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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23:46:38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고대 로마의 내란·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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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부인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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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영어: Antony's Civil War[1]
파일:악티움 해전.jpg
시기 기원전 32년 ~ 기원전 30년
장소 발칸 반도, 에게 해, 이집트
원인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옥타비아누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의 대립
교전 세력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파일:rome_antony_mon_256.png 안토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휘관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옥타비아누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롤리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마르쿠스 루리우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파일:rome_octavian_mon_256.png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가이우스 소시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마르쿠스 인스테이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퀸투스 델리우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일:rome_antony_mon_256.png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
파일:attachment/mon_256_3.png 클레오파트라 7세
병력 7만 5천 로마 군단병
로마 전선 및 수송선 450척
10만 로마 군단병
2만 이집트 병력
로마-이집트 전선 및 수송선 600척
피해 악티움 해전의 전사자 2,500명. 그 외의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음.악티움 해전의 전사자 5,000명, 함선 250척 나포. 그외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병력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
결과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영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
로마 제국의 시작.

1. 개요2. 배경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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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2년 ~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서방 로마군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방 로마군-클레오파트라 7세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연합군이 맞붙은 내전.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 세계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고, 로마 공화국은 이 시점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로마 제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 배경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이래, 카이사르파는 '해방자'를 자처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토벌하고자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주도하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 연합군을 섬멸한 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수비를 담당했던 레피두스가 시칠리아에서 할거하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내통했다고 고발하여 재판에 회부했다가, 나중에 무혐의로 처리한 뒤 아프리카 속주만 맡기고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양분했다.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시리아 등 지중해 동방 전역을 차지했으며, 무티나 내전 승리 이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장발의 갈리아'[2]와 갈리아 키살피나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특히 안토니우스파인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갈리아에서 11개 군단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확보했으며, 공동 관리 구역으로 지정된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별다른 경력이나 전공을 세운 적이 없었으면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상속인으로 지명된 것을 근거삼아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자처하는 옥타비아누스를 경원시하면서, 자신이야말로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이며 로마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카이사르 고참병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수많은 유력 인사를 등에 업고 있는 안토니우스를 꺾지 못한다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하여 양자는 서로를 헐뜯었고, 지지자들은 상대 세력의 명예를 실추시킬 음모를 끊임없이 꾸몄다. 급기야 기원전 4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내전을 벌이면서, 양 세력간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뜻밖에도 동생과 아내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고, 갈리아 키살피나에 주둔하고 있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이탈리아 남부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등 안토니우스파 장군들은 매우 느리고 불분명하게 움직였다[3]. 안토니우스가 소극적으로 나온 까닭은 불명확하나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는 옥타비아누스가 퇴역병들이 정착할 토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탈리아 평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 몰수하는 정책을 단행하여 민심이 들끓자, 그를 폭군으로 매도하며 민중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안토니우스 역시 옥타비아누스처럼 군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병사들이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설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또한 많은 병사가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의 양자로 추앙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면전을 벌인다면 군심이 대거 이탈할 수도 있었다.

결국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휘하 장군들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옥타비아누스와 맞서다가 패배했고, 이탈리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여기에 갈리아를 다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파 총독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대를 전부 넘기면서, 갈리아 역시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 기원전 40년 5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생과 아내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이집트에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남동부의 항구도시인 브룬디시움으로 쳐들어가 포위했다.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이 때를 틈타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하여 투리와 코센티아를 포위 공격했고, 휘하 함대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점령했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안토니우스의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와 만나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율리아는 곧장 안토니우스에게 섹스투스의 의사를 전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이 카이사르를 추종하던 이들인데 그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친다면 반발이 심할 것이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브룬디시움으로 육군을 이끌고 오면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양측의 부하들이 싸우기를 거부하자[4] 두 사람은 화해를 모색했고 그해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을 체결해 공식적으로 화해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는 공인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옥타비아누스에 맞섰다가 망명한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협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육군을 시칠리아로 철수시켰다. 그 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시칠리아의 지배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미세눔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섹스투스는 육상 및 해상 전투를 중단하고 해상 봉쇄를 해제하는 대가로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및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소유하기로 했으며, 섹스투스에게 망명했던 이들은 카이사르의 살인자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권리를 얻었다.

섹스투스가 삼두와 화해하고 평화가 성립되게 한 것에 수많은 이가 고마워했지만, 측근들은 그가 대의를 저버렸다고 여기고 등을 돌렸다. 또한, 삼두의 숙청을 피해 섹스투스에게 도망쳤던 많은 사람들이 사면받아 로마로 돌아갔다.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다스리던 해방노예 출신 제독 메노도루스는 섹스투스의 세력이 약해지자 그에게 반기를 들 마음을 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감지하고 메노도루스를 회유했고, 그는 결국 기원전 38년 초 옥타비아누스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넘겨줬다. 이에 위협을 느낀 데다, 안토니우스가 "펠로폰네소스 주민들이 내게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기다리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내주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자, 섹스투스는 해상 봉쇄를 재개하고 해적 행위를 다시 벌였다. 이에 사람들은 섹스투스가 자신들을 속였다며 분노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강도 여러 명을 잡아 고문한 뒤 섹스투스가 자기들을 보내 시민의 재산을 강탈하려 했다고 자백하게 했다. 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섹스투스와의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라벤나에서 차출한 함대를 브룬디시움에 집결시키고, 갈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테네에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전갈을 보내 섹스투스를 함께 치자고 권유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미세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계속 밀어붙였다. 그러나 기원전 38년에 단행한 시칠리아 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군이 연전연패하자, 시민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에서 활약하고 있던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불러들여 폭동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기원전 37년 봄 안토니우스와 타렌툼에서 만나 새로운 협약을 체결했다.삼두의 임기를 5년 연장하기로 했으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130척의 함선을 보내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필요한 2만 병력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함대 지원에 힘입어 기원전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시칠리아를 탈환했다. 그 직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자신이 육지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물리쳤으니 시칠리아를 자기 관할로 삼겠다고 요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홀로 레피두스의 군영에 찾아왔고, 레피두스의 병사들은 대부분 그의 편을 들었다. 결국 레피두스는 항복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새로운 내전을 유발하려 했다고 비난하며 기존에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속주의 지배권마저 박탈했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 히스파니아, 갈리아, 아프리카를 포함한 서방 로마 일대의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그리스, 아시아 속주, 시리아, 이집트의 지배자 안토니우스는 10만 대군을 일으켜 파르티아를 공격했다. 만약 이 원정이 성공했다면, 그는 불후의 명성을 얻고 로마 최강의 권력자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35,000명에 달하는 로마군 및 동맹군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여기에 유능한 부관이었던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 플라비우스 갈루스 등이 전사했다. 안토니우스가 생존자들을 안티오키아에 집결시켰을 때, 아내 소 옥타비아가 병사들에게 줄 돈, 보급품, 옷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또한 2,000명의 완전무장한 군대를 추가로 데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약속한 2만 명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또 너무 늦었다.[5]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시칠리아 내전을 치르는 그를 돕기 위해 파견한 120척 중 85척만 돌려보냈다.

안토니우스는 이에 분노했고, 소 옥타비아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가지고 온 건 그대로 보내되 당신은 로마로 돌아가라"고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푹 빠진 나머지 헌신적인 아내 소 옥타비아를 박대한다고 비난하며, 누나가 받은 모욕에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소 옥타비아가 자신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자 결국 취소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원정 도중에 배신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원전 34년 봄에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15일만에 제압하고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체포해 알렉산드리아로 압송했다. 그 후 메디아로 진군하여 파르티아에 반기를 든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딸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약혼시켰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귀환한 뒤 기원전 34년 가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로마의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통인 개선식을 남의 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거행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로마인들에게 불쾌감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중 앞에서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와 키프로스의 왕중의 여왕으로, 카이사리온과 함께 공동으로 통치한다.
2.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메디아, 파르티아, 아르메니아를 통치한다.
3.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 페니키아, 킬리키아를 통치한다.
4.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통치한다.
5. 카이사리온은 신격화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며, 이집트의 왕중의 왕이다.

이 선언은 로마인들에게 극심한 충격과 분노를 야기했다. 우선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위인데,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다른 나라나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의미였고, 이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또한 동방 영토는 원래부터 그에게 주어진 땅이 아니라 로마의 역대 명장과 병사들이 피땀을 흘러가며 쟁취한 것이었으며, 로마에게 있어 막대한 세입과 곡물이 들어오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 영토를 클레오파트라와 자식들에게 분할하겠다는 것은 로마 시민들이 절대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파르티아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이전의 여론전에서는 안토니우스 파가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가 기원전 37년 타렌툼 조약에 따라 120척의 함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줘서 시칠리아 내전의 승리에 기여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2만 군단병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고작 2천 명만 보내는 등 약속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3두 중 한 명인 레피두스가 가지고 있던 아프리카 속주를 빼앗고 그를 일개 시민으로 살게 만든 점 역시 안토니우스 파에게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될만한 소재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은 정치적 명분에서 불리한 처지였던 옥타비아누스가 역공을 취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는 안토니우스를 음해하는 갖가지 소문을 퍼트렸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괴상한 복장을 하고 술에 취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정잡배들과 함께 희곡을 즐긴다는 설, 클레오파트라가 마약이나 마술로 남자를 최면에 빠뜨리는 요술이 뛰어난 마녀라는 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밤새도록 난잡한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여기에 그들의 음란한 성관계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서 로마 시민들에게 은밀하게 배포하기도 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은 이에 대항하여 옥타비아누스의 문란한 사생활을 꼬집는 갖가지 소문을 유포시켰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처녀나 기혼 여성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납치해 노예를 다루듯이 옷을 벗겨서 몸매를 감정한 후, 그에게 갖다 바치는 심복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둘째 아내였던 스크리보니아가 쫓겨난 이유도 그녀가 남편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질투심을 보였기 때문이며, 그가 리비아 드루실라를 셋째 아내로 성급하게 맞아들인 이유도 결혼식 이전에 이미 은밀한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자식인 대 율리아오드뤼사이 왕국코티스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는 소문도 퍼트렸으며, 심지어 옥타비아누스가 어렸을 때 카이사르에게 몸을 판 매춘 소년이었다는 소문까지 퍼트렸다.[6]

이렇듯 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과 뒤이은 악색선전으로 안토니우스의 인기는 크게 떨어졌지만, 안토니우스파였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이우스 소시우스가 기원전 32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영향력은 아직 강력했다. 두 집정관은 안토니우스의 분할령을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성토하라는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서를 공개해, 그의 정치적 명분에 치명타를 가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문제의 유언서는 화로의 여신을 지키던 사제 처녀들에게 보관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 진영에 속해 있다가 옥타비아누스파로 변절한 마르쿠스 티티우스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유언서가 숨겨진 장소를 밀고해서 옥타비아누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신성모독죄를 무릅쓰고 이를 탈취해 선동의 도구로 이용했다. "내가 죽으면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서가 진짜인지 위조된 것인지 여부는 오래도록 논란이 이어졌다. 로마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인 로널드 사임 교수는 이 유언서가 진본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 로버트 존슨 등은 유언서가 진본이라고 주장했으며, 현재 역사학계는 유언서가 진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7]

유언장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상관없이, 이것은 안토니우스를 회복 불가능한 궁지로 내몰았다. 이 유언서는 옥타비아누스 진영이 그간 소문으로만 퍼뜨렸던 온갖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의 구실을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광범위한 정치조직을 동원하여 안토니우스가 원로원의 동의 없이 로마의 속국들을 불법적으로 분할했다는 주장, 정실부인인 소 옥타비아를 내쫓고 클레오파트라를 정식 아내로 맞이했다는 주장, 카이사르의 적장자로 카이사리온을 지명했다는 주장, 안토니우스가 죽으면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히고 싶어한다는 주장 등을 유포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안토니우스를 마녀의 유혹에 빠진 얼간이로 여기게 되었고, 이제까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야욕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중립적인 인사들까지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기원전 32년 10월 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을 설득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로마를 탈출하여 아테네에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안토니우스 편으로 찾아갔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의 전쟁이 발발했다.

3. 전개



옥타비아누스와의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안토니우스는 아테네에서 대군을 소집했다. 그는 10만 로마 군단병에 폰토스 왕국폴레몬 1세, 콤마게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의 코티스 2세 등 여러 속국 군주들이 제공한 보조병들을 갖추었고, 로마-이집트 연합 함대 600척을 결집했다. 유대 왕국헤로데 대왕에게도 합류하라는 전갈을 보냈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시리아 일부와 레바논 일대를 빼앗으려 드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헤로데는 지진이 일어나서 피해를 복구해야 한다는 핑계를 들며 거절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보유한 전 함대를 안토니우스에게 넘기는 한편 그의 군대에 식량과 자금을 공급했다. 하지만 그의 거대한 병력은 동방 각지에 흩어져 있었기에, 기원전 32년 8월이 다 지나서야 이오니아 해안에 집결했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등 로마에서 안토니우스에게 망명한 인사들은 안토니우스에게 로마의 악화된 여론을 전하면서,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을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전쟁으로 왜곡시킨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저들이 자신에게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히며 물러서지 않았고, 안토니우스 역시 여왕 편을 들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2년이 지날 때까지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가을과 겨울에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했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해안에 가장 가까운 브룬디시움과 타렌툼 항구를 요새화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안토니우스의 군대에 배속된 외국 병사들이 이탈리아에 진입한다면, 로마인들이 "안토니우스가 외국군을 끌어들였다"고 간주해서 결사적으로 항전하려 들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가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기다린 뒤 우수한 함대를 동원하여 적의 해상 보급을 차단하고 그리스에서 쳐부수기로 했다. 그는 함대 대부분을 악티움 항구 인근의 암브라키아 만에서 겨울을 보내게 하고 나머지 함대는 그리스 서부 해안의 다른 항구에 분산시켜서 적의 임박한 공세에 대처하게 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의 친구이자 사령관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적 행보를 보였다. 그는 기원전 31년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에 시칠리아 내전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에서 군공을 세우면서 경험을 쌓은 우수한 해병 및 선원들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의 해안 요새 중 하나인 메토네를 기습 공격해 그곳을 지키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국왕 보구드를 전사시키고 단번에 공략했다. 그 후 아그리파의 함대는 그리스 서부 해안을 따라 여러 해안 도시를 급습했고,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로 운송되는 수송선들을 대거 포획했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의 육군 7만 5천 명이 판노니아 북부에 상륙한 뒤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숙영하고 있는 곳을 향해 남하하여 암브라키아 만과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해협 북쪽 언덕을 점령했다.

이제 안토니우스는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육군을 상대하러 간다면, 아그리파의 해군이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여 군대가 말라죽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그리파를 물리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한다면, 옥타비아누스의 육군이 추격하여 큰 손실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는 고심 끝에 험준하기로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강력한 요새에서 수성하고 있는 아그리파보다는 옥타비아누스 쪽이 상대하기 수월하다고 판단하고 군대를 이끌고 해협의 남쪽 해안으로 끌고 간 다음 북쪽 해안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옥타비아누스는 전면전을 벌이려는 안토니우스의 모든 시도를 무시했지만, 유일한 담수 공급원을 차단하려는 안토니우스의 시도에 맞서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보급품이 충분했고 유리한 위치를 점했지만,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늪지대에서 야영해야 했기에 전염병이 발생했다. 여기에 아그리파가 안토니우스의 중요한 보급 기지 몇 개를 점령하여 이집트의 식량 보급을 차단해버렸고, 뒤이어 안토니우스 함대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암브라키아 만을 봉쇄했다.

상황이 이처럼 나빠지자, 당초 안토니우스를 따랐던 속국 통치자들은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이탈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로마인들도 대거 투항했다. 이에 안토니우스가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어찌 대응할 지를 묻자, 많은 부하들은 마케도니아로 철수한 뒤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아군과 합세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육군을 단단히 요새화된 도시들에 주둔시킨 뒤 해군을 이끌고 암브라키아 만을 봉쇄하고 있는 적을 물리친 뒤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토니우스는 고심 끝에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안토니우스가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라고 본다. 식량 공급이 끊겨버리고 병사들과 유력 인사들이 계속 이탈하는 상황에서 마케도니아로 이동한들 판을 뒤집기 힘드니 차라리 클레오파트라의 본거지인 이집트로 후퇴한 후 군대를 새로 일으키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해상 봉쇄를 뚫기로 한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1년 8월 31일 아침에 안개가 짙게 깔린 것을 확인하고 가이우스 소시우스에게 선봉 함대를 맡겨 전방의 적 함대를 공격하게 했다. 소시우스는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가 이끄는 적 함대를 습격해 패주시켰지만, 아그리파가 이끄는 적 함대가 재빨리 증원하는 바람에 돌파에 실패하고 킬리키아 왕 타콘디모토스가 전사하는 등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이에 많은 병사들이 이집트 여왕에게 휘둘리는 안토니우스에게 혐오를 느끼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게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나이우스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했다. 여기에 오랜 세월 안토니우스와 함께 했던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한 뒤 안토니우스기 거대한 전함들로 북쪽 측면을 공격하려고 계획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먼 바다에 포진한 채 적과 거리를 두면서 숫자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암브라키아 만 봉쇄를 돌파하고 이집트로 이동하려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함대와 이를 저지하려는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맞붙었다.(악티움 해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220척 ~ 360척이었는데, 그 중 3열, 4열 및 5열의 노가 있는 170척의 대형 선박이 주력이었다. 이 함선들의 측면 높이는 3m에 달했고, 적 함선에 박혀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숫양'이 있었으며, 충돌로부터 배를 지탱하기 위한 목제 장갑 벨트를 갖췄다. 또한 갑판 위에는 무거운 투석기와 발사체 투척용 탑이 있었다. 다만 속도가 매우 느려서 적선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안토니우스는 선원을 제외한 25,000명의 병사를 배에 태웠다.

옥타비아누스 함대는 260척의 전선과 그리스로 오다가 아그리파에게 탈취당한 이집트 배를 포함한 수송선 수백 척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함대의 핵심은 1열 또는 2열의 노를 갖춘 가벼운 기동 선박으로, 로마인들은 일리리아 해적들이 주로 이용하던 이 배를 '리부르니'라고 불렀다. 리부르는 길이가 30m, 너비가 4~5m인 소형선으로, 84명의 선원과 36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이 배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내구성이 약했다. 해군 사령관 아그리파는 이 배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수송선들을 후방에 배치시켜서, 리부르니가 적 함대를 붙들어두는 사이에 수송선에 타고 있는 군단병들이 적선에 뛰어들어 탈취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당시 옥타비아누스 함대에 승선한 군단병은 34,000명이었다.

두 함대는 통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각각 3개 편대로 나뉘었다. 안토니우스는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와 함께 북쪽 편대를 이끌었고,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중앙 편대를 이끌었으며,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남쪽 편대를 이끌었고, 클레오파트라 7세는 60척의 이집트 갤리선으로 구성된 예비 함대를 이끌었다. 이에 맞서는 옥타비아누스 함대에서는 아그리파가 북쪽 편대를 맡아 안토니우스를 대적했고, 루키우스 아룬티우스가 중앙 편대를 이끌었으며, 마르쿠스 루리우스는 남쪽 편대를 이끌었고, 옥타비아누스는 후방에서 예비 함대를 이끌었다. 육상에서는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안토니우스 육군을 이끌었고,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가 옥타비아누스 육군을 이끌었다. 안토니우스는 육지에 남은 장병들에게 해전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상관하지 말고 해전이 끝나자마자 그리스를 떠나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윽고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만에서 출격하자, 옥타비아누스 함대는 뒤로 물러나서 적이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아그리파는 리부르니 함선들을 적의 대형 함선들에 접근하여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면서 적선들이 이를 추격하다가 포진을 흐트러지게 했다. 리부르니 함선들은 안토니우스의 '떠다니는 요새'를 사방에서 덮쳐서 화살비를 쏟아붓다가 적선이 다가오면 즉시 후퇴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이에 맞서 투석기와 탑을 통해 원거리 무기를 쏟아부었지만, 쏜살같이 몰려들었다가 도로 빠져나가는 적선들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그리파의 주력 함대가 전열이 흐트러진 적선들을 향해 달려들면서, 안토니우스의 북쪽 편대는 곧 둘러싸였다. 한편 다른 전선에서는 두 함대가 격렬한 접전을 벌였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클레오파트라는 60척의 이집트 갤리선에 안토니우스 북쪽 편대를 둘러싸느라 생긴 공백을 향해 항해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외해로 빠져나간 이집트 함대는 적에게 포위된 안토니우스를 구하는 대신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순풍과 함께 전장을 떠났다. 이 광경을 본 안토니우스는 급히 경선으로 갈아탄 뒤 쫓아간 끝에 그녀의 배에 올라탔다. 그는 뱃머리에 4일 동안 엎드린 채 클레오파트라와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그렇게 전장을 빠져나간 후에도 전투는 몇 시간 더 지속되었다. 안토니우스의 일부 선박은 탈출을 위해 무거운 발사체를 바다에 던졌지만, 본대는 끝까지 버텼다. 아그리파는 그들을 향해 불화살을 대량으로 사용해 여러 선박을 불태웠다. 결국 수많은 배가 침몰하거나 파괴되었고, 250척이 나포되었다. 이렇듯 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뱃멀미에 시달려서 선실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고 한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사전에 철수하라고 지시했던 육군은 눈앞에서 아군 전함이 파괴되는 광경을 보고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고, 지휘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홀로 이집트로 달아났다. 한편,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생포된 뒤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주위의 간언을 받아들인 옥타비아누스의 용서를 받고 풀려난 뒤 정계를 떠났다. 삼두의 일원인 레피두스의 친척이었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역시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가 생포되었지만, 일전에 그의 은혜를 입었던 아우구스투스의 측근 마르쿠스 롤리우스의 구명을 받고 풀려났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잔여 함대를 수습한 뒤 카레나이카에 가서 그곳에 주둔한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의 2만 병력을 통솔하려 했다. 그러나 스카르푸스는 안토니우스가 보낸 전령을 사형에 처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부관인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여기에 안토니우스를 따랐던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등 수많은 속국 군주와 도시 지도자들이 대거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넘어갔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상황에 분노해 알렉산드리아 감옥에 갇혀 지내던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처형하고 그의 수급을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내면서 "당신이 안토니우스를 저버린다면 이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이를 무시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쫓는 대신 기원전 31년 겨울을 그리스에서 보내면서 항복을 하러 온 사절들을 맞이하고 동방 질서를 재편성했다. 그러던 중 고참병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갔던 아그리파로부터 병사들이 정착지와 보상금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은 옥타비아누스는 급히 로마로 귀환한 후 고참병들에게 "이집트 여왕을 내년에 끝장내면 정착지를 충분히 마련할 수 있고, 보상금 또한 두둑이 줄 테니 1년만 더 참아라"고 설득했다. 고참병들은 이에 불만섞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옥타비아누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 후 그리스로 돌아간 옥타비아누스는 사모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사절을 맞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며 그를 회유하려 하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큰아들인 안틸루스를 보내 은퇴한 뒤 아테네에서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말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살려준다면 후환이 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향해 진격했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스카르푸스와 함께 카레나이카에서 안토니우스가 있던 파래토니움으로 진격했고, 옥타비아누스는 다른 군대를 이끌고 페루시움으로 갔다. 안토니우스는 갈루스 군을 상대하지만 격파당하고 이집트로 도피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선봉대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기원전 30년 8월 1일 마지막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적의 편으로 넘어갔고 육군은 옥타비아누스의 본대와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안토니우스는 배를 타고 달아나는 도중에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예 에로스에게 자신을 찔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에로스가 이를 거부하고 자살하자, 그는 단검으로 스스로 찔렀다. 하지만 출혈이 많지 않아서 몇 시간 더 살았는데, 곧 여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몸종들에 의해 궁전으로 이송된 후 바리케이드가 쳐진 영묘로 올라갔다. 그는 그곳에서 여왕의 품에 안긴 채 죽음을 맞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기 위해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갔다. 자신을 이집트 여왕으로 인정해준다면,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부하를 시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처단하게 했고,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자식들을 로마로 끌고 가서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내세우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2일 자결했다. 클레오파트라가 독사를 통해 자살했다는 설이 유명하지만, 이것은 속설일 뿐이다. 알렉산드리아 궁정의 전의였던 일림피오스는 그녀가 죽은 원인을 밝히지 않았고, 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소문이 떠돌았다고 소개하면서도 클레오파트라의 사인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녀가 독사를 이용했다기보다 독을 바른 머리핀을 이용하여 자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한편, 최후까지 안토니우스를 따랐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공화국 최후의 내전은 막을 내렸고, 최후의 승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고 로마로 귀환하여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한 뒤 로마 제국을 출범시키고 40여 년간 지중해 세계를 이끌었다.


[1] 단순히 War of Actium이라고 칭할 때도 있다.[2]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전쟁을 통해 확보한 갈리아 대부분[3] The Perusine War and Triumviral Italy, Emilio Gabba, Harvard Studies in Classical Philology, Vol. 75 (1971), pp. 139-160[4] 이것만 봐도 안토니우스의 걱정이 단순한 기우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5]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대해 일리리아 원정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6]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불리한 소문들은 전부 카더라에 불과했지만 안토니우스에 대한 소문은 클레오파트라라는 현물(?)이 존재했으므로 안토니우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있었으므로 소문을 부정하거나 단속하기도 쉬웠을 테지만 안토니우스는 먼 동방에 둥지를 트고 있었으므로 소문을 막을 길이 없어서 로마에서 평판 하락은 피할 수 없었다.[7] 가장 큰 증거는 역시나 이 유언장에 대해 안토니우스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