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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2:43:40

라눌프 드 제농

라눌프 드 제농
Ranulf de Gernon
생몰년도 1099년경 ~ 1153년
출생지 노르망디 공국 제농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체셔주
아버지 라눌프 르 메신
어머니 볼링브로크의 루시
형제 아델리자
배우자 글로스터의 마틸다
자녀 휴, 베아트리체
직위 체스터 백작, 아브량슈 자작, 바이외 자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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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무정부시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강력한 권세를 행사했으며, 마틸다스티븐 왕 양자를 오가며 이득을 챙기려 했다.

2. 생애

아버지 라눌프 르 메신은 체스터 백작, 아브랑슈 자작, 바이외 자작을 역임했으며, 헨리 1세의 심복으로서 노르망디 공국을 노리는 기욤 클리토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헨리 1세의 승리에 기여했다. 어머니 볼링브로크의 루시는 볼링부르크 남작령의 상속녀였다. 누이 아델리자(? ~ 1139년 이후)는 클레어 남작 리처드 피츠길버트 드 클레어와 초혼했고, 1136년 리처드 피츠길버트가 웨일스인과 전쟁을 치르던 중 전사한 뒤 기사 로저 드 콩데와 재혼했다. 1128년 또는 1129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라눌프는 하부 노르망디(아브랑슈, 베생)과 잉글랜드 왕국(체셔, 랭커스터셔, 링컨셔) 등지에 광범위한 영지를 보유했다. 그는 체스터 백작으로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고, 웨일스 국경에 배치된 정예군을 통솔혔다. 또한 체셔 북쪽의 잉글랜드 북서부 전체(랭커셔, 컴벌랜드)는 비록 아버지 대에 잉글랜드 왕실에 양도되었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는 영주들이 많았다. 이렇듯 라눌프는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 내 귀족 중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12세기 중반 잉글랜드 연대기인 <스티븐 왕의 행적>에서는 그가 잉글랜드의 거의 1/3을 통치했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을 썼다.

1135년 12월,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가 사망했다. 라눌프는 스티븐 왕의 등극을 즉위했다. 그러나 헨리 1세가 생전에 자기 딸 마틸다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던 것 때문에, 스티븐 왕의 등극에 반발하는 이들이 많았다. 1136년 1월,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가 찬탈자 스티븐 왕을 몰아내고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해 1월 말까지 칼라일, 워크, 알닉, 노럼, 뉴캐슬 성을 함락했다. 그 해 2월 스티븐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반격하자, 다비드 1세는 그와 대결하는 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제안했다. 스티븐 역시 갓 즉위해서 불안정한 왕권을 다질 여유가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이때 체결된 더럼 조약에 따르면, 다비드 1세는 칼라일을 유지하는 대신 다른 성은 반납하고,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는 스티븐 왕이 다비드 1세의 침공에 보복하고자 몰수했던 헌팅던 백작에 선임되고 헌팅던의 절반을 돌려받는 조약을 맺었다. 또한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이 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헨리는 칼라일과 다른 잉글랜드 영토의 영주로서 스티븐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이후에도 다비드 1세와 스티븐 왕 간의 전쟁은 이어지다가 1139년 더럼 조약이 재차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이에 따르면, 스티븐은 다비드 1세가 마틸다를 더 이상 돕지 않는 조건으로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가 헌팅던 백작의 명예를 계속 누리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노섬벌랜드 전체를 다비드 1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북부 잉글랜드에 대한 라눌프의 영향력은 약화했다.

라눌프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가 잉글랜드 왕실에 헌납했던 칼라일을 비롯해 자신과 연관 있는 북부 잉글랜드 상당수가 스코틀랜드 왕자에게 넘어간 것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1140년 9월 말, 라눌프는 스티븐의 궁정에 머물던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 왕자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조직했다. 그는 이복형인 윌리엄 드 루마와 함께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길목인 링컨 성을 접수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헨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하던 스티븐 왕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스티븐 왕은 라눌프와 타협하기로 하고, 링컨과 더비 영지와 링컨셔 보안관 작위를 라눌프에게 양도하는 대신 헨리가 스코틀랜드로 무사히 돌아가는 걸 보장받았다.

그러나 링컨 주민들은 라눌프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감을 품고, 스티븐 왕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들은 라눌프가 방심하고 있다면서, 지금 링컨으로 와주면 성문을 열고 귀순하겠으며, 라눌프를 스티븐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41년 1월 6일, 스티븐 왕이 이끄는 왕실군이 링컨에 도착한 뒤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무혈 입성한 뒤 라눌프의 수비대가 숨은 성을 포위했다. 라눌프는 아내 글로스터의 마틸다를 성에 남겨둔 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라눌프는 마틸다 진영으로 귀순하기로 하고, 체셔 지역과 웨일즈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면서, 마틸다 추종군 사령관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잉글랜드 북부 최대의 거물을 끌어들임으로써 내전을 유리하게 이끌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고 링컨으로 진격했다.

1141년 2월 2일에 벌어진 링컨 전투에서, 라눌프는 중앙과 오른쪽 측면에 휘하 부대를 배치했고, 적군을 물리치고 스티븐 왕을 생포하는 데 일조했다. 라눌프는 이 승리를 이용해 잉글랜드 북부 경쟁자인 리치먼드 백작 알란 드 팡티에브르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 2가지 버전이 전해진다. 한 기록에 따르면, 알란 드 팡티에브르가 라눌프를 매복 공격을 통해 생포하려 했지만 오히려 생포된 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하에 풀려났다고 한다. 헥섬의 존의 따르면, 그는 체스터 백작이 보부아르 성 앞에 와서 협상하자는 제안을 받자 이에 따랐다가 체스터 백작의 함정에 빠져 생포된 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부아르 성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마틸다는 링컨 전투에서 승리한 뒤 런던으로 가서 잉글랜드 여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준비를 했지만, 1141년 6월 28일 런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1141년 9월 라눌프가 이끈 분견대가 포함된 마틸다의 군대는 윈체스터 전투를 치렀지만 기욤 디프르가 이끄는 스티븐 측 군대에게 패배했고, 라눌프는 마틸다와 함께 탈출했지만 글로스터의 로버트는 생포되었다. 마틸다는 로버트를 석방하는 대가로 스티븐 왕을 석방해야 했다. 스티븐은 곧장 곧장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일전에 링컨 전투 때 자기에게 대적했던 라눌프와 화해하고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145년 말 또는 1146년 초에 체결된 스티븐과의 합의에 따라, 라눌프는 스티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링컨에 대한 주권을 스티븐으로부터 확인받았다.

1146년, 라눌프의 군대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와 마틸다에 대한 스티븐 왕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그의 기사들은 스티븐 왕이 베드퍼드 성을 점령하고 월링포드 공방전을 이끄는 걸 도왔다. 그러나 스티븐 왕과 라눌프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이는 왕과 더 가까운 다른 귀족들이 북부 영토에서 자기들의 땅의 일부를 강점하는 라눌프가 스티븐 왕에게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스티븐 왕에게 라눌프를 믿지 말라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급기야 라눌프는 노샘프턴에서 스티븐의 부하들에게 급습당해 체포된 뒤 반역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 라눌프는 스티븐에게 링컨을 포함해 무정부시대 동안 뺴앗았던 모든 왕실 영지와 성을 반환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복수심에 가득찬 라눌프는 체셔로 돌아오자마자 스티븐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코벤트리와 링컨을 습격해, 비록 함락시키진 못했지만 주변 일대를 약탈했으며, 뒤이어 스티븐과 그의 추종자들의 영지를 수시로 습격하여 황폐화했다. 워릭셔는 라눌프의 습격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내전이 끝날 무렵, 주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워릭셔는 잉글랜드 주 중에서 납부하는 세금 금액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1149년, 라눌프는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과 함께 요크에 대한 원정을 조직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다시 링컨을 공격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라눌프는 무정부시대에 중앙 정부가 마비된 틈을 타 체셔에서 링컨까지 이르는 자기 영지에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국왕에게 바쳐진 세금과 기타 수입으로 얻은 수익금을 처분했다. 이 시기에 그의 강력한 권세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사례로, 1149년경 레스터 백작 로베르 드 보몽과 체결한 협정을 들 수 있다. 거기엔 15일 이내에 상대방에게 사전 통지 없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의무, 국경 지역에 성 및 요새 건설을 금지하고, 조약 당사자 중 일방을 왕이 공격하는 경우 다른 쪽은 왕을 돕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레스터 주교, 체스터 주교, 그리고 20명 이상의 기사는 조약 조건 준수를 보증하는 역할을 했다. 왕의 허가 없이 맺어진 두 영주의 평화 협약은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왕권이 완전히 쇠퇴했으며, 영주들이 스스로 자기 영역에서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려는 열망이 강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 왕 다비드 1세와의 분쟁도 해결했다. 다비드 1세는 리베 강 남쪽의 랭커스텨셔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고, 라눌프는 컴벌랜드와 칼라일이 다비드 1세의 아들 헨리 왕자의 소유임을 인정했다.

1153년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플랜태저넷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자 그의 편에 섰다. 1153년 11월 스티븐 왕과 헨리 사이에 월링포드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무정부시대가 막을 내렸다. 몇 주 후인 1153년 12월 16일, 라눌프는 급사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독살의 징후가 명백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휴 드 퀘벨록은 1135년까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고, 라눌프가 무정부시대 기간 동안 획득한 모든 재산은 왕실이나 이전 소유자에게 돌아갔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