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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20:38:06

밀비우스 다리 전투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내란·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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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비우스 다리 전투 콘스탄티누스 1세 vs 막센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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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두스 전투 파일:east_roman_mon_256.png 테오도시우스 1세 vs 파일:western_roman_mon_256.png 에우게니우스 }}}}}}}}}
밀비우스 다리 전투
파일:밀비우스 줄리오 로마노.jpg
밀비우스 다리 전투 프레스코화. 줄리오 로마노 作, 1520~1524년
시기
312년 10월 28일
장소
로마 테베레 강의 밀비우스 다리
원인
사두정치의 모순
교전국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로마 제국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로마 제국
지휘관 콘스탄티누스 1세 막센티우스
병력
50,000여명 75,000 명 ~ 120,000 명
피해
300 ~1,100 명 40,000 ~ 90,000 명
결과
콘스탄티누스 1세 군의 대승리
영향
콘스탄티누스의 서방 통일

1. 소개2. 다리3. 기적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영어 :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파일:external/thekingdomiswithinyou.com/constantines-vision.jpg

사두정치 체제의 내재적인 모순으로 황제 간의 협동이 안 되자 그걸 다시 정리하기 위해 벌어진 로마 내전 중의 전투였다. 로마 제국의 공동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312년 10월 28일 경쟁자인 막센티우스와 로마 시 근교[1]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막센티우스가 여기서 죽게 되어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방을 통일했다.

막센티우스는 기병 전력에서 앞선 콘스탄티누스군의 기병이 우회 돌격해오는 것을 막고, 콘스탄티누스군 보병대가 축차 투입될 수밖에 없는 좁은 다리라는 병목지점을 보병 전투력에서는 로마군 최강이었던 프라이토리아니 전력으로 방어하려고 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직접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다리로 정면 돌격하여 막센티우스군의 방어선을 정면에서 분쇄하고, 혼란에 빠진 막센티우스군은 좁은 다리로 몰렸다가 배수진처럼 몰살당했다. 막센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는데,[2] 공교롭게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가족은 불쌍한 것이 부(막시미아누스, 처형), 자(막센티우스,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전사), 녀(파우스타, 후계 구도와 궁정 음모로 처형)가 전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 막센티우스는 죽은 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승리를 기리는 로마 입성 행진에서 시신이 창에 꿰였고, 경고의 의미로 북아프리카로 보내지는 등 험한 꼴을 당했다.

로마 근위대, 즉 프라이토리아니마지막 불꽃을 산화한 전투이기도 하다. 기록에 따르면 막센티우스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했다고 한다. 전투력의 쇠퇴와는 무관하게 마지막까지 근위대라는 자부심은 있었던 것이다. 이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공식 해채했고, 잔여 생존자들은 게르마니아 국경 지대의 야전 부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로 소속이 바뀌었다.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퇴각 중에 공병 대원들이 다리의 너트와 볼트를 뽑는 타이밍을 잘못 잡아서 큰 추락사고가 났고, 거기에 황제 막센티우스도 휩쓸려 죽었다고 한다.

2. 다리

파일:밀비우스 르브룅.png
샤를 르 브룅의 미완성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제라르 오드랑의 판화, 1666년

해당 전투가 벌어진 다리는 오늘날의 그 위치에도 존재한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Ponte Milvio'. 위키 백과에 따르면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3. 기적

사실 전투 자체의 의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위 그림처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는 전승으로 유명하다.
파일:콘스탄티누스1세의꿈.jpg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두고 십자가 꿈을 꾸는 중세의 기록화.[4]

이 일화에 따르면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 날 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5]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6][7]
라는 글자를 보게 되었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라바룸' 군기를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전》(De Vita Constantini)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후에 17세기 계몽 시기에 이르러 이 일화의 사실성에 대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따져 보아도, 같은 사람(에우세비우스)이 저것보다 이전인 325년에 썼던 《교회사》에서는,[8]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고 한다. 있었으면 안 썼을 리가 없을 텐데... 오히려 《교회사》에서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 황제 본인과 그 자식들이 그려진 깃발이었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몇 만 명의 병사들도 그렇고.[9] 그냥 그만큼 당시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승리에 대해 간절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10]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로마 시 북쪽에 있고, 다리 밑의 강은 다름 아닌 테베레 강이다.[2] 따지자면 퇴각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는데, 그런 강물과 다리 자체가 전장이었으므로 사고사라기보다는 전사로 보는 것이 더 맞다. 바다나 강에서 선박끼리 해전을 치르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사고사가 아니라 전사로 보는 것과 같다.[3]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근처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영주이기도 했는데, 통일된다면 그 땅을 다 뱉어내야 한다. (뱉어내고 이탈리아에 완전히 소속시키자 항의의 표시로 바티칸 포로 상태로 있다가, 무솔리니가 이런 난국을 해결하고 국민과 교회의 지지를 얻고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결과 지금 바티칸이 탄생했다.) 옛날 서로마 말기 ~ 롬바르드 때와 달리 교황청/교황직 자체의 존립이 위험할 가능성은 전혀 없고 이탈리아 통일 당시에도 없었지만, 그때의 동로마-프랑크-롬바르드 사이에서 신변의 안전을 꾀했던 시절은 트라우마로 남았기에 로마 시 말고도 주변의 완충지역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 결과가 교황령이었다. 그래서 치열하게 지키고자 했고(이런 거 다 빼도 있는 땅 뺏기고 싶겠는가, 교황도 사람인데) 그래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제휴해 프랑스군을 파견받아 안전보장을 받았다. 로마 시내 주둔군만으로 안 될 것 같자 프랑스군이 북쪽에서 증원을 오는 것이었다.[4]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카롤루스풍으로 그려져 있다. 의외로 제관과 복식 등의 고증은 봐줄 만한 수준이다.[5]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의 십자가가 아니고, '그리스도'(ΧΡΙΣΤΟΣ)의 그리스어 첫 두 글자가 겹쳐진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크리스토그램 참조[6] In hoc signo vinces : 영어로는 In this sign, (you will or you shall) conquer[7] 정작 저 사진 속의 글자는 라틴어도, 영어도 아닌 그리스어다.(...)[8] 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전》은 당연히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붕어 이후에 쓴 것이다.[9] 《비잔티움 연대기》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병력만 보병 90,000명+기병 8,000명으로 98,000명이었다고 한다.[10] 위의 에우세비우스는 이에 대해 자신의 미래가 걸렸다는 엄청난 중압감 속에서 신적인 계시를 달라고 열렬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냥 뻥인 것은 알지만 기독교 공인도 해주시고 했으니 좋게 좋게 써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