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광장의 분수와 엘 라흐만 모스크 (과거 생 폴 성당)
셰르셸 항구와 1881년에 세워진 포흐 주앙빌 등대
로마 시대 원형 극장 유적
1. 개요
아랍어 شرشال베르베르어 ⵛⴻⵔⵛⴻⵍ
영어, 프랑스어 Cherchell
알제리 북부의 도시. 수도 알제에서 서쪽으로 60km, 테네스에서 동쪽으로 70km, 츨레프에서 동북쪽으로 8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5만명으로, 티파자 주의 최대 도시지만 주도는 아니다. 동쪽의 티파자와 함께 로마 유적과 바다가 어우리진, 알제리 중서부 해안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이다. 동서로 길게 늘어선 시가지에는 두 군데의 로마 유적과 엘 라흐만 모스크, 엔누르 모스크, 밥 엘 가르브, 고고학 박물관 등의 볼거리가 있다.
과거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수도였고, 로마 제국 시기에는 카이사레아 마우레타니아이로 불리며 알제리 해안의 중심 도시이자 해군 기지로 번영하였다. 이슬람 정복 기에 거의 유적이 되었다가 16세기부터 재건되었고, 카이사레아의 아랍식 발음인 샤르샬로 개칭되었다. 이후 바르바리 해적과 스페인의 점령이 반복되다가 프랑스령 알제리에 소속되어 프랑스식 발음인 셰르셸로 불리게 되었고, 군사 기지이자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2. 역사
카이사레아 유적에서 출토되어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유바 2세 &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 프톨레마이오스 일가 석상 |
기원전 400년경 카르타고 무역 거점 이올 (Iol)로 세워졌고, 기원전 3세기경 요새화되었다. 그러다 2차 포에니 전쟁 후 누미디아령이 되었고, 바알 함몬 (로마의 사투르누스와 호환됨)을 비롯한 카르타고 신들과 물고기 등이 묘사된 동전이 발행되었다. 기원전 106년 유구르타 전쟁 당시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보쿠스 1세는 사위 유구르타를 배신하고 로마 측으로 전향하였는데, 그 대가로 누미디아의 영토 서부를 할양받았다. 그중 이올은 볼루빌리스와 함께 마우레타니아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33년, 보쿠스 1세의 손자 보쿠스 2세가 사망하며 왕국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맡기자 일대는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다만 8년 후 아우구스투스는 그 방계이자 누미디아 왕이던 유바 2세를 마우레타니아 왕에 봉하였다. 유바 2세는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수도 이올을 아우구스투스의 법적 부친인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카이사레아로 명명하였다.
2.1. 전성기
로마 시대 포룸 유적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
유바 2세와 안토니우스 및 클레오파트라 7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도시를 로마 / 프톨레마이오스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증축하였다. 격자무늬 도로와 함께 7km에 달하는 성벽, 극장, 미술관, 그리고 파로스 등대를 모방한 등대까지 세워졌다. 그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40년에 로마를 방문했다가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마우레타니아의 로마 병합이 선포되어 서부는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동부는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칼리굴라 역시 암살당하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42년 프톨레마이오스의 해방노예 아이데몬과 베르베르 장군 살바누스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와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를 파견해 44년까지 3년 간의 전쟁 끝에 반군을 항복시키고 끝내 로마 지배를 확립하였다.
전쟁 중 로마군의 진압 거점이던 카이사레아는 전후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의 주도로써 카이사레아 마우레타니아이로 명명되었고, 로마 퇴역병들이 정착하며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식민도시로써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카이사레아로도 불리게 되었고, 일대에 대한 로마화와 안정 유지의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군사적으로는 로마의 마우레타니아 암대의 중심항이 되었고, 로마 보조병이 주둔하였기에 170년대 베르베르 인들의 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를 거치며 시내에는 히드포룸, 극장, 신전, 바실리카 등과 화려한 모자이크를 갖춘 빌라들이 세워졌다. 본래 페니키아 / 그리스 / 로마계에 일부 베르베르계로 구성되어 있던 주민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혼혈되었다. 한편 2세기 말엽 북아프리카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새 포룸이 세워졌고, 165년 이곳에서 태어난 마크리누스는 3세기 초엽 첫 베르베르계 황제로 등극하였다.
전성기 시절 카이사레아는 3만 인구를 자랑하였다. 2-3세기 기독교 확산기에는 현지 처녀 마크리아나가 디아나 여신상을 파괴했다는 혐의로 경기장에서 숫소와 표범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녀는 후일 성인으로 추승되어 축일은 1월 9일이다. 다만 4세기 들어 주민 절반이 기독교도가 되었고, 314년부터는 주교구로 편성되었다. 로마에 절대 충성하던 도시는 371년과 429년에 각각 베르베르 반란과 반달족의 침공 당시에 함락되고 약탈당하며 쇠퇴하였다. 반달 왕국은 카르타고와 함께 카이사레아를 양대 해군 기지로 삼았고, 이를 기반으로 로마령 지중해에 대한 습격을 가하였다. 따라서 도시는 그 전리품의 유입 덕에 번영하였다. 5세기 중반 무렵 카이사레아는 당대 최고의 라틴 문법학자인 프리스키아누스의 고향이었다. 비록 그는 5세기 말엽 동로마령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였으나, 당대 최고의 라틴어 학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카이사레아의 로마화 수준을 보여주는 증표가 된다.
2.2. 중세
100 기둥 사원이라 불리는 엔누르 모스크
484년 반달 왕국의 아리우스파 강요로 티파사와 마찬가지로 카이사레아 역시 정통파 주교가 사라졌다. 이러한 종교적 억압은 동로마 제국의 개입으로 이어졌고, 533년 일대는 동로마령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카이사레아를 반달 해군의 거점에서 기존 무역 도시로 환원하며 반달족 귀족층을 억압하고 반달 시기의 성채를 공공 건물로 환원하였다. 다만 강화된 성벽은 유지하였다. 경제적으로 위축되던 동로마 제국은 농업에 있어 로마인이나 반달족 대신 값싼 현지 베르베르인 노동력을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로써 시민들의 주를 이루었던 자영농 계층이 몰락하였고, 로마 색채는 점차 희석되었다. 또한 군대를 담당했던 반달족 귀족들이 쇠락하며 수비력이 약화되었다. 6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우마이야 왕조의 마그레브 정복 당시 카이사레아는 장기간 포위되었고, 동로마 측의 해상 보급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안전을 대가로 항복하였다.
하지만 8세기 들어 과도한 지즈야 부과와 차별에 반발한 로마-베르베르 주민들은 동로마 측의 지원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수차례의 봉기 후 9세기 들어 무슬림 지배자 (술라이만 왕조로 추정)가 성벽을 허물고 시내의 로마식 건물들을 재활용하였다. 이로써 도시는 무슬림 군대의 병영 옆 작은 마을로 전락하였고, 카이사레아의 아랍식 발음인 샤르샬로 불리게 되었다. 다만 10세기 파티마 왕조와 지리 왕조에 들어 종교적 관용이 적용되었기에 기독교 공동체는 최소 12세기까지는 지속될 수 있었고, 일부 시가지가 재건되었다. 1144년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군이 인근 베레슈크를 습격한 데에 이어 16세기 초엽 아라곤 왕국의 스페인이 알제와 함께 샤르샬을 점령하였다. 1516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복속한 바르바로사 형제가 점령하였고, 형 오루츠 레이스가 성채를 세웠다. 1574년에는 로마 유적을 재활용한 '백개의 기둥' (엣 누르) 모스크가 세워졌다. 다만 실제 기둥의 개수는 89개라 한다.
2.3. 근현대
프랑스 시절 세워진 개선문이자 성벽의 일부이던 밥 엘 가르브
프랑스 시절 세워진 생 폴 성당. 독립 후 엘 라흐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이후 샤르샬은 바르바리 해적의 사략선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이에 스페인과 몰타기사단 해군이 1612년 등 종종 습격하였다. 17-18세기 스페인 등이 재차 점령한 시기에는 기존 오스만 성채를 능가하는 궁전이 세워졌으나 기존 성채 역시 군사적으로 중요했기에 허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1738년의 지진으로 성벽이 붕괴하자 스페인 군은 철수하였고, 샤르샬은 다시 오스만령 알제 총독령이 되었다. 그러던 1840년 프랑스 군이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하였고, 현지 파샤를 포함한 해적들은 일소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로마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고 일부는 재건하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포룸에 있던 로마 신전을 재활용한 생 폴 성당과 현재까지 식수원으로 쓰이는 유바 2세 시절의 저수조이다. 다만 유적 중에서도 원형극장의 경우는 복원이 불가하다 여겨 새 성채와 병영 건설의 자재로 활용하였고, 히드포룸 역시 성녀 마르키아나의 흔적을 찾기 위해 훼손된 후 교회 자재로 활용되었다.
프랑스식 발음인 '셰르셸'로 불리게 된 도시는 많은 유럽인 방문객과 정착민을 유치하였다. 20세기 초엽 다수를 차지했던 유럽계 인구는 1차 대전 후 정체되었고, 점차 농장의 값싼 노동력으로써 유입된 현지 아랍-베르베르 인구가 40%에 육박하게 되었다. 2차 대전 시기 셰르셀의 도서관, 카페, 식당, 호텔 등은 횃불 작전으로 유입된 미군에 의해 수용되었고, 1942년 10월에는 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리기도 하였다. 전쟁으로 관광업이 침체되며 그에 의존하던 셰르셸의 경제 역시 쇠퇴하였고, 1952년에 이르면 20년 전 인구의 절반인 1만 5천명 정도만이 거주하였다. 다만 프랑스 지배력이 강했기에 알제리 독립 전쟁 시기에도 셰르셸은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1966년 유럽계 주민들은 평화롭게 도시를 떠났다. 독립 후 1만의 소도시로 전락했던 셰르셸은 80-90년대 관광업과 더불어 대리석, 석고, 철광석 채굴 산업과 석유, 담배, 도기 수출로 3만 인구를 회복하였다.
3. 갤러리
19세기 셰르셸 시가지와 유적 지도
로마 시대 수도교 유구
순교자 광장의 로마식 기둥
로마 시대 극장 유구
엘 라흐만 모스크의 미나렛 | 로마 유적의 기둥들 |
파일:알제리 셰르셸 1.jpg
엘 라흐만 모스크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
셰르셸 고고학 박물관
- [(후방주의) 세 여신들 모자이크 / 기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