πελταστής / Peltast 왼쪽은 그리스어 - 오른쪽은 영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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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의 투창병. 트라키아 지방의 전통적인 초승달형 방패 펠타(Pelta)를 장비하고 전장에 나섰기에 펠타스트라고 불렸다.2. 고대
펠타스트는 고대 발칸반도 전역에서 운용되었던 경무장 투창병으로, 본디 트라키아 지방의 산악민족들로부터 유래된 이 병종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그리스의 군사 체계에 편입되었다.고대 지중해의 군사적 전통에 따라 호플리테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펠타스트 또한 개인의 장비는 개인이 마련해야 했기에 충분한 재력을 지닌 시민들이 주가 되었던 중장보병인 호플리테스와 달리 갖출 무장과 방어구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펠타스트는 주로 폴리스의 가난한 하층민이나 트라키아, 일리리아 등의 외국 출신 용병들이 대다수의 구성원을 이뤘다.
이들은 투창으로 무장한 숙련된 척후병이자 고대 그리스 군대의 중핵을 담당한 호플리테스와 마케도니안 팔랑크스를 보조하는 병과였으며, 전방과 후방을 자유롭게 오가며 치명적인 투창으로 적군에게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 이들의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펠타스트는 점차 중장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는 펠타스트가 운용되었던 고대 동부 지중해의 군사 독트린이 전환됨에 따른 필연적인 변화였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과 계승자 왕조들간의 숱한 전쟁 속에서 전열의 핵으로써 활약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보였던 치명적인 문제점인 기동성과 유연성의 결락을 도저히 기병대의 운용만으로는 완벽하게 커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었다.[1] 이는 기원전 3세기에 있었던 켈트족의 소아시아 대이주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는데, 당대 서방세계의 최강국이었던 셀레우코스 제국군은 그 위명에도 불구하고 부족단위의 연합군이었던 켈트족의 군대를 압도하지 못했을 뿐더러 결국 전쟁 자체는 승리했음에도 소아시아의 한가운데인 갈라티아[2]에 켈트족의 왕국을 세우는 것까지 허용하고 마는 추태를 보였다.[3]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팔랑크스 전술의 근본적 한계는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메가스 이후 전술적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헬레니즘 세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으며, 헬레니즘 세계의 지도자들은 둔중한 팔랑크스를 보조하며 때로는 구멍난 전열을 매꿔줄 수 있는 소방수. 즉 충분한 기동성이 있으면서도 적당한 방호력을 지닌 병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4] 그에 따라 펠타스트는 기존의 경장 투창병에서 보다 다양한 상황에의 대응이 가능한 병과로 도약하게 되는데 그 성공적 변화의 예가 소수의 투창과 투레오스 방패(Thureos Shield)[5], 그리고 단창으로 무장한 중(中)형 보병[6] 투레오포로이(Thureophoroi)였다.
이들은 기존의 펠타스트의 역할이었던 투창을 통한 유격전 이외에도 켈트족의 전투방식을 모방하여 마케도니안 팔랑크스의 취약한 양익과 후방을 지원하는 보조병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거기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사슬 갑옷을 입힘으로써 방호력을 높인 토라키타이(Thorakitai)[7]는 기존의 보조병 체제에서 벗어나 마케도니안 팔랑크스와 더불어 디아도코이 제국의 주력 보병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8] 단언컨데, 이들은 카타프락토이와 더불어 지정학적 불안정 탓에 이민족들과의 잦은 전쟁을 치러야 했던 헬레니즘 세계의 군사 독트린이 만들어낸 걸작품중 하나였다.
계승자 왕조의 투레오포로이(우)와 토라키타이(좌). 투레오스 방패와 단창으로 무장하고 있다.
물론 동부 지중해의 모든 곳에서 펠타스트가 위와 같은 변화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숱한 전쟁으로 인해 군사적, 전술적 변화가 격렬했던 아나톨리아 반도와 페르시아를 위시한 디아도코이의 세력권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평화가 지속되었던 그리스 본토에서 펠타스트는 원형을 상당기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비단 그리스 본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디아도코이 왕조의 세력권에서도 동일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경무장 투창병은 손쉽게 충원할 수 있으면서도 나름의 전술적 가치가 있는 이른바 높은 가성비를 지닌 병종이었고, 이들의 유용함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래 꾸준히 증명되어왔기 때문이었다.[9]
하지만 이러한 펠타스트의 전성기는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반도가 로마에게 편입되고, 셀레우코스 제국이 무리한 대외원정의 연이은 실패와 파르티아의 약진에 의해 무너짐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로마에게는 레기온이라는 펠타스트의 상위 호환의 병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파르티아는 본디 유목민족이었기에 정주민족의 보병 전술에는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양쪽 모두 경무장 투창병을 운용하기는 하였으나 기존의 펠타스트를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그렇게 펠타스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중세
펠타스트가 다시 등장한 시대는 11세기 초~12세기 초의 동로마 제국이었다. 트라키아 지방에서 발흥한 동로마 제국은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 이후 붕괴된 테마 제도 중심의 지방군을 재편성하기 위해 기간 병력으로 삼을 보병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런 요구에 따라 3m 미만의 짧은 단창과 방패, 천 갑옷, 사슬조끼등을 갖춘 산악 보병들이 탄생했는데 이들을 펠타스트라고 불렀다.그러나 이들은 고대의 펠타스트들과는 달리 투창과 다트는 부무장이었고 보병창이 주무기였으며, 스스로의 호칭에 걸맞게 펠타 방패를 쓰기도 했지만 동로마 특유의 라운드 쉴드나 노르만족에게서 유래된 카이트 쉴드가 더 흔하게 착용되었다.
펠타스트들은 일종의 중장보병이자 주요병종인 스쿠타토스와 궁기병, 경보병 포에데라티들 사이의 기간병종이였다. 따라서 무장의 정도도 중장보병과 경보병 사이의 중간정도 되는 급이었다고 한다.
12세기 초중반에 제국의 중앙군이 복구되고, 테마 제도가 봉건적인 프로니아 제도로 개편되어 중장보병이 확충되자, 펠타스트는 조금씩 외국 경보병 용병대로 바뀌어갔다. 이들이 활약한 전투는 1차 십자군의 니케아 공방전과 도릴라에온 협곡 전투였다.
4. 매체에서 등장
4.1. 게임
4.1.1. 도미네이션즈
그리스 투창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용병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그리스 투창병(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4.1.2. 토탈 워: 로마2
그리스나 트라키아 계열의 국가들이 사용한다. 사격 능력은 평범하나, 탄탄한 갑옷과 방패, 그리고 준수한 근접전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급 보병과는 대등하게 싸우는게 가능하다. 그외에 트라키아 펠타스트가 우월한 사격전 능력과 뛰어난 근접전 능력을 가지고 있어, 투창에 숫자가 줄어든 적병을 오히려 썰어버리며, 키메리아, 폰토스등 일부 국가들은 최상급 펠타스트를 보유해 이들의 펠타스트가 사격전 능력에서 순위를 앞다툰다. 그리스 공용으론 기술 개발로 경장 펠타스트로 바뀌는데, 장비가 부실해진 대신 사격전 능력과 탄약의 수가 늘어난다. 그러나 방어구가 약해지는 단점이 너무나 커서 기술 개발을 해도 업그레이드를 안 시키는게 좋다. 최상위 병영에서 왕실 펠타스트가 등장하는데, 이름만 펠타스트지 최상급 검보병으로, 순간 화력은 전보병 최강을 앞다투게 강하다. 대신 탄약의 수는 크게 줄었다.[1] 사실 동방 원정 시절만 해도 마케도니안 팔랑크스는 장창병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동성과 유연함을 보였다. 이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종군한 페제타로이가 선왕 필리포스 시절부터 짬밥을 먹어왔던 고참병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 시기의 팔랑크스는 후대의 디아도코이 시대의 팔랑크스에 비해 사리사의 길이도 짧았으며 무장도 가벼웠기에 그러한 전술적 기동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의 주적은 다름 아닌 타 국가의 팔랑기테스(팔랑크스 진형을 이루는 자)였고, 팔랑크스끼리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사리사는 점차 길어졌으며 갑주는 두터워졌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변화의 결과는 기동성의 급격한 저하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팔랑크스의 전술적 가능성을 축소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2] 지금의 앙카라 지방.[3]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본가인 마케도니아 왕국이나 그리스 도시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켈트족과 싸우다가 무려 국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가 사로잡혀 목이 잘렸고(!), 그리스 도시들은 켈트족의 침공을 막지 못해 모든 그리스인들이 신성하게 숭배하는 델포이 신전이 싸그리 털려 황금을 모조리 빼앗기는 수모까지 겪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켈트족들이 약탈한 델포이 신전의 황금 중 일부는 켈트족들이 그들의 고향인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남부로 옮겼는데, 나중에 갈리아 남부를 점령한 로마 장군이 이 황금을 보고 빼앗으려다 실패했다고 전해진다.[4] 물론 대이주 시기 이전의 헬레니즘 세계의 지휘관들도 바보는 아니어서 양익 끝부분에 호플리테스나 점령지의 지역병들을 배치하는 등,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의 단점을 최소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호플리테스는 원조 팔랑크스답게 둔중하고 유연하지 못해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를 지원하는 데는 부적합했다. 전술적으로도 그렇지만 충원에도 애로사항이 꽃폈는데, 우선적으로 그리스적 중장보병의 전통이 있는 지역에서만 충원이 가능했다. 반면 점령지에서 징발한 지역병들은 낮은 사기와 군율 때문에 전황이 조금만 불리해지면 전열을 내팽개치고 도주하기 일쑤였기에 도무지 믿을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즉 양쪽 모두 지휘관들이 원한 요건을 만족하지 못했던 것.[5] 켈트족으로부터 유래된 대형 원추형 방패.[6] 경보병과 중보병의 중간 수준의 무장을 한 보병.[7] 토락스는 그리스어로 흉갑을 의미한다.[8] 폰토스를 비롯한 디아도코이의 군대와 부딪힌 로마군이 기록에 남긴, 소위 '짝퉁 레기온'이 바로 이 토라키타이이다. 실제 이들의 무장과 전술은 로마군과 상당히 유사했다.[9] 쉽게 말해 다수의 투창을 휴대한 경보병으로써의 펠타스트는 토라키타이 등장 이후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전장에서 굴려졌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