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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21:29:54

미시마 유키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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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집안 배경3. 유년기 및 학창 시절4.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5. 작가로 등단 이후6. 미시마 사건

1. 개요

미시마 유키오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집안 배경

일본의 대문호들 중에선 단연코 최고 수준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다른 대문호들 중에도 부모가 대지주나 사업 성공을 한 부유층 자녀는 꽤 있었지만, 미시마 쪽은 부, 명예, 권력 셋 다 가진 완벽한 상류층이라 그네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오죽 최고 수준의 금수저였으면 어릴 때부터 교사들뿐 아니라 교장까지도 학생인 그의 눈치를 봤을 정도다. 다자이 오사무 정도가 그나마 금수저로서 미시마와 견줄 만하지만 그래도 미시마 쪽이 명예적인 부분이나 종합적인 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외가 조상 중에는 홋카이도 에조 공화국의 하코다테 지사였다가 메이지 시대의 고위공무원까지 된 나가이 나오유키도 있었다. 증조부 히라오카 타키치(平岡太吉, 1833~1896)는 에도막부 시절 히메지번에 속한 하리마국의 부농에 고리대금업자로 아들 둘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뛰어난 머리로 단숨에 상류층이 되었다. 큰할아버지인 히라오카 만지로(平岡萬次郞)도 변호사 겸 정치인으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 4선을 했고, 조부인 히라오카 사다타로(平岡定太郎, 1863~1942)는 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내무성 관료로 임관해 제17대 후쿠시마현 지사와 가라후토청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부친인 히라오카 아즈사(平岡 梓, 1894 ~ 1976)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 수석 합격을 했는데, 그런 이들이 대개 초일류 관청인 대장성에 간 것과 달리 이류 부처인 농림성에 가긴 했으나 성내 최고위직인 수산국장까지 올라간 고위관료에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던 엘리트였다.

또한 조모인 나가이 나쓰(永井なつ, 1876 ~ 1939)[1]는 무가 집안 출신으로 부친인 나가이 사다타로는 대심원판사, 모친은 아나호번(宍戸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賴位)의 서녀였기에[2]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조모는 미시마의 어린 시절 엄격한 훈육과 과보호를 했다고 한다. 미시마의 어머니인 시즈에(1905~1987)는 한학자이자 카이세이중학교의 교장을 지낸 하시 겐조(橋 健三, 1861~1944)의 둘째 딸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미시마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가 카이세이중학교를 거쳐 제1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거쳐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인연으로 혼인하였다. 이 정도의 혈통과 인맥, 조부, 부친, 본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감안하면 혈통이 중요시되는 일본 정치사회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N선 의원, 한 술 더 떠 총리도 가능할 정도로[3] 일본의 상류층 중에서 황족 다음가는 권세와 스펙을 가졌다.

3. 유년기 및 학창 시절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ishima_HighSchool.gif

▲ 가쿠슈인 고등과 재학 시절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했는데 또래 친구들이 한창 뛰어놀 나이에도 몸이 약해서 아침조회를 하다가 살짝 어지러워 쓰러진 적도 몇번 있었다. 결국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가 직사광선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도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 빨로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평교사 할 것 없이 신경 쓰던 학생이 키미타케였는데, 이 의사의 진단 이후로 할머니가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몸이 약한 우리 키미타케에게 태양볕을 맞아야 되는 아침 운동장 조회 같은 것은 앞으로 절대 시키지 말라." 하고 면전에서 강하게 요구했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시마 유키오는 모든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운동장 조회를 공식적으로 다 빠졌다.

가뜩이나 왜소한 데다가 건강도 안 좋은데 의무적으로 햇빛도 자주 피하고 살다보니 얼굴색이 항상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로 유명해서, 미시마를 안 좋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창백"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명문가 집안의 가오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는지, 당시 유키오의 동창들이 훗날 증언한 바로는 못된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도[4] 기세에 밀린 적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덩치 크고 짓궂은 반 애가 방과 후 집에 가려고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야, 창백이, 넌 불알도 창백하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유키오는 기세 좋게 바지 단추를 풀어 그것들을 꺼내 "봐라! 봐!"라고 하면서 당당히 공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한 그 아이가 뻘쭘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집에 갔다고 한다.[5]

4.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

앞에서도 상술했지만 조부때부터 3대가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우리로 치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6] 미시마 유키오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걸로 유명해서[7]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8]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참고로 아직 대학생일때 일본이 패망해서 제국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입학해서 도쿄대학으로 졸업했다.[9]

그러나 그는 이후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10] 그러나 미시마는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여러 잡지에 단편 소설을 출판하고 문학인들과 어울리며 문학도의 길을 착실히 걸어나간다. 그러나,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장관직에서 잘리고[11]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12]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이에 따라 미시마 역시 취업을 준비하게 되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7년 여름에 유명한 은행 두 곳의 시험을 봤으나 탈락했다.[13]

결국 미시마는 아버지처럼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여 졸업 직후인 겨울에 합격한 뒤 대장성[14]에 입성해 관료가 된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 중에도 계속 글을 써 보내고 잡지사 등에서 출판하는 것을 병행했고 이런 겸업 체제가 길어지다 보니 원래 선천적으로 약했던 건강이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글쟁이들이 고위 공무원으로 잘 살 수 있는 자기 아들을 계속 배고픈 길로 부추긴다는 생각에 성질이 난 아버지는 1948년에 그전부터 아들의 글을 실어주고 있던 출판사 가마쿠라 문고[15]를 찾아가, 출판사 편집자에게 "아니 지금 당신들, 이제 24살(만23세) 된 어린 내 아들 키미타케(미시마 유키오)가 남들보다 글 조금 더 능숙하게 쓴다고 게이샤처럼 너무 오구오구해 주는 거 아니오? 뭐 걔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1911 ~ 1973)[16]라도 될 거 같소?"라고 항의했다.실제로 그리 됐다. 이에 편집자 기무라 토쿠조(木村德三, 1911~2005)[17]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 연재할 실력은 될 겁니다.[18] 화려한 (스타) 작가가 되고 말고 하는 거야 자기 운에 달린 거긴 합니다만, 최소한 일류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합니다."라고 하자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5. 작가로 등단 이후

그 후에도 미시마는 계속 문학 활동과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며 몸이 약해졌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기차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플랫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19], 이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20]는 미시마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열 달 만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가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이후 과거 그의 작품 활동을 지원한 기무라 토쿠조의 "일류 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그 말대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일류작가 겸 최고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는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한국 드라마 중 괜찮아, 사랑이야시카고 타자기 같은 작품을 보면 유명한 젊은 작가가 거의 연예인 스타처럼 나오기에, 한국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가 없는데[21] 그렇게 표현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당시 미시마 유키오는 고작 20대부터 정말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쓰는 작품마다 히트시키고 여러 문학상 수상으로 문학성의 인정까지 모두 받으며, 온 언론과 방송의 주목으로 진짜 연예인 스타 같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22] 어쨌건 정말 어렵다는 대중성과 문학성 둘다 확실히 거머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대중적 스타작가의 계보를 잇는 아이콘.[23]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24]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본인은 1970년 자살한 탓에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천황주의자여서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에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25] 19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의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 전투기를 타는 따위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수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고,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출처불명]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황의 방패란 의미다. 참고로 이웃나라 한국의 5.16 군사정변을 모델로 한 정변을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603310896_01.jpg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들과 만나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2시간 반가량 대담을 진행했다. 전공투 학생 수백 명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로,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었다.# 그는 "천황만 인정하면 너희와도 함께하겠다." 라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그는 전공투가 지향했던 사회주의의 계급 타파에 대해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덴노'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 라고 말하며 천황제 인정을 양보로서 제안했다.[27] 그리고 설전에서 전공투 학생들은 동의하지 못하면서 미시마에게 '그건 궤변이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당시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의 현체제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인다는 것.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했고, 패널로 참가했던 전공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본인 구미에 맞는 만족감을 얻고 간 모양이다. 이 대담은 이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TBS 요약본: #1, #2, #3, #4, #5)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공투해당 문단을 참고할 것.

그런데 이 작자는 정작 군대도 안 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의관이 청진을 할 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하고 군 입대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오진인 줄 알고서도 끝까지 그 결과대로 묵인했다는 것이다. 역시 집안 빽이 이를 두고 가면의 고백에서는,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을 때는 아쉬웠으나 신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6. 미시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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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2.bp.blogspot.com/200px-ScarlettJohanssonFeb07.jpg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을 따르는 다테노카이 멤버들 중 4명과 함께 육상자위대 총감실을 습격하여 총감을 인질로 잡고 발코니에 올라 일본의 정치적 궐기를 촉구한 후 방패회 멤버들 중 모리타 마사카쓰와 같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5세.


[1] 홋카이도 에조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나가이 나오유키의 직계 증손녀라고 한다. 나가이 나쓰가 어렸을 때 증조부는 에도막부 후반기와 메이지 유신 초반기의 권력자 중 하나였다. 막상 나오유키는 에조 공화국 때 망하면서 항복하게 생기자 할복자살을 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사실 에조 공화국 설립은 엄연히 심각한 쿠데타라서 그들이 항복한 뒤에 법대로 다 죽였어야 했지만, 그들이 항복하자 희한하게도 메이지 덴노는 공화국 설립자들의 능력을 높이 사서 용서만 한 게 아니라 중요한 관직을 주었고 권력자로 만들어 주었다. 단, 나가이 나오유키 자체는 하급 영주의 서자이자 중급사무라이인 하타모토 계급의 양자였기에 어떤 귀족 적통 집안 같은건 아니다.[2]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남편을 은근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 실제로 그의 친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스타 소설가로서의 이력 덕에 자민당 8선 의원과 4선 도쿄도지사를 역임했다.[4] 물론 권세 있는 가문의 아이를 폭행했을 리는 없으니, 물리적 충돌은 없었던 것이고 그저 기싸움 개념으로 말로만 시비를 자주 걸었던 모양이다. 그와 관련된 많은 기록에 초등학생 시절에 주먹다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5] 미시마 유키오의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화가인 미타니 마코토가 훗날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쓴 회고록인 "급우(친구), 미시마 유키오"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타니 마코토가 당시 옆에서 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회고의 글은 "남색 교복 배경에 튀어나온 그것이 체격에 비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6] 과거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은 이 정도의 지위를 보장하는 시험이었다.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은 해방 후에 행정부 관료, 판검사,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선택과목으로 법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변호사 자격이 주어진 경우도 있었다.[7]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가, 반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왔을 때 "히라오카 상(미시마 유키오)은 태어날 때 일도 기억해요!"라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걸로 전교에 유명했다고 한다. 한 일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서전격 소설로 유명한 가면의 고백에 주인공의 언급으로, 자신이 아기였을 때 머리를 씻기려고 물을 담아놓은 대야에 머리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써 있다. 물론 자서전격 소설이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니 진짜인지 알 수야 없지만.[8] 이에 대한 증거가 미시마 유키오가 졸업식 연사를 했던 사진인데 당시 일본은 전교 1등이 졸업식 연사를 했기 때문에 이 사진이 미시마가 전교 1등이라는 증거가 된다. 또한 덴노로부터 금시계도 받았다고.[9] 도쿄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개칭된게 1947년 9월이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대학 이름이 개칭되고 2개월이 지난 1947년 11월 28일에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개칭된 이름으로 졸업학력이 남게 되었다.[10] 미시마의 아버지는 미시마 유키오의 방에 들어가 써놓은 원고를 찢어버릴 정도로 아들이 문학의 길을 걷는 걸 탐탁지 않아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인 시즈에가 미시마를 위로해 주면서 미시마가 계속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 후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왔다.[12] 당시 일본 내부경제는 전쟁자금 부족으로 2차대전 말기에 공무원 월급도 밀리거나 안 주고, 멀쩡한 회사 공장을 군부가 빼앗아서 군수물자 공장으로 바꾸는 등 엉망진창 개판이었고 종전 후에도 수습하느라 나라가 거지꼴이었다. 거기다 고위관료들도 공직에서 추방되고 재벌도 해체되며 군인들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해체한 대한제국군마냥 해체되면서 전부 다 실업자가 되는 등(물론 나중에 자위대가 형성되며 그곳으로 흡수된 이들도 많다) 일본의 엘리트 계층들이 죄다 나가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상류층도 이런데 서민들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13] 필기시험은 다 합격했으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전후의 처참한 경제상황 속에서 도쿄대 법학부 출신이라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14] 이미 문학활동을 병행하던 관계로 합격자 중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합격자 167명 중 138등으로 합격했다. 물론 졸업 직후 바로 합격을 했다는 것, 게다가 계속 글을 써서 출판하는 것과 고등문관시험 공부를 병행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겸업을 하면서도 국가 고시에 합격한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거다.[15] 태평양 전쟁 말기에 출판계 사정도 갈수록 악화되는 가운데 '전쟁으로 황폐화된 민심을 어떻게 밝게 비추어 줄 오락거리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당시 가마쿠라에 거주하던 문인들이 자신들의 장서를 각출해 세운 책 대여점에서 시작해 패전 뒤에 출판사로 발족했다. 유키오는 여기에 1945년부터 글을 기고하였다. 엔도 슈사쿠도 1948년에 이곳에서 잠시 촉탁으로 근무하며 <20세기 외국 문학 사전> 편찬을 도왔다. 1949년에 도산했다.[16] 일본의 소설가. 참고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기독교 신자였다. 한국에는 <내가 아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번역되어 있다.[17] 패전 뒤인 1946년 1월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당시 가마쿠라 문고의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 오다 사쿠노스케가 이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다.[18] '아사히 신문에 연재 소설은 쓸 수 있겠네'라는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당대 아사히 신문 정도의 메이저급 언론에 소설이 연재된다는 것은 당시 작가들이 선망하는 소설가로써의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다. 그 나츠메 소세키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써 이름을 떨쳤다.[19] 다행히 기차가 올 시간보다 한참 전에 쓰러진 거라 기차에 치일 일은 없었고, 역무원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잡아주면서 기어 올라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병원에 옮겨져 입원을 했었다.[20] 입원한 미시마 유키오의 손을 붙잡고 "소설이 너한테 대체 뭐길래 그러냐"며 울었다고 한다. 엘리트 집안에서 무난히 기대한 대로 엘리트로 성장한 아들한테 엘리트 공무원으로 가족의 위상을 다시 살릴 거라는 기대가 워낙 컸던 집안이기에 충격이 더 컸었다.[21] 일단 문학성과 대중성이 둘다 압도적인 젊은 문학가가 전혀 없고, 그걸 이루는 문학가들은 거의 중년 이후에나 유명해지고 나서야 비문학적인 사회활동을 병행한다. 그나마 공지영 정도가 30대 초반부터 대중성을 크게 잡았고 문학성도 인정은 받았으나, 작품마다 히트를 치지는 못했고 문학성에서도 온전히 최고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한국에서는 저 드라마 주인공 스타일에 제일 가깝다[22] 게다가 당시가 TV라는게 나온지 얼마 안 되어 TV용 연예인(영화 배우나 무대용 연예인들의 부업 같은 느낌)이라는 직업 장르가 정확히 잡히지 않아, 연예인이 아닌 다른 분야 유명인들이 TV로 더 인지도를 치고나갈 여지가 현대보다 훨씬 크게 있던 것도 사실이다.[23] 본래 19세기 대중소설의 개념이 등장하는 시대에 등장한 여러 대중소설작가들은 낭독회를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는 유명한 소설가는 연예인급 인기를 모았다. 일제시대 이광수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 최인호의 인기는 어마어마 해서 거의 아이돌에 가까웠다. 이문열 역시 1980년대 연예인급 소설가로 명성이 높았다.[24] 노벨상 후보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미시마 사후에야 공개된 사실이다. 노벨 재단은 당대에는 수상 후보자를 공개하지 않으므로 당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물로 세간에서 거론될 만큼 인정받는 작가였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다.[25] 좌파 성향 학생들이 그들과 대립했음에도 그에게 관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출처불명] [27] 사실 이게 정말로 천황제 중심의 군주국가를 지지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시마는 보수 우익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종의 극우 혁명가였는데, 전공투들의 '경제적 목적'을 인정할테니 다른 부분과 손잡자는건 좌-우익의 혼합사상, 즉 제3의 위치이다. 나치즘과는 상관없는 대중주의 파시즘, 혹은 민족 볼셰비즘인 셈이다. 기타 잇키가 덴노를 절대적인 존재로 세우는 대신, 덴노의 말과 행동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인사들이 통제하게 해 대중들의 뜻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게 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을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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