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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3-19 19:47:30

녹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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祿

1. 개요2. 성격에 대한 논란3. 상세4. 역사
4.1. 탄생 ~ 전기녹읍4.2. 폐지4.3. 부활 ~ 후기녹읍

1. 개요

녹읍은 신라에서 고려 초기까지 있었던, 벼슬아치에게 직무의 대가로 일정 지역의 부세(조세租와 공납調) 수취권을 주던 제도이다.

2. 성격에 대한 논란

옛날에는 녹읍이 민들이 보유한 연수유답전 위에 설정한 수조권을 부여한, 다시말해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를 분급한 제도라고 보았으나, 통일신라 시기에 수조권이 보편적으로 분급되려면 결부제가 시행되었어야 하는데 이것이 증명되지 않았고, 고려 전시과와 달리 녹읍은 토지 면적이나 호구수 단위로 땅을 준게 아니라 군현 단위로 준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현재는 수조권 분급설은 반박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개설서나 교과서, 교양서 등지에는 수조권을 부여했다고 나와 있다.

옛날에는 녹읍을 조용조 전반에 대한 수조권을 주는 제도라고 보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 설이 별다른 근거 없이 식읍과 녹읍을 동일시한데다가 고려사의 녹읍 기사를 가져다가 신라 중대의 녹읍의 성격을 연구하는 무리한 추정을 한지라 이 역시 지금은 반박당했다.

반면 현재 통설인 부세 수취권 설은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조 모두를 수취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조용조 수조권 설과 다르지 않아보이지만, 조용조 수조권 설에서는 실제로 군현의 토지가 귀족에게 분급되어 조용조 모두를 수취하게 했다고 본 반면 부세 수취권 설에서는 녹읍이 실제로 토지를 분급한 것이 아닌 수취권만 부여하여 부세에 해당하는 조(租)와 조(調), 즉 조세와 공납만을 수취하게 했다고 본다는 큰 차이가 있다. 다만 부세 수취권 설에서도 수취된 것을 운반하는 데에 필요한 요역 징발권 정도는 추가로 부가되었을 수 있다고 본다. 즉 조용조 수조권 설에서는 귀족이 수취된 현물 운반 이외의 토목공사 등에도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었다 보는 반면, 부세 수취권 설에서는 원칙적으로 이것이 금지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조용조 수조권 설은 조용조 중 조(租)에 대해 수조권 설과 마찬가지로 결부제에 따른 토지세로 곡물 수취를 했다고 보지만 부세 수취권 설은 통일신라 시대에 결부제가 조세 수취의 기준이었다는 것에 회의적이며, 가호를 기준으로 한 인두세로 곡물을 수취하였다고 본다.

한편 식읍은 실제로 그 토지를 부여하고 조용조에 대한 수취권을 모두 주었다는 점에서 녹읍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현재 녹읍의 성격에 대한 통설인 부세 수취권 설을 정립한 바 있는 전덕재 교수가 저술한 한국고대사회경제사(전덕재, 2006)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하였다.

3. 상세

위에서 설명한 대로 현대에는 녹읍의 성격을 실제로 토지를 분급해서 조용조 전체에 대한 수조권을 준 것이 아니라 특정한 군현 혹은 촌을 대상으로 관직자에게 부세, 즉 조세와 공납의 수취권과, 그 수취한 현물을 운송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징발권을 준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대아찬 이상의 상급 관리에게는 군현 단위로, 그 미만의 하급관리나 지방 관리를 대상으로는 여러 촌들을 묶어 녹읍으로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녹읍을 받은 관직자가 그것을 수취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대체로 자기 가신이나 노비를 보내 수취하게 했다고 여겨진다. 이를 증명하는 유일한 사료가 고려사 뿐이긴 하지만 이를 반박할 만한 사료도 없는지라 대체로 인정받는 편이다.

녹읍을 폐지와 부활을 앞뒤로 두 시기로 구분하여 전기녹읍, 후기녹읍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는 김기흥 교수가 녹읍 부활은 반동적 조치가 아닌 이전의 녹읍에 비해 진보한 형태였다고 주장할 때 쓴 것에서 유래하는데, 이 주장이 현재는 큰 틀에서 수용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용어 역시 용례갸 늘었다

이외에도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유명한 이영훈 교수는 2017년 발표한 개선사석등기에 대한 연구에서 녹읍이 제한적으로나마 매매, 세습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개선사석등기에 300석을 기부하였다고 나온 김중용을 개선사 근처의 녹읍(수조지) 보유자로, 거래 대상이 된 토지를 녹읍으로 해석한 후 신당서 신라전의 유명한 '재상가에는 녹이 끊이질 않는다'는 기록을 신라의 재상가에는 '대대로' 녹이 끊이질 않는다고 해석한 결과이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이영훈 본인의 개인적인 추정이 매우 강하게 개입되어 있고 학계 전반적으로 인정받는 주장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영훈의 주장은 녹읍=수조지=국가권력 개입=사유토지 아님이라는 논리로 귀결되어서 신라시대의 사유토지 존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더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4. 역사

4.1. 탄생 ~ 전기녹읍

언제부터 녹읍이 존재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적어도 진흥왕 대에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녹읍은 위에서 말했듯 관리들에게 직무의 댓가로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녹읍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정비가 완료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한 530년대 혹은 그 이후에 녹읍제도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열기 열전에 김유신이 임의로 급찬에 해당하는 관직을 하사한 후 서라벌로 돌아와 열기에게 사찬에 해당하는 관직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벼슬과 녹봉은 공공의 그릇으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爵祿公器 所以酬功)이라고 말한 사실을 감안하면 녹읍은 관직의 수여에 따라 주어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덕재 교수는 녹읍의 지급 기준에 대해 대아찬 이상 관등 소지자는 모두에게 녹읍에 별도의 세조를, 아찬 이하의 관등 소지자들에게는 관직을 받은 자에 한하여 녹읍과 별도의 세조를 지급하였다고 추정했다.

문무왕 시기인 677년과 681년에는 각각 좌사록관, 우사록관이라는 관직을 신설했는데, 이에 대해 안병우 교수는 이후의 녹읍 폐지를 위한 준비단계로 보았지만 그보다는 녹읍에 대한 사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관료조직 탄생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보여진다. 즉 관료조직이 확장, 정비되면서 녹읍 지급량도 늘었고 이에 따른 관직 신설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강봉룡 교수의 경우 사록관 설치를 녹읍 수취에 있어서 백성 수탈과 같은 불법적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로 해석했다.

4.2. 폐지

당시 신라에는 녹읍과 함께 한술 더 떠 세습까지 가능한 식읍(食邑)도 있었다. 단, 대대로 우려먹을 수 있는 식읍은 녹읍의 상위호환급으로, 너무나 큰 특권이라 김유신, 장보고, 경순왕[1], 견훤[2], 강감찬[3] 등 극히 일부 사례에서만 지급했으므로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고 녹읍에 비해 비중있게 가르치진 않는다.[4] 녹읍은 월급, 식읍은 보너스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아무튼, 전덕재 교수는 대강 무열왕 이후 언젠가에 녹읍제도가 식읍과 함께 개혁되어 조조(租調)를 수취하던 것에서 조(租)만을 수취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고 추정하였으나, 명확한 사료적 근거가 있다기보단 동시대에 중국과 신라에서 식읍제도가 개혁되어 국가 통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 그리고 녹읍제도가 폐지된 이후 관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租뿐이라는 점에서 추정한 것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다가 689년 신문왕 시기에 이르러 녹읍제도는 폐지되고 1년마다 쌀을 관리들에게 수여하는 연봉제로 바뀐다. 이미 녹읍이 조용조에서 조(租)로 축소된 상태였기에 쌀만 주게 된건지 아니면 신문왕이 조(租)뿐으로 축소 개혁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오랜 통일전쟁 이후 재건을 통해 경제가 안정되고 정부의 지배체제가 공고화되어 관료층을 왕권에 가깝게 포섭하고 지방 지배를 보다 정부가 직접적으로 행하는 방식으로 개혁한 시도였다.

이와 별개로, 과거에는 687년 신무왕이 지급했고 신라민정문서에 '내수령답'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른바 관료전[5]이 녹읍을 대체할 목적으로 관료들에게 지급한 것이며 노동력 징발권까지 부여한 녹읍과 달리 조세 수조권만 부여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 견해가 지금도 개론서와 교과서에는 쓰여져 있으나, 관료전 분급이 지속적이었다는 증거가 없고 일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경식)과, 일본의 직분전의 사례를 참고할 때 관료전은 통일전쟁 이후 황폐한 땅이나 개간이 필요한 땅을 개발하기 위해 관료들에게 준 토지라는 견해(전덕재) 등이 제기되어, 녹읍 폐지와 관료전 부여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성은 미약하다는 것이 현재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심지어, 전덕재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관료전은 녹읍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녹읍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말도 된다.

그러다가 이후 어느 순간에 다시 연봉제에서 월봉제로 개혁되었는데, 이는 제2신라문서에서 전하고 있다. 제2신라문서의 추정 연대가 학자마다 제각각이지만 757년에 녹읍이 다시 부활했음을 감안하면 7세기 말-8세기 초 연대를 채택할 수 있는데, 연봉제로 바꾼지 얼마 안되어 월봉제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안병우 교수가 월봉제를 곧 관수관급제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한 이후 신문왕이 개혁한 녹봉제 = 관수관급제라는 등식이 지금까지 교과서에 박혀 있는데 정말 그런지는 증명이 불가능하다. 제2신라문서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어야 할 일이지만 제2신라문서 자체가 민정문서와 달리 굉장히 파편적으로만 글자가 남겨져 있어 전체적인 맥락과 내용 파악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4.3. 부활 ~ 후기녹읍

그러나 757년 경덕왕 시기에 녹읍은 부활하고 월봉제는 다시 폐지되었다. 종래에는 녹읍 부활을 구 귀족세력의 불만에 따른 왕권의 약화라고 보았지만 정작 이후 경덕왕은 아주 야심차게 한화정책을 밀어붙이는지라 이는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현대의 대체적인 견해이고, 전덕재 교수는 성덕왕 이래 지속된 가뭄과 전염병, 자연재해로 인해 관료들에게 월급을 나눠줄 재정이 부족하자 자구책으로 녹읍을 부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활한 녹읍은 이전 중고기의 녹읍에 비해서는 어느정도 위상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녹읍을 '녹'으로 표현하던 중고기와 달리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 비문에는 녹읍을 '봉'(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 하대의 녹읍이 '관료'에게 지급하는 봉급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사에서도 왕건의 조서에 녹읍을 곧 녹봉(봉급)과 동일시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799년 소성왕 시기 국학 학생들에게 거노현(현재의 거제도)을 녹읍으로 준 것 역시 국학 학생들을 관료들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왕조도 초기에는 역분전(役分田) 제도와 함께 신라의 녹읍 제도도 이어받아 계속 시행했던 듯하다. 고려사 태조세가와 흥달 열전에서 고려도 녹읍을 부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그 기간이 전시과 시행 이전까지로 잡아도 짧기 때문에 녹읍이라고 하면 보통 신라 때의 토지제도로 보는 편이다. 그러다 제5대 국왕 경종 때인 976년에 새로운 제도로 전시과를 시행하였다.
[1] 신라고려에 바친 대가로 왕건에 의해 경순왕에게 경주 전체를 식읍으로 지급.[2] 견신검쿠데타에 밀려서 실각하자, 견훤이 고려로 망명해 왕건한테 투항한다. 왕건은 견훤의 고려 망명을 최대의 업적으로 생각하면서 견훤을 상보로 삼고 양주 전체를 식읍으로 지급했다. 식읍 문서를 보면 견훤이 받은 양주 식읍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의 양주는 오늘날의 양주시 일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울 강북지역을 포함한 굉장히 넓은 지역이었다. 게다가 견훤의 외손녀가 정종의 왕후가 되는 등 후백제왕이었다고 해서 고려에서 무작정 괄시받지 않았다. 지금은 실전되었으나 여러 사료에서 인용되어 있는 '이제가기'라는 족보를 남긴 집안이기도 하였다.[3]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은 뒤, 현종에 의해 받는다. 그것도 300호, 500호, 1000호 순으로 계속 올려받는다.[4] 식읍도 원칙적으로 소유권은 나라에 있었고, 식읍보다 더 좋은 것으로 그 소유권까지 주는 '봉읍(封邑)'도 있지만, 이건 중국의 봉건제도 시절에나 있던 것이라 한국사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사실 봉읍까지 나눠주면 그건 중국 춘추시대마냥 사실상 별개의 국가나 마찬가지다.[5] 사실 관료전이라는 이름은 사료에 나온 이름이 아니라 근현대 역사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