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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9:52:27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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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
Constance de Bretagne
이름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Constance de Bretagne)
출생 1161년
브르타뉴 공국 갱강
사망 1201년 9월 3일 또는 9월 4일
브르타뉴 공국 낭트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1166년 ~ 1201년
리치먼드 여백작
1171년 ~ 1201년
아버지 코난 4세
어머니 헌딩턴의 마가렛
형제 기욤, 마르그리트
배우자 조프루아 2세, 라눌프 드 블론드빌, 기 드 투아르
자녀 엘레오노르, 마틸드, 아르튀르 1세, 알릭스, 카트린, 마르그리트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여공작.

2. 생애

1161년경 브르타뉴 공국 갱강에서 브르타뉴 공작 코난 4세와 헌딩턴 백작 헨리[1]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4세의 누이인 헌딩턴의 마가렛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기욤, 마르그리트[2]가 있었다. 1166년, 포허 자작 에우돈 2세가 여러 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브르타뉴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에 코난 4세는 앙제로 이동한 뒤 1166년 7월 31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접견해, 자기 딸이자 후계자인 콩스탕스를 헨리 2세의 넷째 아들인 제프리와 약혼시키고, 두 사람에게 브르타뉴 행정부를 맡기고 퇴위했고, 오직 갱강 백국만 다스렸다. 당시 코난 2세에게는 기욤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헨리 2세의 압력으로 공작위 계승권이 배제된 뒤 성직자가 되었다.

그 후 콩스탕스는 런던으로 이송되어 그곳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헨리 2세는 1168년 포허 자작 에우돈 2세를 굴복시키고 브르타뉴 전역을 안정시켰다. 이제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 푸아투, 멘, 아키텐 공국에 이어 브르타뉴 공국까지 실질적으로 통치해, 프랑스 왕국 국토의 서쪽 절반 이상을 온전히 자기 영향권으로 삼았다. 1181년, 콩스탕스는 제프리와 결혼했고, 제프리는 그녀의 남편 자격으로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를 칭했다. 이후 조프루아 2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통치를 주도하는 동안,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양육하는 데 전념했다.

1186년 8월 19일, 조프루아 2세가 파리 궁정에서 병사했다. 헨리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계속 자기 영향권으로 붙들어놓기 위해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인 체스터 백작이자 아브랑슈 자작 라눌프 드 블론드빌과 재혼하도록 강요했다. 결혼식은 1188년 또는 1189년 2월 3일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귀족들은 이를 모욕적인 처사로 여기고, 라눌프가 리치먼드 백작으로서의 영예를 누릴 뿐 브르타뉴 공작을 자처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1189년 5월, 콩스탕스는 세인트 길다스 드 루이스 수도원 예배에 참석해 아버지와 첫 남편 조프루아 2세, 딸 마틸드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기부금을 납부했다.

1191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는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 국왕 탕크레디와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4살이었던 그의 조카이자 콩스탕스와 조프루아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는 리처드 1세에 의해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아르튀르가 성년이 되면 탕크레디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었다. 1196년, 콩스탕스는 브르타뉴 귀족 총회에서 9살된 아들 아르튀르를 공동 공작으로 세웠다. 이에 리처드 1세는 장차 아르튀르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 했던 자기 계획이 파탄났다며 불만을 품고, 콩스탕스에게 아르튀르를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했다.

콩스탕스가 아들을 넘기길 거부하자, 리처드 1세는 그녀에게 바이외로 출두하라고 명령한 뒤, 자기가 브르타뉴 공작이 되는 걸 인정하지 않은 콩스탕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라눌프 드 블론드빌에게 그녀를 남치하라고 명령했다. 라눌프는 콩스탕스가 퐁토르송을 방문했을 때 납치한 뒤 텔레리에 있는 자기 성에 가뒀다. 콩스탕스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튀르는 급히 브레스트 성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파리로 이동해서 필리프 2세의 보호를 받았고, 브르타뉴 성직자 및 귀족들은 콩스탕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리처드 1세는 브르타뉴 대귀족들이 인질을 인도하는 대가로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이 인질을 데리고 오자, 그는 인질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끌고 온 귀족들까지 감옥에 가뒀다. 이에 분노한 브르타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리프 2세와 전쟁을 치르던 리처드 1세는 1198년 콩스탕스와 브르타뉴 인질들을 전원 석방하고 브르타뉴 귀족들과 화해했다.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성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에 콩스탕스는 리처드 1세의 강압으로 이뤄졌던 라눌프와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 드 투아르와 재혼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막대한 뇌물을 지불했고, 교황은 그녀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1199년 6월 1일 인노첸시오 3세가 투르 대주교와 돌 대주교 사이에 수백 년간 이어졌던 브르타뉴 교구 관리권 분쟁에 관해 투르 대주교의 손을 들어주고 돌 대주교의 직위와 팔리움을 박탈해 다른 브르타뉴 교구들과 함께 투르 대교구에 귀속되도록 하자, 콩스탕스는 이에 항의했다가 파문되었다.

1201년 9월 3일 또는 4일, 콩스탕스는 낭트에서 사망했다. 투르 연대기에 따르면, 그녀는 나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이 기록은 투르 대주교가 브르타뉴 전역을 관장하는 것에 반발한 그녀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이기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보며, 쌍둥이 카트린과 마르그리트를 낳은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콩스탕스는 낭트 남쪽의 소리니에르에 위치한 빌뇌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의 둘째 아들[2] 몰리나와 아티엔차 영주이며 나르본 자작인 페르도 만리케 드 라라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