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0:08:44

게오르크 엘저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colbgcolor=#000><colcolor=#fff>
요한 게오르크 엘저
Johann Georg Elser
파일:게오르크 엘저.jpg
출생 1903년 1월 4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르마링겐
(現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하이덴하임 헤르마링겐)
사망 1945년 4월 9일 (향년 42세)
나치 독일 다하우

1. 개요2. 생애
2.1. 평범한 목수2.2. 히틀러 암살 시도2.3. 최후
3. 추모4.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나치 독일총통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꾀한 인물.

2. 생애

2.1. 평범한 목수

1903년 1월 4일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르마링겐에서 루트비히 엘저와 마리아 뮐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목공이었고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했는데 그가 태어난 지 1년 후에 결혼했다. 그에게는 프레데리크, 마리아, 안나, 루트비히, 안나, 그리고 레오나르드 등 다섯 동생이 있었다.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초등학교에 다녔고 이후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목공으로 일했다.

그는 숱이 많은 머리를 뒤로 단정히 빗어 넘긴 아담한 몸집의 사내였다.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친구 없이 외롭게 지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매사에 성실한 친구라며 호감을 표했다. 그는 조용하고 과묵하고 부지런했으며 일터에서는 완벽주의자였다. 초등학교만 다녀서 아는 게 별로 없었고 책도 안 읽었으며 신문도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정치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정치 토론을 벌인 적도 없었고 이념에도 어두웠다. 공산주의적색투쟁전선동맹에 가담한 적도 있고 목공 노조에도 들어갔지만 당원으로 이름만 올렸을 뿐 군중 대회에 참석한 적은 별로 없었다. 훗날 그는 게슈타포에게 "내가 지금까지 집회에 참석한 적은 딱 3번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구경 좀 하고 금방 돌아갔다."고 밝혔다. 1933년까지 독일 공산당에게 투표했고 노동자 단체에 이름을 올렸으나 그것은 노동자 형편이 좋아지려면 이들에게 투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등극하고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집권한 이래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계속 떨어지고 자유도 줄어드는 상황을 목격했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체제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왔다. 그는 동료들의 대화에 끼여들지 않았지만 대화를 묵묵히 엿들으면서 나치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라디오로 방송되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지 않았으며 1938년 나치 당원들의 행진이 쾨니히스브론에서 진행될 때 주변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는 와중에도 팔짱을 끼고 있기만 했다. 한 이웃이 그에게 순응하는 것이 현명할 거라고 상기하자 그는 "차라리 내 엉덩이에 키스하겠어."라고 답했다고 한다.[1]

1938년 가을 체코 위기가 진행되다가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게 귀속되었다. 대다수 독일 국민은 히틀러에게 찬사를 보냈지만 그는 히틀러의 행보를 볼 때 조만간 다시 다른 나라 땅을 차지하려 들 것이고 따라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품었으며 전쟁을 막기 위해 히틀러, 괴링, 괴벨스 같은 정권 수뇌부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암살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2.2. 히틀러 암살 시도

1939년 11월 8일 그가 설치한 폭탄이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폭발했지만 히틀러는 폭탄이 터지기 13분 전에 맥주홀을 떠나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자세한 내용은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폭파 사건 문서 참조.

폭탄이 터져서 맥주홀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무렵 그는 콘스탄츠에서 스위스 국경을 몰래 넘으려다 체포되어 콘스탄츠 부근의 세관에 잡혔다. 처음에는 특별한 의심을 받지 않았지만 폭발이 일어난 지 몇 시간 뒤 출입국 관리들이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사진이 들어간 그림 엽서를 그의 호주머니에서 찾아내면서 그는 히틀러 암살 시도범으로 지목되었다. 11월 14일 그는 게슈타포에게 자신이 암살을 시도한 게 맞다고 밝혔고 사건의 전모와 동기를 털어놓았다.

이후 작센하우젠수용소에 끌려간 그는 뜻밖에도 특별대우를 받았는데 아마 그의 배후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여긴 히틀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여론조작을 위한 공개 재판을 벌여서 영국 첩보부에 먹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다하우 수용소 경비를 맡았던 슈츠슈타펠 장교 레흐너는 훗날 게오르크가 수용소에서 자신의 암살 시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진술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히틀러는 독일의 몰락을 상징합니다. 제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그렇지 않습니다. 에른스트 텔만에게 동정심을 느끼지만, 히틀러를 제거하는 건 저만의 독창적인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들켜버렸고, 이제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그들이 날 즉시 처형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2.3. 최후

미군이 다하우로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1945년 4월 9일 총살되었다. 향년 42세.

총살 며칠 전인 그해 03월 29일, 자신을 체포하고 수사를 주도한 질서경찰 대장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 장군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자로 체포돼, 자신보다 먼저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3. 추모

4. 참고 문헌



[1] 슈나이트하임 출신의 공산주의자이자 게오르크와 면식이 있던 요제프 슈러(Josef Schurr)가 1947년 울름의 한 신문사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게오르크는 항상 히틀러와 그의 동료들에 대한 폭력성에 극도로 반감을 품었으며 히틀러를 항상 '집시'라고 불렀고 그의 얼굴은 전형적인 범죄인 상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