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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03:07:52

애스터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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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물

1. 개요

미국과 영국에 걸쳐 존재하는 명문가.

이 가문은 18세기 후반 미국 최초의 백만장자라 불리는 존 제이콥 애스터에 의해 독일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며 여러가지 사업을 개척하고 번성하면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뉴욕의 안주인으로 취급될만큼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특히 뉴욕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지위에 군림했는데, 19세기 후반쯤 가면 강도 귀족들이 미국 사교계까지 좀먹기 시작하여 20세기초에는 거의 좌지우지하게 되었으나, 이때에도 애스터 가문만큼은 드물게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한 배경으로 성립된 진짜배기 명문가의 하나로서 인정받아 재력면에서 한참 앞서는 강도 귀족 자본가들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게다가 영국에서 진짜 귀족 가문이 되었다.

이들이 유산으로 남긴 이름은 지금도 미국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19세기말 집안싸움, 즉 사촌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한쪽 일파가 영국으로 떠났고[1], 미국에 남은 가계는 수장이 타이타닉호 침몰사고에 휘말려 사망했다.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빈센트 애스터는 후계를 남기지 못해 대가 끊겼지만 수장 사후 4개월 뒤에 태어난 막내 아들이자 유복자 존 제이콥 애스터 6세를 통해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2] 영국으로 간 가계는 정계에 진출하고 애스터 자작(1917)과 애스터오브히버 남작(1956)[3] 작위를 세습하는 가문이 되는 등 계속 번영하여 현재에도 명문가의 하나로 남아있다.

2. 인물

한편 그녀는 반공주의자였으며 나치 동조자이자 반유대주의자였다. 게다가 인종차별주의적인 신념까지 가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공공연히 아돌프 히틀러의 정책에 대해 바람직한 것이라며 칭송했고,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정치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짓을 벌인 적도 있다. 영국이 나치 독일과 적으로 맞붙게 된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런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7], 전후에도 인종차별 및 제국주의 망언을 일삼아 말년에는 가족들에게마저 절교당했다. 심지어 낸시의 아들 존 에스터는 어머니가 혐오하던 천주교 신자와 결혼하기까지 했다.
한가지 일화도 있는데 낸시는 의회에 출석한 윈스턴 처칠에게 "Sir, if you were my husband, I would poison your drink." (내가 당신 부인이었다면, 당신의 찻잔에다 독을 탔을 거에요.)라고 독설을 내뱉었고, 처칠도 지지않고 "Madam, if you were my wife, I would drink it." (애스터 부인, 당신이 내 부인이었다면, 난 당신 남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 (독이 든) 찻잔을 마셨을 거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파일:Nancy Astor_Viscountess Astor.jpg 파일:Nancy Astor and Waldorf Astor.jpg 파일:Nancy_Astor_Viscountess_Astor.jpg
젊은 시절 1935년의 남편과 함께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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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본래 두 집안이 같은 블록을 둘로 나눠 지은 집을 물려받아 살았는데, 영국으로 떠난 집안(월도프 애스터)이 자기들 집 있던 자리에 의도적으로 거대한 호텔을 지어서 옆에 있던 사촌집을 가려버렸다. 결국 사촌도 못견디고 집을 다른 블록으로 옮기면서 역시 자기 집 부지에 호텔을 지었는데 이 둘이 합쳐진 것이 바로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다.[2] 다만 유산 대부분은 이복형 빈센트 애스터의 몫이 되었는데,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난 빈센트는 아들과 한살 차이나는 처녀와 재혼해 집안 망신은 다 시키고 유럽으로 도망간 아버지가 ‘여자와 아이들 먼저’라는 규칙으로 딸뻘인 아내와 하녀에게 밀려 죽은것도 기가 막히는 마당이라 어린 계모와 이복 남동생을 평생 불신했기 때문.[3] 시조 초대 애스터 자작의 3남[4] 이때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윌리엄 월도프 애스터가 운영하던 월도프 호텔을 자신이 운영하던사실 사촌 겐세이 놓겠다고 바로 앞에 세웠던 아스토리아 호텔과 합병, 월도프 아스토리아 뉴욕이 된다.[5] '실질적으로'란 단서를 붙인 이유는, 명목상 최초의 여성 의원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1918년 콘스탄스 마르키예비츠(Constance Georgine Markievicz)가 신페인 소속 아일랜드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바 있으나, 신페인 소속이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의회에 등원하지 않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6] 출처 : 세계사 산책.[7] D-Day 기피자들 발언을 하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영국 장병들을 공분에 빠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