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자, 시리아, 킬리키아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 Πτολεμαῖος ὁ Φιλάδελφος | ||
휘 |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Πτολεμαῖος ὁ Φιλάδελφος) | |
생몰년도 | 기원전 34년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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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이다.2. 생애
기원전 34년 여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며 동부 지중해 일대의 최고 권력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쌍둥이 남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있었고, 이부 형제로 클레오파트라 7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인 카이사리온이 있었다.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 그리고 자신의 세 자식에게 지중해 전역을 분배하겠다고 선포했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분배받았으며,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분배받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분배받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의 공동 파라오이자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카이사리온은 이와 별도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서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옥타비아누스와 맺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선언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거기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한 후, 전황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로 입성했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자식들의 생명을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치욕을 받느니 죽기로 작정하고 자결했다.
이후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붙들려 처형되었고,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와 함께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개선식에 세워진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뿐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일언반구도 없는 걸 볼 때, 그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