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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3 23:23:59

에드가르 막 말 콜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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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colbgcolor=#0065bd> 스코틀랜드 알바 왕국 국왕
에드가르 막 말 콜룸
Étgar mac Maíl Choluim
파일:에드가르 막 말 콜룸.png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 야코브 데 베트 2세(Jacob de Wet II)가 그린 상상화.
이름 스코틀랜드 게일어 에드가르 막 말 콜룸
(Étgar mac Maíl Choluim)
영어 에드거
(Edgar)
출생 1074년
사망 1107년 1월 8일 (향년 33~34세)
재위 스코틀랜드 알바 국왕
1097년 ~ 1107년 1월 8일
부모 아버지: 말 콜룸 3세, 어머니: 웨식스의 마거릿
형제 에드워드, 에드먼드, 알락산더르 1세, 마틸다, 메리, 다비드 1세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전신인 알바 왕국 제24대 국왕.

2. 생애

알바 국왕 말 콜룸 3세망명자 에드워드의 딸인 웨식스의 마거릿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명한 조상인 에드거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093년 10월 말, 아버지 말 콜룸 3세는 장남 에드워드와 3남 에드가르를 데리고 노섬브리아를 침략해 심각한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안윅성을 포위했다가 곧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던 11월 13일, 해안가에 있는 밤버러 요새의 총독이자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가 지휘하는 소규모 잉글랜드군이 기습 공격했다. 말 콜룸 3세와 에드워드는 피살되었고, 에드가르가 군대를 간신히 수습해 돌아갔다. 말 콜룸 3세의 유해는 타인머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에드가르로부터 남편과 장남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마거릿은 깊은 슬픔에 빠져 식사하기를 거부하다가 11월 16일에 사망했고, 던펌린에 있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말 콜룸 3세의 동생 돔날 3세가 알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고, 그는 형제들과 함께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해 에드거 2세의 보호를 받았다. 1094년 5월 이복형 돈카드 2세가 돔날 3세를 몰아내고 알바 국왕이 되었을 때 일시적으로 귀국했고, 돈카드 2세가 타이닝햄, 올드햄, 스카울, 노우헤더윅, 브록스머스 등의 여러 영지를 더럼의 성 커스버트 교회에 기부할 때 발행한 헌장에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돔날 3세가 반격하여 돈카드 2세가 살해되자 재차 망명했다. 이때 둘째 형 에드먼드는 돔날 3세에게 가담했고, 그로부터 영지를 받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097년, 에드가르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2세의 지원에 힘입어 돔날 3세를 물리치고 알바 국왕이 되었다.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돔날 3세는 에드가르의 막내 동생이자 미래의 국왕 다비드 1세에게 생포된 뒤 나중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왕실 명단>에 따르면, 돔날 3세는 에드가르에게 생포된 후 실명형에 처해졌고, 앵거스의 레스코비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티거나흐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099년에 실명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가 사망한 연도도 1099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편, 돔날 3세와 손잡았던 형 에드먼드 역시 체포된 뒤 잉글랜드의 어느 수도원에 갇혀 1100년 사망할 때까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1098년, 노르웨이 국왕 망누스 3세오크니 제도로 진군한 뒤 맨섬과 앵글시섬을 항해하여 그곳을 약탈했다. 그 후 알바 국왕과 평화 협상을 하기로 했다. 협상 결과, 망누스 3세는 스코틀랜드 서쪽의 헤브리디스 제도 등 모든 섬의 주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알바 국왕을 명목상 주권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타버트 지협을 건넌 후 킨타이어 제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추가했다. 1099년, 에드가르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개관을 위해 거행된 대연회에 참석해 잉글랜드 국왕의 검을 들고 행사에 임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가 사망한 후 헨리 1세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104년 성 커스버트의 무덤 개장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예전에 지역 지주가 소유했던 버윅셔의 스윈튼을 기부하고, 소 24마리와 주민들이 매년 내는 은화 반 메르크도 기부하기로 했다. 또한 에드가르는 에드넘 영지를 '토르 르 롱(Thor le Long)'이라는 사람에게 수여했다. 토르는 왕의 도움을 받아 그 영지를 개발했고, 그곳에 성 커스버트에게 바치는 교회를 지었다. 1105년, 토르는 영지 일부를 더럼 교회에 기증하면서, 기증서에 "내 군주 에드가르 왕의 영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혼, 그의 형제자매들의 구원,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형제 레프와인의 구원을 위해 기증한다"라고 기술했다.

에드가르의 통치 기간 내내 성 앤드류스와 글래스고 주교구는 공석이었지만, 현재 퍼스 앤 킨로스 주에 있는 포트모크를 로크 레번에 있는 켈리데 수도원에 수여했고, 포스 만 북쪽 해안에 있는 영지를 어머니가 세운 던펌린 수도원에 수여했으며,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덤펀린 수도원에 수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렇듯 그는 돔날 3세 치세 동안에 무너졌던 가문의 기반을 다시 세우기 위해 교회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에드가르는 아일랜드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중세 아일랜드 연대기인 <이니스폴렌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105년에 먼스터의 군주이자 아르드리인 무어체르타흐 우아 브리아인에게 "놀라운 대형 동물"을 선물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선물이 대체로 낙타였을 거라고 추정하며, 제1차 십자군 원정에 가담한 스코틀랜드인 부대가 스코틀랜드로 가져왔을 거라고 본다.

1107년 1월 8일, 에드거는 에든버러에서 사망해 덤펀린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자녀가 없었고, 유언장에서 동생 알락산더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또한 그는 막내동생 다비드 1세에게 컴브리아 영지를 부여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