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3:55:12

모리 오가이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 ||
<colbgcolor=#000> 모리 오가이
[ruby(森,ruby=もり)][ruby(鷗,ruby=おう)][ruby(外,ruby=がい)][1]|Mori Ōgai
파일:dcaa34cf76c886679ac20a9e6609745a.jpg
본명 모리 린타로 (森林太郎 | Mori Rintarō)
출생 1862년 2월 17일
이와미국 시마네현 츠와노
(現 일본 시마네현 카노아시군 츠와노정)
사망 1922년 7월 8일 (향년 60세)
일본 제국 도쿄부
직업 의사,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 학력 <colbgcolor=#fff,#191919>도쿄대학 의학부 (의학 /학사)[2]
활동 기간 1889년 ~ 1922년
묘소 도쿄도 미타카시 젠린지(禅林寺) 츠와노정 에이메이지(永明寺)
장르 소설번역
대표작 무희, 기러기 }}}}}}}}}

1. 개요2. 생애3. 문예인 활동과 주요 작품
3.1. 주요 작품3.2. 주요 번역서
4. 군의관으로서의 행적5. 기타6. 캐릭터화

[clearfix]

1. 개요

파일:attachment/uploadfile/Amoriougai.jpg
육군 정복을 입은 모리 오가이
일본소설가, 평론가, 의사. 시마네현의 츠와노(津和野)[3] 출신이다.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근대 일본 소설의 거장, 메이지 정신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이미지가 자아 성찰, 초연함, 반권위적이라면 모리 오가이의 이미지는 경파, 견실함, 권위적으로 서로 이미지가 대조되는 측면도 있다[4][5]. 또한 모리 오가이는 분큐,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살았는데 거의 평생을 메이지 시대 속에 살아갔던 셈이다.

모리 오가이는 필명으로, 문학인이 아닌 군의관으로서는 본명인 모리 린타로(森林太郎)로 활동했다.

오가이라는 필명은 현재의 스미다가와에 있는 시라히게바시(白鬚橋) 부근에 있던 "갈매기가 건너가는 바깥쪽(鷗の渡しの外, かもめのわたしのそと)"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리가 상경한 후 거주하던 센주[6]를 의미한다.#

2. 생애

대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를 맡아온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으나 최하급 무사였다. 모리의 집안은 그다지 명망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쳐내고자, 모리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켜 모리만큼은 자신과 달리 출세하기를 원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 및 할머니의 뜻대로 상당한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공부방에 들어가서 사서 오경과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연날리기나 팽이치기 같은 놀이를 할 시간도 없이 공부했다. 공부하다 쉴 때는 집 앞의 정원을 거닐거나 사군자를 쳤다.

1872년 도쿄로 상경하여 의학 서적을 읽기 위하여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였고, 관직에 있었던 친족 니시 아마네(西周)[7]의 집에서 숙식하며 공부하여 1873년 현 도쿄 대학 의학부의 전신에 해당하는 도쿄 의학교에 진학하였다.

나이를 2살 올려 나이를 속여 입학했는데, 이때 모리는 겨우 11세 된 어린아이였다. 동급생들이 적어도 10대 후반은 되는 형누나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어려도 한참 어린 나이와 그 나이에 맞는 왜소한 체격으로 눈에 띄는 편이었다. "꼬맹이(일어로는 ちび. 얕잡아보는 표현이다)"라는 별명이 붙기도 할 정도. 돌아다니는 이야기로는, 남자 선배에게 비역의 대상이 되어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다.[8]

19세의 나이로 도쿄 의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이는 2020년대에도 깨어지지 않는 최연소 졸업 기록이라고 한다. 졸업 성적은 학부 8등이었다.

1879년에 아버지가 미나미아다치군 소속 의사가 되어 그곳에서 근무하기 위해 센주로 거처를 옮겨, 이후 킷세이도(橘井堂) 의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모리는 도쿄 의학교에 재학하며 하숙집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1881년에 졸업한 후에는 하숙집에서 나와 센주에 살게 되고 이때부터 의사로서 아버지와 함께 의료 활동에 종사한다. 이 무렵의 경험은 소설 〈임상 기록(カズイスチカ)〉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모리 오가이는 일본 육군 군의관이 되었고, 1884년 독일의 의학과 위생 제도를 배워오기 위해 독일 유학을 명 받고 유학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그는 의학 이외에도 문학미술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겪은 체험이 그가 소설가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모리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 이전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에도 문학과에 지원하고 싶어 할 정도로 의사보다는 문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 가업을 잇는 차원에서 제2지망인 의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

이때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괴테의 "체념(resignation) 철학"을 모리는 일평생 지침으로 삼았는데, "주체와 대상간의 억압적인 분리를 극복하는", 그리고 "단념하는 것이 괴롭고 불만스러울지라도 그에 맞서는 태도로서의 태연함을 견지하는" 괴테식 체념을, 모리 본인의 삶에서 맞닥뜨린 여러 고뇌와 굴욕에 대응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데에 크게 참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필한 소설의 주제로도 곧잘 다루었다.[9] 그리고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를 일역하여 출판하였고,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 5가지를 본인의 작품에 인용하였다.

한편, 그의 대표작 무희(舞姫)도 이곳에서 독일 여자와의 연애 경험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10]

이러한 독일 유학 경험 덕분에 독일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 독일어로 이루어진 연설도 유창하게 했다고 한다. 유학 이후에도 독일로부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적극적이어서, 독일에서 출간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간 서적이 모리의 책장에 꽂혀 있곤 하였다고 한다. 세계화 시대에 앞서 서양과 일본의 문화 교류를 위한 교량을 놓아준 문인들 중의 한 명인 것이다.

본명인 '린타로'를 독일 사람들이 발음하기 매우 힘들어했기에 독일 유학 시절에는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점이 훗날 자식들에게 오토, 마리, 후리쓰, 안느 등의 서양식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을 붙여 주게 된 것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1888년 귀국한 후 군의 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다. 이때는 주로 유럽 문학 번역과 평론 등에 치중했다. 1889년 번역 시집 오모카게(於母影)를 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 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90년 '무희(舞姫)'를 시작으로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했다. 청일전쟁 도중 1개월 동안 조선 부산에 체재하였는데, 그때 쓴 일기도 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 부임했다가 1896년 일본에 귀국했다.

이후 1899년 6월에는 소장 계급에 상당하는 군의감이 되었고, 이때 현재의 기타큐슈시에 속한 고쿠라(小倉) 주둔 육군 제 12사단 군의부장으로 좌천된다. 창작 활동 및 번역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동료들과 상사들에게 본업인 군 생활에 소홀하다는 의혹의 시선을 받은 것. 그리고 이는 "모리가 군의관의 품위에 맞지 않는 작품 활동을 한다"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결국 이시구로 타다노리(石黒忠則)등의 책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리는 고쿠라로 좌천되었다. 이는 다시 도쿄로 돌아와 승진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모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1]에게 재능을 인정받는데, 그 이전까지는 고쿠라 좌천 이후의 승진은 꿈에도 꿀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모리는 후쿠오카 니치니치신문(福岡日日新聞)에 〈오가이는 누구인가(鷗外漁史[12]とは誰ぞ)〉라는 소논문을 투고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도쿄의 여러 신문, 여러 잡지 등에서 오가이라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화살이 꽂혀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가이라는 이름은 이곳[13]에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가이는 여기에서 죽었다."다. 10세 때 가족과 함께 고향 츠와노 번에서 도쿄로 상경한 이래로 독일 유학, 복무를 위한 이동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도쿄를 떠나 일하며 지낸 적이 없었던 모리에게 고쿠라 좌천은 큰 충격과 깊은 좌절을 안겨 준 것이었다.

1902년 3월 제 1사단 군의부장으로 발령받아 도쿄로 되돌아온 뒤 1904년에서 1906년까지는 러일전쟁에 참전하였고, 1907년에는 중장에 상당하는 육군 군의총감에 올라 군의관의 최고봉인 육군성 의무 국장이 된다. 또 같은 해에는 제 1회 문부성 미술 전람회의 서양화 부문 심사 위원 주임을 맡기도 했다.

1916년 육군에서 퇴역한 이후에는 현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제실박물관장 겸 도서관장, 제국 미술원장 등을 역임하다 1922년결핵으로 사망했다. 향년 60세.

3. 문예인 활동과 주요 작품

창작, 번역, 평론 등 그 활동의 폭이 매우 넓은 편이었다. 그는 또한 문학 뿐 아니라 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오모카게(於母影)와 즉흥시인(即興詩人) 등의 번역시는 일본 근대시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극문학 번역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소설은 청춘기 그의 경험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에서,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소설,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을 다룬 소설 등 매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국내 번역서로는, 각기 '청년', '기러기', '아베일족', '모리오가이 단편집'이라는 타이틀의 중단편집이 출간되어 있다. 나쓰메 소세키에 버금가는 작가임에도 한국에는 번역현황이 열악하다. 전술한 중단편집들은 모두 수록작이 겹쳐서 실상 번역된 작품수가 얼마 안된다.

아무래도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작품 활동은 겸업 차원에서 해 나갔다 보니, 호흡이 긴 작품을 남기기에는 힘에 부치는 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지고는 한다.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남긴 소설 중에는 장편 소설이 없다.

이외에도 일기를 꾸준히 썼고, 널리 알려진 일기는 독일 유학 시절에 썼던 "독일일기(独逸日記)"다. 모리는 기록으로 남기면 나중에 불편해질 내용은 일기장에 적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유학 시절 연애 상대였던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과 동거했을 텐데도 독일일기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다.

간결체에 가까운 군더더기 없는 문체이면서도 절제되고 세련된 문체를 주로 사용했다.

정보, 비행기, 업적, 성병 등의 한자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모리 오가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가 독일어 서적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단어다.

3.1. 주요 작품

3.2. 주요 번역서

4. 군의관으로서의 행적

문학가로서의 그는 매우 뛰어났지만, 군의관으로서는 일본군각기병 환자 증가를 부르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일본군은 비타민 B1 결핍으로 생기는 각기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학파로 육군 군의관의 높은 자리에 올랐던 모리 오가이는 당시 의학계의 주류였던 각기병 병원균설을 지지했다. 사실 각기병은 전통적인 대처 방법으로 보리, 메밀 국수 등을 먹으면 낫는다는 민간요법이 퍼져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비타민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원인 자체는 몰랐지만, 보리에는 비타민 B 성분이 들어있으며 경험적으로 이걸 먹으면 각기병이 나아진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오가이는 이를 당시 최선진 의학이었던 독일 의학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신용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보리밥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당시의 독일 의학계를 맹신한 것에 더하여, 모리는 평소부터 부하들에게 자상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상관이었기에 부하들이 맛없다고 먹기 싫어 하는 보리밥을 병영식으로 삼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보리밥 배식 금지령을 내린 것이기도 하다. 모리의 이러한 명령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육군에서만 25만명의 각기병 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 약 2만 8천여명이 사망했다. 후술할 이유로, 이 환자 및 사망자는 거의 총원 육군이었다.

결국 전쟁 말기에 그 상황을 참지 못한 러일전쟁 당시의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장군이 군의부의 의견을 깔아 뭉개고 흰쌀밥을 혼식으로 바꿨다. 완전 편성된 사단 1개(평시 상비 사단 2개)분이 각기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엉망인 징병 제도로 인해 당시 동원 인력의 1할만을 채우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있어서 1개 완편 사단의 병력이 전사도 아니고 질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극히 심각한 사태였다.

모리 오가이가 소속되었던 일본 육군과 달리, 일본 해군에서는 이미 1884년 잡곡밥이 각기병 방지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하여 식단에 혼식을 넣어 각기병을 예방하고 있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에서 결국 서로의 발목을 잡기까지 했듯이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이미 이때부터 극심했던데다가, 이 방식을 시행했던 해군 군의관 다카기 가네히로가 영국 유학파였기 때문에 육군 군의관인데다 독일 유학파였던 모리 오가이는 일종의 자존심 싸움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병력 수만 명이 각기병으로 사망한 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사실 비타민의 존재와 각기병의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기 이전이어서 모리 오가이로서는 과학적 근거에 의한 치료를 하려 했다는 옹호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비록 당시로서는 과학적 근거가 없기는 했으나, 이미 경험과 임상례로 증명된 예방책을 지나치게 합리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가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과학만능주의 내지 과학적 회의주의를 신봉하다가 덫에 걸렸다고 볼 수도 있다.[16][17]

모리 오가이는 비타민의 존재가 밝혀진 뒤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려 들지 않았다. 모리 오가이가 워낙 고집을 부린 덕분에 일본 육군의 군의부가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 B의 부족이며 이의 예방을 혼식 등 식단 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정한 시기는 그가 죽고 난 1923년이었다. 정작 본인은 을 매우 좋아하다보니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군의관으로서 공훈도 있다. 그는 일본 위생학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리고 당시 일본 의학계에 깔린 봉건적 구습을 씻어 버리는 것을 목표로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함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명시된, 의사로서의 사명과 윤리는 어기지 않았고 인체실험 및 민간인 학살 등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부하가 포로를 가지고 생체 실험을 하자고 건의하자 뺨을 치고 욕설을 퍼부었다. 다만 청일전쟁에서 여순 전투 직후 학살을 목격하기는 했다.

모리는 전장에서 여성을 강간하고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전쟁범죄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작품에서 드러내기도 했다. "쥐 언덕(鼠坂)"이라는 소설에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도중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현지 여자를 강간한 후 살해한 기자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작품 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일본군은 전장에서 민간인 및 포로에게 각종 야만적인 만행을 저질렀는데, 모리는 그러한 일본군에 몸담고 있었으면서도 일본군의 만행의 대상 중 일부였던 무고한 민간인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한 생각을 소설을 통해 드러냈던 것이다.

5. 기타

6. 캐릭터화

의사라는 점 또는 군인이라는 점, 린타로라는 본명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1] 모리 오가이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일본의 신자체 규정이 시행되기 전이라 鴎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체 규정으로도 鷗는 鴎가 아닌 鷗라고 쓰는 것이 올바르다. 현재는 森 鷗外, 森 鴎外 표기를 병행하기도 한다.[2] 1873년 당시 '도쿄의학교'라는 명칭이된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877년 '도쿄카이세이대학'과 '도쿄의학교'가 합병되어 일본 최초의 대학인 '도쿄대학'이 설립이 되어 졸업은 '도쿄대학'이라는 명칭으로 했다. 이듬해인 1878년 '도쿄대학'에 학사 학위 수여권이 부여되었고, 모리는 1881년 졸업하였다. 1885년 도쿄법학교와 통합되었고, 1886년에는 공부대학교와 통합되고 제국대학령의 반포로 인해 '제국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890년에는 도쿄농림학교가 통합되었고 1897년에 교토제국대학이 설립되어 명칭 중복을 해소하고자 '도쿄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61년 만에 '도쿄대학'으로 환원되었다. 1886년 이전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의 도쿄대학을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3] 현재 시마네현 카노아시군 츠와노정[4] 둘 다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격에 참가했던 노기 마레스케자살에 충격을 받고 그 영향을 받은 소설을 썼다. 덧붙여 노기 마레스케는 메이지 덴노의 부음을 듣고 죽은 것.[5] 나츠메 소세키는 『마음』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자살과 선생의 자살을 연관시켰으며, 모리 오가이는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썼다.[6] 오늘날의 아다치구아라카와구의 경계에 있는 지역. 오늘날에는 기타센주와 미나미센주로 나뉘었다.[7] 사상가, 교육자, 관료로, 모리와 마찬가지로 츠와노 번주의 시의 집안 출신이다. 일본에서 최초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간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서양의 지식을 일본에 전파하는 데에 기여했다. mechanical art를 기술이라고 번역하기를 최초로 제안한 인물이다.[8] 모리는 도쿄 의학교 주변의 하숙집에서 통학했다고 하는데, 그 일을 당한 것은 기숙사에서의 일이라고 하므로 이야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모리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당한 것인지, "기숙사에서 생활하지는 않았으나 기숙사에 강제로 끌려가" 당한 것인지의 여지는 있으므로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9] 이러한 "괴테식 체념"은 동양에서 통용되는 체념과는 다른 개념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한 개인이, 동양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저 "난 여기까지구나" 하고 자신의 한계에 대한 불만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마음속으로 삭히지만, 괴테식 체념을 따른다면 "그래, 현실은 이렇고 난 여기까지야.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나는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할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 하고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멈추지 않는다. 모리가 지은 소설 〈기러기(雁)〉의 여주인공 오타마의 대사 중 "저, 이제부터 씩씩해질 거예요."가 있는데, 이 대목에서 이러한 괴테식 체념이 드러나는 것이다.[10] 실제로 모리 오가이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엘리제라는 독일인 여성이 그를 쫓아 따라와 모리와 결혼하려다가 모리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엘리제는 1개월 만에 도로 귀국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본인이 외국인과 연애 및 결혼을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사회적 풍조가 있었고, 이에 더하여 모리의 집안 사람들은 모리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모리의 입신양명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우려하였기에 반대가 심한 것이었다. 오죽하면 모리가 이 연애 경험을 소재로 집필한 소설 〈무희〉가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파격을 불러올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오늘날의 일본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겠는가.[11] 일본 육군 원수로서 육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히 일본 육군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며 내각총리대신까지 맡아 정계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막후 실세였다.[12] 漁史(ぎょし, 교시)는 문인 등이 자신의 필명 뒤에 붙이는 일종의 호칭격 접미사다.[13] 고쿠라[14] 안데르센의 소설 'Improvisatoren'의 번역서. 국내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15] 괴테파우스트의 번역서이다.[16] 그런 입장에서는, 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지 않은 경험에 근거한 판단은 유사의학에 불과하기 때문에 먼저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17] 21세기 현대의학에서도 정확한 메커니즘은 모르지만, 일단 효과가 있고 뚜렷한 부작용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처방하는 약들이 상당수 있다.[18] 모리 오가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군의 총감이었다.[19] 일본어 위키백과 및 여러 웹 사이트 교차 참고. 딸 안느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고 한다.[20] 不律. 독일어로 쓰면 프리츠(...)[21] 화과자의 일종으로 달콤한 소가 들어 있는 퍽퍽한 과자다.[22] 나쓰메 소세키는 딸기잼을 대량구매하여 쌓아 놓고 퍼먹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