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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5:34:00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1. 개요2. 배경3.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리우스의 개혁4. 실상

1. 개요


로마 공화국 말기의 명장이자 정치인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기원전 107년부터 101년까지 로마군의 군사 체계를 획기적으로 바꿨다고 알려진 개혁.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실체에 비해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2. 배경

로마군마니풀라 체계를 통해 삼니움 전쟁,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셀레우코스 전쟁 등 수많은 전장에서 연전연승하며 로마를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로 우뚝 서게 하였으나, 기원전 2세기부터 예전만한 위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루시타니아 전쟁누만티아 전쟁에서 숫자와 전투력 모두에서 밀리는 루시타니아 연맹 및 아레바키족에게 고전해 수십년 동안이나 결판을 내지 못했고,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안드리스코스반란페르가몬에서 발발한 아리스토니코스의 반란에도 고전했다. 뒤이은 유구르타 전쟁에서는 유구르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장군이 전쟁을 그만두고 귀국하거나 유구르타의 유인책에 걸려 포위된 로마군이 멍에 아래 기어가는 굴욕을 겪어야 했을 정도로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군이 지난 시대에 비해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는 원인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갈등 심화라고 진단했다. 원로원 계급으로 대표되는 대지주들은 지중해 전역에서 쏟아지는 부와 노예를 독점하며 막대한 곡물을 생산하지만, 평민들은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온 후 황폐해진 소규모 농지를 애써 경작해야 하니 상대가 되지 못해 파산하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토지를 지주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고 로마로 상경하여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이러니 군역을 담당할 수 있는 평민들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고 군대에 입대한 이들의 전의도 떨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 개혁을 단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득권층의 반발에 직면하다가 그들이 평민을 선동하여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이 되려 한다고 여긴 정적들에게 피살당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상황을 과장했거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광범위한 선동을 벌인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당시 남부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 바르카에 동조했다가 막대한 토지를 몰수당하여 대지주들의 농장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는 여전히 군단병을 구성하는 평민들이 소규모 농장을 대거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실시된 인구 조사 역시 군역 대상자가 줄어든 것과는 거리가 멀다. 기원전 136~135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 따르면, 로마군에 복무할 수 있는 장정은 317,993명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에는 성인 남성이 30만 명도 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인력난에 시달렸다. 본래 로마군에 입대하려면 적어도 11,000아스의 재산을 갖춰야 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13년에 4,000아스로 삭감되었고, 기원전 123년에는 1,500아스로 재차 삭감되었다. 그럼에도 인력난이 심해서 전장으로 출진해야 하는 집정관들이 병력을 모집하길 힘들어 했으며, 그나마 모집한 이들 중에는 이전에는 징집 대상이 아니었던 자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무장 상태와 전투력이 예전만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마니풀라 체제에서 재산 정도에 따라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를 구분하는 것도 갈수록 모호해져서 나중에는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고 부대원들간의 단합력도 떨어졌다.

많은 학자들은 이 현상의 원인은 로마가 지나치게 많은 전쟁을 연이어 치르고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복무 대상자들의 피로가 극심해진 데 있다고 진단한다.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로마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은 장정들을 충분히 모집할 수 있었지만, 이베리아 반도, 발칸 반도, 시리아, 북아프리카 등 로마에서 멀어진 지중해 세계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고 복무 기간도 갈수록 늘어나자, 굳이 머나먼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싸워야 할 동기를 느끼지 못하고 복무를 기피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났다. 로마법에는 복무를 기피한 자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노예로 삼고 심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재산과 인맥을 충분히 쌓아둔 이들이 로비를 통해 빠져나오기 일쑤였고, 로마 정치인들 역시 표심을 잃을 것을 우려해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결국 법망을 피할 만한 인맥이나 재산이 없는 자들만 억지로 끌려왔으니 전의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로마군이 인력난에 시달리고 전투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기원전 113년, 유틀란트 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 테우토니족, 암브로니족, 티구리니 족이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로 남하했다. 로마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킴브리 전쟁을 단행했지만 연전연패했다. 급기야 기원전 105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에 달하는 로마군이 무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로마인들은 저들이 로마까지 쳐들어올까 두려워했지만, 게르만인들은 방향을 틀어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로 향했다. 그 사이에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유구르타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로마인들은 마리우스를 집정관에 연이어 당선시켜 로마군을 개편해 예상되는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이리하여 마리우스 개혁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3.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리우스의 개혁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자 루트비히 랑게(Ludwig Lange: 1825 ~ 1885)가 처음 주장하고 테오도르 몸젠, 빌헬름 뤼스토프(Wilhelm Rüstow: 1821 ~ 1875) 등 독일 역사가들이 각각 <로마사>와 <보병의 역사>를 통해 널리 전파하면서 오늘날까지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인력난과 전투력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다음의 개혁을 단행했다고 한다.

마리우스는 이렇게 모집한 군대를 철저히 훈련시키고 동기 부여를 끊임없이 해 전의를 극도로 끌어올렸고, 로마군은 그의 지도하에 전투력을 회복하여 기원전 101년 이탈리아로 침입한 킴브리족 등을 궤멸시켰다. 그러나 사령관이 자원병들을 모집하고 병장기와 급료를 지불하면서 병사들을 오랫동안 이끌고, 퇴역병들에게 정착할 농지와 로마 시민권을 주게 되자, 군단병들은 어느덧 로마의 군대가 아니라 사령관 개인의 사병으로 변모했다. 이후 권세가들의 정쟁에 사병화된 군단병들이 대거 동원되면서 로마 내전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그 결과 공화정이 무너지고 최후의 승자인 아우구스투스로마 제국을 창건했다.

4. 실상

현대의 대다수 학자들은 위의 통설은 19세기 몸젠 등 독일 역사가들이 고대 문헌이 전하는 몇몇 기록과 마니풀라 체계와 마리우스 이후의 로마군 체계를 비교 분석해 마리우스 개인에게 몰아주면서 만들어진 '공상의 산물'로 간주하며, 마리우스 군제개혁이 실상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본다. '마리우스 군제개혁'이 이뤄진 시기 이후에도 없어졌다는 관행이 이어졌다는 사실이 고대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로 드러나고 있으며, 반대로 마리우스가 내렸다는 조치들이 실은 그 이전부터 이뤄졌으며, 일부는 19세기 학자들의 근거없는 추측일 뿐임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현대 학계의 연구로 밝혀진 사항이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지적을 하면서, 마리우스 군제 개혁의 실체는 "징집 대상을 로마 시민 전체로 확대하고 아퀼라를 대표적인 군기로 확정하고, 군대를 수 년간 훈련시킨 것"에 국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군대가 사병화되어서 로마 내전이 빗발쳤다는 것 역시 근거없다고 간주하며, 사병화 현상은 마리우스 때문이 아니라 동맹시 전쟁술라의 내전 이래로 권력을 무력으로 쟁취하려는 사령관들의 야욕 때문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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