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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스크리보니아 라틴어: Scribonia | |
생몰년도 | 기원전 70년경 - 서기 16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아버지 또는 이복 형제) 코르넬리아 술라(어머니)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형제 또는 조카)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형제 또는 조카)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첫째 남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둘째 남편) 옥타비아누스(셋째 남편) 코르넬리우스 마르켈리누스(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아들) 코르넬리아(딸) 대 율리아(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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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귀부인.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두번째 아내이다.2. 생애
기원전 70년경에 출생했다. 아버지는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로 알려졌다. 이 인물이 기원전 80년 법무관 루키우스 스키보니우스 리보이며,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그녀의 이복 남자형제라는 것이 일반적인 가설이지만, 고대 로마 여성의 삶을 연구한 서양 고전학자 일레인 펜섬(Elaine Fantham, 1933 ~ 2016)은 2006년에 출간한 저서 <율리아 아우구스티: 황제의 딸(Julia Augusti: The Emperor's Daughter)>에서 스크리보니아가 기원전 90년경에 출생한 리보의 이복 누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며, 서기 16년에도 살아있었던 것이 고대 기록상에서 확인되는 만큼 비현실적이라면서, 스크리보니아는 기원전 34년 집정관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둘째 딸이라고 주장했다. 이 가설은 현재 여러 학자들로부터 일리있는 주장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어머니 코르넬리아 술라는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유일한 아들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폼페이우스의 딸인 폼페이아 마그나의 딸이었다. 형제 또는 조카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있었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차남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결혼한 조카 또는 누이인 스크리보니아가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스크리보니아는 총 3번 결혼했으며 처음 두 남편은 집정관이었다고 한다. 첫번째 남편의 이름은 분명하지 않지만, 로널드 사임 등 많은 로마사 권위자들은 기원전 56년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기원전 39년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 그녀와 아들 코르넬리우스 마르켈리누스를 기리는 비문이 로마에서 발견된 점을 고려한 추정이다. 두 번째 남편 역시 분명하지 않으나, 많은 학자들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살비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크리보니아는 기원전 34년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있었던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늘그막에 결혼한 코르넬리아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기원전 16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기원전 16년에 사망한 코르넬리아를 그녀와 스키피오 살피토의 자녀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에 거점을 삼고 이탈리아의 해상을 봉쇄해 식량 수송을 가로막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고전한 끝에 그와 타협하기로 하고, 섹스투스의 최측근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의 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기로 했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친자식인 대 율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짧고 불행했다. 애초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언젠가 도모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를 전혀 사랑하지도, 아내로서 존중해주지도 않았다. 이는 스크리보니아도 같았는데, 그녀 역시 성격과 생활방식이 상극이고 자신보다 연하였던[1] 옥타비아누스를 정략혼 대상으로만 여겨 큰 정을 쏟지 않았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와 스크리보니아는 서로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평했고, 두 사람의 결혼은 처음부터 양 세력의 관계가 어긋나면 상호이혼으로 파기될 상황으로 보였다. 헌데 두 사람은 이를 숨기지 않았고, 옥타비아누스 주변과 스크리보니아 주변 모두 이를 애둘러 표현하지 않고 인정해, 일찍부터 이들의 결혼생활은 짧을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짧은 결혼 생활에서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첫 아이를 임신했다. 이때가 기원전 38년인데, 섹스투스와의 전쟁을 재개하기로 마음먹은 옥타비아누스는 스크리보니아와의 이혼을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상호 합의 하에 미뤘다가, 이들의 딸 대 율리아 출산 이후 예정에 따라, 상호 합의 아래 깔끔하게 이혼해 관계를 정리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율리아가 태어난 지 몇 달만에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빨리 결혼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측 진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를 내쫓은 이유는 그녀가 남편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질투심을 보였기 때문이며, 그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결혼 생활 중이었고 임신 중이었던 리비아와의 결혼을 성급하게 추진한 것도 결혼식 이전에 이미 은밀한 성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한 음해성 소문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부족하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는 대개의 정략혼처럼 이혼 이후에도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여, 정략혼이 파탄난 귀족들 사이에서 흔한 상호간 인격 모독조차 없었다. 따라서 후일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9년 후일 제정이라고 평가된 종신 집권 체제를 연 뒤, 스크리보니아와 그녀가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 손주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친인척 관계를 맺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이혼한 뒤, 스크리보니아는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얻은 율리아도 스크리보니아와 함께 살았는데, 얼마 뒤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 후 다시 살림을 꾸리면서 상호 합의 아래 율리아를 자신의 사저로 데리고 가서 키웠다. 이때 스크리보니아는 자신의 막내 아이였던 율리아와 매일 만나고 싶어 했는데,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는 율리아와 매일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그녀의 딸 율리아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아래에서 지극히 전통적인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정의 규수 교육법에 따라 엄격하게 양육됐고, 스크리보니아와도 종종 왕래하며 자랐다.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혼생활 내내 서로를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평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렇지만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와 이혼 당시부터 관계를 서로 합의 하에 깔끔히 정리해 악감정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딸 율리아에게 라틴어, 그리스어 교육과 예법 등을 가르치는데 큰돈을 들여 신경쓰는 것에는 항상 만족했다. 그러니 그녀는 그와 율리아 접근 문제로 부딪히지 않았고, 전남편과 재혼해 딸을 엄하게 키운 리비아와의 관계 역시 나쁘지 않았다. 여기에는 율리아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 스크리보니아조차 심술궂고 버릇없다고 할 만큼 행실이 불량했던 것도 컸다. 교양이 풍부하고 예의를 중요시한 까닭에 그녀는 이런 딸의 행실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 부부는 스크리보니아의 지위와 명망을 언제나 존중했고, 그녀의 풍부한 교양과 예의를 높게 평했다. 이는 스크리보니아의 손주들에게도 같았는데,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스크리보니아의 여러가지 태도 중 그녀의 교육열과 성과를 높이 평했다. 왜냐하면 스크리보니아는 진심으로 자녀 교육에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교육열은 당대부터 유명했다.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스크리보니아는 능력이 뛰어난 노예를 찾으면, 노예 주인이 얼마를 요구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이고 반드시 그를 사들였다. 이후 그녀는 자녀, 손주들의 가정교사로 그 노예를 삼으면서 이들에게 자신의 성씨와 함께 자유를 줬고, 그에게 평생 거주할 집과 생활비를 지원해줬다. 따라서 세간에서는 이런 그녀를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귀부인이 고귀하다며 놀라움을 평했고,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이런 그녀의 평에 자신들 역시 찬사를 받자 이를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해방노예 출신은 고대 로마의 문법가 스크리보니우스 아프로디시우스였다. 아프로디시우스는 원래 당대의 저명한 문법가 루키우스 오르빌리우스 푸필루스의 노예이자 제자였고, 시인 호라티우스의 스승이었는데, 아들 교육과 손주들 교육에 열정적이었던 스크리보니아는 거액을 주고 그를 스카우트한 다음 바로 자유를 주면서 그를 가정교사로 삼고, 아프로디시우스와 그 가족에게 평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기원전 2년 율리아가 신전에서 대놓고 남정네들과 성관계를 맺고 아우구스투스와 남편 티베리우스를 도모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이 발각되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판다테리아 섬으로 추방됐다. 이때 스크리보니아는 딸 율리아가 아주 어릴 때부터 주변 모두에게 심술궂고 버릇없다는 기질로 문제가 심하다는 평을 알고 있었고, 여기에 휘말린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부자가 누명으로 명예를 잃고 자결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때문에 일찍부터 이 부분을 자책했고 자신의 혈육들에게 미칠 파장까지 생각해, 추방을 자처했다. 자신에게도 딸 대 율리아의 악행에 대한 그 책임이 있다며 "딸의 부도덕함을 참회한다"고 밝히면서 여자 노예 몇 명과 함께 원로원과 아우구스투스 앞으로 갔고 그 자리에서 자발적인 추방을 청했다.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은 스크리보니아의 청을 받아들였고 스크리보니아는 딸을 따라갔다. 이후 서기 4년에 레기움으로 율리아가 거처를 옮겨 금고 생활을 했는데, 이때에도 스크리보니아는 율리아와 함께 살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자청해 추방생활과 이후 금고 생활을 한 스크리보니아를 이유로 율리아에게 재산과 연간 수입을 부여해줬다. 그러다가 10년 뒤인 서기 14년 율리아가 화병으로 사망하자[2][3], 로마로 귀환해 자신의 저택에서 살았다.
서기 16년 스크리보니아의 두 쌍둥이 조카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가 티베리우스 황제를 도모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서기 14년 8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사형되었을 당시 티베리우스가 객관적으로 명확히 자신이 무관하다고 밝힘에도 결과적으로 포스투무스의 죽음으로 인한 수혜자가 티베리우스라는 점 때문에 리보 형제들의 반역죄 역시 대 율리아의 친척들을 숙청하는 거라고 여겼다. 특히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점쟁이에게 자신이 브룬디시움이나 브린디시까지 돈으로 아피아 가도를 포장할 만큼 부자가 될 건지 물어봤다는 어거지나 다름없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두 형제가 황제의 허락 없이 군대와 접촉하는 등, 의심을 살 일을 벌인 것도 사실이기에 티베리우스는 "난 지금 늑대 등 위에서 두 귀를 붙잡고 있다"며 그들을 반역죄로 재차 고발했다. 재판 과정에서 리보 형제는 자신들의 비서인 노예들이 증인 조사를 받는 걸 방해하며 재판을 질질 끌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그들의 노예를 강제로 사들여 관료에게 소유권을 넘기고 해방노예로 삼은 뒤 재판 증언을 받아 리보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마르쿠스는 자신이 병마로 고생하고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그는 평소 비만인 것을 제외하면 건강해서 이 꾀병에 더욱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가차없이 재판에 출두하라고 명령했고 원로원 역시 꾀병을 부리는 것이 유죄의 증거라며 황제를 편들었다. 이에 마르쿠스가 자결을 결심하자 스크리보니아는 만류하면서 이렇게 혼을 냈다.
"다른 사람이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게 무슨 보람이 있는가? 재판에 출두해서 처벌을 달게 받아라."
그러나 마르쿠스는 듣지 않고 16년 9월 13일에 배를 단검으로 두 번 찔러 자살했다. 그의 형 루키우스 역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형제의 지지자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마르쿠스가 자살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앞으로 스크리보니우스 가문의 구성원들이 '드루수스'라는 이름을 쓰는 걸 금지했다. 이후 스크리보니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사망년도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친딸, 외손자, 조카를 잃고 집안이 무너졌다고 해도 스크리보니아의 후손과 친척들은 여전히 부유했고 그녀도 여전히 사회적 존경을 받았으니 곤궁하게 지냈는지는 의문이다.
[1]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63년생이다.[2]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몇 주 전, 티베리우스에게 율리아의 막내 아들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죽이라고 조언하면서,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직속 백인대장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와 경호대를 보내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죽이고, 이를 티베리우스에게 통보케 했다. 그 이유는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와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가 추방된 율리아와 포스투무스를 구출해 이들을 앞세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를 죽이려고 한 반역이 들통이 났기 때문이었다.[3]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추방된 섬에서 엄격한 보안 하에 구금되어 있다가 연락 한 번 없던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처형단에게 맨손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교살됐다. 포스투무스는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라고 보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이 겨우 그 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후 포스투무스의 사형이 발표되고 유가족인 어머니 대 율리아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됐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크리스푸스에게 "그의 명에 따라 임무를 완수했습니다."라고 통보받자 큰 충격 속에서 원로원을 급히 소집해 자신은 한때 아들이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죽이지 않았다고 밝히며 "전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전 로마로 소환되었을 때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이 일리리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그 증거를 내보이며 결백을 호소했다. 하지만 원로원 대다수에게 티베리우스는 젊을 적부터 차가운 이미지였데다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이었지만 서기 13년부터 신뢰가 떨어지고 지위가 예전같지 않던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저택에서 급사한 것과 엮여 모두가 티베리우스를 더욱 의심했다. 포스투무스의 교살 소식을 들은 대 율리아도 당연히 아버지와 전남편이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해 그 둘을 저주하다가 화병으로 죽었고 스크리보니아 역시 딸과 외손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면서 티베리우스에게 불만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