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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4:27:34

네 명의 집정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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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희생자들4. 사건 진행과 여파

1. 개요

118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황제의 명령을 따른다며 원로원의 동의를 받고 집정관급 인사이자 전임 황제 트라야누스의 최측근 4명을 살해한 사건. 하드리아누스가 재위 기간 내내 원로원과 갈등을 벌이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2. 배경

로마 제국 13대 황제 트라야누스는 아내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화목한 사이였지만 자식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 대신 자신의 조카인 살로니아 마티디아와 전직 집정관 루키우스 비비우스 사비누스의 딸인 비비아 사비나를 친자식처럼 아꼈다고 전해진다. 비비아 사비나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세간에서는 그녀의 남편감이 누가 될 것인지를 놓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트라야누스의 총애를 받는 그녀와 결혼한 자가 차기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폼페이아 플로티나는 아버지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가 사망한 뒤 트라야누스의 가정에서 길려진 하드리아누스를 친자식처럼 여겼다. 그녀는 하드리아누스가 사비나의 적합한 남편감이니 결혼시키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사비나의 어머니 마티디아도 하드리아누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트라야누스는 내키지 않아 했다고 전해지나, 아내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서기 100년경 하드리아누스와 사비나를 결혼시켰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인정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가 끊임없이 자신의 측근들과 대립했을 때 제지하지 않았고,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한다고 밝히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는 다키아 전쟁으로 얻어낸 다키아 속주는 수익에 비해 방위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고, 결국 아테네의 아르콘 또는 총독으로 좌천되어 철학 공부를 틈틈이 했다.

그러던 113년,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고자 아내와 함께 동방으로 향하던 중 아테네에 들러 하드리아누스와 만났다. 플로티나는 남편에게 하드리아누스에게 중임을 맡기라고 강력하게 설득했고, 트라야누스는 이에 따라 하드리아누스를 시리아 총독에 임명해 원정군의 보급로를 유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후 감행된 원정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해 파르티아 수도 크테시폰을 공략하고 로마 함대가 페르시아만까지 진출하면서 성공하는 듯했으나,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파르티아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의 발발 등 여러 악조건으로 인해 끝내 실패했다.

원정 실패에 상심한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후속 조치를 맡긴 뒤 117년 7월 말에 플로티나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러나 117년 8월 초 킬리키아 지방의 셀리누스에 도착했을 때 뇌졸중으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플로티나는 하드리아누스를 불러서 임종을 지켜보게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 황제 사후 원로원에 "황제가 죽기 이틀 전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라는 서신이 보내졌는데, 이 편지엔 트라야누스가 아니라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원로원이 의문을 제기하자, 플로티나는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

일설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한다. 심지어 플로티나와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몰래 불륜을 맺었으며,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건 이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소문을 명백한 거짓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이 불명확했기에 의혹은 끊이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를 후계자로 지명할 계획을 세우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네가 통치를 행사하라"라고 일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실제로 로마에서 발굴된 한 묘비가 이런 음모론에 힘을 더해주는데, 이 묘비의 주인 해방노예 마르쿠스 울피우스 파이디무스(Marcus Ulpius Phaedimus)는 트라야누스의 음료 담당 시종이라고 쓰여있었고, 사망한 날짜가 트라야누스가 사망한 3일 후였으며 사망 당시 겨우 28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종이 플로티나의 명을 받고 트라야누스의 목숨을 끊은 후 입막음으로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시리아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원정 실패와 유대 반란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는 한편, 자신에게 제기되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대한 관대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로마에 남아있던 근위대장 푸블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도시 장관 바비우스 마케르가 반역을 꾀하는 조짐이 있으니 즉시 죽여야 하며, 트라야누스 치세 때 섬으로 유배되었던 라베리우스 막시무스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크라수스 프루기 리키니아누스[1]도 반란을 꾸미고 있으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묵살했다.[2] 또한 군인들에게 보너스를 두둑히 지급해 지지를 확보했다.

한편,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 서신을 보내 트라야누스를 신격화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이 황위에 오를 때 원로원에 허락을 구하지 않은 점을 사과하며 "병사들이 황제 추대를 서두른 것은 황제가 없이는 국가가 있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면서 하드리아누스에게 개선식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선황제의 초상을 전차에 실어서 개선식의 주인공으로 삼게 했다. 또한 자신이 즉위할 때 제공되었던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아직 황제로서 별다른 업적도 세우지 못했는데 그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수는 없다"라며 거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기부금을 송금하고 속주세를 줄이고 공공 행사를 기획하는 등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근위대장 아티아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적발'하면서, 로마에 피바람이 불었다.

3. 희생자들

4. 사건 진행과 여파

118년, 근위대장 아티아누스는 니그리누스가 팔마, 켈수스, 퀴에투스와 공모하여 하드리아누스가 제사를 지낼 때 암살한 뒤 황제를 칭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가 이들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원로원에 승인을 요구했다. 원로원은 황제의 뜻에 따라 네 사람을 처형하기로 결의했다. 니그리누스는 파벤티아, 팔마는 타라시나, 켈수스는 바이아에서 피살되었고, 퀴에투스는 로마로 귀환하던 중 살해되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포함한 여러 로마 전승이 전하는 하드리아누스의 자서전에 따르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들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원로원이 아티아누스의 말만 믿고 처형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의혹에 둘러싸인 집권을 공공연히 하기 위해 네 명의 경쟁자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민심 역시 4명의 집정관 계급 인사들을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측결 처형한 것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하드리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한 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내렸다. 민중에 지금하기로 했던 보너스를 2배로 늘렸고, 원로원에 "앞으로는 원로원의 투표가 있을 때까지 의원을 처벌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다. 또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의 재산을 황제 재산에 귀속시키지 말고 공공 금고에 예치하게 했으며, 로마와 이탈리아의 채무자들의 빚을 덜어주고자 막대한 액수의 돈을 송금했고, 속주민들이 세금을 내지 못해서 생긴 체납금을 상당부분 탕감했다. 심지어 약속 어음을 신격화된 트라야누스 신전에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가난에 시달리는 원로원 의원들의 재산을 보충하고, 빈궁하게 지내는 여인들을 지원했으며, 6일 연속으로 검투사 경기를 벌이고 자신의 생일에 1,000마리의 야수를 투입했다.

이렇게 해서 민심을 수습하고 원로원을 안심시키는 한편, 네 사람을 죽인 책임을 아티아누스에게 떠넘겼다. 119년, 황명을 사칭하여 네 사람을 죽여버렸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근위대장 직을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그 대신 원로원 의원직을 유지하게 해주고 오르나멘타 콘술라리아(ornamenta consularia: 집정관현장)의 영예를 수여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고 밝혔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아티아누스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분명하지 않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가 민심 수습책을 잇따라 시행하고 원로원과 타협하려는 의지를 보였음에도, 명망높은 동료 의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암살 책임을 원로원에게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는 그의 행태에 반감을 품은 의원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 내 기류가 자신에게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걸 감지하고, 그들을 정국에서 배제하고 최측근들을 위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재위 기간 중 절반 이상을 제국 전역 순방에 할애했다. 말년에는 다시는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의원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여러 의원을 반역 혐의로 체포해 처형하거나 감옥에 수감했다. 이로 인해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하드리아누스 사후 기록말살형까지 거론되었다가 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만류로 중단되기도 했다.

136년, 하드리아누스는 118년에 피살당한 니그리누스의 사위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입양하여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시키고 후계자로 삼았다. 이에 대해 앤서니 비렐리는 하드리아누스가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을 죽인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이런 선택을 했을 거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판노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38년 1월에 폐결핵으로 요절했고, 하드리아누스의 오랜 친구이자 인척관계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새 후계자로 지명되어 138년 7월 10일 하드리아누스 사후 새 황제로 등극했다.


[1] 96년 11월 네르바 황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아내와 함께 타렌툼으로 유배되었다가 트라야누스 즉위 후 로마로 귀환했지만, 나중에 트라야누스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가 또다시 발각되어 이탈리아 해안에서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었다.[2] 다만 크라수스 프루기는 섬을 탈출하려 시도했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