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1D4D4><colcolor=#000> 프랑스 왕국 루이 12세의 왕비 가톨릭 성인 • 베리 여공작 프랑스의 잔 Jeanne de France | ||
출생 | 1464년 4월 23일 | |
드뢰 백작령 노장르루아 | ||
사망 | 1505년 2월 4일 | |
베리 공작령 부르주 | ||
배우자 | 루이 12세 (1476년 결혼 / 1498년 무효화) | |
아버지 | 루이 11세 | |
어머니 | 사보이아의 카를로타 | |
형제 | 루이, 조아킴, 루이즈, 안, 루이, 샤를 8세, 프랑수아 | |
종교 | 가톨릭 | |
세례명 | 요안나 (Ioanna) | |
수도명 | 가브리엘라 마리아 (Gabriella Maria) | |
성인정보 | ||
성인명 | 발루아의 성녀 요안나 (Sanctus Ioanna Valoisensis) | |
시복 | 1742년 6월 18일 | |
로마, 베네딕토 14세 | ||
시성 | 1950년 5월 28일 | |
바티칸, 비오 12세 | ||
축일 | 2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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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1세의 차녀이자 루이 12세의 첫 번째 왕비였으나 남편의 즉위 후 혼인무효화되었고 이후 수녀로 살다가 사후에 성인으로 시복되었다.2. 생애
2.1. 어린시절과 결혼생활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 국왕 루이 1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사보이아의 카를로타[1] 사이에 태어난 8명의 자녀 중 넷째이자 차녀였다. 잔의 부모는 총 8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유아기를 지나 성인기까지 살아남은 것은 잔의 언니인 안, 잔 본인, 그리고 남동생인 샤를 8세뿐이었다.태어났을 때 등에 혹이 있고 절뚝거리며 걸을 정도로 기형으로 태어났고 이 때문에 불임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아버지 루이 11세는 본인의 6촌이자 잔의 7촌 숙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잔을 결혼시킴으로써 장차 오를레앙 가문이 자손을 잇지 못하고 단절된 뒤 왕실에 영지가 흡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당시 외아들인 샤를 8세가 요절하거나 왕위에 올라도 후사를 남기지 못할 수 있어서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프랑스 왕위의 유력한 후계자였고, 루이 11세 입장에선 그런 루이와 딸을 혼인시켜 여계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혈통으로 프랑스 왕위를 이어가려고 할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잔은 두 살이 되었을 때 7촌 숙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의 결혼이 결정되었고 그로부터 10년쯤 후 12세 때 결혼하게 되었다.
이후 잔이 19세가 된 1483년에 아버지 루이 11세가 사망했고 14세의 남동생인 샤를 8세가 뒤를 이었는데 샤를 역시 잔과 마찬가지로 몸이 병약했다. 병약하고 어린 샤를을 대신해서 언니 안 드 프랑스가 섭정을 맡았다.
결국 샤를 8세는 1498년에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잔의 남편 루이가 루이 12세로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다.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잔의 신체적 기형 때문에 결합이 성사된 적이 없고 그로 인해 자녀가 없다는 이유로 혼인을 무효화했고 잔의 올케였던[2] 안 드 브르타뉴와 2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루이 12세와 이혼한 후 잔은 베리 여공작의 칭호를 받았다.
2.2. 종교 생활과 시성
잔은 가낭한 병자와 전염병 환자 구호, 주거 시설 복구, 가난한 일꾼들의 급여 인상, 여아들의 교육 및 빈곤층 학생들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수도원 개혁 등을 계획에 따라 실천했다. 그러던 중에 잔은 작은 형제회의 회원이자 자신의 고해신부였던 가브리엘 마리 신부의 도움으로 가톨릭 신심이 깊은 10명의 여성들을 모아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했다. 잔은 자신이 세운 수녀원에서 가브리엘라 마리아(Gabriella Maria)라는 수도명으로 서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종교생활에 헌신하며 살다가 1505년 2월 4일 부르주에서 생을 마감했다.1562년 5월 27일에 위그노들이 잔의 묘를 훼손하고, 시신을 불태웠는데 시신이 불후[3] 상태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1742년 4월 21일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50년 5월 28일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