으로 러시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이었던만큼, 이 조약은 유럽 강대국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특히나 그레이트 게임으로 전세계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이 산 스테파노 조약의 결과에 가장 기겁을 했는데, 조약의 결과 러시아가 흑해를 거의 완벽히 장악했고 러시아가 사실상 러시아 영향권에 든 불가리아의 지중해 항구를 지중해 진출로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와 외무장관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은 러시아에게 '당장 이 조약 수정 안하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단순히 영국 뿐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강대국 모두가 러시아에게 '너네 이 조약으로 너무 컸다?'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결국 러시아도 이에 굴복하여 발칸 반도에서의 세력 재조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개최된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발칸반도 일대에서 슬라브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것에 영국만큼이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다.
알바니아인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현 영토 기준) 남부 몬테네그로와 동부 북마케도니아의 할양은 고조되던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던 알바니아인들의 위기감에 불을 지폈고 알바니아 민족주의 발흥의 주요 기점이라 평가되던 프리즈렌 동맹의 체결을 불러오게 된다.
4. 여담
- 역사가 중 일부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그대로 실행되고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지 않았더라면 보스니아가 실질적으로 독립했을 것이고[6] 따라서 사라예보 사건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불가리아에게는 무려 500년에 걸친 오스만 지배를 거의[7]종결시킨 역사적인 조약이니만큼 오늘날에도 열심히 기억되고 있다. 아예 산 스테파노 조약 수립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했을 정도. 또한 러시아에 대한 인식도 보다 우호적인 편이다.
5. 관련 문서
[1]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2] 터키어로는 아야스테파노스(Ayastefanos). 지금의 이스탄불 바크르쾨이 구에 위치한 예실쾨이(Yeşilköy)로 1926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이곳은 현재는 화물전용공항으로 이용되지만 한때 터키의 관문이었던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이 위치해있는 곳이기도 하다.[3] 그리스어로 아요스 스테파노스(Άγιος Στέφανος). 산 스테파노는 '아요스 스테파노스'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것이다. 터키어 이름 역시 '아요스 스테파노스'를 음역한 것이다.[4] 불가리아 같은 큰 나라를 이 전쟁 한 번에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면 동유럽의 정세가 너무 크게 바뀌므로 일단 명목상 종속, 자치정부 같은 사족을 붙이긴 했지만 말이 좋아 자치정부이지, 자체적인 정부와 헌법에다가 독자적인 군대까지 보유한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5] 특히 몬테네그로는 이 조약으로 인해 영토가 두 배로 늘어난다.[6] 베를린 회의를 통해 보스니아는 독립국이라는 지위를 잃고 오스트리아의 영역으로 편입된다.[7] 상술했다시피 명목상 계속 오스만 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