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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유지하기 위해 실시한 정치 제도.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참주정의 등장을 막기 위해 고안한 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독재자가 될 위험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 조각에 적어 내게 하는 방식이었기에 도편 추방제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뽑힌 인물은 아테네 국외로 10년간 추방되어야 했으며 변론 혹은 항소는 허용되지 않았다. 단, 언제까지나 "일시적 추방"이기 때문에 시민권과 재산은 존치되었다. 그저, 아테네에 입국하는 것이 10년간 금지되는 것으로, 추방 기간이 만료되고 나면 얼마든지 아테네에 돌아와도 상관 없었고,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당연히 허용되었다. 또한, 민회가 추방 기간을 감축 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페르시아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10년 추방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일도 많았다.
제도의 의도는 아무래도 인기 많은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파벌들이 급진화되어 냅다 파벌 지도자를 참주로 옹립하거나, 상대 파벌 지도자를 불법적으로 제거하는 사태가 빈번했기 때문에, "대충 과하게 인기 많은 놈을 10년 동안 내쫓으면 쿠데타는 안 일어나겠지"란 간단한 발상에서 기인한 듯하다.
실질적으로는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기용되었고, 실제로도 그런 용도로 쓰였지만, 언제까지나 시민의 지지를 받아야만 추방을 시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서로 통수치고 다닐거면 민회를 통해서 통수치란 의도로 도입된 것으로, 참 무사태평 안일하기 짝이 없는 제도여도, "민회에서 피 보는 것 보단 낫겠지"란 발상 하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훨씬 후대인 동로마 제국에서 정적의 목을 냅다 댕겅하는 것 보다는 신체를 훼손해서 위신을 떨어트려 권력에 복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명하고 자비롭다고 코를 자르거나, 눈을 뽑거나, 고자를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 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보다 훨씬 잔혹한 피바람이 불던 고대치곤 꽤 현명한 제도였다.
2. 절차
물론, 이 제도를 도입한 장본인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도편 추방을 민회 의제로 아무때나 올릴 수 없게 제한이 걸어져있었다. 원칙적으로 매년 1~2월의 정기 민회에서만 당년에 도편 추방 투표를 시행할지 결정하였고, 시행이 결정될 경우, 2달 안에 투표를 실행하도록 되어있었다.당시 아테네 상식으론 도편 추방에까지 몰릴 정도이면 나름 저명한 인물[2]일테니, 민회가 자연히 2달의 유예 기간을 줄 것이라 판단하여 이런 기한 제한이 붙었으며, 당시의 정보력 수준이면 아무리 서로 어깨 너머로 다 알고 지내는 아테네라해도 충분히 끓어오른 분위기가 식고 남을 수준이라, 어영부영 투표가 부결되거나, 추방이 확실시 된다면 떠날 준비를 할만한 수준이 되었다. 이 2달의 유예 기간은 변론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단 투표가 가결될 경우 추가적인 변론이나 항소 시도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투표는 아고라에서 한꺼번에 실시됐으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독재자로 발전할 위험이 있는 자들의 이름을 도편에 적어냈고 개표는 투표 종료와 동시에 진행됐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당대 그리스의 사료들 조차 의견이 엇갈리는데, 일단 학계에서는 당시 아테네 시민권 보유자의 수를 감안해서 총 투표 가운데 6000표 이상을 득표한 자가 추방당한다.는 주장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3][4] 추방되는 것으로 결정된 자는 투표로부터 10일 이내에 아테네를 떠나야 했으며 정당한 이유 없이 추방을 거부하거나 추방기간 중 정당한 절차 및 사유 없이 아테네로 몰래 돌아왔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3. 주요 추방자
- 기원전 487년: 히파르코스
- 기원전 486년: 메가클레스[5]
- 기원전 485년: 칼리크세노스
- 기원전 484년: 크산티포스[6]
- 기원전 482년: 아리스티데스[7][8]
- 기원전 471년: 테미스토클레스
- 기원전 461년: 키몬[9]
- 기원전 460년: 알키비아데스
- 기원전 457년: 메논
- 기원전 442년: 투키디데스
- 기원전 416년(?)[10]: 히페르볼루스
4. 폐지
본래는 민회의 분위기가 흉흉해져서 민회에서 누가 칼빵을 맞거나, 혼란을 기회삼아 참주가 옹립되는 참사[11]를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지만, 페르시아 전쟁 무렵부터는 민회의 분위기가 항상 흉흉해지면서 해당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버리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만으로 악용되기 시작한다. 분위기가 하도 흉흉하니 본래 도편 추방을 함부로 열지 말라고 1년에 한번만 투표 여부를 결정하고 난 후에야 투표하게 한 것도, 도편 추방이 연례 행사로 변질되면서, 1년에 한번 꼬운 놈 엿 먹이는 서커스로 타락하게 된다.대표적인 경우로는 스파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하다가 반대파에게 추방당한 테미스토클레스와 페리클레스가 주도하는 아테네 제국 정책을 반대하다가 추방당한 투키디데스. 결국 페리클레스 사후에 중우정치 시기가 되면서 말 그대로 개판이 되고 말았다.
기원전 416년 혹은 417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와중에 히페르볼루스가 추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도편추방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도편추방제는 이 때를 전후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히페르볼루스를 추방시켰을 때의 상황은 도편추방제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의 아테네 정계는 전쟁 방향을 놓고 니키아스의 신중파와 알키비아데스의 강경파가 대립하던 상황이었는데 두 세력의 크기가 비슷비슷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정책의 실현이 불가능했고 히페르볼루스는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고 둘 중에 하나라도 쫓아내려고 도편추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연합(…)해서 역으로 히페르볼루스를 내쫓은 것이 사건의 전말. 확고한 적이 있을 때는 도편추방제가 효과만점이었지만 내쫓아야 할 대상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야합으로 이런 식의 짓이 얼마던지 가능했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클레스의 사후 중우정치에 질린 아테네인들이 자발적으로 도편추방제를 없앤 것으로 표현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패배한 후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강요에 의하여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채택했고 과두정의 특성상 개인 독재자가 등장하기는 힘들었다는 점도 도편추방제가 사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여겨진다.[12]
도편투표가 명문가 출신이거나 웅변에 탁월한 사람 또는 명성이 뛰어난 사람들이 대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예로 페리클레스의 스승 다몬은 지혜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해서 이 투표로 추방되었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아리스티데스 편)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시민이나 정적의 시기와 질투로 변질 될 우려가 높은 제도로 보고 있고, 당대에서도 썩 평가가 좋았다 못할 제도이다.
5. 매체
- 파이널 판타지 11: 작중 등장 대통령 중 한명인 프리엔이 '철편추방'으로 대통령직에서 실각하였다는 공식설정이 있는데 도편추방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6. 여담
- 페리클레스는 도편추방제를 가장 잘 활용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30년 가까운 집권 시기 동안 자신의 정적은 싸그리 도편추방으로 배제시켜 버리면서도 정작 본인은 한번도 도편추방제에 발목을 잡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 현대 영어에서 Ostracism은 도편추방이라는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왕따, 소외 등을 표현하기도 한다.
- 오늘날 발굴된 당시 도편을 보면 실명 옆에 각종 조롱과 별명들도 적혀 있다. 가령 '아리스티데스 멍청이' 이런 식으로. 물론 이런 조롱과 별명들의 유무에 상관없이 실명만 명확히 적혀 있으면 유효한 표로 인정됐다.
- 최근 사회학에선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사이버 도편추방(Cyberostracis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1] 위의 사진 속에 쓰인 이름들은 굉장히 유명한 인물들로, 맨 위의 페리클레스를 제외하면 실제로 도편추방을 당했던 인물들이다. 윗쪽부터 크산티포스의 아들 페리클레스,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이 보인다.[2] 그러니 당연히 어느정도 재산이 많은 상류층이거나, 아니더라도 그냥 재능이 뛰어나서 어느 동네에가든 잘 먹고 잘 살 인물(...)이라 추방당해도 고향만 못 갈 뿐 삶에 지장이 갈 것은 없으리란 발상도 포함한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10년을 못 참고 타국에서 선동을 벌인다면 그 때에는 아예 민회에서 시민권을 박탈해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10년이면 당대 기준 정치 기반이 전부 사라지고 남을 기나긴 세월이므로, 실상, 정치가 그리 좋은 사람이면 타국가서 거기 시민권 따고 정치하고, 여하간 아테네서 정치하지 말란 의미나 다름 없다.[3] 영어 위키백과에는 '일단 총 투표수가 6000표 이상이 되어야지 투표가 유효하다'는 가설도 서술하고 있으며 '최다 득표자가 추방당한다'는 다른 출처의 학설도 있다.[4] 한편으로는 이게 사실일 시 아테네의 시민은 6천 명을 훨씬 넘었으며 이 인구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었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아테네와 더불어 그리스의 쌍벽이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지 고작 80년 만에 시민이 10% 수준으로 급락한 것과는 대조적이다.[5] 히포크라테스의 아들로 유명하다.[6] 아테네의 황금기를 열어제낀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다.[7] 다음과 같은 일화로 유명하다. 도편추방제 선거 당일 까막눈이었던 어떤 시민이 "내가 글자를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써주실 수 있겠소?"라고 지나가던 아리스티데스 본인에게 (물론 상대가 아리스티데스인줄 모른 채) 물었다.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그 자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소?'라고 되물어봤다. 그러자 그 시민은 '아뇨. 그렇지만 주변에서 하도 아리스티데스를 정직하고 선한 자라고 칭찬해대는 소리를 들으니까 진저리가 나서요.'라고 답했고 이에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었다. 그리고 추방[8] 하지만 추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해서 아테네로 복귀했다. 후술할 테미스토클레스는 그의 정적으로 테미스토클레스는 도편추방제로 아리스티데스를 몰아냈지만 나중에는 역으로 아리스티데스가 도편추방으로 테미스토클레스를 쫓아내 버린다.[9] 이때 키몬의 추방을 뒤에서 공작한 인물이 바로 페리클레스로 키몬의 추방과 동시에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손에 들어갔고 이 시기의 아테네를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라고 부른다.[10] 정확한 연도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11] 억울하게 쫓겨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그걸 발판 삼아 참주가 옹립되는 것 보단 낫다는 발상이다.[12] 하지만 이는 의문이다. 사실 아테네는 과두정을 받아들인지 단 1년 만에 과두정을 뒤엎어버리고 다시 민주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도편추방제로 인한 중우정치를 막지 못하면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정치체제가 바뀌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테네인들에게 큰 충격을 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