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동로마 제국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외교 관계를 서술한 문서.2. 상세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시절부터 양면전선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제국은 간접적 접근에 의한 문제해결을 중시했다.예를 들어서 당시 동로마 제국의 적이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키예프 루스를 이용해서 때린 것처럼,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는 전쟁보다는 먼저 외교적으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전통적 작업은 나쁘게 말하면 '비잔틴'스러운 음모와 권모술수로 여겨졌고 좋게 말하면 세련된 세력 균형 유지를 통한 평화추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평화추구를 위해 '야만국'(외국 전담 정보부)을 유지할 정도로 동로마 제국은 타국에 대한 정보수집과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 항상 노력했고 이것은 외교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런 '비잔틴'스러움은 아주 악명이 높아서 당시 중세에서도 고유명사로 '비잔틴'이라는 말이 존재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그 뜻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음흉함을 의미했다.
2.1. 서유럽
서유럽과의 관계는 복잡미묘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당연히 자신이 로마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상 기존의 제국을 멸시했기 때문에, '원조 로마'인 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에 대해 의도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수많은 흠집이 가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린 800년 이후 점차 심해졌고, '로마 제국의 정통'을 표방하던 동로마인들로서는 카롤루스 대제 및 그 계승자들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을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한편으로는 동로마와 서유럽은 동로마의 존속 기간 내내 이슬람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 있었고, 때문에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무릅쓰고 서로간 협력을 하기도 했으며, 좀 후세의 동로마 황제들은 신성 로마 황제들을 '황제'로 인정하고 혼인 동맹을 시도하는 등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동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흠집내는 데 가장 열심이었던 나라는 또 다른 로마 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 9세기 초 프랑크의 역사가이자 카롤루스 대제의 측근이었던 아인하르트는 저서 '카를 대제전(Vita Karoli Magni)'은 서유럽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19장에서 콘스탄티노스 6세를 '그리스인들의 황제(Grecorum imperatore)'라고 일컬었으나, 반대로 뒤의 제28장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를 '로마 황제(Romanis imperatoribus)'라고 일컫는 등 그 호칭 표기와 관련하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동로마에 대한 서방인들의 폄하 어린 시선은 노골적으로 변해 갔으며, 아예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 황제라고 격하시켰다. 871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도비코 2세가 당시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가 자신의 로마 황제 즉위에 이의를 제기한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한 답장으로[1] '당신네 그리스인들은 로마 시(市), 로마인, 로마의 언어도 몽땅 버리고 다른 도시, 제위, 민족과 언어로 옮겨가지 않았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것만 봐도 알수 있다.[2][3]
또한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황제에 등극(962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968년 오토 1세의 아들(후의 오토 2세)과 전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2세의 딸 안나와의 혼담을 논의하기 위해 서방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는데, 그때 겸사겸사 전해준 교황 요한 13세의 편지에 '로마인들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들의 황제(Emperor of the Greeks)'가 언급된 것을 보고 뚜껑 열린 황제 니키포로스 2세가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를 수장으로 하는 사신들을 모조리 감방으로 보내버린 뒤 추방시킨 일도 있었다.[4] 또한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을 내심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니키포로스 2세는 교황의 편지를 읽기 전부터 의도적으로 리우트프란드 사절단을 푸대접했고, 당연히 니키포로스 2세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었던 리우트프란드는 니키포로스 2세의 외모를 극단적으로 비하하는 인신공격성 기록을 남겼다. 작은 키, 큰 머리, 두더지같이 작은 눈, 혐오스런 턱수염, 체구에 비해 긴 엉덩이, 낡고 악취 나는 옷차림 등... 그리고 오토 1세의 로마 황제 등극에 대해 태클을 거는 니키포로스 2세에게 "우리 오토 1세 님이 로마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동안, 정작 이 세상의 유일한 로마 황제라고 거들먹거리는 너님은 뭐했나요?"라고 대놓고 쏘아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니키포로스 2세 역시 지지 않고 "네놈들은 로마인이 아닌 랑고바르드인이잖아!(Vos non Romani, sed Longobardi estis!)"라고 맞받아치고...
거기다가 서방과는 종교적으로도 자주 충돌했다. 이미 중세 초기부터 아카키오스 분열, 포티오스 분열 등의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충돌해 왔다. 초기에는 로마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세적이었으나, 서기 800년 카롤루스 대제가 서방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균형을 이루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계속 대립하였는데, 나중에는 필리오퀘 논쟁 등으로 인해 교리적인 불일치도 커져 갔다. 이 대립은 서기 1054년의 맞파문 사건으로 절정을 찍었다. 교황이 파견한 사절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로마 사절단을 맞파문하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났다. 이후 십자군 전쟁(특히 2차와 4차)을 거치면서 제국과 서유럽인들은 서로를 더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제국인들은 오랜 세월 남부 이탈리아를 점유하고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계속 이 지역을 노렸지만 결국 이곳을 점령할 수 없었다. 후에 노르만인들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제국을 몰아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창건했다. 노르만인들은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제국의 도시 두라초[5]를 공격하기도 했다. 노르만인들 또한 제국의 주요한 적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제국의 용병으로 노르만인이 고용되기도 했다.
중세 서유럽인들은 정통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는 카롤루스 대제와 그의 계승자들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는 단지 '그리스인들의 황제(Imperator Graecorum)'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대단한 결례로 여겨졌으나 동로마를 싫어하여 모욕할때는 이렇게 불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국의 번국으로 출발했지만, 관계가 좋지 않았다. 아니, 2000년 역사의 로마 제국을 결정적으로 몰락시켜서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 베네치아가 주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던 4차 십자군이다. 그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때 병사를 보내기는 했고 베네치아인들은 구원을 위해 결사대로 포위를 뚫고 나가기도 했다. 구원병이 없다고 알았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그 도시에서'라고 하면서 다시 돌아온 것을 볼 때 최소한 제국의 멸망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베네치아로서는 제국이 유지되는게 무역이나 외교 등 여러 측면에서 이득이 컸고, 일부 베네치아인들은 예전부터 조계지에서 정착했던 도시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교황청과 헝가리 왕국 등에게 '서둘러 힘을 모으지 않으면 우리는 동방의 그리스도 국가의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베네치아였고, 동로마의 구원 사절단을 맨 처음 받아 교황과 여타 유럽 강대국들에게 빠르게 전달한 것도 베네치아였다. 물론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도시가 함락당하면 베네치아의 대외무역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지중해 거점들을 상실하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한 이때 점령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의 최대도시로 남게 된다.
2.2. 이란 및 이슬람권
그 외에도 제국의 주변에는 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동방의 주적은 사산조 페르시아로, 호스로 2세 때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페르시아에게 밀려서 626년 최초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적에게 포위되는 사태[6]를 맞이하게 되나 결국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역관광을 보내며 크테시폰이 있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진군하여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하는 성과를 올린다.하지만 이보다 더 강대한 적들인 아랍의 무슬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순식간에 피폐해져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에게서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지역을 점령했다. 잠시 숨을 돌린 아랍인들은 곧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공격해 왔다. 콘스탄티노스 4세 때에는 그리스의 불로 해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레온 3세 때 다시 한번 아랍인들을 격파했다. 두 차례의 아랍인들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서 동로마인들은 아랍인들을 저지할 수 있었고, 서쪽에서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승리로 유럽과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이라는 라이벌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동방의 적은 유목민이었던 이슬람화된 오구즈 튀르크인이었는데 11세기 이후에는 셀주크 제국과 소아시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고 아나톨리아에 룸 술탄국이 세워지기에 이른다. 이들을 막기 위해 십자군 기사들을 불러들이기도 했고 마누일 1세 시기 룸 술탄국은 동로마 제국의 속국 내지 영향권 신세였을 정도였다.[7] 마누일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룸 술탄국은 다시 기지개를 폈고 4차 십자군에 의해 본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털린 후에는 예전과 같은 힘을 상실한 제국이 계속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룸 술탄국이 몽골 침공으로 큰 타격을 입고 지방 베이들이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고 독립해서 해체되면서 여러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이 탄생하였는데 이 중 오스만 베이국은 동로마 영토에 제일 가까워서 동로마에 가장 공격적이었는데 동로마 영토를 점령하고는 다른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을 합병하면서 아나톨리아-발칸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에게 영토를 전부 빼았겨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레아 반도 밖에 남지 않은 동로마 제국은 결국 오스만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정교회+그리스어) 계승자인 현 그리스와[8] 튀르크의 계승자인 튀르키예의 대립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동로마-아나톨리아 튀르크 관계는 적대적이기도 했지만 서로 영향을 받은 관계이기도 했는데 투르코폴레스로 동로마군에 튀르크인이 복무하기도 했고 튀르크의 영향을 받아 말기로 갈수록 복식이 튀르크와 비슷해 졌다. 튀르크는 룸 술탄국 시절부터 동로마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고 오스만의 개국공신 중에는 동로마 출신도 있었을 정도로 양측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비슷해져 갔다.
2.3. 유목민
오구즈 튀르크 이전에도 동로마 제국은 초원의 유목민과 종종 충돌하였는데 훈족의 아틸라는 447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바 있었고 그 이후 아바르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아바르족은 복속된 슬라브 부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으며 슬라브족이 발칸 반도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이후 불가르족이 제국을 침입했는데 다뉴브 강 유역에 정착한 불가르족은 볼가강에 정착한 불가르와 달리 현지 슬라브족에 동화되어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성립시키고 언어도 튀르크계 언어에서 슬라브계 언어로 바뀌었다. 이들은 8~9세기에 동로마 제국을 크게 압도할 뻔했다가 동로마의 반격으로 멸망한다.
페체네그, 마자르족과도 충돌하였는데 페체네그는 약체화된 뒤 레부니온 전투, 베로이아 전투로 소멸하였고 마자르는 페체네그의 침공으로 밀려나 판노니아 평원(푸스타)에 정착하고 헝가리를 세웠는데 이들은 불가리아와 동로마 뿐만이 아니라 서유럽을 약탈하였고 레히펠트 전투로 그 기세가 꺾이자 서방교회에 귀의하였다.[9] 그러나 헝가리가 서방교회에 귀의 했어도 동로마의 영향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여서 성 이슈트반 왕관 중 링 부분은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가 사위인 헝가리 왕 게저 1세에게 선물한 것이고 콤니노스 왕조 중흥기에는 하람 전투, 시르미온 전투로 인해 속국신세 였으나 마누일 1세 사후 속국신세에서 벗어났다.
키예프 루스의 원정으로 하자르가 약화되어 세력이 강성해진 쿠만과 가끔 충돌하였으나 쿠만은 키예프 루스와 자주 충돌하여서 인지 동로마 제국과는 많이 싸우지는 않았다. 그 뒤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동로마와 접촉했다. 당시 재건된 동로마는 미하일 8세~안드로니코스 2세 시대까지 사라센이나 튀르크를 견제하기 위해 몽골(+ 일 칸국)과 우호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2.4. 슬라브
제국의 또 다른 적들로는, 발칸 반도 지역에 남하해온 남슬라브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동로마인들의 적이었지만,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 형제의 포교와 제국의 압도적인 문화 덕분에 동로마 문명에 동화되었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동화되었지만, 후에 세르비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을 노리기도 했다. 스스로 '세르비아와 로마니아의 황제' 자리에 올라 로마 황제를 자칭한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이 좋은 예다.[10]초기에 슬라브족들은 발칸 반도 지역에서 약탈을 일삼았지만, 얼마 안 가 제국의 영토에 정착했다. 슬라브족들 외에도, 북쪽에서는 계속해서 스텝지대의 유목민들이 남하해 왔는데, 초기에는 아바르족,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불가르족, 나중에는 페체네그족들이 남하해왔다. 아바르족은 이라클리오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가 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실패하고 세력은 붕괴되었다. 불가르족은 오랜 기간 제국을 괴롭혔다. 튀르크계 불가르족은 토착 슬라브인과 연합, 불가리아 왕국을 세워 제국과 대립했다. 제국은 한 때 불가리아 국왕에게 제위를 선물해서 그들의 비위를 달랜 적도 있었다.(제1차 불가리아 제국) 바실리오스 2세(재위 976년 ~ 1025년) 때는 불가르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기도 했지만(1018년), 이내 제국이 약화되면서 불가리아는 다시 나타난다(제2차 불가리아 제국). 페체네그족은 제국이 가장 약화되었을 때 발칸 반도로 남하해 왔고, 알렉시오스 1세는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쿠만족을 끌어들여 레부니온 전투에서 승리하며 페체네그족을 궤멸시켜 버렸다. 그 후에도 이들은 제국의 병사와 정주민으로서 존속했다. 그들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을 보호했다.
동슬라브인의 키예프 루스와도 자주 교류 및 충돌을 했다. 바이킹 노르드인이 동화된 이들은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도 했고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가 동로마의 사주로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동로마마저 공격하려다 격퇴당했다.(스뱌토슬라프 전쟁) 그 이후 키예프 루스가 동로마로부터 기독교, 키릴 문자, 교회법를 받아들인 이후에는 같은 정교회로서 동질적인 문화권이 되어, 전쟁도 몇 번 있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루스는 우호관계가 되었다. 이런 사례의 대표격으로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일화가 있다.
- 986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는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으로 개혁하고 종교의 권위를 빌려 자신과 후계자들의 통치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기존의 동슬라브인이 믿고 있던 슬라브 신화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도입하기로 결심했다.
- 당시 블라디미르가 도입하고자 한 종교는 볼가 불가르인들이 믿고 있던 이슬람교, 하자르인들이 믿고 있던 유대교, 서유럽 게르만인들의 가톨릭, 그리고 흑해 건너 로마인들의 정교회, 이렇게 네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이슬람교 이맘들로부터 이슬람교가 술과 돼지고기를 금한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루스인들이 술을 못 마신다는 게 말이 되냐?"[11]는 말과 함께 바로 이슬람교를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하자르에서 온 랍비들에게는 "너희들이 하느님한테서 선택받은 민족이라면 왜 너희들 성지인 예루살렘을 잃어버린거냐? 이건 곧 하느님이 너희들을 버렸다는 증거다."라고 반문했고 랍비들이 이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하면서 유대교 역시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 이로써 블라디미르에게는 가톨릭과 정교회,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는데 둘 중 어느 종교로 개종할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인 끝에 서유럽과 동로마, 두 곳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서유럽으로 간 사절단이 서유럽의 분위기에 실망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반면, 동로마로 간 사절단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하기아 소피아를 방문하고 그곳의 화려함에 반해[12] 당장 정교회로 개종할 것을 조언했다.
- 이에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블라디미르는 이제 어떻게 정교회로 개종할지 간만 보고 있었는데 때마침 제위를 노리는 군사 귀족들의 반란으로 위기에 몰린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가 지원 요청을 보내자 지원군 6천 명을 보내주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타 안나와의 결혼을 약속받았다.
- 블라디미르 대공의 지원에 힘입어 바실리오스 2세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여동생 안나는 "아무리 그래도 병사가 필요하다고 여동생을 첩을 수백씩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야만족 왕에게 팔아먹냐"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바실리오스 2세 자신도 제국의 적통 황녀를 이교도 야만족에게 시집보내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싶었는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적거리기 시작했다[13].
- 물론,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에 격분한 블라디미르 대공은 당시 제국령이던 크림 반도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이 지역에서 제국의 거점이던 도시 헤르소니소스[14]을 점령한 뒤 약속 안 지키냐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 귀족들의 반란은 진압했으나, 언제나 양면전선, 심하면 3면 전선에 시달리던[15] 동로마 제국으로써는 신흥 세력인 루스까지 적으로 돌릴 여력이 도저히 없었고, 별 수 없이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써 정교회의 수호자인 입장이기 때문에... 황실의 공주는 죽어도 이교도에게는 시집 못 보낸다!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 정리해라! 그럼 나도 약속 지키겠다!고 응답했다.
- 이미 정교회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블라디미르 대공은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대공은 988년 헤르소니소스에서 정교회로 개종했다. 안나는 별 수 없이
울면서대공에게 시집갔으며, 이로써 현대의 우크라이나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은 동슬라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동시에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 양측 모두 향후 수백년간 우려먹고 긁어먹고도 남을 엄청난 이득을 얻은 외교적인 대승리라 할 만한 사건이기도 하다. 일단 블라디미르 대공은 자신이 정교회로 개종했을 뿐 아니라 가신과 봉신들에게도 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직접 영토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집단 개종과 세례를 독려했다고 하는데...[16] 체계화된 교리를 가진 국가 종교인 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 체계적으로 개선하고 종교의 권위를 빌려 자신과 후계자들의 통치기반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효과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만한 일이었고, 더 나아가 당시까지 문화적, 기술적 수준이 높지 못했던 키예프 루스로써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발전의 기회를 얻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루스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운명의 캐삭빵을 벌이던 동쪽의 이슬람 세력, 호시탐탐 제국의 영향권을 넘보는 서쪽의 가톨릭 세력, 늘 영토를 못 뜯어먹어 안달인 이웃한 남슬라브 세력,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털고가는 북쪽의 유목민 세력에 포위된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 가능한 동맹국을 확보하여 국방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기독교 개종 이후라고 류리크 왕조의 대공국들이 조지아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을 전혀 안 턴 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이교도였던 시절에 툭하면 제국을 대규모로 약탈하러 들어오던 것보다는 훨씬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수백 년 후 동로마 제국이 돌이킬 수 없는 쇠망기에 접어든 1300년대 무렵에는 루스가 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열심히 달래고 부탁해도 딱히 시원한 도움을 주지는 않던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에 비해[17] 모스크바 대공국은 (자신들도 킵차크 칸국의 몽골-타타르의 멍에에서 막 벗어나 썩 좋지 못한 형편이었는데도) 거리가 멀어서 지원군은 보내지는 못했지만 정교회의 총본산인 성 소피아 성당의 수리비라는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해 주는 등 그나마 시원시원하게 동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었던 것. 결국 이 수리비는 성당 고치는 데 안 쓰고 용병 고용비로 다 써 버렸지만, 모스크바 측에서는 별 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로마가 멸망한 훗날 러시아 제국은 슬라브 국가이면서도 제3의 로마로 자칭하며 동로마의 후예를 자칭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같은 정교회를 받아들인 것, 동로마와 혈연적으로 이어졌던 것에서 비롯되었다.[18] 그리고 러시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기 위해 수없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물론 보스포루스 해협이 지리상의 요충지라서 노린 것도 있지만, 옛 동로마와 정교회의 본산이란 상징성, 오스만 치하에서 동방 정교회를 믿는 동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하나의 명분이자 동기 부여였다.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문서 참조.
2.5. 비슬라브 동방 기독교권
아르메니아는 칼케돈 기독교→정교회였던 동로마 제국과는 다르게 오리엔트 정교회(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신봉해서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인도 많았고 황제도 여럿 배출했다.같은 정교회권인 조지아와는 바실리오스 2세 때 전쟁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으며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동로마가 잠시 멸망했을때 전성기를 맞이한 조지아 왕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가 국교였던 에티오피아(악숨 왕국)는 동로마 제국의 제안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교 국가였던 힘야르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교류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발흥으로 동로마가 이집트 및 레반트를 상실하고 에티오피아도 해안가 지역을 상실하면서 서로의 교류가 매우 힘들어졌다.
2.6. 인도 및 중국
서로 먼 거리에 있던 인도의 여러 국가들이나 중국과의 관계는 제한적인 교류만 가능했다. 인도는 그나마 가까운 편이었지만 중국은 너무 멀었기에 서로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로마 제국-중국 관계 참조.[1] 바실리우스 1세의 편지 자체는 남아있지 않다.[2]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 『비잔티움의 헬레니즘(Hellenism in Byzantium)』 p.337[3] 물론 외교 문서이니만큼 '영혼의 형제'니 뭐니 띄워줬지만, 어딜 봐도 동로마인들의 자격지심을 콕콕 자극하는 내용이다. 이미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가 정치/경제적으로 쇠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도시는 그 국가가 기원한 일종의 성지였을 테고, 자기들이 원해서 그런 건 아니라지만 기껏 수복한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에서 통치 개판으로 하다가 민심 잃고 쫓겨나서 프랑크인들이 대신 로마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동로마인들에게 유쾌하게 느껴졌을 리가 없다. 답장의 번역자 찰스 웨스트에 따르면, 애초에 이 답장의 실제 저자 자체가 로마 출신이자 동로마통이기도 했던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이니, 애초에 철저하게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4]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는 젊은 시절에는 자비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학하기도 하는 등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대 서방의 대표적인 동로마통 인물로 활약하였다. 968년 이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사절 업무를 수행하는 등 대(對) 동로마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전까지는 딱히 동로마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968년 감금당한 이후로는 단단히 앙심을 품고 동로마 궁정을 욕하는 온갖 악담과 사실 왜곡을 늘어놓는 기록을 남겼다. 문제는 이후 그와 같은 동로마통 인물이 서방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평도 있을 정도로 동로마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리우트프란드였기에, 동로마와 관련하여 남긴 여러 악평들이 후세에까지 제법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5] 오늘날 알바니아의 듀러스(Durrës).[6] 이때 동로마 제국은 발칸반도의 아바르와 동방의 페르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악조건하에 있었다.[7] 왜 옛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내륙을 직접 수복하지 않았나면 이미 아나톨리아에 튀르크 부족들이 상당히 이주해서 이들을 통제할 룸 술탄국이라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골 침공으로 룸 술탄국이 해체되고 여러 아나톨리아 베이국들로 분할되니 동로마는 이전보다 아나톨리아를 지키기가 힘들어졌고 결국 그 베이국 중 하나인 오스만 베이국의 성장으로 멸망하게 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8] 그러나 로마 제국은 보편제국인 반면, 현재의 그리스는 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계승자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더군다나 국호를 다시 로마라고 한 것도 아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구 동로마 제국 시기의 고토들도 영유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계승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9] 사실 마자르는 그 이전에는 동방교회의 영향이 더 컸지만 레히펠트 전투의 영향으로 서방교회에 귀의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10] 심지어 두샨은 새로 제정한 법전에 자신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계자임을 명시하기도 했다.[11] 키예프 루스 때나 지금이나 러시아인은 유럽에서 알아주는 술꾼이다. 다만 중세 무슬림들은 술을 잘만 마시고 다니는 사례도 있긴 하다.[12] 동로마를 사절단이 하기아 소피아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님긴 기록은 하기아 소피아 문서에서 볼 수 있다.[13] 이런 바실리오스 2세의 태도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한 것이, 제위의 여계 계승(특히 사위 계승)을 폭 넓게 인정하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통 황녀를 외국으로 시집보내는 것을 엄청난 금기로 여겼다. 혼인동맹을 위해 황실의 여성을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 정도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전 황제의 딸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타를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과 안나의 사례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14] 오늘날 우크라이나 헤르손의 어원이지만 실제 위치는 세바스토폴이다.[15] 사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지중해, 중근동 문화권의 강대국이었다는 평이 아깝지 않은 것이... 사실상 모든 국경이 군사적 접경지대인 상태에서도 잘만 버텨냈다는 것이다.[16] 일례로 개종 후 블라디미르는 수도 키예프로 돌아오자마자 키예프 주민들을 불러모아 단체로 드니프로 강에 입수(...)시켜 세례를 받게 했다.[17] 서유럽이 도와주기 싫어서 도와주지 않았다기보다는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미 한 차례 십자군을 결성해서 도와주러 왔다가 국왕이 전사하면서 오스만에게 완전 박살이 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서로 백년전쟁 하느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도 자국과 인접한 이슬람 세력과 싸우는 데 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다 교황이 도와달라고 서유럽 각국에 호소했지만, 이전만큼 교황의 말을 듣던 시기가 아니었다.[18] 동로마 제국 멸망 뒤 러시아 제국의 전신인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의 결혼이 가장 큰 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