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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드 브르타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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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국 샤를 8세의 왕비
프랑스 왕국 루이 12세의 왕비
안 드 브르타뉴
Anne de Bretagne
파일:안 드 브르타뉴.jpg
출생 1477년 1월 25일 또는 1월 26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사망 1514년 1월 9일 (향년 36세)
프랑스 왕국 블루아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1488년 9월 9일 ~ 1514년 1월 9일
배우자 막시밀리안 1세 (1490년 결혼 / 1492년 무효화)
샤를 8세 (1491년 결혼 / 1498년 사망)
루이 12세 (1499년 결혼)
자녀 샤를 오를랑, 클로드, 르네
아버지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푸아
형제 이자보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결혼2.3. 두 번의 왕비 대관식2.4. 사망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

[clearfix]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두 번째 아내[1]이자, 프랑스 왕국샤를 8세루이 12세의 아내.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프랑스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477년 1월 25일 또는 26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와 마르그리트 드 푸아[2]의 장녀로 태어났다. 4년 뒤 여동생 이자보가 태어났지만 9살 때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푸아가 사망했고 2년 뒤에는 아버지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안은 프랑수아즈 드 디낭이라는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프랑수아 2세의 사망 당시 브르타뉴 공국은 반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안이 다음 여공작이 되었고, 낭트, 몽포르, 리치몬드 여백작 작위도 함께 상속받았다. 안이 결혼하는 상대에 따라 브르타뉴 공국의 영토가 남편에게 상속되므로 당시 안은 모두가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안과 결혼하기 위해 여러 결혼 협상들이 진행되었고 그 중에는 웨일스 공 에드워드, 헨리 튜더, 막시밀리안 대공, 오를레앙 공작 루이 등이 있었다.

2.2. 결혼

1490년 12월 19일, 안은 독일왕이자 차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인을 통해 결혼했다.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던 프랑스 왕국에게는 상당히 불리한 일이었다.[3] 프랑스 왕국의 샤를 8세는 안과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을 무효화시키고자 군대를 보내 안의 거처인 을 포위했다. 안은 잉글랜드 왕국,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카스티야 왕국의 도움을 받아 두 달이나 버텼으나 결국 프랑스 군대에 함락되었다.

당시 샤를 8세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브르타뉴 공국을 얻기 위해 약혼을 파기하고 안과 다시 약혼했다.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안이 이미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고 샤를 8세와의 결혼은 강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샤를 8세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 당시 샤를 8세가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안이 다음 후계자와 결혼하여 프랑스가 브르타뉴 공국을 합병할 것을 명시했다.
파일:604259-1461252042-01.jpg
샤를 8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결혼식

2.3. 두 번의 왕비 대관식

1491년 안은 샤를 8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국의 왕비가 되었고, 다음 해에 생 드니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안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7년간의 결혼생활 중 무려 6번이나 임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산되거나 요절하였고, 프랑스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누이 안 드 보주 때문에 안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으로서의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1498년 4월 4일 남편 샤를 8세가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는 어이없는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안과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안은 결혼 계약대로 다음 국왕인 루이 12세와 결혼해야 했다.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누나인 프랑스의 잔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교섭하여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프랑스가 지원하는 것을 댓가로 첫 결혼이 강요된 결혼이었다는 핑계로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안과 결혼했다. 1504년 생 드니 대성당에서 두 번째 대관식이 거행됐고 안은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왕비가 된 인물이 되었다.

샤를 8세의 왕비이던 시절과는 다르게 루이 12세의 왕비로서 안은 브르타뉴 여공작의 지위를 회복했다. 또 브르타뉴 공작위를 차남이나 딸에게 상속하여 프랑스 왕위와 분리할 것을 보장받았고, 장녀 클로드를 후계자로 삼았다. 안은 브르타뉴가 보이는 블루아 성에서 살았으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안은 프랑스스페인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딸 클로드를 카를 대공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브르타뉴 공국을 얻어보려는 남편 루이 12세는 그녀를 프랑스 차기 왕위계승자인 앙굴렘의 프랑수아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4]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와 합병되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던 안은 죽을 때까지 클로드와 프랑수아의 결혼을 반대했고, 공국을 차녀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이러한 안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은 여행을 명분으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2.4. 사망

인생 내내 임신과 유산을 반복한[5] 안은 매우 쇠약해졌고, 결국 1514년 1월 9일 신장 결석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으며 심장은 낭트로 옮겨져 부모 곁에 안치됐다.[6] 유언장에는 브르타뉴 공국을 차녀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적혀 있었는데, 루이 12세는 이를 무시하고 장녀 클로드를 브르타뉴 여공작에 임명했다. 또 안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프랑수아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사를 클로드의 후견인으로 삼은 데다, 안이 죽자마자 클로드를 프랑수아와 결혼시켰다. 결국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한 후 브르타뉴 공국은 영원히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안 드 브르타뉴
(Anne de Bretagne)
<colbgcolor=#fff3e4,#331c00>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Francis II, Duke of Brittany)
<colbgcolor=#ffffe4,#323300> 에탕프 백작 리샤르
(Richard, Count of Étampes)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John IV, Duke of Brittany)
나바라의 후아나[7]
(Joan of Navarre)
베르튀스 여백작 마르그리트
(Margaret, Countess of Vertus)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8]
(Louis I, Duke of Orléans)
발렌티나 비스콘티[9]
(Valentina Viscont)
마르그리트 드 푸아
(Margaret of Foix)
푸아 백작 가스통 4세
(Gaston IV, Count of Foix)
푸아 백작 장 1세
(John I, Count of Foix)
잔 달브레
(Jeanne of Albret)
레오노르 1세
(Eleanor)
추안 2세
(John II)
수리아 1세
(Blanche I)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샤를 8세
(Charles VIII)
1남 프랑스의 도팽 샤를 오를랑
(Charles Orlando, Dauphin of France)
1492년 10월 11일 1495년 12월 16일
루이 12세
(Louis XII)
1녀 프랑스의 왕비 클로드
(Claude, Queen of France)
1499년 10월 13일 1524년 7월 20일 프랑수아 1세
슬하 3남 4녀[10]
2녀 페라라 공작부인 레나타
(Renata, Duchess of Ferrara)
1510년 10월 25일 1574년 6월 12일 에르콜레 2세 데스테
슬하 2남 3녀

4. 여담



[1] 다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전에 혼인이 무효화되었기 때문에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2] 나바라 왕국 레오노르 1세의 딸로 나바라 왕국의 인판타였다.[3] 프랑스를 둘러싼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땅이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인 상황에서 프랑스와 가장 가까이 있는 브르타뉴 공국마저 합스부르크 가문에 상속될 예정이었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좋았을 리가 없다.[4] 루이 12세와 안 사이에서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브르타뉴 여공작이 될 클로드가 왕위계승자인 프랑수아와 결혼을 한다면 브르타뉴 공국도 프랑스에 합병이 된다.[5] 무려 11번이나 임신했다.[6] 그러나 훗날 프랑스 혁명 때 혁명군이 무덤을 크게 훼손하고 시신을 공동묘지에 던져버렸다고 한다(...)[7] 카를로스 2세의 3녀이자 장 2세의 외손녀다.[8] 샤를 5세의 차남이다.[9] 장 2세의 외손녀다.[10] 앙리 2세, 스코틀랜드의 왕비 마들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