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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31 21:28:30

율리아 안토니아

율리아 안토니아
라틴어: Julia Antonia
생몰년도 기원전 104년경 ~ 기원전 39년 이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미상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아버지)
풀비아(어머니)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오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첫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두번째 남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장남)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차남)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삼남)
안토니아(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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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귀부인.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어머니다. 당대에도 다른 율리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율리아 안토니아'로 지칭되었다.

2. 생애

기원전 104년경 로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기원전 90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어머니는 기원전 125년 집정관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의 딸 풀비아다. 오빠로 기원전 64년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있었다.

기원전 85년경 저명한 노빌레스 가문인 안토니우스 씨족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와 결혼해 세 아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딸 안토니아[1]를 낳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남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는 남에게 소유물을 베푸는 걸 좋아했지만, 그의 아내가 그가 적은 재산을 축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섣불리 그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돈이 없었던 그는 노예에게 은색 머그잔에 물을 담아서 가져오라고 시켰다. 이후 면도하려는 듯 턱을 적시더니, 또다른 구실로 노예를 방 밖으로 내보낸 뒤 친구에게 머그잔을 주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이후 머그잔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아내가 노예가 훔쳐간 줄 알고 집안의 모든 노예를 불러서 일일이 고문하려 들자, 그는 자기 때문에 노예들이 심한 꼴을 당하는 걸 견딜 수 없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기원전 71년, 해적 토벌에 전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가 크레타에서 객사했다. 그후 율리아는 기원전 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와 재혼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렌툴루스 수라는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그러나 수라는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음모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당해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처형되었다.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고대 작가들에 따르면, 계부를 무척 사랑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계부를 죽인 키케로를 증오했다고 한다.

율리아는 렌툴루스 수라 사후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아들들을 돌보는 데 전념했으며, 먼 친척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자식들의 미래를 맡겼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녀의 순결함과 고상한 성품은 당대 최고 자리를 경쟁할 수 있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로마에 있었다. 기원전 43년, 그녀의 오빠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장남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지정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뒤 숙청 명단에 들어갔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율리아는 오빠를 자기 집에 숨긴 뒤 포로 로마노에서 장남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독재자여, 나는 나 자신의 죄악을 밝히겠소. 나는 루키우스를 내 집에 숨겼고 여전히 숨기고 있으며, 당신이 우리 둘 다 처형할 때까지 숨길 것이오. 법령에 범죄자를 숨긴 자에게 그런 형벌이 내려지니 마땅히 그래야하지 않겠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길이 탄식한 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용서했다고 한다.

기원전 41년부터 기원전 40년까지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녀는 로마를 떠났지만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굳이 건드리지 않고 친절을 베풀었기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한편,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율리아와 만나 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율리아는 곧장 그리스에 있던 안토니우스에게 가서 섹스투스의 의사를 전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자기를 따르는 병사들이 카이사르를 추종하던 이들인데 그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를 친다면 반발이 심할 것이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39년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미세눔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의 회담에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 기원전 47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의 첫번째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