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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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십자군 원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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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틴의 뿔 전투(1187년 7월)로 예루살렘 왕국이 사실상 멸망하고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 군주 살라딘(1138년 ~ 1193년)에게 점령당하자, 그에 따라 성지를 탈환하고자 결성된 십자군이다.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다.아크레에 도착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오귀스트 |
이 시기의 십자군은 사상 최고 수준의 전력을 가진 십자군이었다. 당시 원정에 참여했던 왕들의 능력, 군대의 규모와 질, 참가국의 권위 등으로 따질 때 모든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단연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하다. 3차 십자군에 참가한 군주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당시 유럽 최대의 세력을 자랑했던 신성 로마 제국의 "붉은 수염왕"(바르바로사) 프리드리히 1세(1152년 ~ 1190년), "사자심왕"이라 불릴 정도로 용맹을 떨쳤던 잉글랜드 왕국의 리처드 1세(1188년 ~ 1199년), 중세 프랑스 카페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업적으로 "존엄왕"(아우구스투스)이라 불리던 필리프 2세(1180년 ~ 1223년) 등, 당대 유럽의 내로라하던 걸출한 군주들이 모두 참가했기에 "왕(들)의 십자군"이라 불릴 정도의 위세를 자랑하였다. 더욱이 이슬람 세력을 대표하여 이들과 맞선 인물은 당대의 영웅으로 회자되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이었다.
이처럼 그 멤버들의 면면만 보면 드림팀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겠으나, 결과적으로는 용두사미에 가까웠다. 살라딘이라는 한 영웅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통합되어 있었던 이슬람 세력과는 달리, 십자군들은 단결력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었기에 사실상 아크레 함락 이후 리처드 1세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원정을 총지휘하다시피 하였다.[1] 그런 한계 때문인지 결국 성지 탈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다만 리처드 1세가 분전한 덕에 살라흐 앗 딘에게 빼앗겼던 레반트 해안 지역의 주요 도시들을 일부 회복할수 있었고, 요새들이 신축 및 재건되는 등의 뚜렷한 성과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유브 왕조와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어 향후 26년간 기독교도들의 성지 순례가 보장되는 등 십자군 국가들의 수명 연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역대 십자군 원정 중에서도 후세에 호사가들에 의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가장 많은 편이다. 3차 십자군 전쟁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흐 앗 딘과 당시 유럽 최고의 명장이자 용맹한 기사로 이름을 드날렸던 리처드 1세의 낭만적인 대결도 후대에 회자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인상적이었고,[2] 또한 이 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유럽 세계의 권력 이동 등을 비롯한 흥미로운 일화가 많기 때문이다.
2. 배경
2.1. 다마스커스의 함락
2차 십자군의 참혹한 실패 이후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 상황은 날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뒤를 이어 장기 왕조의 지배자로 집권하게 된 누르 앗 딘(일명 누레딘)은 이슬람의 종교적 열정을 부채질하여 십자군들에 대한 성전을 주장하며 이슬람 세계를 규합해갔다. 2차 십자군의 실패 이후 유럽에서 자신들의 신앙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듯이 그 역시 십자군 국가의 존재는 이슬람 신앙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라 주장했고 신앙을 '정화'하기 위해 시아파를 박해하고 사원과 학교를 건립했다.한편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3세가 어머니 멜리장드를 숙청하여 나불루스의 영주로 격하시킨 다음에 1153년 아슈켈론을 점령함으로 전 팔레스타인을 예루살렘 왕국의 영역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2차 십자군 원정으로 훼손되어 버린 다마스커스와의 관계가 최악의 수로 돌아왔다. 예루살렘 왕국군이 아슈켈론에 몰려 있는 동안 누레딘이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것이다.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십자군을 불신하고 있었고 별 저항도 없이 성문을 열어 누레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자신들이 통일된 이슬람 세계에 포위되었단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비옥한 이집트를 정벌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3]. 1163년 보두앵 3세 사후 그의 동생 아말릭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본격적으로 이집트 원정에 착수했다.
2.2. 예루살렘 왕국의 이집트 원정
당시 이집트는 누레딘이 파견한 장수 시르쿠와 누레딘에 의해 앉혀진 파티마 왕조의 권력자인 샤와르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샤와르는 누레딘을 배반하고 아말릭 1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아말릭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64년 빌베이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누레딘이 안티오키아를 공격해 안티오키아의 십자군들을 궤멸시킴으로 전략의 추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아말릭은 시르쿠를 이집트에서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이집트에서 물러났다.3년 후에 누레딘은 다시 시르쿠를 이집트에 보내자 예루살렘 왕국은 샤와르의 원조 요청을 다시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 시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 드디어 기독교도의 5대 교구[4]가 모두 회복된 것이다.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곧 파티마에 반환되었으나 예루살렘 왕국의 깃발은 파로스의 등대 위에 휘날릴 자격을 얻었고 카이로엔 십자군들이 주둔했다. 이집트는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집트를 완전히 점령하고자 했고 구호 기사단이 여기에 열렬히 호응했다. 성전 기사단은 다마스커스를 공격해 중요한 우방을 잃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를 공격했다. 샤와르는 어제의 적인 누레딘과 동맹을 맺어 맞섰다.
1168년 십자군은 빌베이스를 장악하고 카이로를 공격했다. 하지만 시르쿠의 군대가 도착할 때 즈음에 십자군은 완전히 지쳐버렸다. 아말릭은 이집트에서 철수하는 댓가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고자 했으나 샤와르와 누레딘은 십자군이 지친 걸 알고 협상을 질질 끌었다. 결국 공세 종말점에 다다른 십자군들은 맥없이 철수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 원정의 댓가를 자기 손으로 걷어차고 중요한 우방도 잃고 말았다.
2.3. 살라딘의 부상
샤와르의 결말도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시르쿠에게 죽임을 당했고 시르쿠는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2달 후에 시르쿠가 급사하자 그의 조카 살라딘이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다. 에루살렘 왕국은 이집트 정복을 포기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연합하여 다미에타를 쳤으나 서로간의 불신으로 인해 실패했다. 1174년에는 시칠리아의 왕 굴리엘모 2세의 도움으로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지만 아말릭 왕이 급사하면서 원정은 다시 흐지부지해졌다. 노르만은 패배했고 귀환했다.한편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보두앵 3세의 뒤를 이어 보두앵 4세가 즉위했다. 그는 나이도 젊고 총명하며 용감했으나, 문둥병을 앓고 있어 오래 살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어 살라딘과 대립하던 누레딘이 죽자 시리아에서는 그의 빈자리를 놓고 내전이 발발했다. 살라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다마스커스를 점령한 후,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일하여 자신의 기반을 닦았다. 아직까지 모술과 알레포에 장기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있었지만 살라딘은 사실상 전 이슬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1176년 동로마군이 미리오케팔론에서 튀르크에게 패배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소아시아 회복은 허사로 돌아갔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서유럽은 원조에 소극적이었다. 십자군들은 자력으로 이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살라딘은 1180년 튀르크와 동맹을 맺고 1183년에 알레포를 점령했다. 모술과 동맹을 맺은 다음에 십자군과 4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어 십자군들의 역습을 막고 세력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는 서유럽인들을 혐오하던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와 협상하여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십자군이 도움을 받을 최후의 여지까지 없앴다.
2.4. 예루살렘의 위기
문둥이 왕 보두앵 4세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했고 예루살렘의 권좌를 놓고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몬페라토 후작 굴레엘모, 왕의 여동생 시빌라, 티레 대주교 기욤 드 티레, 기 드 뤼지냥, 르노 드 샤티용이 얽힌 예루살렘의 파벌 다툼은 고조화되었다. 시빌라와 결혼해서 야파와 아슈켈론의 영주가 된 새로운 섭정 기 드 뤼지냥은 보두앵 4세와 극렬히 대립했다.보두앵 4세는 기 드 뤼지냥을 섭정에서 해임했지만 몸 상태 때문에 새로운 섭정을 뽑아야 했고 트리폴리의 레몽을 10년 임기의 섭정으로 임명하여 자신의 공동 지배자인 조카 보두앵 5세를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레몽은 자신의 정적 쿠르트네의 조슬랭 3세와 협상하여 만약 보두앵 4세가 죽을 시에 섭정 자리를 그에게 넘기겠다고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1185년 보두앵 4세가 승하했고 보두앵 5세가 즉위했다.
그런데 조슬랭이 반란을 일으켜 아크레와 베이루트를 장악하였고 격노한 레몽은 나불루스에 소집령을 내렸지만 그의 파벌을 제외한 귀족들은 소집을 무시했다. 결국 내전은 불가피했으며 살라딘은 즐겁게 기독교도들의 팀킬을 구경했다.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는 재빨리 시빌라를 예루살렘 여왕으로 즉위시켰다. 시빌라는 편법을 써서 자신의 남편 기 드 뤼지냥에게 왕위를 주었다. 레몽은 티베리아스로 퇴각해 살라딘과 동맹을 맺어 도움을 요청했고 살라딘은 기꺼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편 르노 드 샤티용과 기 드 뤼지냥의 관계는 엉켜버렸고 르노는 순례자들을 약탈하면서 제멋대로 굴었다. 이미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의 호전성으로 곤욕을 치른 르노였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트랜스요르단이 자신의 독립 왕국이라면서 행패를 부렸다. 결국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선전포고했다.
2.5. 하틴의 뿔과 예루살렘의 함락(1187)
살라딘의 예루살렘 원정. |
1187년 7월 4일, 살라흐 앗 딘은 프랑크 군대를 하틴의 뿔에서 제압하였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기를 생포하였다. 그해 9월 20일, 무슬림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재차 포위되자 성 안의 기독교도들은 (1차 십자군이 자행하였던) 1099년의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 몸서리쳤다.
상황의 심각성을 안 레몽은 살라딘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예루살렘에 충성을 맹세했다. 예루살렘은 2만 명의 대군을 소집했지만 1187년 7월 3일 살라딘의 병사 3만 명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했다. 이것이 바로 하틴 전투다. 자세한 정황은 해당 항목 참조. 포로로 잡힌 르노 드 샤티용은 살라딘이 직접 목을 벴고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을 모조리 죽였다. 이것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방위 능력은 공백이 되었고 차례로 아크레, 아슈켈론이 줄줄이 항복했으며 이벨린의 발리앙의 협상을 끝으로 기독교도들은 몰살을 면할 수 있었다.
수비를 책임지던 발리앙 디블랭은 바위의 돔을 파괴하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겠다며 공격군에 엄포를 놓았다. 이에 살라딘은 공성을 중단하고는 배상금을 받는 조건부 항복을 허락하였다. 라틴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몸값을 내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은 값을 치르지 못하여 노예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 기독교도 2천 명을 대가도 없이 석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10월 2일 예루살렘은 항복을 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그는 550년 전 칼리파 우마르가 이슬람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 입성하였을 때처럼 성묘 교회에 대한 어떠한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690년에 이슬람의 성전으로 세워진 바위의 돔 위에 있던 십자가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돔 위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 인은 물론이요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들은 '알라후 아크바르 !!' 라고 울부짖었고 프랑크 인들은 심히 괴로워하며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도 커 땅이 흔들리는 착각마저 들정도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두 종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바위의 돔의 십자가 조형물이 내려진 이 작지만 큰 사건은 성스러운 도시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음을 상징하는 작은 변화였고, 이슬람과 크리스트교 양측의 기록에 남아있다. 이로써 트리폴리, 티레, 안티오키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 티레도 함락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몬페라토의 코라도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바로 이 시점을 그리고 있다.
2.6. 3차 십자군의 결성
어쨌거나 예루살렘이 이슬람 교도들의 손에 다시 떨어졌단 소식은 지금까지 지원에 소극적이던 전 유럽에 충격을 전해주었다.[5] 교황 우르바노 3세는 충격으로 선종했고, 그레고리오 8세가 즉위하여 <아우디타 트레멘디>란 교서를 발표해 전 유럽에 7년간의 휴전을 선포하는 동시에 에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참회와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촉구했다.전 유럽의 왕과 귀족들이 십자군에 참석하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칠리아 국왕 기욤 2세가 트리폴리에 대함대를 보내주어 트리폴리를 이슬람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냈고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와 1188년 1월 21일 휴전을 맺고 같이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도 십자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살라딘 십일조로 알려진 보통세의 부과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십자군을 돕기 위한 세금을 바쳤다.
1189년 4월, 70살이 다 되어 가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십자가의 서약을 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오랜 전투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이 성지까지 지나갈 영토의 모든 지배자들에게서 통행권을 보장받았는데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까지 그에게 통행권을 주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노르만 족과 동맹을 맺은 일 때문에 그를 불신했다. 그는 프리드리히가 트라키아와 그리스 지역을 약탈할 것이며 심지어 콘스탄티노플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가지고 있는 '서로마의 황제' 자리 역시 거슬렸다. 이사키오스 황제는 살라딘에게 십자군의 진격을 방해해 주겠다는 협약을 체결했다. 이 소식은 새어나갔고 서유럽 전체가 격노했다.
3. 진행 과정
- 전투 경과는 리처드 1세 항목도 참조.
3.1. 독일 십자군의 출정과 와해
1189년 5월 11일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황제가 레겐스부르크를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황제가 나타나 검을 치켜세우자 모였던 4,000명의 기사와 15,000의 군사들이 모두 황제의 이름 프리드리히를 연호했고, 전 유럽이 통일된 듯한 장관이었다. 그의 아들인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와 남독일의 귀족들 대부분이 그와 함께했고 역대 십자군을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의 십자군이 그를 따랐다. 온 유럽은 그리스도의 치욕이 곧 갚아질 것이라고 흥분했다.이사키오스 2세는 십자군의 진군을 방해했는데, 격노한 프리드리히는 "방해를 멈추지 않으면 동로마 제국을 먼저 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가 자신을 황제로 칭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논의할 것이 없다고 못박았다. 이사키우스 황제가 그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자 결국 십자군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해버렸고 기겁한 동로마 제국은 도시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1190년 2월 식량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널 함대를 제공했다.
1190년 4월 25일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아나톨리아에 상륙하자 위협을 느낀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5월 18일, 조약을 깨고 그를 습격했지만 독일 십자군은 튀르크 군을 개박살내고 이코니움을 점령해 버렸다#.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허겁지겁 통행권을 다시 보장해 주었다. 독일 십자군은 곧 아르메니아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이때에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6월 10일, 노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살레프 강을 건너던 중에 익사하고 말았던 것이다.[6]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사건 때문에 기세 등등하던 독일 십자군은 황당하고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제가 죽는 바람에 독일 십자군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중 일부만이 프리드리히 공작과 함께 진군했으나 그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3차 십자군에 참여한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던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십자군의 전력은 당초보다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7]
3.2. 아크레 공방전 (1189년 ~ 1191년)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망 소식에 십자군들은 멘붕했지만 그래도 영국과 프랑스에서 강력한 십자군이 오고 있단 사실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188년 6월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과 십자군 귀족들은 살라딘에 다시는 대항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는데 석방되자마자 맹세를 준수할 의무를 면제받았다. 기 드 뤼지냥은 재빨리 티레로 향했는데 티레의 지배자인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지배권을 기 드 뤼지냥 따위에게 줄 생각이 없었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몇 달이나 성 밖에 방치하는 굴욕을 안겨다주었다.
유럽에서 도착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 국왕과 티레의 영주의 다툼에 크게 놀랐고 상황을 모르던 그들은 모두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어주었다. 피사에서 온 십자군들이 기 드 뤼지냥을 따를 것을 맹세하자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군대를 이끌고 재빨리 아크레를 공격했다. 아크레의 수비군은 십자군의 몇 배에 달했고 공격은 무의미해 보였다.
이는 전략적으로는 엉망이었지만 정치적으론 대성공이었는데 기 드 뤼지냥의 아크레 공격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기 드 뤼지냥은 부하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이교도에 맞서는 위대한 십자군의 기사의 이미지를 얻었고 이에 감동받은 십자군들이 앞을 다투어 기에게 합류하면서 코라도는 병신이 되었고 기는 대단한 위신을 얻었다. 결국 코라도도 1189년 9월 기의 공격에 합류했고 1190년에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10월 7일 독일 십자군의 잔여 세력까지 기에게 합류하면서 기의 보잘 것 없는 군대는 대군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해 가을 시빌라 여왕과 두 딸이 모두 사망하면서 기 드 뤼지냥은 왕위를 잃었다. 이제 남은 왕족은 토론의 옹프루아와 결혼한 이자벨 공주뿐이었는데, 문제는 옹프루아가 권력욕이 약하고 뤼지냥과의 친분 때문에[8]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르는 데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코라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 뤼지냥파를 결집시켜 이자벨을 압박하여 그녀를 옹프루아와 이혼시킨 뒤, 1190년 11월 24일에는 아내로 삼아 예루살렘의 왕위를 요구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브레멘과 뤼베크에서 온 독일 상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의 독일 성 마리아 병원을 세웠고, 이것이 수도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클레멘스 3세의 승인을 얻어 1198년에 군사 조직이 되는데 이 기사단을 튜튼 기사단[9]이라 부른다.
3.3.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십자군의 출발
원래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1189년 부활절에 출병하고자 했으나 애로사항이 꽃피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가 부왕이 후계자로 자신이 아닌 존을 앉히려는 걸 알고 반란을 일으켰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편을 들어 휴전 협정을 깨고 헨리를 공격했고 헨리 2세가 7월에 사망하고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다.33세의 리처드는 키가 2m에 육박하는 위엄있는 풍채에 왕에 걸맞은 근엄한 용모를 지녔으며 대담무쌍한 성격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휘어잡았다. 거기다 리처드는 야전 사령관으로서 괴물같이 강했고 지휘관으로서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보여주듯 우수하며, 전략적인 판단력도 합리적이었다. 리처드는 이미 왕자 시절에 헨리 2세의 명령을 어기고 십자가의 서약을 한 바가 있다. 국왕이 된 그의 앞길을 막을 것은 없었다.
한편 25세의 필리프 2세는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키가 큰 체격에 쾌활한 미남이었고 정치 감각이 뛰어났다. 우수한 지휘관이자 교활하긴 했으나 리처드에 비하면 그는 밀리는 처지였다. 형식상 그가 리처드의 주군이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영향력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봉신인 리처드보다도 동원한 병력과 챙겨온 자금도 적었다. 그리고 리처드가 프랑스 내에서는 제후국 군주라 하더라도 아키텐과 노르망디는 프랑스와 별개의 공국이고 왕 자리를 가지고 있던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상관없는 독립국이기에 딱히 꿇릴 것도 없었다.
그 이전에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결혼 때문에 프랑스 영토에 문제가 생겼고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리처드가 상속받은 영지들은 힘으로라도 빼앗아야 할 정도로 중요했기에 언젠가 전쟁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었다.
1190년 7월 4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출병했다. 그들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했다. 필리프는 제노바에서 함대와 식량을 확보한 후에 따로 출발했지만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포르투갈에서 이슬람 교도들과 싸우는 것을 마르세이유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다 지쳐 직접 함대를 구해 시칠리아의 메시나로 이동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함대가 오길 기다렸다.
메시나에서 탕크레드와 만나는 필리프 2세. |
그런데 시칠리아의 새 국왕 탕크레드가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싸움이 붙었다. 시칠리아의 전 국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의 여동생 조안이었는데 리처드는 그녀가 시칠리아로 가져간 지참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탕크레드는 이를 지체했고 분노한 리처드는 10월 4일에 우선 메시나를 점령했다.
그런데 필리프 2세가 성벽에 꽂은 잉글랜드 깃발을 빼고 프랑스 깃발로 바꾸라고 하고 출발 전에 모든 공로를 반으로 나누자고 한 서약을 들먹이며 상속분의 반을 요구했다. 그가 메시나 공격을 거부한 것과 어디까지나 헨리 2세의 자식들과 시칠리아 사이의 상속 분쟁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제3자가 제 집안 재산 분쟁에서 대뜸 나타나서는 내놔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탕크레드는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지참금을 돌려주었는데 필리프는 지참금의 반이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리처드는 조안의 몫을 챙겨줘야 한다며 지참금의 3분의 1을 주었다.
한편 리처드와 잉글랜드 군은 메시나인들과 불화를 일삼았고 메시나인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던 필리프 2세가 그들의 편에 서자 귀족들까지 나서 둘을 화해 시켜야만 했다.
그 후 두 왕은 맞배신을 했다. 리처드가 먼저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라와 일방적으로 파혼하고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약혼했다.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사이를 이간질할 간계를 꾸몄지만 곧 탄로났다.
이 일로 필리프 2세는 파혼 배상금 1만 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하고 두 왕은 아델라의 지참금이었던 벡셍과 지조르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1191년 3월 30일에 필리프 2세는 아크레로 출항, 리처드는 자신의 함대가 도착하자 4월 10일에 출항했다.
3.4. 키프로스 공략
아크레에 도착한 필리프 2세는 코라도와 기 드 뤼지냥이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필리프 2세는 대부분의 영주들의 지지를 받던 코라도의 편을 들었고 바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침착하게 공성전 무기를 조립하며 모든 공격 준비를 끝마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렸다. 한편 리처드는 폭풍우를 만나 20척이 넘는 배들을 잃었는데 난파한 사람들을 키프로스의 지배자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억류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사키오스는 용케 난파를 피한 조안과 나바라의 베렝겔라도 포로로 잡으려 했지만 현명한 여인들은 이사키오스의 상륙 요구를 거부했다.잠시 분기탱천한 리처드가 함대를 이끌고 자신의 재물과 사람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3.5. 아크레 점령전
리처드는 키프로스가 중요한 전략 요충지라는 것을 깨닫고 3차 십자군 원정 내내 키프로스에서 물자를 공급받고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키프로스에서 리처드는 기 드 뤼지냥의 방문을 맞이했다. 기 드 뤼지냥은 과거 리처드와 악연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왕이 되기 전에 그를 푸아투에서 쫓아낸 사람이 바로 리처드였다.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와 필리프 2세가 이미 콘라도를 지지하는 상황에 그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하지만 리처드는 기를 지원하기로 했다.
리처드가 상륙한 직후 병에 걸리고 필리프도 이어서 병에 걸려 살라딘과의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대신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했다. 둘은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꿋꿋하게 전투를 지휘했으며 6월 7일 리처드는 이슬람 수송선을 침몰 시켜 천 명이나 되는 이슬람 지원군을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7월 2일 리처드는 아크레 성벽 반대편에 자신이 직접 '신의 투석기(Le lanceur de pierres divin)'와 '불량한 이웃(Malvoisin)'라고 이름붙인 커다란 망고넬 투석기 두 대를 설치하고 성벽 한 면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필리프도 땅굴을 파고 투석기와 공성차를 이용하여 성벽에 커다란 균열을 냈다.
7월 12일 두 왕은 아크레를 함락시켰다. 아크레 점령 후 두 왕은 대립을 계속했다. 필리프는 키프로스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리처드는 그럴거면 원정 기간 필리프가 상속받은 영지도 반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대차게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한편 레오폴드 5세도 잠깐이나마 성채에 깃발을 올렸는데 두 왕은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았다. 두 왕의 동의로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이 내려졌는데 리처드의 부하들은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다. 격분한 그는 병력을 수습하여 귀국길에 올랐고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이를 지켜보던 필리프는 아크레 함락 직후 병을 이유로 돌아가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10] 리처드를 필두로 프랑스 귀족들과 십자군 영주들까지 만류했지만 그는 모조리 무시했다. 필리프는 리처드의 부재 기간 프랑스 내 리처드의 영지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지만 곧 거짓말로 드러났다. 어쨌거나 필리프는 돌아가기 전에 예루살렘의 왕위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리처드와 상의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부르고뉴의 공작이 프랑스 십자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십자군을 지휘할 자금이 부족했다. 결국 리처드가 자금을 떠맡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십자군을 다 통솔하게 되었다. 리처드는 필리프가 떠나자마자 그가 코라도에게 양도한 전리품과 수비대 포로들을 빼앗았고 코라도는 이 결정에 화가 나서 마음대로 하라면서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라는 권유에 응하지 않고 티레에 머물렀다.
살라딘은 예수의 십자가와 1천 명의 기독교도 포로를 반환하고 20만 디나르의 몸값을 내는 조건으로 리처드가 사로잡은 수비대 2,700명을 살려줄 것을 요구했고 리처드는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살라딘은 예정된 날짜까지 돈을 주지 않았고 화가 난 리처드는 살라딘이 보는 앞에서 포로들을 학살했다. 이에 살라딘도 분노하여 보복으로 8월 27일 케사리아에서 사로잡은 십자군 포로들을 여자를 제외하곤 모두 처형했다.
3.6. 야파 공략
살라딘이 내륙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었기에 리처드는 보급을 함대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내륙 지방인 예루살렘을 공략하기엔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따라서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야파를 함락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리처드의 군대가 야파로 향하기 시작하자 살라딘의 군대가 그 배후를 조심스럽게 밟았다.하지만 리처드는 추호의 빈틈도 내놓지 않았다. 가장 취약한 부대들을 해안 쪽으로 진군하게 한 그는 보병과 기병을 내륙 쪽에 배치하여 내부를 보호했고 뜨거운 날씨를 고려해 조금씩만 행군했다. 살라딘은 화살을 쏘면서 십자군을 도발했지만 리처드의 강력한 통솔력에 십자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행군했다. 수십대의 화살 공격에도 십자군 보병대들이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행군하는 것을 본 살라딘의 전기 작가인 바하 앗 딘조차도 십자군의 규율에 감탄했다.
따라서 살라딘은 계속 초조해졌다. 그가 소집한 에미르들은 십자군을 강타할 것을 요구했고 살라딘은 요구를 받아들여 9월 7일에 아르수프 북쪽에서 리처드의 군대를 공격했다. 구호 기사단이 리처드의 명령을 듣지 않는 바람에 잠시 위기가 있었으나 리처드는 제때 지휘력을 발휘하여 살라딘의 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살라딘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달아났고 하틴에서의 손쉬운 승리에 방심하던 이슬람 영주들은 모두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살라딘은 이후 다신 리처드와 직접 대결하려 하지 않았다. 살라딘은 야파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파의 성벽을 허문 다음에 병사들을 아슈켈론으로 철수시켰다. 리처드는 야파를 점거하고 다시 성벽을 쌓았다.
3.7. 예루살렘 왕위의 안정
이제 리처드에겐 3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가 예루살렘 공격, 둘째가 아슈켈론 공격, 셋째가 외교적 협상이었다. 리처드는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아슈켈론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지만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이 눈앞에 있는데 왜 다른 도시를 먼저 쳐야 하냐고 반발했다. 이에 리처드는 예루살렘과 아슈켈론을 동시에 공격하는 한편 살라딘에게 외교관을 파견했다. 살라딘은 아슈켈론도 포기하고 역시 성벽을 허물고 병사들을 예루살렘으로 물렸다.1191년 10월 리처드의 사절이 살라딘에게 평화 협상을 제시했다. 살라딘의 동생 사이프 알 아딜과 리처드의 누이 조안을 혼인시키고 두 사람이 공동으로 요르단강 서안을 지배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해였다. 살라딘은 이 주장에 솔깃했지만 사이프 알 아딜이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단 사실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살라딘은 코라도에게 자신과 동맹을 맺고 리처드를 공격하자고 요청했으나 코라도는 리처드를 엿먹이는 일은 기꺼이 환영하겠지만 리처드를 전장에서 만나긴 싫다고 했다.
리처드는 아슈켈론을 점거하고 수비대를 배치하려 했지만 부하들의 반발로 아슈켈론을 방치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야 했다. 그는 야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모든 요새를 점령하면서 그것들을 모두 수리하여 전략 기지로 삼았는데 덕분에 진군이 매우 둔화되었다. 하지만 십자군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었다.
1192년 1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20km 떨어진 베이트 누바에 닿았다. 십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리처드는 예루살렘 공략을 앞두고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앞으로 방침에 대해 논의했다.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예루살렘이 내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설령 이를 점령하더라도 십자군이 귀국하면 이를 방어할 수 없었으므로 도시를 공격하지 말 것을 권했다. 이에 십자군 지휘관들도 동의하였고 다시 회군하여 아슈켈론을 먼저 점령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회군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길길이 날뛰었고, 심지어 부르고뉴의 위그 등은 분노하여 십자군을 이탈하여 야파와 아크레 등으로 떠나버리기까지 했다.
1월 20일 리처드는 조카인 상파뉴의 앙리와 함께 아슈켈론에 도착하고 아슈켈론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리처드는 살라딘과 코라도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했지만 어느 쪽도 진전이 없었다. 코라도는 기와 관계된 군대는 돕지 않겠다고 요지부동이었고 리처드의 동생 존이 필리프와 결탁하여 앙주의 리처드의 영토를 노린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면 살라딘이 이길 것이다. 결국 리처드는 귀족 회의를 다시 소집하여 예루살렘의 왕위를 코라도에게 주었고 대신 기에겐 키프로스를 주었다. 코라도는 이 결정에 매우 흡족해했지만 1192년 4월 28일 아사신들에게 암살당했다. 이에 십자군 귀족들은 상파뉴의 앙리에게 예루살렘의 왕이 되어주길 청했다. 앙리는 이자벨과 결혼하여 남은 십자군 영토를 다스렸지만 스스로를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 칭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예루살렘의 내분이 안정되면서 리처드는 레반트 지역의 모든 기독교도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리처드에게 예루살렘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동생 존의 뒤통수에 리처드는 갈등했다. 고심하던 리처드는 자신이 1193년 부활절까지 성지에 남아있을 것이며 예루살렘 공략이 가능하면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6월 7일 십자군 아슈켈론을 떠나 예루살렘을 쳤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이미 살라딘이 배치한 이슬람 대군이 주둔하고 있어 공략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만약 살라딘이 해안을 차단하기라도 한다면, 설령 예루살렘을 잠시 빼앗을 수는 있을지언정 지킬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성지를 탈환하려면 살라딘의 세력을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그의 근거지인 이집트를 치기로 했지만, 부르고뉴의 위그 등이 자꾸 딴지를 걸었다. 리처드는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지만 실패할 것이 뻔한 계획 때문에 부하들을 개죽음으로 몰아넣을수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은 또 다시 회군해야 했다. 회군한 후에도 십자군 내부의 반발이 심해서 결국 이집트 원정은 백지화되었다.
3.8. 라믈라 평화 조약
전쟁 종결 이후 레반트 지역의 지도. |
이집트 원정이 백지화된 이상 더 이상 십자군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살라딘이 이집트를 차지한 채 버티고 있는 이상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없으며 탈환해도 지킬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십자군들은 팔레스타인 해안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휴전을 요청했다.
그때에는 살라딘도 오랜 전란과 병환으로 지쳐 있었고, 리처드의 가공할만한 무력에 질린 에미르들도 협상을 촉구하고 있었다. 살라딘이 거느린 군사들 또한 오랜 싸움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결국 살라딘도 협상에 응했지만, 중요 요충지인 아슈켈론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리처드 또한 협상을 거절했다. 1192년 8월에는 리처드가 열병으로 앓아 누웠고, 설상가상으로 존이 리처드의 왕좌를 찬탈했으며, 그와 손을 잡은 필리프 2세가 리처드 소유의 프랑스 영지를 회치고 있단 소식이 전해졌다. 리처드는 더 이상 레반트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으니 돌아가야만 했다.
9월 2일, 살라딘과 십자군 사이에 3년간 휴전한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살라딘은 야파에서 티레까지 이어진 십자군 영토를 존중하기로 했으며 또한 기독교도들의 순례를 보장했다.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의 영주들도 이에 참여할 수 있었고 대신 리처드는 아슈켈론을 살라딘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그냥 주지는 않고 성벽을 허물고 주었다. 십자군 기사들은 예루살렘의 성묘를 찾아가 참배했지만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에게 돌려드리기로 한 서약을 완수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밟지 않겠다면서 참배를 거부했다. 1192년 10월 9일 리처드는 자신의 왕국으로 귀환했다. 언젠가 돌아올 것을 기약하며.
4. 여담
리처드 1세는 귀국 길에 배가 난파되는 사고를 당했고, 결국 원수였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곧 신성 로마 제국에 넘겨졌고,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도움으로 막대한 몸값을 치른 후 1194년 봄에야 풀려났다.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잉글랜드 국내에 막대한 세금이 부과된 것은 덤이었다. 이 시기에서 비롯된 전설이 바로 로빈 후드이다.이때 잉글랜드의 재상이던 윌리엄 롱챔프가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사람들에게 인기가 낮았는데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의 동생인 존이 롱챔프를 런던 탑에 유폐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부재상 발터 드 쿠탕스가 잉글랜드에 돌아오자 존의 입지가 좁아졌고, 마침 리처드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존은 프랑스 왕 필리프가 있는 파리로 찾아가 동맹을 맺고, 반역을 일으켰지만 발터가 윈저성에서 농성하는 중에 리처드가 풀려나자 물거품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처드를 대신해 왕이 되고 싶어 반역을 일으킨 존 왕이 리처드의 몸값을 구하기 위해 세금을 열심히 걷었을 리는 없고 고생한 건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허버트 월터였다.
리처드 1세는 다시 돌아와서 자신을 배반했던 동생 존과 옛 친구 필리프 2세의 언플로 잃었던 영토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기겁한 존은 형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빌어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리처드는 관대하게도 자신을 배신한 아우를 만찬에 불러서 그를 공개적으로 용서하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맹세했던 것과는 달리 다시는 중동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프랑스 내의 영지 소유권을 둘러싼 문제 때문에 리처드가 프랑스 땅에 발이 묶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뿐 아니라 다른 프랑스의 제후들과의 분쟁을 지속하며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으나 결국 1199년, 리모주 자작의 성을 공략하다가 갑주도 걸치지 않고 진영을 순시하다 석궁에 저격당하여 위명에 걸맞지 않은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11]
한편 그보다 앞선 1193년 3월 4일, 살라딘도 부활절을 3주 남겨놓고 사망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그의 동생 알 아딜에 의하여 유지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이슬람 세계는 다시 균열을 맞이한다. 만약 존과 필리프의 방해 공작만 아니었다면, 리처드는 성지에서 살라딘의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더라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으로 보인다.[12]
재미있게도 필리프 2세 또한 리처드 1세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로 귀국하던 중 바다에서 엄청난 폭풍우를 만났다. 이때 프랑스의 기사들은 길을 잃었다며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필리프 2세는 침착하게 "지금이 몇 시인가?"라고 물었다. 부하가 자정이라고 대답하자 필리프는 그렇다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며 시니컬하게 말함으로써 두려움에 빠진 군사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말년이 되어 주치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재원정을 준비하다 쓰러져 망트에서 눈을 감았다.
5. 평가
당시 유럽 제일의 명장이었던 리처드 1세의 노력 덕분에 제3차 십자군이 거둔 성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틴의 뿔' 전투에서 살라딘이 대승한 이래 잃거나 위험해진 땅들 중 지중해 연안 레반트 지역의 도시들은 리처드 1세의 활약으로 대체로 되찾거나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성지를 장악하기는 하였으되 팔레스타인 해안의 장악과 십자군의 완전 축출이라는 다 잡은 성공을 놓치고 말았다. 물론 덕분에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들은 다시 유지될 수 있었다.[13]다만 3차 십자군은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예루살렘을 비롯한 내륙의 도시들은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결론적으로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으며 수세에 몰린 전국(戰局) 자체를 뒤집지는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잉글랜드 등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했던 강대국을 다스리던 걸출한 실력의 군주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이른바 "왕들의 십자군"이 거둔 성과 치고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이후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만큼 거대한 규모의 십자군은 다시 결성되지 못했음을 생각해보면 그 결과는 용두사미와 같았다.
그 과정을 들여다 보아도 참으로 황당한 일이 많았다. 제3차 십자군에서 가장 큰 지분의 병력을 거느렸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미처 레반트 지역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고를 당해 허무하게 죽었고, 때문에 그가 거느렸던 10만 대군은 제대로 힘조차 써보지 못한채 철수해야 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아크레 함락 후 성지에 대한 열정을 잃어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홀로 남아서 막강했던 적수 살라딘을 상대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끝내 자신의 뜻대로 십자군을 움직이지 못하였다. 결국 리처드가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장악하는데 실패하면서, 성지 회복이라는 궁극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는 제1차 십자군 때와는 반대로, 통일된 이슬람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도교 세력의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로 십자군이 성지를 회복하게 된 것은 제6차 십자군 원정(1227년 ~ 1241년) 때에야 가능했다. 다만 그조차도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일시적 회복에 불과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레반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가 내분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살라딘의 조카였던 알 카밀 [14]과 협상을 통해 싸움없이 예루살렘을 잠시동안 회복할 수 있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아크레의 항구를 통해 귀국하였다.
다만 이는 서로간의 격렬한 무력 충돌을 원치 않았던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 2세 사이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가까웠다.[15] 이에 대해 기독교와 이슬람교 양 측 모두 크게 반발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수살렘에서는 두 종교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1244년 아이유브와 호라즘 왕조의 연합군에 점령당하면서 다시 이슬람 세력 하에 들어 갔다. 이후로 십자군은 다시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또한 사실상 이 3차 십자군 이후부터는 십자군 원정의 근본적인 목표인 성지 탈환과 종교적 명분은 점차 누그러들어서 희석되기 시작했다. 특히 4차 십자군은 아예 대놓고 성지 탈환보다 이익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성지 탈환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갈망은 수 세기동안 이어졌고, 이후로도 루이 9세와 에드워드 1세 등의 군주들은 십자군 원정에 열정을 불태웠다.
6. 미디어에서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3차 십자군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1편 배경이기도 하다.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의 십자군 캠페인을 하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 등 3차 십자군의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외에 미디블2 토탈워의 모드인 브로큰 크레센트가 3차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추가로 3차 십자군의 역사적 전투 중 하나인 아르수프 전투가 구현되어 있으며 유저가 리처드를 맡아 살라딘을 물리쳐야하는 전투이다.
동로마를 다시 위대하게의 시작 시점도 하틴 전투 직전의 시기로 주인공의 개입으로 발리앙이 맡은 예루살렘 공방전을 주인공이 지휘하는 등 역사가 어느 정도 바뀌며 프리드리히 1세가 주인공과 만나 그와 동로마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주인공이 비밀리에 보낸 편지 덕에 3차 십자군의 성과가 원역사보다 축소되었고 그 결과 4차 십자군도 앞당겨지는 나비효과가 발생했다.
Fate/strange Fake에서 어느정도 묘사된다. 십자전쟁마다 사도 27조가 난입했었는데, 리처드 1세와 살라딘, 당대 산의 노인이 힘을 합쳐서 사도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1] 물론 이슬람 측도 맹주인 살라흐 앗 딘을 중심으로 뭉친 여러 세력들의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비슷했다지만 십자군의 상황은 그보다 더욱 심각했다.[2] 리처드 1세가 열병에 걸리자 살라흐 앗 딘이 장미 샤베트(그러니깐 적장을 위해 사막에서 얼음을 구해왔단 이야기다!)를 구해다 주며 빨리 나으라고 한 대인배 사례나, 그런 살라딘이 호의로 준 말을 타고서는 이슬람 군의 목을 베고 다녔던 리처드 1세의 용력 등등.[3] 다만 이는 이집트와 시리아 양쪽에서 가해지는 이슬람 세계의 압력을 파티마 왕조 말기에 접어들어 상대적으로 약체화된 이집트를 정벌하여 한쪽이라도 타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4차 이후의 십자군의 목적지가 이집트인 점만 봐도 그럴 법 하다.[4]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5] 여담으로 살라딘은 비록 적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기독교인들을 상당히 신사적으로 대우했다고 한다. 1차 원정 당시 십자군이 재물을 빼앗고 수많은 무슬림과 유대인의 피를 흘린 것(상당수는 추방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많은 이들을 살해했다.)과는 매우 대조적.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선 농담삼아 우르바노 3세가 선종한 원인 중 하나로 이걸 언급하며 당시 십자군의 야만스러웠던 행태를 깠다.[6] 그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그가 이미 7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찬물에 갑작스럽게 입수했다가 심장마비가 왔을 수도 있고, 혹은 경솔히 입수했다가 갑주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7] 만일 프리드리히 황제가 거느린 대군이 무사히 레반트 지역까지 당도했다면, 3차 십자군의 전황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아랍 역사학자 이븐 알 아시르는 "알라께서 독일인의 왕을 멸하지 않으셨다면, 시리아와 이집트는 지금 이슬람의 영토가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다. 출처: 십자군 전쟁/ 조르주 타트 지음/ 안정미 번역/ 시공사/ 117쪽[8] 뤼지냥의 일파로 예루살렘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르노 드 샤티용이 바로 옹프루아의 의부였다.[9] 프로이센 공국의 기원이다. 그러나 이 프로이센 공국에서는 이름만 빌려왔을 뿐,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다.[10] 학자들은 필리프가 앙주 제국의 영지를 탐낸 것과 별개로 그는 플랑드르의 백작이 십자군 원정 도중 급사할 것을 우려했던 점 등을 보아 아크레에서 사망한 플랑드르의 백작이 남긴 프랑스의 영지 승계 문제 해결 등을 위해 귀국행을 결정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11] 석궁에 맞은 부위가 팔이었기에 응급 조치를 잘 했더라면 살 수 있었겠지만, 돌팔이에게 시술을 받는 바람에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 진중에서 죽어가던 리처드 1세는 마침내 성을 함락시키고 자신을 저격했던 소년 궁수를 생포했으나, 그의 당당한 태도에 감탄하여 그를 용서하고 금전까지 하사하는 자비를 보였다. 그러나 리처드가 죽자 그의 부하들은 분노하여 그 궁수를 잡아서 끔찍하게 죽여버렸다.[12] 리처드가 살라딘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귀국하던 와중이었다. 이에 부하들이 리처드에게 자신들이 조금만 더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자, 리처드는 "우리가 그곳에 남아있었다면, 살라딘 또한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멋진 답변을 내놓았다.[13] 십자군 연구로 유명한 토머스 매든은 이에 대해서 살리딘이 그동안 거둔 승리가 대부분 무(無)로 돌아가 버렸다고 평할 지경이었다. 이런 표현이 조금 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에 살라딘은 성지를 지키기는 했으나 리처드에게 번번히 패하는 바람에 해안가의 여러 주요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14] 살라딘의 아우인 알 아딘의 아들이다. 알 아딘은 살라딘이 죽은 후에 조카들을 몰아내고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이 되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세 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15] 프리드리히 2세는 알 카밀과 10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내의 이슬람 교도들과 모스크 또한 건드리지 않았고, 성전산 또한 이슬람 측의 소유로 남겨두었다. 무엇보다 이미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채도 다시 짓지 않도록 합의를 맺었다.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언제 다시 이슬람의 공격을 받아 점령된들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