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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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버스터 키튼 BUSTER KEATON | ||||||||||||||||||||||||||||||||||||||||||||||||||||||||||||||||||||||||||||||||||||||||||||||||||||||||||||||||||||||||||||||||||||||||||||||||||||||||||||||||||||||||||||||||||||||||||||||||||||||||||||||||||||||||||||||||||||||||||||||||||||||||||||||||||||||||||||||||||||||||||||||||||||||||||||||||||||||||||||||||||||||||||||||||||||||||||||||||||||||||||||||||||||||||||||||||||||||||||||||||||||||||||||||||||||||||||||||||||||||||||||||||||||||||||||||||||||||||||||||||||||||||||||||||||||||||||||||||||||||||||||||||||||||||||||||||||||||||||||||||||||||||||||||||||||||||||||||||||
분야 | 텔레비전,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텔레비전 : 6231 Hollywood Blvd. 영화 : 6621 Hollywood Blvd. |
버스터 키튼 Buster Keat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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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셉 프랭크 키튼 Joseph Frank Keaton | |||
국적 | 미국 | |||
출생 | 1895년 10월 4일 | |||
캔자스 주 피퀘이 | ||||
사망 | 1966년 2월 1일 (향년 70세) | |||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우들랜드힐스 | ||||
직업 | 배우, 코미디언, 스턴트맨, 영화감독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묘소 | <colbgcolor=#fff,#1f2023>로스앤젤레스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할리우드 힐스) | ||
활동 기간 | 1898년 ~ 1966년 | |||
종교 | 무종교 | |||
신체 | 165cm | |||
부모 | 아버지 조 키튼 (1867 ~ 1946) 어머니 마이라 키튼 (1877 ~ 1955) | |||
배우자 | 나탈리 탈매지[1] (1921년 결혼 / 1932년 이혼) 메이 스크리빈 (1933년 결혼 / 1936년 이혼) 엘리노어 키튼[2] (1940년 결혼) | |||
자녀 | 아들 버스터 키튼 주니어 (1922 ~ 2007) 아들 밥 탈매지 (1924 ~ 200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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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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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무표정 The Great Stone Face |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메리 픽포드, 릴리안 기시, 그레타 가르보와 함께 무성영화를 이끌던 전설, 그리고 스턴트 액션의 대가이자 대부. 또한 영화사에서 명감독, 명배우를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위대한 영화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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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ter Keaton: A Hard Act to Follow 버스터 키튼의 인생에 대한 다큐멘터리[4] |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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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버스터 키튼 |
버스터 키튼은 1895년 10월 4일 메디슨 쇼의 공연자인 조셉 핼리 키튼과 미라 커틀러 키튼 사이에서 태어난다.
약장수들이 소비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벌이는 일명 '메디슨 쇼'를 행하는 보드빌 배우[5]의 아들로 태어난 키튼은 생후 18개월부터 가족들과 함께 보드빌 공연을 했는데[6] 주변 사람들이 아동 학대로 부모를 신고할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슬랩스틱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했다. 심지어 그의 별명도 드라마틱하고 특이한 상황에서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소문에 의하면 키튼 가족과 함께 이 이름을 지은 것은 탈출 예술가 해리 후디니와 그의 아내였다. 이들은 버스터의 대부모들이기도 했다. 후디니는 생후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꼬마 버스터가 계단에서 거의 다치지 않은 채 미끄러져서 바닥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 "자네 아들 참 기막히게 하는군!(What a buster your kid took!)" 후디니는 외쳤다고 한다. 그 간단한 말로 키튼은 버스터를 이름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7]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심지어 그의 산파였던 사람이 지어줬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연유로 이 이름을 지어줬는지는 불확실하다.
보드빌 배우인 부모들 밑에서 많은 것을 보고 목격한 버스터 키튼에게 쇼 비즈니스는 숙명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생후 9개월의 나이에 날개 위에서 기어오르며 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8] 세살도 채 안 되었을 때, 이러한 관객들의 기쁨과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다. 그는 당시 아동 노동법을 담당하던 기관인 게리 협회의 경계가 느슨한 마을에 정기적으로 그의 가족과 함께 나타났는데, 그의 일은 아버지와 함께 공연하는 것이었다. 그의 타고난 희극적 재능은 그의 첫 공연에서 이미 분명했다. 그는 똑같은 의상을 입고 아버지의 뒤에 서있었고, 계획되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은 채 침묵하고 기괴한 그리스 합창으로 아버지의 공연을 도왔다.
버스터 키튼이 여섯 살이던 1902년 9월 25일자 신문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버스터가 그 가족에 합류하기 위해 동행했을 때, 그는 필연적으로 극장의 아이가 되었다. 아기였을 때 그는 애지중지하는 어머니에 의해 날개에서 무대 한쪽에 놓였고, 종종 그녀는 넘어져버린 작은 아이를 태우기 위해 재빨리 출구를 만들곤 했다. 버스터가 나이가 들면서 그를 돌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 객석의 여자들이 그 작은 녀석을 데리고 갔는데, 그 녀석은 너무나 철저하게 그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그의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한 연기, 스타덤에 대한 이야기들은 후세에 자세히 재조명되었다. 키튼의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의 캐릭터는 그가 어릴적부터 충실히 쌓아올린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버스터가 4살이 될 무렵 그는 키튼 가족들에게 중요한 기회인 뉴욕의 전설적인 쇼맨 토니 패스터의 아버지와 함께 오디션을 봤다. 그 결과 아버지는 고용되었지만, 버스터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버스터는 방송에서 제외된 것에 울었다고 한다. 그의 공식적인 프로 데뷔는 1900년 10월 17일 수요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 있는 독스테이더 극장이었다. 41년 후, 키튼이 할리우드의 전설로 여겨졌을 때, 윌밍턴의 한 신문은 그 인상적인 데뷔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대머리 공포 가발, 턱수염, 커트어웨이 코트, 헐렁한 바지, 슬랩슈즈를 신은 그의 아버지 버스터의 모습을 보면, 나중에 오케스트라가 '안빌 합창단'을 연주할 때, 아버지는 키튼은 빗자루로 아이를 때렸다. 아이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흉내내려고 애썼고 쓰러질 때마다 모든 소년다운 품위를 다 갖추고 옷을 털고 '떨어져서 정말 미안하다'고 매우 진지하게 사과했다. 옛날 윌밍턴인들 사이에서도 오늘날까지 들리는, 마을에 관한 개그 중의 하나가 되려 하고 있었다."
이 기사는 계속해서 이 극장의 주인인 윌리엄 독스테이더가 "아이의 능력과 인기에 너무 감명을 받아, 부모가 공연뿐만 아니라 저녁 공연에도 출연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의 서비스에 10달러를 더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고 말한다. 밑의 기사들은 당시의 키튼의 공연에 대한 리뷰다.
"그 소년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그렇게 말했지만, 영화 속 스타덤과 합법적인 극장 속에서는 미래가 정말로 스타덤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
― 조지 슈토프만, 1941년 8월 9일, 델라웨어 주 윌밍턴의 "데일리 이브닝" 기사
― 조지 슈토프만, 1941년 8월 9일, 델라웨어 주 윌밍턴의 "데일리 이브닝" 기사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상서로운 데뷔를 시작으로 버스터 키튼은 스타, 큰 스타였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미국을 순회하며 17년간 변화무쌍한 연기를 펼쳤는데, 일반적으로 조 키튼이 뒤에서 버스터가 대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를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행동은 끊임없이 변화했고, 젊은 버스터는 즉흥적인 행동으로 그의 마음을 날카롭게 하고 패러디에 대한 재능을 개발할 기회를 제공했다. 아마 전체 쇼의 가장 큰 히트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청소년 코미디언인 버스터 키튼이 득점했을 것이다."
― 1904년 1월 16일 보스턴 헤럴드
― 1904년 1월 16일 보스턴 헤럴드
"이 쇼의 큰 웃음은 조, 미라 그리고 작은 "버스터" 키튼에 의해 만들어졌다. 유난히 영리한 '버스터'의 노고를 치하하는 극장의 웃음소리처럼 진솔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경우는 드물다.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댄 댈리, 제임스 러셀, 그리고 사거 미들리의 모사품들은 그의 작은 머리가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 것이 놀랍다는 것을 그에게 많은 박수를 보냈다. "버스터"는 가르침을 받은 듯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 자발적이고 정확해서 지능에서 그의 또래의 평균적인 퍼포머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가 중단과 강조의 가치뿐만 아니라 성숙기의 많은 퍼포머보다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와 미라 키튼도 훌륭한 일을 했다."
― 1904년 1월 30일 뉴욕 드라마틱 미러
― 1904년 1월 30일 뉴욕 드라마틱 미러
"버스터 . . .는 무지막지하게 무자비한 아버지에 의해 무대 위에서 내던져지고 그의 대우와 코미디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 1909년 1월 뉴욕 텔레그래프
― 1909년 1월 뉴욕 텔레그래프
"조 키튼이 '버스터'를 다루는 재주나 전문성은 연구된 '비즈니스'가 거의 믿을 수 없다. 이 소년은 더 성숙해진 세월의 거의 모든 코미디 곡예사가 이윤을 남기고 볼 수 있는 배경으로 뛰어들며 시도했던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 버라이어티, 1910년 3월 12일
― 버라이어티, 1910년 3월 12일
키튼은 당시 공연하는 다른 배우들의 모든 연기들을 관찰하며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것은 당시의 미국 극장이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것들을 흡수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키튼은 17년 동안 대부분 자신보다 어른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 동안 그는, 조, 미라, 그리고 동생 해리("징글스")와 누이 루이스와 함께 보드빌 서킷을 여행하며, 미국 최고의 연예인들과 어울렸다. 길에서 버스터는 아버지의 하우스 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노래, 춤, 피아노와 우쿨렐레, 저글링, 마술, 개그, 패러디 등을 배웠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연주자들 역시 그의 스승이었다. 빌 "보장글스" 로빈슨은 그가 다른 아이 셜리 템플에게 영화를 위해 춤을 가르치기 수십 년 전, 키튼에게 춤을 가르쳤다. 해리 후디니는 키튼에게 카드 트릭을 가르쳤다. 버스터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후디니의 행동에 매료되어, 후디니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종종 노력했고 심지어 위에서부터 후디니의 비밀을 지켜보았다. 그의 영화에서 버스터 키튼은 종종 어린 시절의 연극을 언급하거나 어렸을 때 배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이러한 어린 시절의 연극적 기억을 환기하곤 했다.
많은 보드빌 배우들이 공식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거나 전혀 받지 못한 것 처럼 키튼도 정식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키튼은 맨해튼에서 허드슨 강 건너편에 있는 뉴저지 주 저지 시티에서 공립학교를 하루도 채 안 다녔다. 그의 공식 교육은 점심시간에 갑자기 끝났는데, 그의 재치와 보드빌 개그가 다른 학생들과 특히 그들의 선생님에게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 증명된 후였다. 3학년짜리 교육밖에 받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버스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결국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개인지도교사와 여자 가정교사를 고용해야만 했다.
버스터 키튼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의 부모님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워낙 유명하지가 않아서 그의 부모님이 공연했을 때 공연자 이름도 틀렸을 정도였다. 키튼이 공식적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고 스타가 된 후, 이런 종류의 실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버스터 키튼의 성공으로 키튼 집안의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하지만 키튼을 무대에 계속 서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야만적인 무대 행위에서 아동 학대를 당하는 아들에 대해 변호해 달라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았다. "부모님이 미친 듯이 나를 이리저리 내던지고 있을 때, '어떻게 이 불쌍한 소년에게 이럴 수가 있지?'라고 말한 사람은 사라 베르나르였다. 모두들 그렇게 말했다."라고 버스터 키튼은 훗날 회고했다. 게리 학회는 일하는 아이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지역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는 경찰이 버스터가 학대당하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부모가 체포되었다. 키튼은 "우리는 격주로 체포되곤 했다. 한 번은 그들이 나를 뉴욕 시장, 그의 개인 사무실, 도시의 의사들과 함께 데려갔는데, 그들은 나에게 부러진 뼈와 타박상을 검사하기 위해 옷을 벗겼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시장은 나에게 일을 허락했다. 그 다음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나를 알바니로, 주지사에게 보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또 다른 보드빌 배우 윌 '뮤쉬' 롤스는 "... 버스터를 경찰서로 데려가서 작은 셔츠와 바지를 벗기고, 그들에게 그가 멍이 들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비록 멍이 없고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드빌 무대의 거친 성격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버스터 키튼이 어린 시절 내내 학대의 피해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억측은 하면 안되는게 당시의 게리 협회와 지역 관리들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자경하고 있는 가운데, 만약 아동 학대의 징후가 조금이라도 나타났다면 키튼 부부는 분명히 공연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때마다 키튼과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러한 루머들을 격렬하게 부인하면서 항상 무대 위와 오프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행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부부가 키튼을 혹사한 것은 분명하다. 어린 아이였던 키튼을 17년 이상 주 6일 동안 하루에 두 번(때로는 세 번) 무대에 서게 한 것은 말도 안되는 기록이다 .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버스터를 학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아버지 조 키튼은 아들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했다. 키튼의 가족은 버스터를 위한 작지만 완전한 기능을 갖춘 자동차와 온 가족을 위해 미시간주 무스케곤의 쾌적한 공동체에 있는 여름 별장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해졌다. 버스터의 동생 해리(징글스)의 이름을 따 '징글스 정글'로 불리는 호숫가의 집은 조가 찾아낸 배우들의 휴양지에 있었다. 일 년 중 몇 달 동안인 여름 휴가 기간에 버스터는 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자신의 또래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버스터가 인정받는 보드빌 스타로 자리매김했던 1917년이 되자 게리 협회의 고민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버스터의 아버지는 점차 위험하고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알려진 것은 2건의 현장 사고였다. 아버지 조는 무대 밖에서 가족과 버스터에게 위험해졌다. 디트로이트 뉴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버지 키튼이 현재 몸무게가 130파운드인 버스터를 던질 때, 버스터는 자신을 돌봐야 한다. 더군다나 패드도 안 쓰고." 기자들은 조의 증가하는 무대에서의 폭력에 호기심에 차서 19세의 버스터를 인터뷰하기 위해 계속 그들 주변을 맴돌았다. 버스터는 20일(현지시간) "우리가 행한 쇼의 재미있는 점은 내가 폭력을 받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쇼에서 아버지가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는 것이다. 그의 비밀은 다리를 절뚝거리며 발이나 손으로 넘어뜨리는 것이다. 요령이다. 내가 너무 어린 시절부터 무대에서 제대로 착지할 수 있는 것은 내겐 제2의 천성이다. 고양이처럼 착륙하지 못했다면 나는 무대에서 몇 번이나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우리 행위의 모방자들은 부상과 치료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버스터 키튼의 가족들은 조 키튼의 음주로 인해 버스터 키튼이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결국, 그와 그의 어머니가 충분히 재산을 갖춘 1917년 1월에 키튼은 가족 쇼에 출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또한 알코올 중독인 그의 아버지는 캘리포니아에 일시적으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 스타로서, 키튼은 1917년 슈베르트의 패싱 쇼를 통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주연으로 서게되였다.
2.2. 영화 배우 데뷔와 전성기
키튼은 새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1917년 당대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 아버클(1887~1933)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 데뷔한다. 로스코 아버클은 키스톤 영화사에서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롱 다리를 이용한 다리 찢기로 유명한 코미디언인 알 세인트 존(1892~1963)과 콤비로 활동하면서 미국 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 스승이기도 했던 인물이다.[9] 이 무렵의 아버클은 키스톤에서 독립하고 20세기 폭스사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자 유명 영화 제작자인 조셉 스켕크(Joseph M. Schenck)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코미디언 최초로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한 상태였는데 우연히 키튼의 슬랩스틱 연기를 보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키튼에게 자신과 영화를 같이 찍자고 러브콜을 보냈던 것이다. 키튼은 아버클과의 첫 미팅 때 아버클에게 영화 카메라 한 대를 빌려 달라고 부탁, 밤을 새워가면서 카메라의 작동 원리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등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는 같은 날 자신의 첫 영화 '도살자 소년'에 출연했는데, 리테이크 없이 촬영된 장면들이 주목할 만한 영화 데뷔작이었다. 이후 아버클과 키튼은 '재치있는 뚱보와 어벙한 홀쭉이' 기믹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어렸을 때 부터 항상 기기에 매료된 키튼은 영화 카메라를 궁극의 장난감으로 인정했다. 키튼은 영화 촬영 후 영화 카메라를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그는 카메라를 분해하고 카메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우기 위해 그것을 다시 조립했다. 단 세 편의 영화를 만든 후, 그는 아버클의 조감독이 되었고, 곧 아버클의 전체 메인 스태프가 되었다. 그에 따라 키튼의 연봉은 증가했다. 곧 키튼은 영화로 그가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가질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벌게 되었다. 키튼의 기여는 거의 즉각적으로 눈에 띄는데, 그의 섬세하고 세련된 유머는 아버클 스타일의 더 넓은 슬랩스틱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멘토로 여겨졌던 아버클과의 친밀한 우정은 1922년 아버클의 경력을 무너뜨리는 비극적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1933년 아버클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 아버클과 조셉 스켕크의 지원하에 키튼은 《바보》라는 정극 영화에 출연하며 단독 주연으로 데뷔한다. 때 마침 찰리 채플린이 퍼스트 네셔널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이적하면서 퍼스트 내셔널의 개인 스튜디오를 버스터 키튼에게 넘겨주었고 [10] 키튼은 스스로 감독 및 주연을 맡은 단편 《일주일》을 시작으로 감독 / 각본/ 주연을 도맡아하며 감각적인 카메라워크, 시대가 무색한 편집이 돋보이는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1957년 그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에디 클린은 "버스터 키튼보다 더 빨리 스타덤에 오른 영화배우는 없다. 그는 2년도 안 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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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버스턴 키튼 |
하지만 이와 반대로 아버클은 1921년, 자신이 주최한 파티에서 단역 여배우 버지니아 라페[11]가 사망하는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몰락하고 만다. 문제는 그녀의 지인이자 전과자였던 밤비나 델몬트라는 여성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아버클이 여배우를 죽였다' 라고 거짓 진술을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재판 이후, 할리우드의 뒷모습이라는 강연회를 열어 떼돈을 벌어들였고 아버클은 알코올 의존증에 걸려서 쓸쓸하게 최후를 맞았다. 아버클 사후, 델몬트가 거짓 진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 사법부는 공식적으로 아버클에게 사죄하였다. 덤으로 악녀임이 드러난 델몬트는 무시당했고 자업자득으로 이 여자도 몰락하여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죽게 된다. 키튼은 1922년 단편 <경찰>을 통해서 미국의 사법부를 풍자했을 정도로 아버클을 마지막까지 변호한 영화계 인물이었다.
한편, 키튼의 경력은 계속 치솟았다. 단독 주연으로 데뷔한지 3년밖에 되지않은 이 재능있는 신참은 당시 이미 1년에 두 편의 장편 영화, 즉 훗날까지 그의 명성을 영원히 보장할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비록, 키튼의 영화는 당시 그의 가장 가까운 라이벌인 찰리 채플린이나 해럴드 로이드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키튼은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하고 확립된 스타였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버스터 키튼은 19편의 단편 영화와 12개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두 이전의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전무후무하게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키튼은 무성 영화 작품의 주창자였다. 재능 있는 작가, 감독, 기술자, 연기자였던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당대의 선지자였다. 키튼의 무성 영화는 <카메라 맨>과 같은 친밀하고 개인적인 영화에서부터 <우리의 환대>와 같은 서사시, <플레이 하우스>와 <셜록 주니어> 같은 터무니없고 초현실적인 영화까지 다양하다. 어떤 영화들은 놀라운 특수효과에 의존하고, 어떤 영화들은 키튼의 놀라운 신체적 곡예에 의존하고, 어떤 영화들은 현대 세계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에 대한 키튼의 독특한 시각에 의존한다. '광풍에 쓸려 다니는 사람’, ‘넘어지는 주택’, '방해만 되는 아내의 도움’ 등은 키튼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이다.
비평가들은 심지어 단편 '이웃'이나 '내 아내와의 관계'와 같은 최악의 영화들 조차도 그 당시 영화인들이 만든 거의 모든 최고의 영화들보다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데 동의한다. 당시 키튼은 슬랩스틱 이상의 일을 했다. 그는 씁쓸한 위트와 풍자에 능숙했고, 숨막히는 곡예 능력, 블랙 코미디와 판타지 둘 다에 선천적이고 섬세한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를 겨누는 곳에서 키튼은 카메라를 그의 파트너로 삼고 그것으로 새로운 코믹 어휘를 개발했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시대를 초월한 자질을 지녔기 때문에 키튼은 아마도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이외의 유일한 무성 영화 아티스트로 남아 여전히 많은 인파를 끌어모으고 새로운 추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시대를 초월하고 재미있으며, 관객들의 감정과 지성을 모두 사로잡는다. 키튼의 등장인물들은 동정심이 많고, 그의 줄거리들은 한눈에 파악이 되며, 그의 묘기들은 경악할 만큼 대단하고, 그의 개그들은 영리하고 놀랍다.
1920년대, 버스터 키튼은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와 함께 코미디 스타로 대인기를 누렸는데, 채플린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로이드가 당시 절정에 다다른 영화라는 매체를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면 키튼은 자신의 뛰어난 스턴트 능력으로 코믹한 액션 연기 연출에 방점을 찍었다. 로저 이버트는 채플린, 키튼, 로이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채플린은 완벽주의자였고, 키튼은 꿈 꾸는 사람[12]이었으며, 로이드는 사업가였다.'
그의 화려한 스턴트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인데, 키튼은 거의 모든 스턴트 연기를 직접 해냈다. 게다가 본인의 스턴트는 물론이고 여차하면 다른 배우들의 스턴트까지 도맡아 했다고 한다. 그가 수년에 걸처서 보드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을 알고 있었고, 특히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신체적 성취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한 연기로 인하여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일렉트릭 하우스는 원래 1921년에 촬영이 시작된 영화였으나 촬영 도중 키튼의 발이 에스컬레이터에 끼여 짓눌러진 끝에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고[13] 1년 후가 되어서야 다시 제작을 속행할 수 있었다. 우리의 환대(1923년)에서 그는 강줄기에 빠져 죽을 뻔했다. 제너럴(1927년)에서 그는 대포로 의식을 잃었다.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년) 세트에서는 코뼈가 부러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부상은 셜록 주니어(1924년)의 한 장면을 찍으며 목이 골절됐다는 것이다. 해당 장면에서, 그는 기차 꼭대기를 따라 달리고 나서 물웅덩이를 잡는다. 선로에 물이 쏟아져 내리고 버스터는 잠시 가려진다. 그 순간, 그는 선로로 내려가는 물의 압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고, 거기서 물줄기는 그의 목을 쳤다. 다행스럽게도 이 영화를 자세히 보면, 버스터 키튼이 일어나서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고 이후 그는 두통에 시달렸고 몇 년이 지나서 다른 영화를 촬영하다가 왼쪽 갈비뼈가 부러진 후 엑스레이 검사를 받고 나서야 그는 무엇이 그에게 그동안 그 끔찍한 두통을 안겨주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버스터 키튼의 스핑크스 같은 얼굴은 이번주 캐피톨에서 '네비게이터'라고 불리는 영화 극장에서 보여질 예정인데, 거기서 그의 가장 거친 감정들이 오른쪽 눈썹을 이따금씩 위로 향하면서 반영된다. 이따금 키튼의 눈은 생명의 암시를 내비치지만 입술은 겨우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코미디언의 침착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만 보면 되었다. 웃음의 폭발로 입이 크게 벌어졌고, 즐거움으로 번뜩이는 눈... 키튼 씨는 대부분의 재미있는 장면들을 생각해낸 독창성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인정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 뉴욕 타임즈, 1924년 10월 13일
― 뉴욕 타임즈, 1924년 10월 13일
이렇듯, 스턴트 때문에 갖가지 부상들에 시달렸지만 키튼은 위대한 무표정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그다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영화 속 키튼도 항상 무표정이다. 정말 절대로 웃거나 울지 않는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기면 잠깐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올려보고는 그만. 위에서 말했던 아버클 시기 단편들에선 과장된 연기를 주로 선보였지만, 어린 시절 선보였던 보드빌 쇼에서 배운 "내가 무표정이면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웃는다" 라는 일종의 공식을 떠올려 단독 주연으로 데뷔할 때부터 무표정을 콘셉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무표정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 채플린만의 감성적이고 다채로운 얼굴 표정과 주로 비교된다.
이처럼 전성기를 구가하던 키튼은 1927년 개봉한 《제너럴》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제너럴》은 철도 덕후였던 키튼의 취향을 살려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제로 운용된 증기 기관차를 박살내고 500명의 엑스트라를 기용하는 등[14] 75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로 제작된 영화였지만 흥행은 제작비의 1/5인 15만 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너럴의 실패 이후 키튼은 그 동안 자신의 영화를 전담하던 제작자이자 키튼의 동서이기도 했던 조셉 스켕크와 불화가 심해지게 되고 결국 1928년 계약이 파기당한다. 제너럴은 키튼이 가장 아낀 영화 중 하나였고 이후 재평가를 받아서 현재는 가장 위대한 영화들 중 하나로 칭송 받고있다.[15]
2.3. 실패
In 1928, I made the worst mistake of my career. Against my better judgment I let Joe Schenck talk me into giving up my own studio to make pictures at the booming Metro-Goldwyn-Mayer lot in Culver City.
1928년 나는 내 생애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의 더 나았던 판단 대신, 나만의 스튜디오를 포기하고 컬버 시티의 붐비는 MGM 세트장에서 영화를 찍자는 조셉 스켕크의 말에 넘어가 버렸다. (버스터 키튼의 회고 중)[16]
1928년 나는 내 생애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나의 더 나았던 판단 대신, 나만의 스튜디오를 포기하고 컬버 시티의 붐비는 MGM 세트장에서 영화를 찍자는 조셉 스켕크의 말에 넘어가 버렸다. (버스터 키튼의 회고 중)[16]
이후 키튼은 동료 연예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17] 재기를 위해서 유성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정하였다. 1928년 키튼은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영화사였던 MGM과 전속 계약을 맺는다. 그러나 계약 이후 키튼의 인기는 급속도로 하락하다못해 오히려 곤두박질치게 된다.
첫 번째 문제는 목소리였다. 사실 키튼 본인은 다른 무성 영화 스타들과 달리 유성 영화의 도입을 반겼다. 언변도 유창하고, 자신의 목소리에 자신감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무대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금속 소리가 섞인 듯한 저음의 목소리였고, 이는 대중이 생각하던 "홀쭉한 스톤 페이스" 키튼과 어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이자 가장 큰 문제는 바로 MGM 그 자체었다. 전성기 시절, 즉 키튼이 직접 관여하던 시절 영화 속에 등장하는 키튼은 "실수도 자주 하지만 영민하고 성실한 청년"이었고, 그의 스턴트 액션 또한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개연성 있게 삽입되었다. 하지만 이런 키튼의 성격과 캐릭터는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MGM이라는 기업의 시스템과 맞지 않았다. MGM 시스템의 입장에서 키튼은 변칙적이고 비용이 많이 나가는 존재에 불과했다. 키튼은 예전처럼 자신이 직접 출연할 영화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감독하고, 주연을 맡는 것을 원했지만 MGM은 이를 거부하고, 기존 키튼의 캐릭터성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MGM 시절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키튼은 "그냥 다른 사람들의 계략에 빠지거나 본인의 실수로 바보짓을 하는" 상당히 1차원적 캐릭터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악화되어 가 1930년대부터 키튼은 단독 주연도 맡지 못하게 되고[18] 눈에 띄지도 못하는 무미건조한 캐릭터로 고정되어 버린다. 부적절한 소재와 형편없는 연출은 그때나 오늘날이나 좋은 평가를 못 받고 있지만, 대공황 동안 MGM은 키튼의 영화 덕분에 상당히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인간의 본성인지, 탐욕인지, 권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대기업들이 독립세력을 죽이려고 나섰다. 그들은 나와 상의도 없이 이야기와 자료를 고르고 있었고, 나는 내가 출연하는 영화에 대해 논쟁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MGM의 영화 스탭들과 영화에 대한 논쟁을 했지만 결국에는 영화가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 두게 되었다. 그들은 '이거 웃겨'라고 말했고, 나는 '형편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사실 논쟁해봤자 결론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밀어 붙였으니까. (키튼의 회고)
이 와중에 영화의 판권과 필름 원본 또한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어, 현재도 키튼의 영화는 무성 코미디 영화 삼인방 중 가장 복원하기 까다로운 케이스에 속한다. 화질도 썩 만족스럽지 않은 편.[19] 1930년대 초반은 키튼에게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일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사적인 부분에서도 끊임없이 잡음이 터져나왔다. 당시 키튼의 배우자였던 나탈리 탈마지(Natalie Talmage)는 키튼의 불륜 행각을 거론하며 이혼을 선언하였고[20] 이 이혼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도 전에 키튼은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며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몇 달 후인 1933년 또다시 비슷한 스캔들에 휘말리자 MGM은 지속적인 스캔들로 인한 신뢰 하락 문제와 이전부터 계속되던 키튼의 저항을 이유로 키튼과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21] 그렇게 실업자가 된 키튼은 이후 몇 년 간 배우가 아닌 코미디 작가로 근근히 살아가고 재정적 문제로 인해 파산한다.[22] 여기에 같은 해 가장 친한 친구였던 배우 아버클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하고, 두 명의 또다른 친구들의 죽음도 겪어야 했다.
안 그래도 지속적으로 술에 손을 대고 있던 키튼은 결국, 알코올 의존증 증세를 보이게 된다. 키튼의 주량은 약한 편이었는데, 2-3잔 정도만 술을 마셔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술자리에서 키튼은 주사로 즉흥적으로 위험한 코미디 곡예를 부렸고 다음날 술이 깬 후 자신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술을 끊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키튼은 새로 마련한 작은 집에 혼자 틀어박혀 며칠 동안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 며칠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손의 떨림을 멈추기 위해 흰손톱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피가 날 때까지 혀를 깨물고, 끔찍한 환각을 통해 살아가며, 그 혼란스러움을 혼자서 극복하려고 애썼다.
키튼의 이야기를 하면서 상당히 더 흥미로운 것은 키튼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러한 파괴의 심연에서 자신을 되살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놀라운 결심과 함께, 가족과 주치의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독특한 규율과 결단력을 사생활에 적용하면서 음주를 통제하게 되었다. 1934년 초, 키튼이 통제 불능의 음주를 억제하기 위해 요양소에 머무른다는 기사도 나왔다. 키튼은 스스로 병원에서 퇴원했고, 결국 회복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가 알콜 중독에 걸린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첫 결혼의 파탄과 MGM의 해고 때문이었고 키튼은 의지가 강했기에 술이 그를 망치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때 "할리우드의 가장 음울한 금주자"로 일컬어졌을만큼 알콜 중독이 심했던 키튼은 이후에도 몇 년에 한 번씩 계속해서 술을 마시곤 했는데, 때때로 그 결과로 고통을 받았다. 다만, 예전의 끔찍한 시간 동안 그랬던 것처럼 키튼은 두번 다시 음주로 그의 삶의 패턴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1940년 키튼은 평생의 반려자가 된 댄서 엘라노어 노리스와 결혼한다.
MGM에서의 실패 몇 년 후 키튼의 경력은 항상 전기 작가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왔다. 필사적으로 전기의 해피엔딩을 제공하기를 원하는 전기 작가들은 일반적으로 키튼의 다음 15년을 건너뛰고, 1949년 그의 재기 시절로 바로 뛰어들어 1966년 그의 마지막 시간까지를 그리며 전기를 집필한다. 하지만 그 실종된 세월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면, 키튼은 그 기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경력과 심지어 창의력마저 잃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틀렸다. 그의 실종된 해라고 불리는 1933년부터 1949년까지의 세월에 대한 진실은 그가 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끊임없이 일하면서 유럽의 몇몇 영화뿐만 아니라 Education과 Columbia를 위한 수많은 단편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키튼은 무대 활동도 병행했는데 그의 가장 큰 무대 커리어는 종종 유럽에서 이루어졌지만, 때때로 미국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의 1년 동안 브로드웨이 투어 회사인 Once Upon a Mattress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키튼은 좀처럼 다른 공연자들에게 감동을 주거나 관객들의 환호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다만, 파리 시르케 메드라노에서 키튼과 함께 일했던 빌리 벡은 "쇼에 나오는 광대들은 매일 밤 입구, 그늘에 모여 그를 지켜보곤 했다. 나와 다른 광대들은 놀라워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라며 키튼의 연기를 칭찬했다.
2.4. 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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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은 1940년에 세번째 부인인 엘리노어 노리스와 결혼한 후, 다시 생활에 안정을 찾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49년부터 다시 꾸준히 여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MGM 시절처럼 자신의 캐릭터가 파괴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스톤페이스를 몰락한 무성영화 배우라는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에 접목시키면서 제2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역시 무성영화 시절에는 감독으로 유명했다가, 유성영화의 시대가 오면서 배우로 활약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 함께 출연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0년 작품 <선셋 대로>가 이러한 키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슈트로하임은 무성영화 때 대단히 잘 나가던 감독이지만[23] 지금은 배우의 뒷바라지를 하고 사는 집사, 버스터 키튼은 한때 잘나갔던 무성영화 배우의 현역 시절 친구로 카드 놀이 하는 장면에서 나온다.[24] 비록 버스터 키튼은 별다른 대사 없이 잠깐 얼굴만 스쳐가는 카메오 수준의 분량이라[25]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러려니 지나쳤지만, 키튼을 아는 올드팬들은 이를 보며 굉장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1951년부터 TV방송 시대가 시작되자 버스터 키튼은 자신이 아직 완전히 몰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TV에 적극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한다. 키튼의 슬랩스틱은 당시 복고 열풍이 불고 있던 대중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키튼은 다시 주목 받는다. 직후인 1952년, 찰리 채플린의 자전적 영화 <라임라이트>에서 키튼은 채플린의 보조 피아노 연주자 역할을 맡았다. 채플린은 키튼을 위해서인지, 완벽한 영화를 위해서인지 해당 장면을 편집할 때 본인의 파트는 줄였지만 키튼의 파트는 전부 남겨두었다고 한다.
이후, 키튼은 그가 출연했던 영화들을 연이어 재개봉시키고 광고도 숱하게 출연하여 안정적인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1957년에는 키튼의 전기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1959년 미국 아카데미에서는 키튼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면서 명예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이 시기 오히려 채플린이 조금 올드한 영화들을 찍어내며 관객들에게 외면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성공은 대단하다.
이 와중에 사뮈엘 베케트와 알란 슈나이더, 보리스 카우프만이랑 같이 《필름(Film, 1965)》이라는 이색적인 단편 영화를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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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은 키튼 |
그 후 1962년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1965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 초대되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스티븐 손드하임 원작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로마에서 일어난 기묘한 사건(A Funny Thing Happened on the Way to the Forum, 1966)》인데, 이 역시 호평 일색.
3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영광에 마침내 한을 풀었던 것일까? 1966년 2월 1일,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이 위대한 배우는 폐암으로 눈을 감는다.
박수 소리가 멋지군요.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리고 뒤늦게 천재를 알아 본 신세대 영화 팬들의 추모가 이어진다. 이를테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 에서 주인공들이 키튼과 채플린 중 누가 더 위대한가로 다투는 장면이 있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시도들은 영화 학자와 영화 감독들에 의해 후일 재조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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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작 중 하나인 레일로더[26] |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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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의 스턴트 모음 |
무성 영화 광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버스터 키튼이다. 그가 찍은 영화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가 어떻게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더더욱 그기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해럴드 로이드도 그만큼 우리를 웃게 했고, 찰리 채플린은 우리를 더 깊이 감동시켰지만, 버스터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헤밍웨이가 말했던 것처럼 용기를 정의한다: "압박을 받는 품위". 엄청난 신체적 위험을 안고 있는 스턴트와 코미디가 결합한 영화에서 버스터 키튼은 우주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용감한 정신을 연기했고,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 로저 이버트#
― 로저 이버트#
그의 영화는 무성 코미디 중에서 가장 현대적입니다. 왜냐하면 해럴드 로이드의 필수 캐릭터인 대학 광장이 거의 사라졌고, 채플린은 항상 특이하고 빅토리아 시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키튼이 만들어 낸 특징들 중 하나를 보세요.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현재에 착안된 것처럼 보입니다.
― 피터 보그다노비치[27] (미국 영화감독)#
― 피터 보그다노비치[27] (미국 영화감독)#
100여 년 전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버스턴 키튼 영화는 지금 봐도 즐겁고, 무모하고, 놀랍고, 아름답다고 평가 받는다. 버스터 키튼은 영화라는 예술 앞에서 순수했다. 그와 자주 비교되는 찰리 채플린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면, 키튼은 오로지 영화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키튼의 작품은 순도 높은 경탄을 자아낸다.
키튼은 슬랩스틱의 대가였다. 다만, 목숨을 건 슬랩스틱이었다.[28] 성룡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이자 롤모델답게 키튼의 스턴트는 지금 봐도 대단하다. 작고 왜소한 남자가 달리는 자동차를 한 손으로 잡아채 매달리거나, 몸에 끈 하나를 묶고 폭포 속으로 뛰어든다. 대역도, 당연히 컴퓨터 그래픽도 없었다. 키튼은 온전히 제 몸으로 기적 같은 연기를 해냈다. 게다가 그는 무모한 스턴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주위에서 만류할 정도로 위험한 곡예 연기를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해냈다. [29] 그의 최고작이자 대표작중 하나인 `제너럴`(1927)은 블록버스터 규모로 만들어진 열차 액션 영화다. 기관사 키튼은 적을 향해 대포를 쏘고, 철로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고, 열차 칸과 칸 사이를 뛰어다니고, 기차에서 내려 가까스로 선로를 변경하고, 엔진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장작을 패 연료로 쓴다. 이 모든 일을 쉬지 않고 해내는 키튼의 몸은 경이롭다. 어떤 장면은 단 1초만 합이 안 맞아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만큼 위험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튼은 트레이드마크인 무표정을 유지한다. 작은 키에 비해 얼굴이 커 무표정한 그의 연기가 잘 보였다. 이 덕분에 ‘위대한 무표정’라는 유명한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스턴트가 키튼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뛰어난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턴트 연기에 필요한 힘과 기술을 체득했고 1910년대 후반부터는 보드빌 연기자 생활을 포기하고 영화 제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스스로 카메라 워크와 스토리 구성을 연구하며 자신의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유려한 카메라워크, 우아한 편집 리듬, 빈틈없는 공간 활용은 키튼이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어느 정도로 꿰뚫고 있었는지 가늠하게 한다. `제너럴`에서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차인 키튼은 시무룩하게 기관차 바퀴 빗장에 앉는다. 잠시 후 기차는 출발하지만, 키튼은 깨닫지 못한다. 둥글고 큰 기차바퀴가 돌아가고, 빗장에 앉은 키튼의 몸도 크게 원을 그리며 기차와 함께 오른쪽으로 나아간다. 기차는 캄캄한 터널 안으로 들어가고 화면은 페이드아웃 된다. 이 짧은 장면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언어로 풀어 묘사하는 건 어렵고, 의미도 없다. 오직 영화가 영화로서만 선사할 수 있는 황홀경이다. 키튼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대신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키튼은 단 한 컷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짜인 구도로 가득하다. 화면 속 기하학적 미감을 음미하는 건 키튼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다. 이 재미는 오늘날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만끽할 수 있는 그것과 비슷하다.[30] 그래서 시네필들 사이에선 채플린보다 키튼을 조금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31] 그건 키튼의 영화가 조금 더 `영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에 흠뻑 빠진 키튼답게 영화 그 자체가 주제인 작품도 있다. `셜록 2세`(1924)에서 키튼은 시골 극장 영사 기사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차인 그는 설상가상 시계 도둑으로 몰려 체면까지 구긴다. 그는 풀이 죽어 영사실로 돌아온다. 거기에서 까무룩 잠들고 꿈을 꾼다. 꿈속에서 키튼은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 안으로 쏙 들어간다. 현실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한마디도 못한 키튼은 영화(꿈) 안에선 유능한 탐정이다. 키튼은 어려운 문제들을 척척 풀어내며 여자의 사랑을 얻는다. 달콤했던 꿈도 잠시. 키튼은 잠에서(영화에서) 깬다. 다시 남루한 현실로 돌아왔다.
`셜록 주니어`도 다른 작품처럼 서사는 단순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쉬운 영화는 아니다. 극중극 형태인 `셜록 주니어`는 관객에게 `영화라는 건 뭘까요`라는 질문을 안긴다. 꿈은 꿈일 뿐이듯, 영화도 단지 영화일 뿐일까. `셜록 2세`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놓인 간극을 탐구하는 영화다. `셜록 주니어`처럼 영화를 주제로 한 영화, 이른바 `메타시네마(meta-cinema)`는 거장 감독이라면 한번쯤 도전하는 장르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1985), 마틴 스코세이지의 `휴고`(2011)가 그런 영화다. 영화를 위한 영화 대부분은 `셜록 주니어` 그늘 아래 있다.
또한 키튼의 영화들 중 대부분은 패러디적인 전제로 시작됐다. 시민전쟁 로맨스인 <장군 The General> (1927), 로미오와 줄리엣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우리의 환대 Our Hospitality>(1923), 탐정 셜록 홈즈 이야기인 <셜록 2세 Shelock, Jr.>(1924), 미시시피 보트 경주인 <증기선의 빌 2세 Steamboat Bill, Jr.>(1928), 그리고 유쾌한 서부극 <서부로 Go West>(1925). 이러한 영화들은 항상 관습적으로 숙녀의 사랑에 대한 욕구를 만족하려는 키튼의 캐릭터에 기초를 두고 있다.
1923년과 1929년 사이에 키튼은 1년에 두편이라는 규칙적인 스케줄에 따라 12편의 극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항상 초가을이면 월드 시리즈를 보기 위해 동부로 여행을 떠났다. 키튼의 이러한 규칙적 패턴은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나타낸다. 그는 예술적인 걸작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루에 두번 연기하는 보드빌처럼 날마다의 오락을 재빠르게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규칙적인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작품은 위대한 코미디 걸작들이다.
4.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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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가가 계속 올라가는 영화 감독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현 시대에 봐도 대단함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키튼의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6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영화계에서 채플린보다 키튼을 더 높이 사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현재에도 채플린보다 키튼의 영화를 더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들도 많다. 영국의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에서 매 10년 마다 선정하는 세계 10대 영화 리스트에서 꾸준히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티 라이트> 는 72년과 82년도에 제외되었는데, 바로 키튼의 <제너럴> 때문이었다. 2012년에도 제너럴이 35위를 차지하며 우위를 점했다. 2007년 AFI 선정 100대 영화에서도 제너럴이 18위를 기록하며 신규 진입하기도 했다.[32] 또 그의 영화 중 6편이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또는 미적으로 유의미하다"고 판단되어 미국 국립 영화 등록부에 영구 보존 영화로 선정되었다. 1999년 미국 AFI가 선정한 클래식 할리우드의 가장 위대한 배우 21위, 1996년에는 미국 최대의 대중문화 잡지 중 하나인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7위를 기록하기도 했다.[33]#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에세이 '필름 아르테(Film-Arte)'에서 키튼의 작품들을 '반 예술적' 영화 제작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그의 작품을 '순수한 시'라고 불렀다. 1925년 달리는 키튼의 트레이드마크인 보어터 모자를 무릎에 놓고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앉아있는 포즈로 코미디언의 이미지를 담은 콜라주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침묵한 광대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버스터 키튼이다. 해럴드 로이드도 그만큼 우리를 웃게 했고, 찰리 채플린은 우리를 더 깊이 감동시켰지만, 버스터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했다. 영화 감독 오슨 웰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대. 최고의 예술가, 그리고 나는 영화에 찍힌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평했고 키튼의 제너럴을 "아마도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평했다. 참고로 오슨 웰스는 찰리 채플린을 굉장히 싫어했다.[34] 모던 타임즈는 과대평가 됐다고 까기도 했다.#[35]
영화 감독 멜 브룩스는 버스터 키튼이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나는 영화제작자로서 나에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재들이 이런 놀라운 일들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날 믿게 만들었어."라고 말했다.
버스터 키튼은 성룡이 가장 존경하고 영감을 많이 받은 배우이자 감독이다. 아직도 성룡에게 가장 존경하는 영화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0.5초만에 버스터 키튼이라 말할 정도. 성룡은 80년대 할리우드 진출 당시, 제작환경에 적응을 못해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배틀 크리크> 를 찍을 당시 스텝으로부터 "당신은 버스터 키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참고해 봐라"라는 조언을 들었다. 성룡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의 아크로바틱한 연기와 동작, 홍콩으로 컴백한 뒤에 감독한 영화들에서 키튼의 영향력이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프로젝트 A2의 화판이 쓰러지는 장면은 완벽한 키튼의 오마주.
오늘날의 그의 영화는 계속해서 오마주된다. 대표적으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캐러비안의 해적 2: 망자의 함>(2006) 초반부에는 원주민들에게 붙잡힌 잭 스패로우 선장이 장대에 묶인 채 슬랩스틱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이 씬은 명백하게 버스터 키튼의 1922년작 <흰둥이 Paleface>에 대한 오마주다.[36] 존 윅 시리즈에서 키튼의 작품에 오마주를 많이 한다. 2편 존 윅: 리로드, 3편 존 윅 3: 파라벨룸이 시작할 때 벽에 영사되는 영상은 버스터 키튼의 영화들이다. 2편에 나온 영화는 "Sherlcok Jr."#, 3편에 나온 영화는 "Cops"와 "The Goat"이다.[37]## 그리고 3편 마지막 장면은 The Three Ages (1923)의 낙하 장면을 오마주 한 것이다.# 이런 꾸준한 오마주와 장면 삽입은 스턴트계의 최고 전설인 키튼에 대한 헌사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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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여러 영화에 이런 식으로 종종 오마주 된다.[38] |
5. 관련 말들
5.1. 그에 대한 말들
사랑스러운 사람, 최고의 예술가, 그리고 저는 사진 찍혔던 사람들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깨닫기 시작한 것처럼,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광대이기도 합니다.
― 오슨 웰스#
― 오슨 웰스#
그는 영화계의 거장 중 한 명입니다. 엔터테이너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으로서, 그리고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많은 영화들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현대적인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그저 훌륭한 코미디언만이 아닙니다. 그는 무성 시대의 가장 위대한 미국 영화 감독일뿐 아니라 영화 산업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코미디 배우입니다. 그는 또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며 프리츠 랑,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장 비고, 장 르누아르,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하워드 혹스, 오슨 웰스, 막스 오퓔스, 잉마르 베리만, 그리고 한 줌의 영화 판테온과 함께 가장 높은 레벨에 속합니다. 저는 그를 신에 비유했지만, 그 후 버스터에게 비교의 혜택을 주었습니다. 결국, 신들과 달리, 그리고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감독들과는 달리, 버스터는 우리를 웃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웃어요. 계속 웃어요.#
― 제프 앤드류[39] (영국 영화 비평가)
그는 그저 훌륭한 코미디언만이 아닙니다. 그는 무성 시대의 가장 위대한 미국 영화 감독일뿐 아니라 영화 산업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코미디 배우입니다. 그는 또한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영화 감독 중 한 명이며 프리츠 랑,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장 비고, 장 르누아르,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하워드 혹스, 오슨 웰스, 막스 오퓔스, 잉마르 베리만, 그리고 한 줌의 영화 판테온과 함께 가장 높은 레벨에 속합니다. 저는 그를 신에 비유했지만, 그 후 버스터에게 비교의 혜택을 주었습니다. 결국, 신들과 달리, 그리고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감독들과는 달리, 버스터는 우리를 웃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웃어요. 계속 웃어요.#
― 제프 앤드류[39] (영국 영화 비평가)
한 번도 웃지 않은 사람은, 지금까지 발명된 가장 터무니없이 기발하고 시각적으로 만족감을 주는 희극 중 몇몇을 통해 마치 은판 사진법으로 찍은 사진처럼 고요하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버스터 키튼이었다..
― 제임스 에이지[40] (미국 소설가)#
― 제임스 에이지[40] (미국 소설가)#
그의 아름답고 컴팩트한 몸을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순열에서 피루엣[41]이나 프레첼처럼 지켜봐라. 또는 더욱 우아하게, 모든 것이 미쳐버릴 때 편안히 서있다. 그의 마음이 버스터의 격렬한 변덕을 이해하고, 견뎌내고, 기적적으로, 태즈메니아 늑대의 세계를 사색하는 것을 지켜봐라. 그의 카메라를 보고 그의 사진을 찍는다. (키튼은 그의 모든 최고의 영화를 감독하거나 감독했다); 그것은 유리잔에 포착된 스타만큼 멋지다... 그 매체는 아직 걸음마 단계였다; 만화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이미지를 비웃게 하는 기술을 개척하고 있었다. 키튼은 모든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 리처드 콜리스[42](미국 영화 비평가)#
― 리처드 콜리스[42](미국 영화 비평가)#
버스터 키튼은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 특수효과처럼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키튼이 움직이는 남북전쟁 열차를 타고 달리는 것은 키튼이 하는 일이 현실이기 때문에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헬리콥터에서 브레이킹 애로우에서 과속 기관차로 뛰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흥분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후세를 위해 그의 위업을 포착하고 보존한다. 부서진 화살에서 우리는 결코 슬레이터(혹은 스턴트맨)가 헬리콥터에서 열차로 뛰어드는 것을 보지 못한다.
― 안토니오 푸치넬리(이탈리아 영화 비평가)#
― 안토니오 푸치넬리(이탈리아 영화 비평가)#
스필버그도 루카스도 디즈니도 버스터 키튼 앞에서는 어림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성룡을 만났을 때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 누구세요?" 그러니까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버스터 키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만일 버스터 키튼 영화를 찍을 수 있다라면 나는 감독을 안해도 좋다 라고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룡이 뛰어내리고 다치고 하는 것도 사실은 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 정신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버스터 키튼은 이 당시에는 SF 촬영이라는 것이 전무했었고 그야말로 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되었는데, 아예 목숨을 걸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의 고난도 액션을 보여줍니다.
― 정성일#
― 정성일#
코미디가 반드시 대화만은 아닙니다. 버스터 키튼을 생각해보세요. 포커페이스와 그의 주변은 온통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때로는 타이밍이나 적절한 리듬에 대한 문제입니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 클린트 이스트우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액션 배우는 성룡도 아니고, 주성치도 아니다. 브루스 윌리스도, 류승완도 아니다. 바로 버스터 키튼이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입이 쩍 벌어진다. 재미있어서 벌어지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액션에 또 한번 벌어지고, 독특한 상상력 때문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의 작품들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 김중혁#
― 김중혁#
5.2. 그가 한 말들
평범한 코미디언은 재미있는 것을 한다. 훌륭한 코미디언은 평범한 것을 재미있게 한다.#
스튜디오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 카메라를 갈기갈기 분해해서 그 기계의 구조를 조사해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촬영한 필름들이 편집실에 들어가는지, 그 안에서 뭘 하는지, 어떻게 영사하는지, 어떻게 각각의 촬영분들을 모아서 한 영화로 짜깁는지, 어떻게 일치하게 만드는지를 알아야 했다. 내가 영화에서 흥미를 느낀 건 바로 그런 기술적인 면이었다. 영화를 채우는 내용은 제일 후순위에 불과했다. 영화 내용쯤이야 세트장에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2분 안에 만들어낼 수 있다. 평생 해온게 그 일이니까.#
어쨌든 나는 연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행하면서 그 재료들은 모두 주입된다. 내 영화는 어떤 종류의 대본이나 서면 지시 없이 만들어진다.#
침묵은 신들의 몫이다. 오직 원숭이들만 재잘거린다.#
얼마 전 한 친구가 배우로서 평생을 보내면서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너무 많아서 잠시 그 생각을 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처럼, 나는 행복한 군중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내 인생에서 지루한 순간도 거의 없었고 슬프고 패배한 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결코 내가 살아온 험난하고 암울한 세월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삶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라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노력하지 않은 것을 공짜로 얻으려 하지 않았다. 나에게 나빴던 시기는 너무 적어서, 고작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즐기는 한심한 불평쟁이들이나 되어야 투덜거릴 정도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도 슬랩슈즈와 납작한 모자에서 천재가 될 수 없다.#
나는 내 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찰리 채플린과 나는 누가 더 적은 자막으로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얼굴은 뚱한 얼굴, 죽은 냄비, 얼어붙은 얼굴, 대석면,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비극적인 가면"이라고 불려왔다. 반면 친절한 비평가인 고 제임스 에이지가 내 얼굴을 "거의 미국 초기 원형으로서 링컨의 얼굴과 함께 거의 잊혀지지 않고, 잘생기고, 거의 아름다웠다"고 묘사했다. 나는 분명히 기뻤지만, 이 위대한 철도 분쇄기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없다.#
할리우드가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도시인가? 글쎄, 그럴 수도 있지. 뉴욕도 그럴 수 있다. 어느날 밤 여기서 브로드웨이 스타가 될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길거리에서 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들은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 그것은 할리우드에서도 일어난다.#
슬픈 장면을 찍어야겠어. 왜 난 살면서 아무도 울게 하지 않았던 걸까!#
6. 필모그래피
로저 이버트는 1920년대에 키튼이 만든 30편의 단·장편 영화를 모두 하나의 작품이라고 평했고 이 시기에 만든 모든 작품을 위대한 영화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그만큼 이 기간동안 나온 키튼의 작품은 영화사에 남을 위대한 작품들 중 하나다.6.1. 장편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
감독 | 제작 | 각본 | 주연 | |||
1923 | 세 가지 시대 Three Ages | O | O | O | O | |
우리의 환대[43] Our Hospitality | O[44] | O | 이동진의 올타임 베스트 10. | |||
1924 |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 O | O | O | 현대에도 많은 지지를 받는 화려한 영화적 기교가 돋보이는 작품.[45] 1991년 미 국립영화등기부에 등재된 영화. | |
항해자[46] The Navigator | O[47] | O | O | O | ||
1925 | 일곱 번의 기회 Seven Chances | O | O | O | ||
서부로 가다 Go West | O | O | O | O | ||
1926 | 싸움왕 버틀러 Battling Butler | O | O | O | ||
1927 | 제너럴[48] The General | O | O | O | O | 당시 거대자본을 들여 만든 블록버스터격 영화. 첫 개봉 당시엔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재평가를 받아 키튼의 명작으로 칭송받는다. 1989년 미 국립영화등기부에 등재된 영화. |
전문학교[49] College | O | O | ||||
1928 | 스팀보트 빌 주니어 Steamboat Bill, Jr. | O | O | 2016년 미 국립영화등기부에 등재된 영화. | ||
카메라맨 The Cameraman | O[50] | O | O | 키튼의 전성기를 마감하는 영화. MGM영화사와 계약한 후 처음으로 찍은 영화이다. | ||
1929 | 홧김에 한 결혼 Spite Marriage | O[51] | O | 키튼이 감독한 마지막 장편. |
6.2. 단편
연도 | 제목 | 역할 | |||
감독 | 제작 | 각본 | 출연 | ||
1917.04.23 | The Butcher Boy[52] | O | |||
1917.06.25 | The Rough House | O[53] | O | O | |
1917.08.20 | His Wedding Night | O | |||
1917.09.30 | Oh Doctor! | O | |||
1917.10.29 | Coney Island | O | |||
1918.01.20 | Out West | O | |||
1918.03.18 | The Bell Boy | O | |||
1918.05.13 | Moonshine | O | |||
1918.07.16 | Good Night, Nurse! | O | |||
1918.09.15 | The Cook | O | |||
1919.09.07 | Back Stage | O | |||
1919.10.26 | The Hayseed | O | |||
1920.01.11 | The Garage | O | |||
1920.09.01 | 일주일[54] One Week | O | O | O | |
1920.10.27 | 13번 죄수 Convict 13 | O | O | O | |
1920.12.22 | 이웃 Neighbors | O | O | O | |
허수아비 The Scarecrow | O | O | O | ||
1921.02.10 | 귀신들린 집 The Haunted House | O | O | O | |
1921.03.14 | 불운 Hard Luck | O | O | O | |
1921.04.12 | 비밀 수신호 The High Sign | O | O | O | |
1921.05.18 | 재수없는 놈 The Goat | O | O | O | |
1921.10.06 | 극장 The Playhouse | O | O | O | |
1921.10.06 | 보트 The Boat | O | O | O | |
1922.01 | 창백한 얼굴 The Paleface | O | O | O | |
1922.03 | 경찰 Cops | O | O | O | |
1922.05 | 내 아내와의 관계 My Wife's Relations | O | O | O | |
1922.07.21 | 대장장이 The Blacksmith | O | O | O | |
1922.08.28 | 북극 The Frozen North | O | O | O | |
1922.10 | 일렉트릭 하우스[55] The Electric House | O | O | O | |
1922.11 | 백일몽 Day Dreams | O | O | O | |
1923.01.22 | 기구 조종사 The Balloonatic | O | O | O | |
1923.03 | 사랑의 보금자리 The Love Nest | O | O | O |
7. 여담
- 어린 시절의 꿈이 엔지니어였을 정도로 기계에 늘 관심이 많았다.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도 영화 내용엔 별 관심이 없었고 영화 카메라의 구조, 필름, 영사기 등 장치들의 원리, 편집 방식 등 극히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면에 호기심과 흥미를 느껴서 영화에 매료됐다고 한다. 그의 이런 기계덕후적인 성향은 일주일, 대장장이, 일렉트릭 하우스, 기구 조종사, 셜록 주니어, 항해자, 제너럴, 스팀보트 빌 주니어, 카메라맨 등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배, 기차, 자동차, 엘리베이터, 카메라, 조립식 주택 등 크고 작은 현대의 기계들이 그의 영화에서 배우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감을 담당한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만약 연예인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필히 엔지니어나 발명가가 되었을 거라고 한다.
- 야구하는 걸 좋아했다. 키튼은 영화 촬영 중간에 스탭들과 야구를 하곤 했다. 게다가, 1930년대에 매년 열리는 시나이산 병원의 할리우드 자선 야구 경기를 위해, 그는 항상 코미디언들의 팀을 이끌었다. 키튼은 종종 야구장에서 그의 작가들과 함께 코미디 사업을 발전시켰다. 워낙 야구광이라 이런 전설도 있다. 그가 배우들을 고용할 때 사용했던 지원서에 대한 질문 중 두 가지는 "당신은 좋은 배우입니까?"와 "당신은 훌륭한 야구 선수입니까?"였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예"라고 대답한 사람은 키튼과 함께 일했다.
- 골초였다. 평생 담배를 많이 피운 그는 한 달간 기침과 싸움 끝에 1966년 1월 첫째 주 동안 폐암 진단을 받았지만, 의사들이 이 소식이 건강에 해로울 것을 우려해 키튼은 자신이 아프거나 암에 걸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키튼은 자신이 심각한 기관지염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활동적이고 거의 죽을 때까지 걸어다녔다. 키튼은 아내와 카드놀이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에서 잠든 채로 조용히 사망했다.
- 작가주의 비평가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는 1968년 감독들의 등급을 매겼는데 버스터 키튼은 최고 등급인 만신전에 넣었다.[56] 자세한 내용은 작가주의 문서 참조.
- 1992년 10월 4일 국제 버스터 키튼 협회는 키튼의 생일에 설립되었다. 키튼의 삶과 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더 많이 끌기 위해 헌신하는 이 협회에는 배우, 프로듀서, 작가, 예술가, 그래픽 노블 작가, 음악가, 디자이너 등 텔레비전과 영화계의 많은 개인들과 단순히 버스터 키튼의 마법을 동경하는 팬들이 포함되어 있다.
- 1994년 4월 27일 발행된 무성 영화의 스타를 기념하는 미국 기념 우표 10장 중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캐리커쳐리스트 알 허쉬펠트가 디자인한 이 우표 세트는 또한 루돌프 발렌티노, 클라라 보우, 찰리 채플린, 론 채플린, 존 길버트, 자스 피츠, 해롤드 로이드, 테다 바라, 키스톤 홉스를 그려 그들을 기렸다.
- 그의 어머니는 영국계/독일계였고,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아일랜드계다.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독일에서 귀를 다쳤다. 이 이후로 영구적으로 청력을 손상시키는 귀 감염을 겪었다.
- 그는 자신의 캐릭터가 가능한 한 신체적으로 불리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의 영화에 나오는 그의 적수를 키 크고 무거운 배우들로 캐스팅했다. 비슷하게 키가 작은 찰리 채플린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했다.
- 그의 별명인 버스터의 탄생에 관한 많은 전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이름을 의학 쇼 그룹 "캐슬린 마로넨"에서 조 키튼(버스터 키튼의 아버지)의 파트너였던 전설적인 해리 후디니가 어린 버스터가 아무 부상 없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본 후 기인했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버스터의 사고를 보고 그 이름을 잉태한 것이 조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조 키튼이 보드빌에서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그가 3살이었을 때 그는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옷깃에 끼었고 그것은 으스러져서 첫 손가락 마디가 절단되어야만 했다. 이 부상은 그의 단편 영화 'The Garage'(1920)에서 키튼이 로스코 '뚱뚱한' 아버클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고정시킨 채 얼굴에 묻은 기름을 왼손으로 닦는 장면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해롤드 로이드 역시 영화 촬영 중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된 바 있다.
- 2012년 8회째 개최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두번째 날 저녁에 진행되는 행사에 키튼의 작품 <카메라맨> 이 상영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 모 영화 평론가는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의 대조적 이미지에 대해 이런 분석을 내렸다. "채플린은 사랑스런 방랑자(the tramp)이지만, 사회에 대해 냉소적이다. 대부분의 채플린 영화들은 그가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방랑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반면, 키튼는 무표정한 얼굴(stone face)이지만,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 사회에 편입되는 것으로 끝난다." 실제로 키튼도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채플린의 방랑자는 귀여웠지만 범죄를 저지를 기회가 온다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언제나 정직했죠.' 무성 영화 시대의 두 거장 버스터 키튼 VS 찰리 채플린
- 네이버 스페셜 리포트에서 더 많은 사진과 함께 키튼의 인생을 훑어볼 수 있었지만, 네이버 매거진 서비스가 2018년 07월 18일부로 종료되어 더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본 항목과 살짝 다른데, 참고 자료가 조금 다른 모양. 위대한 무표정 버스터 키튼
8. 외부 링크
[1] 1896년 출생, 1969년 사망[2] 1918년 출생, 1998년 사망[3] 로저 이버트는 키튼이 만든 모든 영화(The Films of Buster Keaton)를 <위대한 영화> 목록에 올렸다.[4] 버스터 키튼을 다룬 다큐멘터리 중 최고라고 평가 받는다. 2편, 3편[5] 후에 그의 아버지 조 키튼은 키튼의 감독작에 종종 조/단역을 맡았다.[6] 생후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았을 때, 키튼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공연하는 동안 무대 밖에서 의상 트렁크에 실수로 갇힌 후 질식할 뻔했는데, 이것은 그의 부모들로 하여금 그들이 살고 있는 하숙집에 그를 남겨두기 시작하도록 하는 사건이었다. 또 그가 세 살이 되던 어느 날 버스터는 오른쪽 검지손가락을 옷깃에 끼었고 그것은 으스러져서 첫 손가락 마디가 절단되어야만 했다. 그 후, 그의 부모님은 그가 무대에서 더 안전할 것이라고 결정했다.[7] 버스터 브라운, 버스터 크랩베, 버스터 포인더 모두 해리 후디니의 간접적인 이름 때문일 것이다.[8] 어떠한 키튼 연구자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되지 않은 날이라고 말한다.[9] 채플린의 모자와 통이 넓은 바지는 아버클의 의상을 빌려 입은 것이었다.[10] 라이벌 이미지랑 달리 버스터 키튼과 채플린은 친구 사이었다.[11] 그녀는 평소에 술에 약했던 체질인 데다가, 난소에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나서 쓰러져 사망했다. 공식 사인은 방광파열과 그에 따른 복막염.[12] 긍정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다. 로저 이버트도 다른 평론가들처럼 채플린과 키튼을 무성영화시대 최고의 인물로 꼽았다.[13] 그가 회복하는 동안, 힘든 일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명령으로, 키튼은 일렉트릭 하우스의 촬영을 잠시 미루고 특수 효과에 대한 놀라운 실험인 'The Playhouse'를 만들었다.[14]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키튼이 실제로 오리건 주의 현역 군인들을 기용했다는 점이다. [15] 제너럴은 미 국립영화등기부에 최초로 등재된 영화 중 하나다.[16] 컬버 시티는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도시로 할리우드에서 남서쪽으로 7마일 떨어져 있으며, MGM의 대규모 세트장이 위치해 있다. 조셉 스켕크는 당시 MGM의 중역이자 유명 영화 기획자였다. Schenck라는 성씨를 한국에서는 흔히 "솅크" 혹은 "쉔크"라고 표기하나,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일단 미국에서는 "스켕크"(/ˈskɛŋk/)로 읽는다. 독일식으로 읽는다면 솅크가 맞긴 한데, 일단 스켕크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기에 스켕크로 표기한다.[17] 해럴드 로이드 및 찰리 채플린 모두 키튼에게 MGM과 계약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키튼의 회고에 따르면, 채플린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전속 계약은 하지 마. 전속 계약은 오히려 네 신세를 망치고 네 판단을 뒤틀어 버릴 거야. 넌 네가 알고 있던 게 옳다고 주장하다 지쳐버릴 걸."이라며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키튼보다 재정적으로 더 안전했던 채플린과 로이드조차도 유성영화가 대세가 된 20년대 후반 이후에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18] 지미 듀란테와 공동 주연을 맡게 된다.[19] 그래도 2015년 이탈리아 쪽에서 주선해 4k DCP로 깔끔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자세한건 다음 링크 참조.. 다만 판권이 거의 퍼블릭 도메인이나 다름 없어서 복원하는 데가 상술한 곳 말고도 또 있다. 참조.[20] 나탈리 탈미지는 부부의 두번째 자녀인 로버트 키튼을 낳은 후 버스터 키튼에게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각방을 쓰기 시작했고 버스터 키튼은 여러 여배우들과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한다.[21] 키튼은 위에서 언급된 MGM 시스템으로 인하여 스태프들과 작업하는 걸 지속적으로 거부해 왔다. 다만 그의 저항은 헛되지 않아서, 이후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한 베티 데이비스 등 훗날 대규모 영화사와 계약하게 되는 다른 배우들의 사정은 나아지게 되었다.[22] 당시 미 국세청은 키튼에게 미납된 세금 2만 8천 달러를 납부하라며 고소하기까지 하였다.[23] 작중 여주인공이 자신의 예전 연기를 보여준다며 남주인공에게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슈트로하임이 연출한 작품이다.[24] 키튼과 여주인공인 글로리아 스완슨을 포함하여 그 장면에서 카드 놀이를 하는 배우 모두가 왕년에 무성영화계를 주름잡던 배우들이다.[25] 그래도 예우 차원에 한 컷 정도 정면 샷이 나오긴 한다.[26]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다. 저 작은 빨간 상자 안에 대관절 뭐가 들어있는지가 포인트.[27] 70년대 초 미국영화계의 ‘신동들’ 중에 가장 유명한 감독이었다. 오슨 웰스와 절친이기도 하다.[28]
영화 스팀 보트 빌 주니어의 한 장면.[29]
영화 스팀 보트 빌 주니어의 한 장면. 이 장면을 찍을 때 스탭들 중 일부는 키튼이 이 장면을 찍다가 사고로 죽을 것이라 확신하고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서 촬영장을 빠져 나왔다고 전해진다.[30] 실제로 앤더슨 감독은 키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31] 사실 둘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키튼과 채플린이 추구하던 작품 경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과냐 오렌지냐 같은 취향 차이의 문제다.[32] 1997년 순위에는 포함되지도 않았다.[33] 그의 앞에 있는 감독들은 1위 앨프리드 히치콕, 2위 오슨 웰스, 3위 존 포드, 4위 하워드 혹스, 5위 마틴 스코세이지, 6위 구로사와 아키라다.[34] 원래 모두까기 인형이기도 했다. 키튼은 그가 좋아한 몇안되는 영화감독이다. 그런데 오슨 웰스는 본인이 꼽은 Top 10 영화 리스트에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를 넣었으며 정작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한 편도 안 넣었다.[35] 또 키튼과 해롤드 로이드와는 달리 채플린은 모든 개그를 직접 짠 것이 아니라 "6명의 개그맨"이 짜줬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재능없는 인간이라고 까기도 했다.[36] 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감독한 고어 버빈스키는 키튼의 팬이기도 하다. <론 레인저>(2013) 속의 기차 추격씬 역시 키튼의 1926년작 <제너럴>을 상당 부분 오마주하고 있다.[37] 2분 25초 쯤부터 오른쪽 전광판에 등장한다.[38] 밑의 오마주된 영화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이다.[39] 영국영화협회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칼럼에서 키튼의 제너럴을 사이트 앤 사운드 영화 선정 최고의 1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주장했다.[40] 퓰리쳐상 수상자. 대표작은 가족의 죽음이 있다.[41] 특히 발레에서 한쪽 발로 서서 빠르게 도는 것[42] 타임지 소속 기자.[43] 로미오와 줄리엣의 버스터 키튼식 재해석.[44] 존 G. 블리스톤과 공동 감독.[45] 제너럴보다 더 높게 평가받기도 한다.[46] 우연히 한 여객선에 갇힌 남녀 주인공을 다룬 작품. 키튼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로 배 한척을 사들여 영화 세트장으로 삼았다. 이러한 교통수단 덕후로서의 모습은 이후 제너럴로 이어진다. 키튼은 해당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자이자 키튼의 동서인 조셉 스켕크가 할당해 준 제작비를 초과해서 사용하였고 그 결과 조셉 스켕크와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불화 끝에 스켕크는 1928년 키튼과의 계약을 파기했다.)[47] 도널드 크리스프와 공동 감독.(크리스프는 영화의 드라마씬을 감독했다.)[48] 열차 위의 추격전을 다룬 영화.[49] 해럴드 로이드의 The Freshman과 함께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일반적으로는 The Freshman이 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관점에 따라 이 영화를 더 높게 쳐주는 평자도 있다.[50] 에드워드 세드윅과 공동 감독.[51] 에드워드 세드윅과 공동 감독.[52] 키튼의 영화 데뷔작.[53] 로스코 아버클과 공동 감독.[54] 키튼의 첫 감독 영화. 정말 편리해보이는 조립식 집을 선보였다.[55] 와이어 등을 사용하여 기계 장치들로 자동화된 집을 구현한 영화. 본래는 1921년에 기획된 영화였지만 키튼이 자동 계단씬을 찍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영화 촬영이 미뤄졌다고 한다.[56] 여기에 들어간 감독은 찰리 채플린, 오슨 웰스, 프리츠 랑,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등이 있다.
영화 스팀 보트 빌 주니어의 한 장면.[29]
영화 스팀 보트 빌 주니어의 한 장면. 이 장면을 찍을 때 스탭들 중 일부는 키튼이 이 장면을 찍다가 사고로 죽을 것이라 확신하고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서 촬영장을 빠져 나왔다고 전해진다.[30] 실제로 앤더슨 감독은 키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31] 사실 둘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키튼과 채플린이 추구하던 작품 경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과냐 오렌지냐 같은 취향 차이의 문제다.[32] 1997년 순위에는 포함되지도 않았다.[33] 그의 앞에 있는 감독들은 1위 앨프리드 히치콕, 2위 오슨 웰스, 3위 존 포드, 4위 하워드 혹스, 5위 마틴 스코세이지, 6위 구로사와 아키라다.[34] 원래 모두까기 인형이기도 했다. 키튼은 그가 좋아한 몇안되는 영화감독이다. 그런데 오슨 웰스는 본인이 꼽은 Top 10 영화 리스트에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를 넣었으며 정작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한 편도 안 넣었다.[35] 또 키튼과 해롤드 로이드와는 달리 채플린은 모든 개그를 직접 짠 것이 아니라 "6명의 개그맨"이 짜줬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재능없는 인간이라고 까기도 했다.[36] 캐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감독한 고어 버빈스키는 키튼의 팬이기도 하다. <론 레인저>(2013) 속의 기차 추격씬 역시 키튼의 1926년작 <제너럴>을 상당 부분 오마주하고 있다.[37] 2분 25초 쯤부터 오른쪽 전광판에 등장한다.[38] 밑의 오마주된 영화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이다.[39] 영국영화협회 멤버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칼럼에서 키튼의 제너럴을 사이트 앤 사운드 영화 선정 최고의 1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주장했다.[40] 퓰리쳐상 수상자. 대표작은 가족의 죽음이 있다.[41] 특히 발레에서 한쪽 발로 서서 빠르게 도는 것[42] 타임지 소속 기자.[43] 로미오와 줄리엣의 버스터 키튼식 재해석.[44] 존 G. 블리스톤과 공동 감독.[45] 제너럴보다 더 높게 평가받기도 한다.[46] 우연히 한 여객선에 갇힌 남녀 주인공을 다룬 작품. 키튼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실제로 배 한척을 사들여 영화 세트장으로 삼았다. 이러한 교통수단 덕후로서의 모습은 이후 제너럴로 이어진다. 키튼은 해당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자이자 키튼의 동서인 조셉 스켕크가 할당해 준 제작비를 초과해서 사용하였고 그 결과 조셉 스켕크와 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불화 끝에 스켕크는 1928년 키튼과의 계약을 파기했다.)[47] 도널드 크리스프와 공동 감독.(크리스프는 영화의 드라마씬을 감독했다.)[48] 열차 위의 추격전을 다룬 영화.[49] 해럴드 로이드의 The Freshman과 함께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일반적으로는 The Freshman이 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관점에 따라 이 영화를 더 높게 쳐주는 평자도 있다.[50] 에드워드 세드윅과 공동 감독.[51] 에드워드 세드윅과 공동 감독.[52] 키튼의 영화 데뷔작.[53] 로스코 아버클과 공동 감독.[54] 키튼의 첫 감독 영화. 정말 편리해보이는 조립식 집을 선보였다.[55] 와이어 등을 사용하여 기계 장치들로 자동화된 집을 구현한 영화. 본래는 1921년에 기획된 영화였지만 키튼이 자동 계단씬을 찍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영화 촬영이 미뤄졌다고 한다.[56] 여기에 들어간 감독은 찰리 채플린, 오슨 웰스, 프리츠 랑,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