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07:01:30

데이비드 스턴

데이비드 스턴 관련 틀
{{{#!folding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7408C, #17408C 20%, #17408C 80%, #17408C);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모리스
포돌로프
J. 월터
케네디
래리
오브라이언
데이비드
스턴
<rowcolor=#fff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아담
실버
- - -
}}}}}}}}}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명예의 전당 데이비드 스턴.jpg
데이비드 스턴
헌액 연도 2014년
}}} ||
제4대 NBA 커미셔너
4th Commissioner of the NBA
파일:데이비드 스턴.jpg
데이비드 조엘 스턴
David Joel Stern
<colbgcolor=#c8102e><colcolor=#ffffff> 출생 1942년 9월 22일
뉴욕주 뉴욕시
사망 2020년 1월 1일 (향년 77세)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럿거스 대학교 (역사학 / 학사 )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 (법무박사)
직책 NBA 커미셔너 (1984.01.31~2014.01.31)
전임 래리 오브라이언 (1975.06.01~1984.01.31)
후임 아담 실버 (2014.02.01~현직)

1. 개요2. 생애
2.1. 크리스 폴 트레이드 승인 거부
3. 사망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전직 변호사이자 제4대 전미 농구 협회 커미셔너. 1984년부터 30년동안 구단의 조직과 개혁을 이끌며 지금의 미국프로농구를 인기 스포츠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

2. 생애

미국 뉴욕에서 식료품점을 경영하고 있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가게 일을 자주 도왔으며 이후 친구들과 함께 농구를 한 적이 있어 뉴욕 닉스를 응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농구선수보다 공무원이 되고 싶은 꿈을 생각했던 스턴은 럿거스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법과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에는 외부 법률 자문위원으로 NBA 사무국과 인연을 맺었다. 1978년에는 제3대 NBA 총재였던 래리 오브라이언의 권유로 법무부문 설립과 관련된 요청을 거절하였고 고문을 거쳐 1980년에는 이사회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1984년 12월, 오브라이언의 후임으로 제4대 NBA 커미셔너에 선출되어 아담 실버에게 총재직을 넘겨주기까지 무려 30년동안 협회를 이끌었다. 1980년대에는 래리 버드매직 존슨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엄청난 흥행을 유도했고, 1990년대에는 마이클 조던의 엄청난 인기로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이름을 알리는데도 기여를 했다. 또 1992년에 개최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참가한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이 한자리에 모인 드림팀을 구성하면서 NBA가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밖에 도핑 테스트 도입, 1997년 전미 여자 농구 협회 창설, NBA 공식 사이트 및 TV 개설, NBA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 허용, 글로벌 경기 송출 등 많은 업적을 이루어 냈다.

총재직에서 물러난 뒤 2014년에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2016년에는 FIBA 명예의 전당에 입성되었다.

2.1. 크리스 폴 트레이드 승인 거부

뉴올리언스 호네츠(현 뉴올리언스 펠리컨스)가 매각되는 과정에서 전 구단주인 조지 쉰이 재정 문제를 겪으면서 팀을 운영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NBA 사무국이 2010년에 쉰의 지분을 사서 대신 팀을 운영하다가 2012년에 새 구단주에게 지분을 파는 과정을 통해 사무국의 수장인 스턴 총재가 호네츠의 구단주 대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이때 리빌딩 중에 있던 호네츠의 프랜차이즈 스타 크리스 폴이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되도록 GM끼리 합의하고 언론에 발표까지 난 상황에서 구단주 대행인 스턴이 이를 거부해 논란이 되었고, 뿔이난 레이커스팬들은 'NBA사무국은 트레이드를 비토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표한 바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이는 당시 구단주 대행인 스턴이 구단주 자격으로 트레이드를 승인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1]

참고로 NBA의 구조는 NBA사무국이란 조직 아래에 구단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NBA사무국은 각자 독립적인 법인인 NBA구단들이 서로 시즌을 치르고 수상자를 정할 수 있도록 합의하게 해줄 수 있는 중재자 위치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노사협상 당시 노동자 측인 선수들과 사측인 구단주들이 협상을 치르는 것이다. 선수 계약이나 트레이드에서 규정 상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나(샐러리가 서로 맞지 않는다거나) 하면 사무국 입장에선 그 이유를 밝히고 트래이드를 승인하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2], 그렇지 않은 케이스에 대해 독단적인 판단으로 취소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이건에 한해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스턴의 입장이 구단주였기 때문이다.

당시 레이커스와 호네츠 측이 합의한 딜은 크리스 폴이 레이커스로 가는 대신 레이커스의 포워드 라마 오돔, 그리고 로케츠에서 슈팅가드 케빈 마틴, 파워포워드 루이스 스콜라, 포인트가드 고란 드라기치를 받고, 휴스턴 로케츠는 파워포워드 파우 가솔을 받는 삼각딜이었는데, 스턴은 뉴올리언즈 구단주 대행으로서 이 트레이드가 불합리하다고 여겨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훗날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 보면 실제 클리퍼스와 성사된 딜, 즉, 폴을 보내는 대신 에릭 고든, 알파룩 아미누, 크리스 케이먼을 받은 딜보다 더 나아보인다.[3] 그러나 트레이드 당시 가치로 보면 이는 구단주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당시 호네츠가 받을 선수들은 모두 롤플레이어들로서,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인 크리스 폴을 보내고 경기당 17분 정도 밖에 못 뛰는 듣보잡 포인트가드로 그를 대체하면서 안 그래도 포화상태인 포워드진에 비슷한 수준의 포워드 두명을 더하고 준수한 슈팅가드 한명을 더하는 수준이었다. 즉, 리그에서 가장 가치있는 선수 중 하나를 보내고 애매한 선수들만 잔뜩 받아오는 딜.

이러한 차이는 당시 뎀프스 GM과 구단주의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원래 GM은 미래를 보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팀을 만들어가는게 중요하지만, 당시 뎀프스 입장에서는 새 구단주가 들어와 어차피 모든게 갈아엎어지고 자신의 자리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미래를 보기보다는 당장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게 중요했고, 따라서 당장의 성적을 내는게 중요했다. 사실 리빌딩을 하겠다는 팀이 (듣보잡이었던 드라기치를 제외하면) 27세, 30대 선수들만 받아오고, 기껏 받아온 드래프트 지명권도 순위가 높을리가 없는 레이커스의 자체 지명권이란 점에서 저건 말도 안되는 트레이드이다. 한마디로 리빌딩을 해야하는 팀이 ‌win-now를 위한 트레이드를 한 것.[4] 당연히 트레이드 발표 이후 레이커스의 윈이란 평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구단주 입장에 철저한 스턴은 미래에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어리고 기대치가 높은 유망주였던 에릭 고든을 중심으로 한 클리퍼스와 딜을 한 것이다. 위에도 언급됐지만 당시 에릭 고든의 주가는 엄청났다. 트레이드 당시 23세였던 고든은 2010-11시즌 때 22.3점을 올리며 소위 말하는 break-out 시즌을 보냈고, 안드리스 비엔드리스의 테러로 부상당해 결장하기 전까지 꾸준히 고득점을 올려주며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게다가 트레이드 당시 29세였던 케이먼은 당시는 주춤했지만 두 시즌 전에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이때도 준척급 센터로서 쓸만한 전력이었다.

즉, 레이커스와의 딜처럼 애매한 선수들만 받아서 애매한 성적만 올리다가 리빌딩이 늦어지는게 아니라, 클리퍼스 딜처럼 팀의 미래가 될 만한 확실한 유망주 하나 잡아서 바로 리빌딩을 시작하는 게 올바른 방향이었던 것이다.[5] 이 때문에 스턴의 후속 트레이드가 발표되자 스턴의 안목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이때도 스턴을 비난하는 것은 코비와 함께할 슈퍼스타 백코트 파트너를 잃어 속이 쓰린 레이커스 팬들 뿐이었다.

한마디로 스턴은 권한을 남용하거나 그딴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만 정확하게 행사했고, 팀의 미래를 위한 가장 최적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6] 오히려 NBA사무국이 아니라 뉴올리언즈 호네츠의 구단주 대행 역할에 지나치게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사무국 입장에선 당연히 NBA 최고팀인 레이커스가 강해지는 것을 쌍수 들어 반길 수 밖에 없기 때문. 그러나 NBA총재란 입장에서 아니라 호네츠 구단주 입장에서 철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저 트래이드를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3. 사망

2019년 12월 13일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중태에 빠졌으며, 2020년 1월 1일 향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스턴의 인터뷰 중: "정정할게 있습니다. 무슨 '취소' 말인가요? GM (델 뎀프스)가 그 트레이드를 하도록 승인을 못 받은 것입니다. 구단 주주들을 대행한 입장에서 우리(NBA 사무국)이 그 트레이드를 안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제가 구단주 대행이었으니까요. '무효화(void)' 시킬게 없어요. 트레이드 자체가 안 일어난 겁니다" https://ca.nba.com/news/this-date-in-nba-history-dec-8-commissioner-david-stern-vetoes-chris-pauls-trade-to-the-los-angeles-lakers/s3zzl4imi12c1uhc5a85va9sw.[2] 이 경우 승인되지 않은 구단주 측에선 자신도 이전에 합의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컴플레인을 걸 근거가 없다. 좋은 예가 97년 당시 주완 하워드를 계약했다가 샐러리캡 계산 실수로 취소되었던 마이애미 히트. 사무국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취소시킨 것이 아니라, 구단주들끼리의 합의 내용에 어긋났기에 계약이 불가하다고 한 것이다.[3] 고란 드라기치는 피닉스에서 포텐이 폭발하며 20점 스코어러가 되었고, 훗날 올스타까지 올랐다. 반면 에릭 고든은 인저리 프론이 되며 계속 하락세를 겪었고, 케이먼 역시 계속 기량이 하락했다.[4] 당연히 NBA에서 win-now란 '우승을 위한' 플랜을 뜻하지 당장 정규시즌 승수 몇승을 올리는 목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즉, 윈나우를 하려면 사치세를 각오하더라도 우승권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에이스과 즉시전력감들을 데려온다. 만약 호네츠가 윈나우를 하려면 폴을 보내고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에이스급을 데려온 다음, 후속 트레이드를 통해 강한 롤 플레이어들을 보강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호네츠는 위에 언급된 팀 상황 상 이렇게 많은 돈을 쓰며 우승권으로 도약하는게 불가능했다. 당연히 (언제가 될지 모르는) 새 구단주가 들어온 이후를 위해 만기계약을 데려와서 샐러리캡을 대폭 덜어낼 기반을 마련하고 상위 드래프트 지명권을 가져오거나, 어리고 실력있는 유망주를 데려오는 등 리빌딩의 초석을 마련해야했다. 에이스급이 없는데 잔여연봉도 많이 남아있는 애매한 선수들만 데려오는 게 아니라.[5] 당시 농구계에선 누구도 고든이 인저리 프론이 되면서 성장이 멈추고, 29세였던 케이먼이 계속 기량저하를 겪을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잘한 결정이라도 미래를 보지 않는 이상 폭망할 가능성은 있기 때문에 결과론으로 이를 비난할 순 없다.[6] 스턴은 NBA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였지만, NBA사무국 총재란 직책 자체가 그렇게 큰 권력을 지닌 위치는 아니며,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트래이드를 총재 권한으로 취소시킬 수는 없다. NBA 사무국은 각자 독립적인 법인인 팀들이 모여 치르는 리그를 진행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지닌 중립자이며, 운영비를 대는 각 구단에게 갑질을 할 수 있는 위치가 절대 아니다. (실제로 총재는 구단주 투표에 따라 해임될 수 있다) '총재'란 이름이 거창해보이긴 하지만 NBA총재는 절대 구단들의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개인의 힘 측면에서 보면 NBA에서 갑의 위치에 가장 가까운 존재들은 억만장자인 구단주들이다. 실제로 구단주를 견제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다른 구단주들이며, 아담 실버 현 총재가 도널드 스털링 사태 당시 스털링이 클리퍼스를 팔도록 강제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구단주들의 동의를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