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 주요부인 주택가 일대 | 유적지 입구와 목욕탕 |
가장 유명한 명소인 암피트리테 모자이크. 우측의 남신은 집 소유주의 얼굴이라 한다 |
1. 개요
불라 레기아(Bulla Regia , بولا ريجيا)는 튀니지 북서부의 유적이다. 현대 도시인 젠두프에서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한다.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에 의해 세워졌고, 카르타고의 주신인 바알 함몬 숭배가 만연했다. 2차 포에니 전쟁 후 누미디아령이 되었고, 마시니사 왕이 수도로 삼았다. 따라서 이후 로마령이 된 후에도 '왕립의 불라'라는 의미인 불라 레기아로 불렸고, 로마 내전 당시 카이사르 편에 선 덕에 후자로부터 자유도시 (civitas libera)[1]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대에 무니키피움을 거쳐 하드리아누스 대에 식민도시로 승격되었고,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당시의 정식 지명은 콜로니아 아일리아 하드리아나 아우구스타 불라 레기아였다. 팍스 로마나 시기 불라 레기아는 히포 레기우스를 비롯한 누미디아 지역과 카르타고를 이어주는 거점 도시로 번영하였다.190년 콤모두스 황제는 불라 레기아 출신의 멤미우스 율리우스 피두스 알비누스를 집정관에 봉하였고, 그의 딸인 율리아 멤미아는 고향에 거대한 목욕탕을 세웠다. 불라 레기아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256년에 주교구가 되었다. 한편 서기 400년에는 인근 타가스테 (수카하라스) 출신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시를 방문, 시민들을 모아두고 시미투스의 선례를 본받아 극장과 같은 오락 시설의 폐쇄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였다. 533년에는 벨리사리우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겔리메르의 반달 왕국군을 격파하였고, 이러한 불라 레기아 전투는 북아르카 재정복의 분수령이었다.
6세기 들어 쇠퇴하던 도시는 6-7세기 무렵 지진으로 1층이 전부 매몰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비록 9세기 아글라브 왕조와 10세기 파티마 왕조 시기에도 작은 마을이 유지되었지만 11세기 베두인들의 침공으로 완전히 버려졌다. 이후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1879년 알제리-튀니지간 철도 건설 중 재발견되어 1906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에 유적 대부분이 흙 속에 덮여 있었기에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천장이 없는 뜰을 갖춘 저택 유구가 유명한데, 중세 아랍 지역 가옥의 원형으로 평가된다. 또한 많은 모자이크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2. 갤러리
2.1. 상세
베누스 개선문과 성벽
성벽과 옛 석관
극장
아폴로 신전
바실리카
2.1.1. 사냥의 집
2.1.2. 암피테르테 집과 모자이크
2.1.3. 멤미아 목욕탕
- [기타 유적지 사진]
[1] 혹은 liberum oppid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