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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8:46:32

녹색 상황

체코슬로바키아영국프랑스를 적대국으로 만들면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느냐 아니면 침략자에게 항복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군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1년 일찍 전쟁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프랑스뮌헨에서 우리의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보어만,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수(1945년 2월)
전쟁이 발발했다면 우리로서는 서부 국경도, 폴란드 국경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만약 저항했다면 아군이 그 요새에 의해 진격이 정지되었을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독일 국방군 원수(1946년 증언)[1]

1. 개요2. 배경3. 계획4. 쿠데타 시도5. 외국의 참전6. 이후7. 실제로 전개되었다면?8. 기타

1. 개요

녹색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위한 나치 독일의 계획이었다. 계획은 1937년 말에 초안이 작성되었고, 군사적 상황과 조건이 변함에 따라 수정되었다. 최종안에 따르면 침공은 1938년 9월 28일로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한 전쟁에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쟁을 막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의 집행이 연기되었으며,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 이후 완전히 폐기되었다.

2. 배경

히틀러 집권 이전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대내적으로 농민공화당, 사회민주당, 국민사회당, 국민민주당, 인민당의 5당과 독일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으로 대표되는 중도좌파계 독일인들이 협력하여 거국일치를 이룩하고 대외적으로는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과 함께 이른바 소협상국이라고 불리는 집단안보체제를 형성하는 한편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프랑스에게서 안보보장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는 위기를 맞는다. 1935년 나치 독일의 후원을 받은 수데텐 독일당은 독일인들의 몰표를 얻으며 원내 제1당으로 우뚝 섰고, 히틀러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 체코슬로바키아를 둘러싼 국가들에 접근하여 소협상을 무력화시키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응하여 체코슬로바키아는 수데텐 독일당의 압승이 점쳐지던 1937년 지방선거를 일방적으로 취소하여 세력유세기회를 막는 한편, 외교적으로 소련에 접근하여 1935년에는 동맹조약을 체결하였고,[2]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증강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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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의 국토 크기에 비해 독일과의 국경선은 너무나 길었고,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독일의 주공이 위치하리라고 예상되는 지역에 중무장한 요새선을 건설하고자 했다. 독일군이 산지가 많은 다른 국경지대를 피하고 슐레지엔 지방을 통해 남하하여 체코 지방과 슬로바키아 지방의 양분을 시도하리라고 추측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령 슐레지엔을 마주보는 동부 국경선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른바 소(小)마지노선이라는 방어선을 건설하였다. 다른 지역에도 토치카 등 미약하게나마 방어시설들이 건설되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건설된 곳은 동부 국경선이었다. 그러나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오스트리아 국경에 독일군이 들어닥치자, 전략이 거하게 꼬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번엔 남부 국경선에도 급히 요새선의 건설을 시작했고 결국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시점에서 요새선은 20%만이 완공된 상태였다.

3.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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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제출된 할더의 작전안은 슐레지엔 방면의 제2군[3]이 주공이 되어 제7항공사단[4]의 지원을 받으며 오스트리아 방면의 제14군[5]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의 허리를 끊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당초에 체코슬로바키아가 예상했던 바와 상동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잘 파놓은 묫자리에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꼴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진작부터 이 방면에 소마지노선을 구축하던 중이었고, 많은 구간이 미완이기는 하였으나 히틀러가 보기에는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킬 위험이 컸다. 대신 히틀러는 주공이었던 제2군과 남부 보헤미아의 조공이었던 제12군에서 차량화사단을 각기 1개씩 차출하여 서쪽의 제10군[6]에 배치하고 새로운 주공축을 맡기고자 했다.

이렇게 어떻게든 체코슬로바키아 위기를 전쟁으로 끌고 가려던 아돌프 히틀러의 의지와 달리, 전쟁 준비 상태에 매우 비관적이었던 독일 국방군은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모험을 벌일까 패닉에 빠졌으며, 개전했다가 독일이 또다시 패전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총참모장이었던 베크는 끝내 사임했고 후임 총참모장 할더와 보수파 장성들은 개전에 반대하면서 은밀하게 쿠데타를 준비한다.

그러나 전쟁에 겁을 집어먹은 프랑스와 영국이 양보하면서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 지역의 점령과 할양이 결정되자, 침공을 위해 배치되었던 병력들은 그대로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로 무혈입성하게 된다. 그렇게 독일은 할양지를 손쉽게 접수하였고, 작전은 백지화되었다.

4. 쿠데타 시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가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공황상태에 빠졌던 건 총참모부만이 아니었다.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와 첩보부의 수장이었던 카나리스, 부장 오스터, 군부 밖으로도 재무장관 크로지크나 외무차관 바이츠제커 등 전문관료층도 반대의사를 표시했고 심지어 괴링조차도 "이게 다 전쟁을 일으켜 독일국가를 파탄시키려는 유태인들의 음모"라며 한탄을 하던 중이었다.

특히 한스 오스터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쿠데타를 꾀하여, 개전에 반대하여 군에서 물러났던 비운의 총참모장 베크와 그 후임인 할더 등을 위시로 오스터의 주도하에 쿠데타를 통해서 히틀러를 제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총참모장으로서 침공작전의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다 알고 있었던 할더는 당시 베를린에 있었던 제3군관구 사령관 비츨레벤과 제1경사단을 지휘하던 회프너를 가담시켜 제3군관구 휘하병력을 기반으로 베를린을 장악한 뒤 제1경사단의 기동력을 활용하여 쿠데타 발생시 예상되는 슈츠슈타펠의 베를린 진입을 원천봉쇄 내지는 격퇴코자 했다. 베를린 경찰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할더는 총사령관인 브라우히치도 음모에 가담시키려 했으나 그는 쿠데타 시도에 대한 가부표시를 하지 않아 할더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편 쿠데타가 성공한 뒤의 계획은 불명확하다. 히틀러는 재판에 붙이거나 (베크), 의사들에게 넘겨 정신감정을 시키거나 (오스터), 쿠데타 계획 발동 직전에 총통열차의 폭파나 탈선유도로 암살 (할더)하려는 계획들이 있었으나 어느 하나 정해진 게 없었다. 쿠데타 이후의 국정 수습에도 할더는 얄마르 샤흐트에게 신정부를 지도할 생각이 있는지 의사타진을 요구했고, 오스터는 바이츠제커와 카를 괴르델러 등의 보수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접촉했으며, 베크는 괴링(!!)과 접촉을 시도했다고 알려졌다.

뮌헨 협정이 이루어지자 결국 오스터는 영불과의 전쟁위협이 사라져 명분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히틀러 정권 전복과 이후의 계획을 밀어붙이고자 했지만, 졸지에 외교적 대승리를 거둔 히틀러가 이미 만세의 영웅으로 등극한 상태였으므로 그를 처단할 경우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것을 우려한 비츨레벤 등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고, 관련 문서들은 게슈타포 출신 한스 기제비우스가 모두 소각하면서 자세한 계획은 유실된 상태라고 한다.

5. 외국의 참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는 경우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처음부터 영국과 프랑스가 히틀러의 요구에 반발하여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각오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뮌헨 협정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협정안의 수용을 거부하고 히틀러가 이를 받아 침공을 개시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정치적 자살행위일뿐만 아니라 당시 양국 수뇌부에게 주어졌던 '독일군 120개 사단 동원 가능설'처럼 독일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한 첩보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므로 현실성이 극히 낮다. 후자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가 영국/프랑스도 동의한 협정안을 거부한 것이므로 서구 연합국에게 참전을 회피할 구실이 생기며, 설령 참전하더라도 가짜 전쟁과 같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독일 군부는 서구연합군이 참전한다면 또다시 패전을 겪을 것이라고 낙담하고 있었는데, 당시 히틀러는 프랑스군의 침공가능성에 대해 억지로 부정하면서 실제로 진공해온다고 해도 방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독일군은 18개 사단을 프랑스 국경에 전개할 예정이었으나, 이중 단 5개 사단이 정규 보병사단이었고 나머지는 동원 보병사단이었다. 폴란드 국경에 전개될 예정이었던 10개 사단이나 전략 예비 8개 사단을 투입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독일 군부는 프랑스가 백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았고 9월 28일 시점에서 이미 프랑스군은 동원이 완료된 상황이었으므로 프랑스군이 순식간에 국경선을 돌파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실제로 1939년 프랑스군이 독일 영내로의 공세를 포기하고 밍기적댔기는 하지만, 프랑스군에게 조금이라도 공세의지가 있었다면 1938년이든 1939년이든 언제라도 독일 군부의 예측대로 순식간에 전선이 붕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이렇게 되었다면 오스터 음모사건이 실제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한편 소련은 유일하게 참전을 약속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항전을 요구했는데, 두 가지가 걸림돌이 되었다. 첫째는 앞선 1935년 동맹 조약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내걸었던 프랑스의 참전 단서. 독일과의 전쟁으로 독박을 쓸 수 없었던 소련은 프랑스의 참전 조건을 계속 문제삼았다. 둘째는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로 향할 경로. 폴란드는 소련의 의도를 의심하여 소련기가 체코슬로바키아행을 핑계로 단 한 기라도 자국 영공에 침투하면 그 즉시 격추하겠다는 초강수를 두면서 반발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극동부 루테니아와 좁은 국경선을 공유하는 루마니아도 소련군의 진입을 거부하였다.[7]

한편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 분쟁이 있는 다른 나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뮌헨 협정을 이끌어내는데 크게 활용하는 동시에 군사 행동도 이끌어내려고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특히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슬로바키아를 떡밥으로 헝가리를 꼬드겨 참전시키고자 애썼는데,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재무장에 제한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군사력이 볼품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뮌헨 협정 직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 주도의 외교 고립을 타파하고자 철천지원수이던 헝가리에 접근하면서 헝가리의 재무장 제한이 풀리긴 하였으나, 이미 헝가리는 독일에게 기운 상태였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의 영토 분쟁도 독일이 외교적으로 활용했는데, 당시 소련은 폴란드가 참전할 경우 소련군이 즉시 폴란드 국경을 넘는다는 경고를 한 적이 있으므로 직접적인 참전 가능성은 미지수. 폴란드든 헝가리든 영토 욕심은 넘쳤지만, 프랑스나 소련과 전쟁을 벌일 각오는 그 어떤 나라도 하지 못했다.

6. 이후

국제환경과 작전의 성패여부에 따라 이후 결과도 크게 갈라졌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스스로 한계선이라고 추정했던 3주 이상을 버텨냈다면 서구 연합국 사이에서 독일군에 대한 환상이 사그라들면서 대독전에 대한 객관적 내지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적극적 참전론이 대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히틀러의 관측대로 "8일 내에 지대한 영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체코슬로바키아군이 버티는데 실패했다면 도리어 독일군에 대한 환상을 확인하는 한편 공공연하게 독일 편을 들었던 폴란드 등에 대한 책임론이 나왔을 가능성이 생기고, 이는 1939년 서구 연합국이 소련에 접근하는데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폴란드 문제에 있어서 영불 양국의 정부가 소련의 입장에 좀 더 동정적이 되는 계기가 되면서 독소 불가침조약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가장 큰 관건은 프랑스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독전에 임하느냐에 달려있다. 영국군은 간신히 2개 사단을 파견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소련군에게는 길이 없었지만, 프랑스군은 백만 명을 동원한 상태였고 또 길도 훤히 열린 상태였다. 그러나 1939년에 프랑스군이 보여준 소극성으로 미루어보면 프랑스군의 적극적 태도는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7. 실제로 전개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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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 전 독일군은 47개 정규 사단을 전개하고 있었고 이중 36개가 체코슬로바키아 방면에 배치된 상태였다. 동원 후 독일군은 8개 정규 보병사단을 신규편성하고 21개 동원 보병사단을 배치하는 등 병력을 증강하고 도합 42개 사단을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 투입하고자 하였으나, 인력과 장비 모두 심각하게 열악하였다. 이에 반해 체코슬로바키아군은 21개의 정규 보병사단, 4개의 기동사단, 12개의 '국경구역사령부',[8] 4개의 '집단'[9]을 배치한 상황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전략은 오로지 프랑스군이 체코를 구원하러 온다는 희망적인 관측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동전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이에 따라 군사력의 절반 가까이가 요새지대나 방어선에 배치된 고정병력이기는 하였으나, 그 질에 있어서는 재무장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독일군과 차이가 컸다.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절 70% 이상의 산업 기반이 체코에 위치해 있었던 탓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못지않게 중공업과 총기산업이 발달한 나라였고 이를 바탕으로 군비를 충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었다. 자동화기의 보급률은 7명중 1명꼴로 세계 정상급이었고 전차의 경우 숫적으로 불리하기는 하였으나 성능면에서 동시기 독일군의 주력전차들을 능가하였으며, 훗날 독일군이 체코군 전차들을 접수했을 때 많은 수가 그대로 독일군에 소속되어 전쟁을 치뤘고 영프와 폴란드도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린 댓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었다.

지형상으로도 체코슬로바키아가 유리한 산악 지형의 고지대를 점유하고 있었고 독일과의 슐레지엔 방면 국경지역에는 독일군의 양분작전을 미리 상정하고 구축한 소마지노선이 버티고 있었다. 비록 많은 곳이 미비된 상태라 우회의 여지가 많기는 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진작부터 독일군의 침공을 상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구역이므로 본디 계획대로 작전을 개시했다면 독일 제2군의 공격은 돈좌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오스트리아 방면의 제14군도 난항을 겪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말로 위협이 되는 건 히틀러의 요구로 추가된 제10군의 주공선인데, 이 일대는 숲과 구릉지대가 많아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상대적으로 경시한 지역이었다. 이 축선에는 슐레지엔 방면과 같은 요새선이 건설된 것이 없었으며 기껏해야 토치카 정도의 경무장 저지선을 제32국경구역사령부가 담당하고 있었고 가용병력으로는 제2보병사단만이 배치된 상황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 같지 않은가? 이상한 부분에서 안목이 뛰어난 히틀러

체코슬로바키아군은 독일군의 국토양분 시도에 집착한 나머지 대부분의 예비병력, 특히 그나마 기동력이 있는 차량화사단을 모라비아에 배치했으므로 제10군이 돌파에 성공했다면 여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남쪽에서 얼마나 빨리 예비병력을 마련해서 끌고 오느냐가 프라하 사수 혹은 포기와 이후의 향방을 갈랐을 것이다.

여기서 독일 공군이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예비병력을 얼마나 차단 내지는 지연시키느냐가 제10군의 승전의 열쇠가 되리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독일 공군은 작전 중 최우선 목표를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재배치 차단과 지상전의 근접지원으로 규정한 바, 이를 위하여 전역을 둘로 나누어 제1공군집단을 북쪽에, 제3공군집단을 남쪽에 할당하고 제1공군집단에는 10개 전투기비행대대(Gruppe), 17개 폭격기비행대대, 4개 급강하폭격기비행대대를, 제3공군집단에는 5개 전투기비행대대, 8개 폭격기비행대대, 2개 급강하폭격기비행대대, 2개 공격기비행대대를 배속시켰고 별도로 오스트리아항공사령부를 설치하여 1개 전투기비행대대, 3개 폭격기비행대대, 1개 급강하폭격기비행대대를 배속시켜 독일 제14군을 지원토록 하였다. 다만 전투기비행대대 가운데 6개 가량이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이 아니라 독일 영공 방어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이에 맞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군은 폭격기 155기와 전투기 326기가 전부로, 전투기는 전부 구형 복엽기였다. 529기의 정찰기를 경폭격기로 전용할 수는 있었으나 전력으로서 큰 가치는 없었고, 독일 공군의 폭격기 1128기, 전투기 773기, 급강하폭격기 226기, 지상공격기 195기에 비해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크게 뒤쳐지는 상황이었으므로 성공적인 영공 방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비록 독일 공군의 전투기 다수가 본토 방어에 돌려지기는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공군보다는 험악한 늦가을/겨울날씨가 독일 공군의 작전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다른 관건은 수데텐란트 현지민들의 민심이다. 다른 체코슬로바키아 정당들을 모두 제치고 수데텐 독일당을 원내 일당으로 올려세운 수데텐 독일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는 그대로 나치 독일에게로 이어지고 있었고, 뮌헨 협정 직전에는 약 3만명 규모의 수데텐 자유군단이 조직되어 관공서를 불태우고 경찰을 살해하는 등 적극적인 사보타주 활동을 펼치는 중이었다. 소마지노선을 비롯한 주요 방어선의 거의 대부분이 독일어권 지역에 위치하였고 더욱이 이들 방어선을 담당한 국경수비대는 분리주의자들의 배신을 우려해 무조건 체코인을 뽑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사보타주와 군사첩보 제공에도 상대적으로 거리낌이 덜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체코슬로바키아군 자신의 항전의지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프랑스군의 참전없이 단 3주를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뮌헨 협정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무력저항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8. 기타


[1] #.[2] 이때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나머지 프랑스가 참전할 시에만 소련도 참전한다는 단서를 붙였는데, 나중에 큰 화가 되어 돌아온다.[3] 12개 보병사단, 기갑사단과 차량화사단 각기 1개씩.[4] 공수부대. 이후 제1강하엽병사단.[5] 3개 보병사단, 2개 산악사단, 기갑사단과 경사단(기병/전차부대의 혼성편제) 각기 1개씩.[6] 2개 보병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기갑사단과 경사단 각기 1개씩.[7] 1982년에 공개된 소련 외교문서 사본 근거로 루마니아가 소련군의 영토통과를 허가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위조 문서로 의심받고 있다.[8] 국경지대 요새를 담당. 사단급 규모.[9] 국경선내 주요 도시들과 요새를 담당. 사단급 규모.[10] 원 역사에서 옷 싣다가 비행기 추락한 장군이 조종사의 말을 듣고 짐을 줄이는 바람에 살았고 이 사람이 수장이 된다.[11] 반면 미국은 작전단위가 아니라 가상적국에 따라 색놀이를 한 색부호 전쟁 계획이란 걸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