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연방 호국경 | |
초대 | 제2대 |
올리버 크롬웰 | 리처드 크롬웰 |
잉글랜드 국왕 · 스코틀랜드 국왕 · 영국 국왕(연합법 이후) |
잉글랜드 연방 제2대 호국경 리처드 크롬웰 Richard Cromwell |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출생 | 1626년 10월 4일 |
잉글랜드 왕국 헌팅던셔 헌팅던 | |
사망 | 1712년 7월 12일 (향년 85세)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하트퍼드셔 체선트 | |
재임기간 | 제2대 호국경 |
1658년 9월 3일 ~ 1659년 5월 25일(8개월 22일) | |
부친 | 올리버 크롬웰 |
모친 | 엘리자베스 보우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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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연방의 제2대 호국경이자 올리버 크롬웰의 셋째 아들. 약 9개월 동안 잉글랜드 연방의 제2대 호국경으로 재임했다.2024년 현재까지 영국 역사상 마지막 공화국 국가원수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올리버 크롬웰은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지만, 장남 로버트와 차남 올리버 2세는 일찍 죽었다. 때문에 리처드는 삼남이면서도 사실상 맏이 역할을 수행했다.리처드는 의회군에서 복무하다가 1647년 링컨스 인 법학원에 들어갔고, 1649년 젠트리 계층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1654년과 1656년에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655년 11월에는 무역위원회의 위원직을 역임했지만, 아버지만큼의 성과는 보여 주지 못했다.
2.2. 아버지의 호국경 자리를 승계
1657년의 개헌으로 올리버 크롬웰은 후계자를 지목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한편 그해 여름 리처드는 옥스퍼드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12월 31일에는 국무회의 의원이 되었다. 또한 육군 1개 연대의 지휘권과 상원 의원의 자리까지 얻었다. 따라서 리처드는 올리버의 후계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실제로 올리버가 사망할 때 후계자로 지목받았다. 때문에 리처드는 순탄히 호국경에 취임하였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육군과 문제가 발생하였다. 올리버는 유능한 장군이면서 본인이 육군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리처드는 군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육군 통수권을 얻으려 하여 육군의 장교들의 반발을 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659년 1월 27일 개최된 의회는 올리버 크롬웰의 마지막 2년간의 철권 통치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는 한편 육군의 고위 간부 한 명을 제명하려 들면서 육군의 반발을 초래했다.
육군은 평의회를 만들어 의회에 맞불을 놓았고, 4월 6일에는 의회에 해명을 요구하였다. 4월 21일 의회는 강경파가 득세해 호국경의 허가 없이는 평의회를 열지 못하게 하고 모든 육군 장교들에게 의회에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육군은 반란을 일으켜 병력을 세인트 제임스에 집결시켰고, 리처드는 사실상 육군의 손에 떨어졌다. 육군의 압력을 받은 리처드는 의회를 해산했고, 5월 7일 재소집된 장기의회와 육군은 리처드의 해임에 동의하였다. 리처드는 이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았고, 결국 5월 25일 호국경직을 사임했다.
2.3. 망명 생활과 말년
사임 후 리처드는 엄청난 빚에 시달렸고, 감옥에 들어갈 뻔 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그는 여름에 프랑스로 망명해, 존 클라크(John Clarke)라는 가명으로 은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옮겨다녔는데, 그 탓에 1671년 왕실이 그를 추적했으나 찾지 못했다. 긴 은둔 생활 동안 그는 영국 정부에게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고, 20년 만인 1680년에야 잉글랜드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그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1712년 7월 12일에 죽을 때까지 상인이자 영국 국왕의 신민으로 살았고, 유해는 햄프셔의 허슬리 교회에 묻혔다. 86세의 고령으로, 그보다 4살 어린 찰스 2세보다 27년, 7살 어린 제임스 2세보다 11년을 더 살아 명예혁명[1]은 물론 윌리엄 3세와 앤 여왕[2]의 치세까지 지켜보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