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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4:25:06

진 폴 게티

진 폴 게티
Jean Paul Getty
파일:JP_Getty,1944.jpg
출생 1892년 12월 1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사망 1976년 6월 6일 (83세)
영국 잉글랜드 서리주 길퍼드 서튼 플레이스
직업 기업인
모교 UC 버클리
옥스퍼드 대학교
배우자 지네트 드몬트 (1923년 ~ 1926년; 이혼)
알렌 애쉬비 (1926년 ~ 1928년; 이혼)
아돌핀 헬름레 (1928년 ~ 1932년; 이혼)
앤 로크 (1932년 ~ 1936년; 이혼)
테디 린치 (1939년 ~ 1958년; 이혼)
자녀 5명

1. 개요2. 생애3. 일화
3.1. 손자 납치 사건3.2. 악명높은 자린고비
4. 여담5.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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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석유 재벌 기업인이자 게티 재단의 설립자이다.

2. 생애

1892년 미니애폴리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 때에 미국으로 이민온 북아일랜드 출신의 스코틀랜드 장로회를 믿던 집안이었다. 부모대에 감리회를 믿기 시작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고 철저히 금주를 했으며 게티도 엄한 감리회의 교육 방식대로 자라났다.[1]

1903년경에 변호사로 성공해 보험업으로 재산을 쌓은 그의 아버지 조지 게티가 석유붐을 맞아 오클라호마주로 이사를 갔고 진 폴 게티도 UC 버클리 대학을 졸업하고 일찍 아버지를 도와 사업에 참여하여 23세에 100만 달러 이상을 번 부호로 성장했다. 어학에 재능이 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그리스어에 능통했고 아랍어라틴어도 익혔다. 그리고 인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고전 예술을 좋아했다. 그는 석유사업에 인생을 걸어 게티석유를 설립하고 사업을 성장시켰다. 대공황 때는 전 직원을 해고시켰다가 싸게 재고용하기도 했다. 한편, 독일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치와 친하게 지내기도 해 FBI의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는 중동 투자를 위해 아랍어 공부도 열심히 했고, 중동 왕족들이나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게티는 1949년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에게 석유가 나오지 않는 곳의 황량한 땅을 천만 달러나 현금으로 주고 개발권을 얻었다. 3년 동안이나 석유가 나오지 않아 실패한 투자라고 사람들이 말했으나 4년째에 석유가 터져 나오면서 1년에 1600만 배럴을 생산했고 진 폴 게티는 막대한 부자가 됐다. 사우디 아라비아 외에도 이란과 쿠웨이트의 유전 개발권도 얻었으며, 중동전쟁 때는 석유가격이 폭등하여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 수 있었다. 중동 석유 사업의 성공 이후 부동산 투자와 호텔 사업에도 투자한 결과, 1956년경 포춘지에서 세계제일의 부자로 선정했다.

그는 억만장자 임에도 구두쇠 기질 탓에 이렇다할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그가 축적한 재산을 아끼지 않은 유일한 분야는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게티는 미술품을 애호하여 게티 재단을 설립하고 미술관, 박물관 등을 운영했다. 그리고 그리스-로마 양식의 건축물에도 관심이 많아 거대한 그리스-로마풍의 게티 빌라를 지어 각종 유물들을 보관했다. 그리고 그가 축적한 재산과 수집한 미술품들은 게티 사후 설립된 게티 재단으로 이관되었다. 게티 재단은 게티의 컬랙션과 유산을 바탕으로 LA에 미술관 게티 센터와 게티 빌라를 설립하고, 운영 중에 있다. 미술관은 주차 요금은 따로 있지만 입장료는 무료이다.

1976년 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재산은 사망 당시 60억 달러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270억 달러(약 31조 원)에 육박한다. 사후 유족에 의해 재산 분쟁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재산이 상속된 재단 싸움으로 또 진통을 겪었다. 게티석유는 유족들에 의해 텍사코(쉐브론 계열)에 매각되었고, 2012년에 파산한 이래 지금은 이름만 남은 상황이다.

3. 일화

3.1. 손자 납치 사건

1973년 당시 16세의 손자 존 폴 게티 3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악명 높은 마피아 은드랑게타에 납치되는 일이 발생했다. 1700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납치범들에게 맞서 처음엔 진 폴 게티는 손자가 할아버지한테서 돈을 뜯어내려는 자작극인 줄 알고 미온적으로 반응했다. 또 만약 테러범, 납치범한테 돈을 주면 그들의 기를 살려줘 더 많은 유괴 피해와 나머지 13명의 손자들도 납치될 우려가 있다고 하여 제대로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2번째 요구사항을 쓴 편지를 또 보냈으나 하필이면 이탈리아 우편 파업 때문에 제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은드랑게타가 귀를 잘라서 보내고 몸값을 320만 달러로 줄였다. 진 폴 게티는 협상에 응하면서도 끝끝내 몸값을 깎아내고 300만 달러까지 깎았다. 그 돈도 소득공제 한도인 220만 달러만 주고 나머지는 아들 존 폴 게티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주었다.[2] 이 때문에 여론으로부터 손자 다친 것보다 돈이 중요한 미친 짠돌이라며 욕을 들었고, 납치범들조차도 게티에게 미친놈이라고 욕했을 정도였다. 납치범들도 뒷세계에서 쌓은 경력이 있음에도 그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물론 납치범들 입장에서야 돈을 거하게 뜯을 줄 알았는데 원하는 수준의 돈을 못 뜯어서 그런 것도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손자 존 폴 게티 3세는 다행히 목숨을 건져 풀려나와 치료와 귀 재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문과 납치 후유증으로 알코올, 마약 중독에 빠져 부작용으로 1981년 뇌경색이 와서 폐인이 돼버렸다. 장애를 얻어 목소리도 안 나오고 시력도 상실되었으며 필사의 재활 끝에 어느 정도 회복은 됐으나 결국 건강을 해쳐 2011년 54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자식으로 로스트 하이웨이에 출연했던 배우 발타자 게티가 있다.[3]

납치범 일당들 9명은 대대적인 수사로 체포되었으나 그중 2명만 유죄 판결이 나서 감옥으로 갔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몸값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3.2. 악명높은 자린고비

진 폴 게티는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했고 지독한 자린고비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4. 여담

5. 어록

돈을 셀 수 있으면, 당신은 부자가 아니오.
급격한 변화의 시기에 경험은 최악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은행에 100달러를 빚졌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입니다. 은행에 1억 달러를 빚졌다면 그건 은행의 문제입니다.
성공을 위한 공식은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하고, 석유를 뿌리는 것입니다.
석유는 야생동물과 같다. 누구든 잡기만 하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팔 때 나는 산다.
나는 실패하는 것이 싫다. 나는 내 결혼의 실패를 후회하고 미워한다. 나는 단 한 번의 지속적인 결혼생활을 위해 기꺼이 수백만 달러를 기부할 것이다.[4]


[1]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이 감리회의 절약정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면에 엄한 감리회의 엄숙주의에 반발로 색(色)에 집착했다는 말도 있다.[2] 아들 존 폴 게티가 돈이 없는 이유는 아들을 로마 지사에 일하게 하고 월급만 줬기 때문이다.[3] 참고로 존 폴 게티 3세도 연기 경력이 있다. 라울 루이즈의 1981년작 영역(The Territory)과 빔 벤더스사물의 상태에 출연했다. 참고로 사물의 상태는 빔 벤더스가 영역 촬영 도중 곤란해진 루이즈를 도와주러 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영역과 제작진, 출연진이 겹친다. 존 폴 게티 3세도 그중 하나[4] 계속된 이혼과 결혼생활 실패를 자조하면서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