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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3:01:00

노미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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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또는 국왕
노미노에
Nominoë
이름 노미노에(Nominoë)[1]
출생 800년 즈음
브르타뉴
사망 851년 3월 7일
서프랑크 왕국 방돔
재위 반(Vannes)의 백작
831년 ~ 851년 3월 7일
브르타뉴 왕국의 수브랭(Souverain)[2]
845년 ~ 851년 3월 7일
자녀 에리스포에

1. 개요2. 행적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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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왕국의 건국자. 프랑크 왕국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통합된 브르타뉴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2. 행적

노미노에라는 이름은 고대 브르타뉴어의 "nom", 즉 신전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18세기 <브르타뉴 지방의 역사>를 집필한 피에르 보부아(Pierre Beaubois, 1693 ~ 1750)는 11세기 수도자 인고마르(Ingomar)가 집필한 <주디카엘(Judicaël)[3]의 생애>를 바탕으로 노미노에가 주디카엘의 후손이라고 밝혔다. 834년 프랑크 왕국에서 발행한 헌장에서는 그에게 베네티(Vénètes)의 공이라는 칭호로 일컬었지만, 학자들은 단지 반(Vannes) 백작이기 때문에 이런 호칭이 붙었을 뿐 프랑크 왕국이 그를 특별 대우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부 학자들은 818년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켜 브르타뉴 왕을 칭했던 모르반의 아들 또는 손자라고 주장하지만, 특별한 근거는 없다.

19세기 브르타뉴 역사가 아르투르 드 라 보더리(Arthur Le Moyne de La Borderie, 1827 ~ 1901)는 노미노에가 819년 7월부터 반의 백작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830년 1월 16일 프랑크 국왕 루도비쿠스 1세가 발행한 헌장에는 기 2세가 여전히 반 백작을 맡아서 루도비쿠스 1세에게 경의를 표한 내용이 있다. 노미노에가 역사 기록에서 처음으로 반 백작으로 언급된 시기는 831년 5월이었다. 이때 잉겔하임에서 총회를 연 루도비쿠스 1세는 브르타뉴인이면서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노미노에를 브르타뉴의 통치자로 지명했다. 이때 발행된 헌장에서는 그를 'missus imperatoris', 즉 '군주가 보낸 자'라고 일컬었다. 그는 행정 및 사법 분야를 전담하면서도 주교를 조사하는 임무도 맡았다. 833년 2월 9일 '브르타뉴의 마기스트로(magistro)'로서 루도비쿠스 1세 통치 20주년을 기념해 랑동 수도원에 기부했다.

루도비쿠스 1세의 충실한 신하였던 노미노에는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사망한 뒤 루트비히 2세, 로타리우스 1세, 그리고 샤를 2세의 내전 양상을 주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샤를 2세를 지지했다. 841년 봄 네우스트리아(Neustria)[4]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샤를 2세가 사절을 보내 자기를 지지하는 지 묻자, 노미노에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841년 후반에는 로타리우스 1세가 그에게 자기와 동맹을 맺으면 네우스트리아 일부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노미노에는 거부했다. 또한 842년 1월 25일 르동 수도원에 샤를 2세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843년, 낭트 백작 리쿠앵이 사망한 후 전임 낭트 백작 랑베르 1세의 아들이었지만 리쿠엥에게 밀려났던 랑베르 2세가 샤를 2세에게 자기를 낭트 백작으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 2세가 그 대신 아키텐의 에르보쥬 백작이었던 르노를 낭트 백작으로 선임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랑베르 2세는 무력으로 낭트를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노미노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들 에리스포에에게 군대를 맡겨 낭트로 파견했다. 낭트 주민들은 브르타뉴인들이 낭트를 정복하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해 르노에게 신속하게 개입해달라고 요청했다. 르노 백작은 푸아투에서 서둘러 달려온 뒤 도시 방어를 조직한 후,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군을 무찌르러 출진했다.

르노는 메삭에서 에리스포에가 파견한 선봉대와 조우해 격파했다. 그들은 멀리서 행군하느라 탈진했기에, 승리감을 맛보며 블리앵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에리스포에와 랑베르 2세가 본대를 이끌고 나타나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적군을 843년 5월 24일에 공격해 살육했고, 르노는 전사했다. 낭트 주민들은 이후에도 랑베르 2세에게 복종하길 거부했지만, 6월 24일 바이킹을 끌어들인 랑베르 2세가 낭트를 함락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낭트 대성당의 고하르 주교와 그곳에 피신한 주민들을 살해했다. 844년, 노미노에는 낭트의 주인이 된 랑베르 2세를 지원해 푸아투의 백작 베르나르 2세와 르노의 아들이자 에르보쥬 신임 백작인 에르베를 낭트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시키는 데 일조했다. 샤를 2세가 아키텐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진압하느라 바빠서 이에 응전하지 못하자, 노미노에는 공세를 이어가서 멘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845년, 샤를 2세는 아키텐의 왕을 칭한 피핀 2세와 화해하고 랑베르 2세를 낭트 백작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 해 11월 샤를 2세가 3,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하자, 노미노에는 오스트 강과 아프 강의 합류 지점인 발롱 늪지대로 적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845년 11월 22일, 프랑크군은 적의 유인에 휘말려 발롱 늪지대에 들어섰다가 브르타뉴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루아르 주에 있는 페리에르의 생피에르에트상파울 수도원장 루 드 페리에르(Loup de Ferrières, 805 ~ 862)가 그 해 11월 말에서 12월 초 사이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샤를 2세가 브르타뉴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로 인해 왕국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목숨을 건진 샤를 2세는 멘에서 군대를 재편성해 반격하려 했지만, 이내 여건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846년 여름에 에페르네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2세는 그에게 "둑스(dux)"라는 공식 칭호를 부여하고, 그가 브르타뉴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는 걸 면제하게 해줬다. 또한 샤를 2세는 노미노에의 요구에 따라 랑베르 2세를 브르타뉴에서 좀더 멀리 떨어진 상스로 옮겼다.

생 베르탱 수도원에서 발간한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에 따르면, 노미노에는 844년과 847년에 바이킹과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846년 12월, 노미노에는 샤를 2세가 지배하는 네우스트리아를 침공해 바이외 인근을 약탈했다. 이는 로타리우스 1세의 부추김에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8472년 2월, 로타리우스 1세와 샤를 2세, 루트비히 2세는 메르센에서 접견하면서, 노미노에와 아키텐 왕 피핀 2세에게 샤를 2세와의 전쟁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노미노에와 피핀 2세는 샤를 2세를 계속 괴롭혔다. 849년 봄과 가을에 샤를 2세가 아키텐을 상대로 2차례 원정을 떠난 동안, 노미노에는 네우스트리아를 습격해 앙주를 철저히 약탈했다.

한편, 노미노에는 킹페르, 반, 돌 및 생폴드레옹에서 프랑크 왕국 출신 주교가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848년 교황 레오 4세에게 랑동의 대수도원장인 콘워이온(Conwoïon)이 이끄는 사절단을 보내 이들 주교직을 브르타뉴인이 맡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브르타뉴인들을 환대했고, 콘워이온에게 일부 유물을 줬지만, 주교를 교체해달라는 요청은 즉답을 피하고, 단지 12명의 주교로 구성된 공의회를 개최하고 4개 주교들이 그 앞에 나타나서 심사받게 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공의회를 여는 자격이 있는 투르 대주교는 프랑크 왕국의 신하였기에, 노미노에가 원하는 공의회를 열어줄 리 없었다. 이에 노미노에는 무력으로 주교들을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849년 4월, 노미노에는 코에 루(Coët Louh)에 성직자와 평신도의 모임을 연 뒤 반의 수잔 주교, 킹페르의 펠릭스 주교, 돌의 살라콘 주교, 그리고 생폴드레옹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주교 등을 성직 매매 혐의를 적용해 폐위하고 브르타뉴 출신 주교로 대체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아르투르 드 라 보더리가 인용한 낭트의 연대기에 따르면, 레오 4세는 노미노에가 공작으로서 황금 왕관을 쓸 권리를 인정했다고 한다.

샤를 2세는 랑베르 2세를 다시 낭트 백작으로 앉혀서 노미노에를 막게 했지만, 850년 랑베르 2세는 노미노에와 손잡고 멘을 함께 침공해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그 해 8월, 샤를 2세는 렌으로 진군한 뒤 그곳과 낭트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직후, 노미노에와 랑베르 2세는 렌과 낭트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두 도시를 점령했으며, 낭트의 새로운 백작 아말릭을 생포했다. 851년 3월 7일, 노미노에는 멘과 앙주를 휩쓴 뒤 방돔으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하려 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랑동의 생 소베르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들 에리스포에가 뒤를 이었다.

3. 여담

9세기 말의 연대기 작가 레지옹 드 프륌(Réginon de Prüm)은 그를 브르타뉴의 왕으로 칭했다. 하지만 노미노에가 생전에 왕이라는 칭호를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랑동 수도원에서 발행한 헌장에서, 그는 브르타뉴인의 공작, 모든 브르타뉴의 공작, 브르타뉴의 공 및 모든 브르타뉴의 공으로 기술되었다. 실제로 샤를 2세에게 브르타뉴 왕으로 인정된 인물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리스포에였다.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에리스포에가 브르타뉴 왕국의 초대 국왕이며, 노미노에는 샤를 2세의 봉신이다. 하지만 당대 및 후대인 모두 그를 프랑크 왕국의 지배로부터 브르타뉴를 독립시키고 브르타뉴 왕국을 실질적으로 건국한 인물로 여겼으며, 19세기 브르타뉴 역사가 아르투르 드 라 보더리(Arthur Le Moyne de La Borderie, 1827 ~ 1901)는 "조국의 아버지"(Tad ar Vro)라고 칭했다.


[1] 브르타뉴어에서는 노베노우(Nevenou) 또는 노베노에(Nevenoe)로 일컬어지며, 라틴어에서는 노메노이우스(Nomenoius) 또는 누메노이우스(Numenoius)로 일컬어진다.[2] 주권자라는 의미의 프랑스어.[3] 돔노네의 마지막 국왕[4] 아키텐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는 프랑스 북부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