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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8181c><colcolor=#f7c400> | |||
출생 | 1440년 1월 22일 | ||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 |||
사망 | 1505년 10월 27일 (향년 65세) | ||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 |||
묘소 | 대천사 성당 | ||
재위기간 | 모스크바 대공 | ||
1462년 3월 28일 ~ 1505년 10월 2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8181c><colcolor=#f7c400> 가문 | 류리크 가문 | |
이름 | 이반 바실례비치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 ||
아버지 | 바실리 2세 | ||
어머니 | 보롭스크의 마리야 | ||
형제자매 | 안나, 안드레이 | ||
배우자 | 트베리의 마리야 (1452년 결혼 / 1467년 사망) | ||
소피아 팔레올로기나 (1472년 결혼 / 1503년 사망) | |||
자녀 | 마리야, 이반, 안나, 옐레나, 표도시야, 옐레나, 바실리 3세, 유리, 드미트리, 예브도키나, 표도시야, 시메온, 안드레이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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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키예프 루스 시대 이후[1] Veliky 칭호를 받은 3명의 러시아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2]
2. 생애
모스크바 대공이었던 장님왕 바실리 2세(Vasily II Tyomniy)의 아들로 1446년 숙부 드미트리가 중간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상당히 파란만장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바실리 2세가 복위하여 숙부 드미트리를 흑역사[3]화시켰고, 1462년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즉위 당시 러시아는 여러 공국들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각 공국들이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한 정략적 수준의 다툼이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전성기가 지나 비록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제후들은 몽골계 타타르족 칸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초기에는 타타르계 카잔 칸국을 상대로 군사적인 행동을 한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적인 행적은 없다. 다만 이 시기 유명한 것으로는 1469년에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인 조이 팔레올로기나와 혼인을 맺은 것[4] 이때 러시아는 교황청으로부터 제 3의 로마 제국이라는 정통성을 인정 받게 되었다. 더불어 모스크바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간 옛 동로마 영역 대신 정교회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으며 이는 러시아 정교회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상징이었던 쌍두독수리 휘장이 러시아의 공식 휘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군사행동을 통해 타타르계 카잔 칸국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되자 아버지 시절부터 계속되던 러시아 북방 지역의 제후들을 굴복시키기 위한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 1463년에 야로슬라블을 합병하였고, 1474년에는 로스토프가 합병되었다. 그리고 그런대로 힘이 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거의 매해 쳐들어가서 털었으며, 1478년에는 힘으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정치적 파워를 서서히 무력화시키면서 1489년에 완전히 합병시켰다. 더불어 한 때 모스크바 공국의 경쟁자이자 정략적인 파트너로 이반 3세와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던 트베리 공국 역시 1485년 찍소리 못하고 그대로 합병당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키에프-루스계 공국들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복속되었으며, 라쟌 공국과 프스코프 공국만이 막대한 조공을 약속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북방 공국들을 갈아먹으면서 동시에 몽골계 타타르족 국가였던 킵차크 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당시 킵차크 칸국은 티무르 제국에게 갈리고 그나마 국가의 중심을 잡아주던 인물인 에디구가 사망하면서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그래도 러시아 군주들을 상대로의 종주권은 여전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크림 칸국과 제휴하여 "우리는 더 이상 칸의 신하가 아니다!"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전쟁이 벌어졌지만 1480년 이반 3세가 아메드 칸의 군대를 패퇴시키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를 마침내 벗어던지고 완전한 주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5]
알렉세이 킵셴코(Алексей Кившенко(Aleksey Kivshenko)), <칸의 서한을 찢는 이반 3세> |
1490년대에는 속령의 제후들을 갈아버리면서 중앙집권화 정책에 착수하였다. 특히 중앙집권화에 걸림돌이 되는 보야르(대귀족)들은 수틀리면 체포당하거나 처형당했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신하에게 영지를 하사하지만 세습은 할 수 없다는 포메스티 제도를 시행하였다. 더불어 1490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맏아들이 통풍으로 사망[6]하면서 손자인 드미트리와 소피야의 아들인 바실리를 놓고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7] 1497년 장고 끝에 드미트리를 후계자로 지명하자 이에 반발한 소피야가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추방당했다. 하지만 150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맹을 맺은 바실리가 반란을 일으켜 1502년에 바실리 3세로 정식 후계자가 되었다.
재위 말기에는 과거 선조들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이 계속되었지만 영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무력화시켰던 카잔 칸국도 서서히 되살아나 저항을 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벌어진
3. 수제브니크
이반 3세는 본격적인 국가 행정 조직과 법전을 만들어 냈으며,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 크레믈린 궁전을 건설하는 등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 낸 제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복한 땅을 군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대가로 그에 대한 충성과 복무를 요구하는 새로운 토지 소유제 포메스티에(Pomestie)를 도입한 것이었다.4. 평가
이반 3세는 키예프 루스 이후 러시아의 군주 중 최초의 통일 러시아 전국의 군주로 평가된다.[8] 분열되었던 러시아 제후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몽골계 타타르족의 예속에서 벗어나 미래의 루스 차르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Russian Empire) 성립에 기틀을 닦은 위인이라는 점은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Veliky란 칭호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파견한 사절이 찬사하면서 붙인 호칭이고 말년의 실정과 사후의 혼미 때문에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 이반 3세가 이룩한 것을 감안하면 Veliky란 칭호가 적절하다고 이야기하는 학자가 있는 반면 "그 양반이 무슨 Veliky"라고 까는 학자도 있다.[1] 굳이 이걸 써놓는 이유는 키예프 루스 시대의 공들 중에서도 Veliky 칭호를 받은 인물들이 몇몇 있기 때문이다.[2] 나머지 두 명은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어 벨리키, 혹은 벨리카야는 Great에 대응된다. 즉 이반 벨리키는 이반 대군주(대제,대왕).[3] 대략 2 ~ 3년 정도 모스크바 대공으로 군림하였지만 역사에서 정식 대공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4] 조이는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모레아 데스포티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의 딸인데 1460년 토마스가 다스리던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하면서 이름을 소피아로 개명,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이반 3세와 결혼한 이후 정교회로 원복했다.[5] 당시 전투 자체만 본다면 양측은 대치만 하다 서로 철수한거라 쌍방간 큰 피해는 없었다. 그래도 러시아 입장에선 자신들을 수백년간 지배한 세력의 군대를 물러나게 했다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상징성을 얻을 수 있었다.[6] 소피야가 명의라면서 추천한 인물이 치료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무슨 뒷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7] 덤으로 러시아 정교 내에서의 이단분파인 유대파의 운동에 드미트리파가 깊숙히 관여되어 있어 정통파가 지지하던 바실리파와의 대립은 더욱 극심했다.[8] '전러시아의 차르'라는 명칭을 최초로 쓰기도 했다. 흔히 이반 4세 때가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군주의 공식 칭호(이전까지의 공식 칭호는 '대공')로 쓰인 최초의 사례이고, 서유럽 국가와의 외교문서에는 이때부터 차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