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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white,#505050> 언어 | 왕족 칭호로써 | 제후 칭호로써 | ||
남성형 | 여성형 | 남성형 | 여성형 | |
한국어 | 공작·대공(大公)·대군[1] | 군주(君主) 또는 제후(諸侯),[2] 대공[3] | ||
라틴어 | Princeps[4] | Principissa | (좌측과 동일) | |
영어 | (Royal) Prince | (Royal) Princess | (Sovereign) Prince | (Sovereign) Princecess |
독일어 | Prinz[5] | Prinzessin | Fürst[6] | Fürstin |
프랑스어 | Prince (Royal) | Princesse (Royale) | Prince (Souverain) | Princesse (Souverain) |
이탈리아어 | Principe (Reale) | Principessa (Reale) | Principe (Sovrano) | Principessa (Sovrano) |
스페인어 | Príncipe (Real) | Princesa (Real) | Príncipe (Soberano) | Princesa (Soberano) |
러시아어 | [ruby(Принц, ruby=Princ)] | [ruby(Принцесса, ruby=Princessa)] | [ruby(Князь, ruby=Knyaz)] | [ruby(Княгиня, ruby=Knyaginya)] |
에스페란토 | (Reĝino) Princo | (Reĝino) Princino | (Suverena) Princo | (Suverena) Princino |
흔히 영어를 배울 때 'Prince = 왕자'로 외우도록 가르치기에 Prince라는 어휘를 무조건 '왕자'로 옮기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서유럽권 언어에서 Prince는 다양한 뜻을 지닌 어휘이다. 근래에 서유럽권 나라들에서 왕자가 Prince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일 뿐 원래는 군주의 아들을 의미하는 어휘가 아니며, 군주를 가리킬 때 쓸 수도 있고, 더 폭넓게 직계 왕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쓸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군주나 제후의 칭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Prince를 공식 칭호 개념으로 사용하는 방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영국에선 직계 왕족만 공식 칭호가 'Prince' 또는 'Princess'이지만, 스페인·포르투갈이나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에서 직계 왕족의 공식 칭호는 Prince가 아니며,[7] 보나파르트 가문에서는 인척까지 가문 구성원으로 인정하여 폭넓게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왕족 신분의 칭호로서 Prince를 쓰는 경우 외에도 명목상의 영지가 Principality라서 Prince로 불리는 작위도 있는데, 영국의 왕세자 작위인 Prince of Wales나 스페인의 왕세자 작위인 Príncipe de Asturias 등이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 외 역사적으로 영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사용된 칭호 중에는 왕족 신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어 Prince로 번역되는 사례도 많다. 문제는 같은 유럽이라는 범주로 묶더라도, 나라마다 심지어는 같은 나라 안에서도 시대에 따라서 작위 제도는 달랐기에, 프린스라는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의하기란 곤란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용된 프린스 칭호는 사례마다 그 성격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번역할 때에는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 옮겨야 한다.
2. 유래
프린스(Prince)의 어원은 크게 라틴어 계통(Princeps)과 게르만어 계통(Fürst)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라틴어 Princeps
라틴어의 경우 로마 황제가 가지던 많은 직위 중 하나인 프린켑스(Princeps)[8]에서 비롯하였다. 로마 황제의 직위인 '군 통수권자'에서 황제 그 자체를 의미하도록 차용된 임페라토르(Imperator)나, 비슷하게 로마 황제의 직위였던 '수석대제관' 혹은 '최고사제'에서 교황의 칭호로 변모한 폰티펙스 막시무스처럼 로마 황제의 칭호가 이후 유럽 군주의 명칭으로 굳어진 예이다.
- 게르만어 Fürst
게르만어에서는 first와 어원을 공유하며, 태생이나 혈통이 고귀한 자, 으뜸인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봉건제 이전 부족제 시절에는 족장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이렇듯 양자 모두 '수석', '으뜸', '고귀함' 등을 내포하였기에 상통하는 말로 취급되었다.[9]
프랑크 왕국이 등장한 이래 중세 유럽은 게르만인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지역마다 차이는 있으나 법률 언어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실제 사용하는 회화 언어는 게르만어의 영향을 받은 지역어를 쓰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게르만의 Fürst 칭호는 라틴어 Princeps로 옮겨졌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서프랑크의 유산을 물려받아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던 서유럽의 왕국들과 대공위시대를 거치면서 제후 중심의 정치 질서를 형성하게 된 신성 로마 제국은 필연적으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차이 외에도 언어적 측면에서도 서유럽권에서는 기존의 현지어에 동화되면서 라틴어 어휘를 폭넓게 수용하여 프린스(Prince) 칭호로 정립된 반면, 독일 지역에서는 게르만어의 전통이 유지되었기에 퓌르스트(Fürst) 발음이 그대로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칭호의 사용에 있어서 중대한 차이점을 불러왔는데, 서유럽권에서는 봉건 질서에 편입된 영역제후들이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관직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고 프린스를 자처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며, 반면 독일 지역에서는 황제가 영역제후를 퓌르스트로 공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중세에 서유럽의 프린스들은 봉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반독립적 세력의 자칭 칭호로 쓰인 반면, 독일에서는 퓌르스트가 황제에게 직접 신속된 제후 신분을 가리키는 개념이자 선제후(Kurfürst)·제국제후(Reichsfürst)·주교후(Fürstbischof) 등 공식적 지위의 칭호로도 폭넓게 사용된다.
한편 중세 시절부터 유럽의 왕족들은 프린스(Prince)를 자처해 왔는데, 이는 프린스를 관직이나 작위 칭호 개념으로 사용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 유행한 "몹시 위대하고 너무나 찬란하시며 어쩌고 저쩌고 고귀하신(Prince) ○○○ 어르신이자 어디어디 공작 나으리" 따위의 호칭에 집어넣는 수식어 중 하나로 왕족 신분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프린스를 썼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장황한 호칭 문화는 14세기에 정점을 찍었다가 그 이후로 점차 수식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대표적인 지위만 내세우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는데, 이에 따라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선 공식화된 칭호나 차별화된 경칭의 수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근세에 서유럽 왕실에서는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신분의 전용 칭호를 공식화했는데, 그 가운데 프린스 칭호가 제정되기도 했다. 또한 프린스라는 공식 칭호를 받지 않았더라도 서유럽권에서 직계 왕족이나 그 후손들을 프린스로 호칭하는 것은 언어 관례상 대체로 허용된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어권에도 퍼져나가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들도 서유럽 왕실의 전용 칭호 개념을 수입하여 가문 구성원들의 칭호로 '프린츠(Prinz)'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즉, 프린스는 근세에 독일어를 기준으로 군주나 제후의 칭호인 퓌르스트(Fürst)와 통치 가문 구성원의 칭호인 프린츠(Prinz) 개념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10]
2.1. 유의점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왕실 제도나 귀족 체제에 관한 이해도가 낮다. 때문에 프린스(Prince)는 칭호(title)의 개념임에도 최근에는 서유럽 군주정 국가들의 왕자들에게 주로 쓰이는 칭호인 점에서, 현대인들은 이를 '왕자'라는 신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11]동아시아에도 전통적으로는 왕족 신분 개념과 작위 칭호는 별개의 개념이었다. 군주의 자녀는 정식으로 칭호를 받기 전에 황자(皇子)·황녀(皇女) 또는 왕자(王子)·왕녀(王女)로 칭해졌고, 정식으로 친왕·대군·공주 등으로 책봉된 뒤에야 공식으로 지정된 칭호인 봉호로 불릴 수 있었다. 현대 한국어 화자들은 대체로 해당 개념을 정확히 구분하지 않기에, 일반적으로 왕자에 상대되는 어휘를 왕녀가 아닌 공주로 사용하듯, 칭호와 신분 개념을 구분하지 않고 혼용한다.
문제는 유럽의 프린스들은 실제로 왕자인 경우도 있지만, 리히텐슈타인이나 모나코처럼 일부 나라에서는 군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는 문제가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왕자가 아닌 귀족의 작위 칭호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오해를 야기할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4세기 무렵부터 작위가 단순 상훈 개념으로만 사용되었고 실제로는 상징적인 영토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유럽에서는 14세기에 들어와서야 봉건제가 쇠퇴했으며 귀족 신분이 있는 나라들의 경우 귀족들의 작위가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상징성이 유지되는 경우도 있다는 정서적 차이점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군주의 공식 후계자에게 태자·세자라는 칭호만 수여했으나, 유럽에서는 왕족들에게 상속 서열을 공인하는 개념이 있었으며 최우선 상속인에게는 특정한 작위가 세습되는 전통이 있는 경우도 있는 차이점도 있다.
이러한 차이점들을 완전히 이해해야 프린스 칭호의 성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2.2. 프린스의 위상 차이
유럽 지역에서 보편적인 귀족 작위는 라틴어를 기준으로 Dux-Comes-Baro 3종류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이를 공작-백작-남작으로 번역하고, 대체로 Comes에서 파생되어 서열이 구분된 작위들을 오등작 개념에 끼워맞춰 후작이나 자작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서유럽의 프린스(Prince)나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는 원래 봉건제적인 작위 칭호가 아니었으며, 근세에 반독립적 지위를 갖고 있던 세력이 편입되는 과정에서 기존에 자칭해 왔던 칭호가 승인되었거나, 군주 중심의 정치 질서가 확립되어 왕족을 예우하기 위해 도입되면서 작위 체계에 들어온 것이다.
또한 근세에 정립된 유럽 귀족의 서열 관념에서는 작위의 서열에 앞서 신분의 서열이 우선되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근세에는 중세 시절과는 달리 공작(Dux)이나 프린스가 주권을 공인받는 사례들이 생겼으며,[12] 이에 따라 작위 칭호의 서열에 앞서서 주권자 신분인지, 왕족 신분인지, 단순 귀족 신분인지에 따른 신분 구별이 필요하다. 또한 귀족이라 하더라도 준군주 신분으로 예우하도록 공인된 독일 연방의 슈탄데스헤어나 스페인의 그란디(Grande)처럼 일반 귀족보다 서열이 높은 별도의 신분이 제정된 경우도 있다.
따라서 프린스 계통 칭호는 군주·제후나 공작·후작 가운데 어느 하나로 일률적으로 정의하여 번역하기보다는, 개별 사례마다 그 성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2.2.1. 군주 예시
국가/문화권 | 작위의 표기 | 대상 | 의미 |
중세 유럽 | Prince | (비정통) 군주 | 중세 당시 봉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소규모 독립 세력. |
슬라브족 | [ruby(Князь, ruby=Knyaz)] | 초기 슬라브의 지방 군주 | 본래 독립적인 지역 군주를 뜻함. 후대에는 귀족 칭호로 쓰임. |
Voivode | 본래 '전쟁 지도자'라는 의미. 후대에는 군사 계급으로 쓰임. | ||
리히텐슈타인 | Fürst von Liechtenstein | 리히텐슈타인 대공 |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중 유일하게 주권국으로 현존. |
모나코 | Prince de Monaco | 모나코 대공 | 모나코의 통치자로, 세습 군주제하에서 국가를 대표. |
안도라 | Co-Prince | 안도라의 공동 군주 | 전통 협약에 따라 프랑스 대통령과 우르헬 주교가 공동 군주로 역할. |
2.2.2. 왕족 예시
국가 | 작위의 표기 | 대상 | 의미 |
영국 | Prince | 왕의 직계 자녀 및 왕족 | 왕의 아들에게 주로 수여하는 상징적 칭호. |
프랑스 | Prince du Sang | 왕가의 직계 혈통 | '왕가의 피'를 의미. 왕의 방계 자손에게 수여. |
Prince français | 황제의 친인척 | 프랑스 제국에서 나폴레옹 일가친척들에게 사용. | |
Prince de … | 왕실 후손 | 프랑스 왕실의 방계 가문 후손이 자칭. 혈통 강조. | |
독일 | Prinz | 왕족 및 방계 친족 | 왕실이나 슈탄데스헤어 일가의 직계 상속자 또는 가문 구성원이 공유. |
러시아 | [ruby(Царевич, ruby=Tsarevich)] | 남성 왕족 | 16세기~1797년 동안 '차르의 자손'이란 의미로 사용. |
[ruby(Князь, ruby=Knyaz)] | 황족 및 고위 귀족 | 1866년 이후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이 될 수 없는 방계 황족의 작위. | |
오스만 제국 | Şehzade(셰자데) | 파디샤의 직계 왕족 | 단순한 왕족으로서의 신분을 나타냄. 군주적 권한은 없으며, 의례적 지위를 강조. |
중국 | 친왕(親王) | 직계 황족 | 황자(皇子) 또는 황제의 친형제에게 수여되는 왕작 또는 그 등급. |
조선 | 군(君) | 종친 | 세자·세손이 아닌 왕족. 중전 소생의 왕자일 경우 대군으로 봉함. |
일본 | 왕(王) | 황족 | 황실의 직계 자손. 일부 황족의 경우 친왕으로 격상함. |
사우디아라비아 | 아미르 | 사우드 가문의 모든 남성 구성원 |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성인 약 15,000명 모두에게 수여. |
- Prince Consort
유럽 언어의 특성상 여왕의 남편은 영어를 기준으로 'King (consort)'으로 불러야 하겠지만, 사실 국서에겐 널리 쓰이진 않는 편이며 대신 왕족의 일원으로서 'Prince (consort)' 칭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King은 국왕인 경우가 많았고 Queen은 왕비(Queen consort)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서를 King으로 부르게 되면 여왕의 권위가 흔들리게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국서가 King으로 불린 사례는 대체로 '공동 왕'으로 즉위한 경우가 많다.
-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영국 찰스 3세의 차남으로 프린스(Prince). 공식 작위는 서식스 공작(Duke of Sussex)이나 일부에서 'Prince of Sussex'로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미르. 현 왕세자.
2.2.3. 귀족 작위 예시
- 신성 로마 제국의 Fürst
Fürst는 황제로부터 상당한 독립적 지위를 승인받은 제후들로, 1648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주권이 공인되기도 했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당시 영방국가에 오늘날의 주권국과 동일한 지위가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영방국가들에는 독자적인 통치권과 외교권이 인정되었으나, 그것이 신성 로마 황제 및 제국법에서의 독립까지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되었음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프로이센 왕국처럼 강대국이 아닌 영방국가들은 사실상 프랑스 제국에 종속되었으며, 1815년에는 독일 연방이 결성되어 그 구성국으로 편입되어야 했다.
- 오랑주 공국
본래는 신성 로마 제국 소속의 제후국인 오라니엔(Oranien) 백작령이었으나, 1163년에 황제가 제국제후(Reichsfürst) 지위를 공인하면서 이를 근거로 공국(Principauté)을 자처했다. 1544년에 통치 가문이 나사우 가문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나사우 가문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 가문이 되기도 했다. 1672년에 프랑스와 네덜란드 간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랑주 공국은 프랑스군의 침공을 받아 점령당했다. 나사우 가문이 칭호를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프랑스 측에선 방계 왕족인 콩티 공(Prince de Conti)이 오랑주 공(Prince de Orange)을 겸하도록 조치했는데,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랑주 공국은 프랑스에 정식으로 합병되었지만 작위 칭호는 나사우 가문이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후 나사우 가문이 네덜란드의 왕위를 갖게 되면서 오라녀 공(Prins van Oranje) 칭호는 네덜란드 국왕의 후계자가 세습하는 작위가 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 외교의 달인 메테르니히 후작
근대 독일에서 Fürst는 공작(Herzog)보다 낮지만 백작(Graf)보다 높은 점에서 후작 서열의 작위로 확립되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될 무렵에는 유력 선제후국에서도 자국 내부의 일반 귀족 작위로 Fürst 칭호를 도입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트리어 선제후를 배출한 메테르니히 가문 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무장관으로 등용되어 전후 유럽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빈 회의를 주도했다. 그는 1813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귀족 작위인 '후작(Fürst)'으로 서임되었다. 메테르니히는 외교적 책략과 유머로 유명했는데, 한 번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사적 압박에 대해 "우리는 프랑스군을 이기지 못하지만, 프랑스의 오만함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프로이센 정치가. 하노버 지역의 귀족 출신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재상의 자리에 올라 무기력했던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보좌하여 프로이센 왕국을 지켜냈다. 1814년에 프로이센 왕국의 후작(Fürst)으로 서임되었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 빌헬름 1세 때 비스마르크 후작(Fürst von Bismarck)으로 서임되었다. 퇴임 후 빌헬름 2세에게 받은 라우엔부르크 공작(Herzog zu Lauenburg) 작위는 일대작위였던 탓에 그의 사후 폐지된다.
2.3. 여성 군주로서의 프린세스
'Princess'라는 칭호가 군주로서 사용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군주제는 남성 우선 상속 체제를 기반으로 했다. 중세 봉건제에서는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군사적 책임이었다. 왕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군대를 지휘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 여성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는 여성 통치자가 등장할 가능성을 제한했으며, 여성 군주가 등장하더라도 'Princess'라는 단어는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우려가 있어 'Princess' 대신 'Queen'이나 'Queen Regent'와 같은 다른 칭호를 사용했다. 따라서 'Princess' 칭호가 군주적 지위를 나타낸 사례는 주로 소규모 공국(Principality)에서 나타났다. 이러한 공국은 규모가 작고 독립성이 약해, 여성 통치자가 'Princess' 칭호를 달고 군주로서 기록될 수 있었다.- 콩스탕스(Constance of Antioch)
국가: 안티오키아 공국
재위 기간: 1130년~1163년
콩스탕스는 아버지 보에몽 2세의 뒤를 이어 안티오키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섭정 체제 아래에서 통치권이 행사되었다. 이후 그녀는 여러 차례 혼인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며 십자군 국가의 복잡한 정치적 환경에서 공국을 다스렸다. 콩스탕스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Sovereign Princess로 기록되었으며, 당시의 혼란 속에서도 공국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루이즈 이폴리트(Louise Hippolyte)
국가: 모나코 공국
재위 기간: 1731년 2월 20일 ~ 1731년 12월 29일
루이즈 이폴리트는 모나코 공국의 통치자로, Sovereign Princess 칭호를 가진 유일한 여성 군주였다. 그녀는 아버지인 앙투안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당시의 사회적 한계로 인해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보다는 남편 자크 프랑수아 드 고요 드 마튀냥과 공동 통치를 해야 했다. 그녀의 재위는 짧았지만, 모나코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Sovereign Princess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 번역
위에서 살펴볼 수 있듯, 한자문화권의 언어에서는 유럽의 프린스와 일치하는 어휘가 따로 없다. 특히 작위 칭호인 프린스를 번역할 때는 개별 사례마다 그 성격을 파악한 뒤에 상황에 맞게 적절한 번역어를 선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군주(君主)
프린스 어원의 의미를 가장 살린 번역으로, 특히 '통치자'라는 의미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쓰일 때는 해당 번역이 가장 적절하다. 일례로 니콜로 마키아벨리 저서 인 《Il Principe(영어: The Prince)》는 동아시아권에서 《군주론》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작위 칭호를 구성하는 고유명사로 쓰일 때는 다소 어색한 경우가 발생하는데, 근세 서유럽 왕족의 프린스 칭호나 신성 로마 제국·독일 등의 퓌르스트는 군주 신분의 칭호가 아니기 때문이다.
- 제후(諸侯)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를 번역할 때 가장 적합한 번역이다. 유럽에는 동아시아권의 제후와 같은 개념은 없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 개념과 가장 유사한 한자어 어휘는 제후이기에 통용되고 있다.
역사학 용어로 중세 10~12세기 무렵 자생적으로 등장한 군소 유력자들을 'Castellan(성주)'로 분류하면서, 이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공식 작위를 보유한 유력 상급 제후들을 '(territorial) Prince'로 정의하는데 이는 '영역제후'나 그 약칭인 '제후'로 번역되고 있다.
- 대공(大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유럽 왕가의 황태자나 소국(小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단어로 '대공'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서유럽의 왕족 프린스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공작(Duke)보다 대체로 우월한 신분으로 여겨지는 점에서 프린스를 대공으로 번역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독일어권의 그로스헤어초크(Großherzog)·에르츠헤어초크(Erzherzog)나 슬라브권의 벨리키 크냐지(Великий Князь) 등도 대공으로 번역되고 있어서, 프린스를 무작정 대공으로 번역하기가 다소 난감한 경우도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문제는 대공(작위) 문서 참조.
- 공작(公爵)
서유럽 왕족의 프린스 작위를 번역할 때 가장 보편적으로 채택된다. 일례로 영국의 Prince of Wales의 경우, 주한영국대사관에서 공식 번역으로 '웨일스 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공작으로 번역되는 Duke(Herzog)와 구분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문제는 후국 문서 참조.
슬라브권에서는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Duke(Herzog) 작위를 도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유럽권에서 대체로 프린스로 번역되고 있는 크냐지(Князь) 칭호 등을 그대로 공작으로 번역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
- 후작(侯爵)
16세기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이나 근대 독일의 퓌르스트(Fürst)에 한정해서 적합한 번역으로, 독일어 사전의 뜻풀이에서도 "(15~16세기 이후) 후작"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16세기까지 퓌르스트는 주로 황제 직속의 상급 봉신들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며, 퓌르스트가 공작(Herzog)과 백작(Graf) 사이 서열의 공식 작위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말기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이외의 프린스를 후작으로 번역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데, 서유럽권에서는 Marquess(영어)·Marquis(프랑스어) 등이 '후작'으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이며, 서유럽권 언어에서 프린스로 번역되고 있는 동유럽 슬라브권의 'Князь'는 'Великий Князь(대공)' 칭호와의 연계를 고려하면 '공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퓌르스트는 군주적 지위를 갖는 칭호이기에 이를 '후작'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나, 독일어권에서 퓌르스트는 영방국가의 주권자에게 한정되어 쓰인 칭호가 아니다.[14] 일례로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했다가 1815년에 복구된 헤센 선제후국은 프랑스 제국이 직할령으로 점거하고 있던 월경지인 카체넬른보겐(Katzenelnbogen) 백작령을 처분하기 위해 이를 프로이센 왕국에 매각하려 했으나, 해당 영토는 헤센 가문의 분가인 헤센-로텐부르크와 공동 소유지였다. 이에 프로이센 측에서는 헤센-로텐부르크에 '라티보르 공작(Herzog von Ratibor)' 및 '코르베이 후작(Fürst von Corvey)' 작위를 수여하여 이 거래를 성사시켰다. 라티보르 공작과 코르베이 후작은 주권이 공인되는 지위가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준군주적 지위인 슈탄데스헤어 신분도 아닌, 단순한 프로이센 왕국의 일반 귀족 작위였다. 즉, 근대 독일에서는 퓌르스트가 공작과 백작 사이의 작위 칭호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다.
- 왕자(王子) 또는 공자(公子)
통치 가문 구성원 등의 전용 칭호로 사용되는 경우에 통용되는 번역이다. 하지만 서양에서 왕족 칭호로서 프린스(Prince)를 사용할 수 있는 범위는 군주의 아들로만 국한되지 않으며, Prince를 공식 칭호로 받지 않은 왕족이라도 관례상 이를 호칭하는 게 대체로 허용된다. 심지어는 20대조는 넘어가야 겨우 군주가 나오는 머나먼 후손이 이를 자칭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왕자나 공자 등으로 옮길 때에는 이러한 성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친왕(親王)
한국어 화자들이 프린스를 일괄적으로 왕자로 번역하는 사례와 유사하게, 중화권에서는 자신들에게 더 친숙한 어휘인 '親王(亲王)'으로 일괄 번역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그 영향을 받아서 프린스를 '친왕'으로 옮기는 사례도 있다. 다만 무작정 '왕자'로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린스를 모조리 친왕으로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거니와, 한국어 화자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친숙한 어휘도 아닌 문제가 있다.
- 군(君)
일각에서 프린스 작위의 번역어로 제시하기도 한다. 프린스 작위가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쓰인 작위가 아니었고 한자문화권에선 오등작이 일반적인 작위로 인식되고 군작이 비정규 작위로 쓰였던 점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통치 작위의 경우 '국군(國君)'으로 옮기거나, 왕족 작위를 '대군(大君)' 등으로 옮기는 등, 일부 표현을 덧붙이면 범용성 있는 번역이 될 수 있다는 이점이 제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군작은 원 간섭기에 제후국의 작위로 제정한 것이기에, 대체로 오등작보다도 낮은 지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 또한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에서 군작을 정식 작위 칭호로 도입한 사례도 없기에, 프린스를 군작 개념으로 번역하는 시도는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3.1. 잘못된 번역 예시
- 'Prince of Monaco'를 '모나코의 왕자'라고 번역하면 혼란이 발생한다. 이는 현존하는 주권국인 모나코의 군주가 사용하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도 주인공은 왕자가 아니라 소행성 B-612호의 '군주'이다.
- 'Prince of Wales'를 '웨일스의 왕자'로 오역한 사례는 '웨일스의 통치자'라는 본연의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했다. 심지어 이 작위는 영국의 '태자(Crown Prince)'에게만 관례적으로 수여되는 작위이기에, '영국 왕세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다. 스페인의 'Príncipe de Asturias'이나 네덜란드의 'Prins van Oranje' 또한 '○○의 왕자' 개념이 아니라 공식적인 왕위 상속예정자의 전용 작위다.
- 해리포터 혼혈 왕자(Harry Potter and the Half-Blood Prince)에서 'Prince'는 왕자가 아닌 Prince 가문을 뜻한다.
4. 사례
4.1. 독일어권
- 초기 게르만 사회와 프랑크 왕국(5세기~9세기)
'Fürst'는 게르만 부족 사회에서 수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로 사용되었다. 프랑크 왕국(481년~843년)에서는 지역 지도자를 칭하거나, 로마의 후원받는 귀족 지위와 유사하게 쓰였다.
- 신성 로마 제국 초기(962년~13세기)
962년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면서 'Fürst'는 황제의 직속 봉신을 지칭하는 범칭으로 자리 잡았는데, 초기에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는 제후라면 누구든 자칭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Herzog)들은 매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어 황권을 크게 위협했는데, 후세에는 그러한 영향력을 두고 '부족 공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정도였다. 황제로 선출된 이들의 주요한 정책은 그러한 공작들의 세력과 권위를 축소하는 것에 있었다.
오토 1세가 공작령을 축소하고 그 대신 고위 성직자들을 영주로 임명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주교후(Fürstbischof),[15] 수도원장후(Fürstabt), 사제장후(Fürstpropst) 등이 등장했다. 이들을 통칭하여 '성직 제후'라고 부른다. 성직자는 결혼할 수 없기에 세습되지 않으며, 당시에는 황제가 성직자를 자기 입맛대로 서품할 수 있었던 점을 노리고 시행한 정책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황제가 직접 Fürst를 공인하는 '제국제후(Reichsfürst)' 제도를 시행했는데, 공작(Herzog)의 신분적 권위를 다른 황제 직속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낮추려는 의도로 도입한 것이었다.
하지만 11~12세기 동안 황제와 교황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성직자의 서품권은 교황에게 넘어가게 되었고, 특히 대공위시대를 거치며 황권은 크게 약화하여 영역제후들은 같은 시기의 서유럽과는 다르게 황제에게서 상당한 정치적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흐름의 결과, 성직 제후 정책이나 제국제후 정책은 본래의 의도와 달리 제후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성직 제후는 제국 내 유력 제후들이 황제 선거 과정이나 교황과의 거래를 통해 적당한 가문 구성원을 꽂아 넣어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제국제후 또한 결과적으로 제후의 신분을 보장하고 독립적 통치권을 공인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 1356년 금인 칙서
황제 선출 권한을 갖는 선제후(Kurfürst)가 공식화되고, 그 지위 또한 제국 내 모든 제후에 우선하도록 지정되었다.[16] 이후 선제후가 되지 못한 유력 제후들을 달래기 위해 공작(Herzog)을 선제후에 버금가는 지위로 공인했다. 그 결과 선제후나 공작들은 Fürst 칭호보다는 본래의 지위를 내세우길 선호하게 되어, Fürst는 점차 백작(Graf)급 제후들의 통칭으로 자리 잡는다.
- 신성 로마 제국 15~16세기
선제후나 공작들이 휘하 봉신을 백작으로 서임하는 사례가 일반화되자, 황제 직속의 백작급 제후들은 자신들과 봉신 백작들을 구분 짓고자 Fürst 칭호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17] 16세기 무렵부터는 백작급 제후들 가운데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영지들을 후국(Fürstentum)으로 통합하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황제에 요청하여 이를 관철하는 사례들도 생겨남에 따라, 'Fürst' 칭호는 공식 작위화되었다.
한편 제국의회가 상설화되면서 '제국제후(Reichsfürst)'는 단독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로 자리매김한다. 다만 제국제후로 지정되는 것이 그 영지를 후국(Fürstentum)으로 승인하는 개념은 아니었고, 반대로 후국(Fürstentum)으로 승인된다고 해서 그 제후가 무조건 제국제후 지위를 얻는 것 또한 아니었다. 때문에 Fürst 중에는 제국백 신분으로 공동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황제의 직속 제후들은 유럽의 국제사회에서 주권이 보장되었다. 이에 백작급 제후의 영방국가들이 후국(Fürstentum) 지위를 승인받으려는 경향이 보편화되어, 'Fürst'는 공작보다 낮지만 백작(Graf)보다 높은 위상을 확립하게 되었다.
또한 서유럽권의 영향을 받아 일부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들이 가문 구성원의 칭호로 '프린츠(Prinz)'를 도입하기도 했다. 본래 중세 유럽에서는 귀족의 작위 칭호는 소유 가문의 수장이 독점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 구성원 전원이 공유하는 칭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영방국가에 주권이 공인되자 통치 가문의 대표 작위는 주권자가 독점하는 것이 일반적인 외교 관례를 따르게 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 나폴레옹 전쟁~독일 연방(1803년~1866년)
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되고 라인 동맹이 출범했으나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815년에 독일 연방이 결성되는 정치적 격동이 이뤄지는 가운데, 독일의 영방국가는 40여 개로 정립되었다. 기존 선제후국은 왕국 또는 대공국 지위로 공인되었고, 그 외의 영방국가는 대체로 공국(Herzogtum) 또는 후국으로 재편되었다. 해체된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과 제국백 가문들은 독일 연방에서 슈탄데스헤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는데, 슈탄데스헤어 작위 서열 역시 공작(Herzog)-후작(Fürst)-백작(Graf) 순이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될 무렵부터 일부 선제후국에선 자국 내의 일반 귀족 작위로도 공작(Herzog)과 백작(Graf) 사이에 후작(Fürst)을 도입했다. 프로이센 왕국은 1848년에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단행하여 기존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 유래된 개별 영지 단위를 통폐합하여 주(Province)를 도입했으며, 1850년에는 같은 가문 소속이긴 했으나 주권이 공인된 영방국가 지위였던 호엔촐레른헤칭겐·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후국을 완전히 합병했다.
또한 독일 연방 시점에는 메클렌부르크 가문이나 올덴부르크 가문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통치 가문이나 슈탄데스헤어 가문에서 그 구성원의 칭호로 프린츠(Prinz)를 사용했다. 때문에 가문의 대표 칭호는 백작(Graf)임에도 그 구성원이 프린츠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국에서는 최우선 왕위 계승자에게 'Kronprinz'(영어: Crown Prince) 칭호를 수여하기도 했다.
- 독일 제국(1871년~1918년)
독일 제국에 합류한 영방국가의 통치 가문들은 비록 주권을 상실했으나 나름 제국의 구성국으로서 기존의 지위를 이어갔고, 그 외 슈탄데스헤어의 특수한 지위 또한 그대로 인정되어, 독일 연방 시절에 비하면 실질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 현대 독일(1918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군주제가 폐지되어, 황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을 포함한 구성국의 통치 가문들 또한 슈탄데스헤어와 유사한 신세가 되었다. 물론 슈탄데스헤어 및 일반 귀족들의 법적 지위 또한 공식적으로 모두 박탈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귀족 가문은 기존의 작위를 칭호를 자칭하거나 프린츠(Prinz) 등을 자처하고 있어, 귀족 전통을 이어가는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4.1.1. 독일권의 군주·제후급 칭호 비교
독일어 | 한국어 | 설명 | 영어(번역) | 프랑스어(번역) |
Kaiser | 황제 | 신성 로마 제국 및 독일 제국 최고 군주 | Emperor | Empereur |
König | 왕 | 독일왕, 나폴레옹 전쟁 이후 선제후였던 군주 | King | Roi |
Großherzog | 대공 | 신성 로마 제국 해산 이후 왕위를 공인받지 못한 선제후 | Grand Duke | Grand-duc |
Kurfürst | 선제후 | 독일왕(황제)을 선출할 권한을 갖는 최고위 제후 | Prince-elector | Prince-électeur |
Herzog | 공작 | 선제후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 Duke | Duc |
Fürst | 후작 | 공작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 Prince | Prince |
Graf | 백작 | 공작보다 서열이 낮은 제후 또는 선제후·공작의 봉신 | Count | Comte |
Kronprinz | 태자 | 왕위 계승권자의 칭호로 사용 | Crown Prince | Dauphin |
Prinz | 왕자·공자 | 통치 가문 또는 슈탄데스헤어 가문의 구성원 | Prince | Prince |
독일에서 왕은 'König'이었는데, 신성 로마 제국 시절에는 제국 내부에선 황제(독일왕) 이외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칭호였다. 황제 선거라는 제국 내부의 정치적 사정으로 보헤미아 공작이나 프로이센 공작이 왕으로 승격된 사례는 있었으나, 이들도 제국 내부에서는 선제후 지위를 내세우는 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부 선제후가 왕위를 공인받았고, 그렇지 못한 선제후들은 대공 지위를 공인받는 데에서 그쳤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한 독일 연방의 구성국들은 프로이센 왕국에 직접 합병된 사례들을 제외하면 독일 제국 시절에도 구성 제후국으로 남았다.
- 선제후 제도와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선거를 통해 제국 내 유력 제후들이 독일왕을 선출하고, 교황이 이를 승인하면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는 선거군주제였다. 이때 황제선거에 참여하는 유력 제후를 'Kurfürst(선제후)'라고 불렀다. 11~13세기 동안 황제와 교황 간의 정치적 대립 속에 교황이 파문을 남발하고 아예 황제를 승인하지 않는 행태가 지속되면서, 무려 20년 가까이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는 사태마저 발생했다. 당시 제후들은 황제의 파문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등 이러한 혼란상을 적절하게 이용해먹었으나, 혼란이 지속되자 점차 교황의 정치 개입을 배제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결국 미리 차기 황제인 로마왕을 선출하는 관례가 정례화되었고, 14세기에 이르면 황제들은 로마 교황의 승인 없이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르게 되었다. 1356년에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 4세가 금인 칙서를 통해 황제 선출 과정을 공식화하고 선제후를 지정한 것도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이뤄질 수 있었던 현상이다. 문제는 기존에 황제 선거 때 유력 제후들 간에 이뤄지던 정치적 거래가, 고정된 선제후 가문의 전유물이 된 점에 있었다. 금인 칙서를 통해 공인된 선제후 특권은 황제가 박탈할 권리도 없었기에, 황제가 선제후 가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일례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제후들에게 세금 부과를 시도했으나,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협력자이면서도 최대 경쟁 후보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가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수장 격이었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등을 포함한 여러 제후를 규합해 이를 반대했다. 황제는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제압할 수도 없었기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기존 선제후 가문들의 입김을 약화하고자 선제후를 추가로 지정한다거나, 제국의회 등을 상설화하는 시도도 이뤄졌으나, 모두 결과적으로 다른 제후 가문들의 독립성만 강화됐을 뿐 신성 로마 제국 차원의 중앙집권은 성공해 내지 못했다. 또한 30년 전쟁을 통해 프랑스, 영국, 스웨덴 등 다른 외국까지 제국 내부 사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결국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영방국가의 주권이 공인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시점에 사실상 황제 지위를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기보다는 보헤미아 왕관령,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자신들의 세습 영토 경영에 주력하게 된다. 또한 합스부르크를 포함한 제국 내 유력 제후들은 자체적인 중앙집권과 영토 확장을 추진하여, 베스트팔렌 조약 시점에 제국 내 약 1,500개의 각종 제후령을 분할하고 있던 300여 개의 영방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이 해산될 시점에는 40여 개만 남게 되었다.
- 외국의 군주를 겸하는 제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 중에는 제국 바깥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한 사례도 있었는데, 바로 15세기 이후부터 사실상 황제를 세습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프로이센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제국 내에선 다소 영세한 영방국가라도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국가원수 지위를 차지하여 당대에도 사실상의 군주로 취급된 오라녀나사우 왕조 같은 경우도 있고, 가문 단위로 보면 덴마크·스웨덴·러시아의 왕실과 한 집안인 올덴부르크 왕조 같은 사례도 있었다.
선거군주제로 전환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선 지리적으로 가까운 작센 선제후가 국왕으로 선출된 사례도 몇 번 있었는데, 그 중 폴란드에선 아우구스트 2세이자 작센에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폴란드와 작센 양국 모두에 열정을 쏟았다. 작센에서는 국영 은행을 설립하고 우정 제도를 확립했으며, 수도 드레스덴을 북유럽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육성하여 '엘베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얻게 만든 치적을 세웠다. 또한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된 뒤에는 후임 작센 선제후로 세습이 이어지도록 체제 개편을 도모했으나, 당시 스웨덴과 러시아 간에 벌어진 대북방전쟁에 휘말리고 주변 강대국의 사주를 받은 귀족들의 방해까지 겹치면서 동군연합 세습을 통한 폴란드-리투아니아 합병 시도는 좌절을 겪었다. 사적으로는 예술품 수집벽과 왕성한 색욕으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표트르 1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게 당시의 유명 코르티잔 초상화를 선물했다는 풍문도 전해지고 있다.
- Fürst von Liechtenstein
원래 오스트리아 빈 인근에 근거지를 둔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인 남작 가문이었다. 가문의 시조인 카를 1세는 루돌프 2세에게 등용되어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재상(Obersthofmeister) 직위를 맡았었다. 루돌프 2세는 무능으로 인해 신망을 잃었기에 1606년부터 그 동생인 마티아스 대공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카를은 여기에 합류하여 마티아스를 지지했고, 그 보답으로 마티아스는 1608년에 신성 로마 황제 자격으로 카를을 제국제후(Reichsfürst)로 지정했다. 이후로도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서 활약하며 많은 재산과 영토를 받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는 해당 사례를 근거로 퓌르스트(Fürst)를 자처했으나, 본질적으로 황제의 직속 제후가 아닌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 신분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인 공인을 받지 못하여 제국의회의 출석도 거부당했다. 이에 1699년에 황제의 직할지였던 셸렌베르크 령(Herrschaft Schellenberg)을 매입했으나, 여전히 황제 직속 제후 신분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결국 1712년에 인근의 파두츠 백작령(Grafschaft Vaduz)을 매입한 뒤 두 영지를 후국(Fürstentum)으로 통합하는 것을 황제에게 신청했으며, 1719년에 이를 승인받고 나서야 황제의 직속 제후 신분을 공인받고 제국의회 출석권을 얻었다.
하지만 20세기 무렵까지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후국 내부의 사정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의 관직을 역임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봉신으로 활동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후국이 프랑스 제국의 괴뢰 신세가 되어 오스트리아의 적국이 되었음에도, 당시의 주권자인 요한 1세 요제프는 오스트리아군의 지휘관이자 외교사절로 활동하는 기괴한 모습도 연출되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리히텐슈타인은 오스트리아의 곁다리 취급을 받았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함께 '독일'에서 퇴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 당시의 영방국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유일한 주권국으로 남았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계속 오스트리아에서 머물렀으나,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에야 홀로코스트를 피해 리히텐슈타인으로 이주했다.
- 빌헬름 황태자(Kronprinz)와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빌헬름 크론프린츠(빌헬름 2세의 맏아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을 이끌었다. 그는 젊고 활발한 성격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었지만, 전쟁 중 그의 리더십은 종종 비판받았다. 특히 그는 서부 전선에서 여러 실패를 경험했는데, 프랑스와의 베르됭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참혹한 피해를 초래하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전쟁 이후 망명 생활 중 그는 사냥과 파티를 즐기는 모습으로 대중의 비난을 받으며 스스로를 "고독한 황태자"라 부르기도 했다.
- '백조의 프린스' 바이에른 국왕
'프린츠(Prinz)'는 독일에서 통치 가문의 남성 구성원이 사용하는 칭호였다. 루트비히 2세는 공식적으로는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이었지만, 왕실 재정을 쏟아부어 가며 여러 환상적인 건축물을 조성하면서 '백조의 프린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세운 건물 중에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특히 유명한데, 이 성은 디즈니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이 되었다. 루드비히는 평소 현실 세계보다 자신만의 판타지와 예술 세계에 심취해 있었고, 이는 결국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4.2. 프랑스
4.2.1. 프랑스 왕국
프랑스 왕국의 작위는 중세 시절부터 체결된 봉건 계약들을 통해 관습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법제화된 제도로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종래에 프린스 칭호를 사용하던 외부 세력이 프랑스 국왕과 봉건 계약을 맺고 프랑스 귀족으로 편입되기도 했고, 모나코처럼 국왕으로부터 주권을 승인받으면서 형식상 봉신 관계를 맺은 프린스도 있었다.또한 역대 국왕들은 다양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는데, 작위 칭호와 관련되는 봉건제에 있어서는 적통의 단절을 명분으로 봉신의 영지를 회수하거나 왕실에서 직접 국내·외의 영지들을 매입하는 등의 방식으로 왕실 직할령을 늘려나가는 정책을 시행했다. 왕실 직할령으로 편입된 영지들은 왕족들에게 분봉되었으나, 국왕이 임명하는 지방관들이 파견되어 통치 권한을 대리했기에, 실질적으로 왕족들은 명목상의 작위만 보유할 뿐이었다.
16세기 중엽에 프랑스 왕실은 왕족 전용의 칭호를 공식화했다. 직계 왕족은 왕의 손자 항렬 이내였다. 태자 이외 왕의 자녀들은 '프랑스의 자녀(Enfants de France)'로 불리며, 남성은 '프랑스의 아들(Fils de France)' 여성은 '프랑스의 딸(Fille de France)'이란 칭호를 쓸 수 있었다. 1710년 3월 12일부터 태자의 자녀도 같은 칭호를 쓸 수 있게 확대되었고, 그 후에 태자의 적장손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본인의 성씨를 'de France'로 쓸 수 있는 특권도 누렸다. 그 외 왕의 손자들은 '프랑스의 손주(Petits-enfants de France)'로 불리며, 남성은 '프랑스의 손자(Petit-fils de France)' 여성은 '프랑스의 손녀(Petit-fille de France)' 칭호를 쓸 수 있었고, 나중에 도팽의 손자까지로 확대되었다. 왕제(王弟) 중 최연장자는 '무슈(Monsieur)', 그 아내는 '마담(Madame)'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녀 중 최연장자는 '마담 루이얄(Madame Royale)'로 불리기도 했는데, 숙모가 없을 경우에는 대신 '마담'으로 불릴 수도 있었다.[18] 대체로 결혼하면 여동생에게 해당 별칭을 물려주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 일정치는 않았다. 무슈의 미혼인 딸 중에 최연장자는 '마드모아젤(Mademoiselle)'로 불렸다.
또한 방계 왕족과 그에 준하는 신분의 칭호도 규정되었다.
- Prince du sang(혈통의 프린스)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칭호로, 왕의 증손 항렬 이후인 방계 왕족들로 왕위 계승권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왕위 계승 최우선권자는 Premier prince du sang으로서 '무슈 르 프린스(Monsieur le Prince)'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 Princes légitimés(공인된 프린스들)
국왕의 공인을 받은 사생아나 그 후손을 의미하며, 공식적으로 왕족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고 왕위 계승권 또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 준왕족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왕족으로 예우받기도 했고, 작위를 받아 이를 세습할 수 있었으며, 고위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왕족들과 혼인관계를 맺기도 했다. 명목상 공국(Principauté)을 영지로 두는 프린스 작위가 있을 때 이를 겸임 작위로서 드러낼 수 있을 뿐, 무조건 공식적인 프린스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다. 왕자로 공인된 사생아는 '프랑스의 적출(Légitimé de France)'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 Prince étranger(외국의 프린스)
외국 왕족들을 의미한다. 프랑스 국왕이 주권을 승인했거나 해외 왕조의 후예로 공인한 경우에 해당하며, 프린스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준왕족이었다.
이런 다양한 칭호들은 영지와 함께 수여되는 작위와는 별개의 개념이었고, 당연하게 종래의 작위 칭호도 그대로 겸할 수 있었다. 명목상 공국(Principauté)을 영지로 두는 프린스 작위는 'Prince de titre(명목상 프린스)'로 분류하기도 한다. 대체로 본인의 신분적 위상을 나타내는 왕족 전용 칭호를 대표 격으로 사용했으며, 겸임하는 작위를 표시할 때는 대체로 공작(Duc) 작위를 Prince de titre 작위보다 우선해 사용했다.[19]
물론 16세기 말쯤 되면 부르봉 왕조의 왕족이나 'Prince étranger' 등의 준왕족 신분이 아님에도 프랑스 국내에 국왕의 공인을 받은 '공국(Principauté)'을 보유한 사례는 사라졌다. 즉, 17~18세기에 공인된 왕족·준왕족 신분이 아님에도 프린스 칭호를 사용하는 경우는 좋게 말해서 작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경우고 실질적으로는 칭호를 사칭하는 셈이다.[20] 프랑스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르봉 왕조의 방계 후손들도 작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린스를 자처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계승권을 주장하는 작위의 계급이 프린스가 아니라 '왕족'·'후계자' 등의 의미로 쓰는 것이다.
4.2.1.1. 프랑스 왕국의 작위 비교
계급/칭호 | 설명 | 영어(번역) | 독일어(번역) |
왕(Roi) | 프랑스 왕국의 군주. 절대 권위와 신의 대리자로 간주됨. | King | König |
도팽(Dauphin) | 왕위 계승자의 공식 칭호. 왕태자. | Dauphin | Dauphin |
공작(Duc) | 프랑크 왕국 시절 공작(Dux; Herzog)에서 유래. | Duke | Herzog |
프린스(Prince) | 중세의 Princeps(Fürst) 칭호에서 유래. | Prince | Fürst |
후작(Marquis) | 프랑크 왕국 시절 변경백(Marchio; Markgraf)에서 유래. | Marquess | Markgraf |
백작(Comte) | 프랑크 왕국 시절 백작(Comes; Graf)에서 유래. | Count | Graf |
자작(Vicomte) | 본래 백작의 가신이었으나, 독립하여 프랑스 국왕과 봉건 계약을 맺음. | Viscount | Vizegraf |
남작(Baron) | 국왕에게 직접 봉토를 하사받은 영주. | Baron | Baron |
비담(Vidame) | 본래 주교의 가신이었으나, 주교를 배반하여 프랑스 국왕과 봉건 계약을 맺음. | Vidame | Vidame |
영주(Seigneur) | 국왕과 봉건 계약을 체결한 봉신이나 공인된 지위를 받지 않은 경우. | Lord | Herr |
전용 칭호를 받은 왕족이나 준왕족은 그 신분적 지위상 작위를 초월하여 일반 귀족들보다 우월한 서열임이 공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용 칭호 개념인 프린스(Prince)가 아니라 공국(Principauté)을 영지로 두는 작위 개념의 프린스는 대체로 공작(Duc)과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낮은 서열로 보았다.[21] 대략 17세기부터는 그러한 작위 개념의 프린스도 공식적으론 왕족·준왕족 신분의 전유물이 되긴 했다.
사실 프랑스에서 작위 칭호의 서열은 명확하게 규정된 바가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다고 하는 편이 그나마 정확하다. 일례로 남작(Baron)의 경우, 13세기 후반 무렵[22]에 처음으로 국왕이 하사하는 작위로 도입될 당시에는 국왕 직속의 봉신 신분으로 여겨졌기에 상당히 영예로운 칭호였다. 하지만 국왕이 해당 작위를 매작하는 사례가 빈번했고,[23] 프랑스 왕국의 영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외국의 남작들도 지속적으로 편입되었기에, 이미 14세기 전반에 이르면 남작 작위의 권위는 다른 외국의 사례와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24]
- 프랑스 왕태자의 독특한 칭호 '돌고래'
알봉 백작(Comté d'Albon)[25]은 문장에 돌고래(Dauphin)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le Dauphi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변 일대로 영역을 확장하여 비엔누아(Viennois) 일대를 통일하게 되자, 기존의 알봉 백작 칭호보다는 '도팽 드 비엔누아(Dauphin de Viennois)'라는 칭호를 내세우게 되었다. 1349년에 작위를 이을 자격이 있는 공식 후계자가 없었던 욍베르 2세는 작위와 영지를 프랑스 왕실에 매각했는데, 이는 명목상 당시 왕태자 샤를에게 분봉되었고 이후로도 프랑스 왕태자가 세습하게 되어, '프랑스 왕태자(Dauphin de France)'라는 공식 칭호가 되었으며 비엔누아 지방도 '도팽령(Dauphiné)'에서 따온 '도피네'로 불리게 된다. 왕태자비는 '마담 라 도핀(Madame la Dauphine)' 또는 이를 줄인 '도핀(Dauphine)'으로 불렸다.
- 프랑스 국왕에 대항한 왕족의 반란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 가스통(Gaston)은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친동생이었다. 친형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상황에서 가스통은 당대의 재상인 리슐리외 추기경을 향한 귀족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반란을 주도했다. 당시 가스통은 루이 13세에게 "형님은 왕이지만, 왕국은 왕의 의지만으로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귀족들의 뜻을 듣지 않는다면 왕국은 분열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나, 루이 13세는 "나는 신이 선택한 왕이다. 귀족들이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반역이다."라며 단호한 입장을 내놓았다. 결국 가스통은 1626년 샬레 공모 사건(Conspiration de Chalais)과 1630년 듣기 좋은 날의 음모(Journée des Dupes) 사건 그리고 1642년 생마르 음모 사건(Cinq-Mars Conspiracy) 등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가스통은 루이 13세에게 3번이나 붙잡혔지만 친동생이라는 이유로 루이 13세는 그를 처형하지 않고 정치적 권한만 제한한 채 풀어준다.[26] 루이 13세가 죽은 뒤인 1649년에도 콩데 공(Prince de Condé) 루이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가스통은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연금당했고, 콩데 공은 달아나서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가스통은 적통 후계자가 없었기에 사후 오를레앙 공작 작위는 루이 14세의 동생이 승계했고, 콩데 공은 1658년에 사면받아 프랑스로 복귀할 수 있었다.
-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삼촌인 가스통의 오를레앙 공작 작위를 계승한 필리프 1세는 가스통과 달리 친형 루이 14세와 굉장히 돈독한 관계를 평생 유지했다. 하지만 친형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필리프는 전장에서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무슈'라는 별칭과 함께 화려한 의상과 사치스러운 파티로 더 유명했다. 특히 여성의 패션과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아 궁정에서 종종 여장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런 독특한 행적은 당시 프랑스 궁정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격언의 대가' 라로슈푸코 공작(Duc)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라로슈푸코 공작은 자신의 책 '격언집(Maximes)'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했다.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격언 중 하나는 "우리의 미덕은 종종 우리의 악덕보다 더 교묘한 위선이다"라는 것이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당신의 격언들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는 웃으며 "불쾌하지 않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 사디즘의 기원 사드 후작(Marquis)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백작 가문 출신으로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는 문란한 행적들로 악명을 얻었으며 몇 차례 투옥되길 반복했다. 결국 빈곤에 빠져서 작가로 활동했는데, 성적 자유와 인간 본능에 관한 급진적인 사상으로 당시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이러한 작품들은 오늘날 '사디즘(Sadism)'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화장지와 음식 포장지에 소설을 적어 간수들을 통해 외부로 몰래 전달했다는 일화도 있다. 1772년에 영지가 후작령으로 격상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을 겪게 되면서 가문의 유일한 후작으로 남았기에 오늘날에는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본인은 1772년 이후에도 '백작'을 자처하고 다녔다. 당시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는 후작을 사칭하는 일이 빈번해서 저명한 후작 가문이 아니라면 일단 사기꾼으로 여기고 보는 경우가 흔했기에, 사드 후작은 정식으로 후작 칭호를 쓸 수 있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용하길 꺼렸던 것이다.
4.2.2. 프랑스 제1제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에 자신을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로 선언하며, 국민투표를 통해 해당 칭호를 공식화했다. 나폴레옹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처럼 귀족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제도들을 도입하여 프랑스 군인 및 공무원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그러한 차원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폐지된 귀족 칭호도 부활시켰다.- 대공(Prince)
- 공작(Duc)
- 백작(Comte)
- 남작(Baron)
- 기사(Chevalier)
해당 작위들은 고위 공직자들에게 배분되었고, 그 외 전공을 세운 군인이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여자들이 서임되었다. 하지만 영지는 수여되지 않았고 수훈자들은 해당 작위의 격에 따라 연금을 추가로 할당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작위 칭호는 지명과 병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제국 대공(prince de l'Empire)'처럼 'de l'Empire' 수식어를 붙여 쓰였다.
특출한 전공을 세운 고위 장교들은 전공을 세웠던 전장의 지명을 작위와 결합해 쓸 수 있는 특권을 누렸는데, 이를 '승리 칭호(Titre de victoire)'라고 부르며 혁명 이전처럼 지명과 결합된 작위 칭호를 쓸 수 있었다. 승리 칭호를 받은 대공이나 공작은 일반적인 '제국 대공'보다도 우선되는 서열로 통했다.
나폴레옹의 친인척들도 대공(Prince) 작위를 받았는데, 이들의 경우 '프랑스 대공(prince français)' 칭호를 사용했다. 수여 범위가 '친인척'이었기에, 보나파르트 가문 구성원과 그 배우자뿐만 아니라 조제핀과의 결혼으로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이 된 외젠 드 보아르네도 이 칭호를 받았다. 이들은 프랑스 대공 칭호 이외에도 프랑스 제국의 괴뢰국 군주로 '책봉'되기도 했다.[27] 외젠의 경우 이탈리아의 부왕(Viceroy)과 프랑크푸르트 대공의 후계자 지위를 겸했다.[28] 나폴레옹의 적장자인 나폴레옹 2세는 '황태자(prince impérial)' 칭호와 함께 '로마 왕(Roi de Rome)' 작위를 받았다.
이 시점에 나폴레옹의 친인척을 포함하여 주요 측근들은 프랑스 제국의 확장을 통해서 국외의 작위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개중에는 명목상 주권을 승인받은 작위도 있었고, 명목상 군주의 '봉신'인 지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장 란은 몬테벨로 공작(승리 칭호)과 시에베르 대공(실레시아의 주권 프린스)을 겸했고, 장바티스트 베시에르는 나폴레옹이 겸한 이탈리아 국왕의 봉신 지위인 이스트리아 공작이었다. 이런 지위를 가진 이들은 '프랑스 대공'보다는 낮게 보더라도 일반적인 프랑스 제국의 작위만 보유한 사람들보다는 우선하는 서열로 인식되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여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프랑스 작위 서열을 간략하게 나열하면, 황태자(prince impérial) > 프랑스 대공(prince français) > 국외 주권자 > 국외 봉신 > ○○ 대공(승리 칭호) > ○○ 공작(승리 칭호) > 제국 대공(prince de l'Empire) > 제국 공작(Duc de l'Empire) > 백작 > 남작 > 기사 순서로 정리된다. 다만 작위 칭호만 보고서 그것이 프랑스 국외의 작위인지 국내의 승리 칭호인지 구분하는 것도 수월하지 않고,[29] 구 귀족 출신으로 폐지된 작위 칭호를 계속 사용하는 경우마저 종종 있으며, 개별 사례에 대입하면 맞지 않는 경우도 생기므로, 이런 식의 도식화는 지양할 필요가 있음을 유의하자.[30]
나폴레옹이 만든 작위들은 1815년에 폐지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다시 황제로 즉위하면서 출범한 프랑스 제2제국 시기에 제1제국 시절의 작위 제도는 복구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prince impérial) 칭호나 그 외 황족들의 프린스 칭호 사용은 이뤄졌고, 그 외에도 승리 칭호와 함께 작위를 수여한 사례 등도 일부 있다.
여담으로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뤄진 동안에도 나폴레옹에게서 받은 작위를 내세우며 귀족 행세를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왕당파 출신 귀족들 사이에선 혁명 직전까지 사기꾼 취급을 해왔던 후작(Marquis) 작위를 나폴레옹이 서임한 적은 없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국 출신의 진정한 귀족이란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
4.3. 영국
영국에서 'Prince'라는 단어는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에서 유입되고 나서 독창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다. 또한 가문 단위로 작위 칭호를 공유하는 전통이 있던 다른 유럽 지역과 다르게 영국에서는 작위 칭호의 공유를 금지했고, 법률상으로 귀족 신분을 인정하는 범위 또한 작위를 보유한 사람 본인만으로 제한된다.관례상 왕족을 프린스(Prince)나 프린세스(Princess)로 호칭하는 것이 허용되거나 방계 왕족의 공식 칭호로도 쓰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프린스 칭호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원칙을 일찍부터 도입했으며, 특히 1917년 조지 5세가 왕실 칭호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체계적인 규제도 확립되었다. 현대에도 영국의 프린스 칭호는 국왕의 아들과 남계 손자에게만 수여되며, 프린세스 칭호 또한 국왕의 딸과 남계 손녀에게만 수여된다.
- 로마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기(기원후 43년~410년)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로마 황제는 브리튼을 제국의 일부로 통합하고자 정복을 명령했다. 로마군은 그 해 43년에 브리튼에 상륙하여 현지 켈트족 부족을 물리치고 브리튼섬 남부를 중심으로 속주(Provincia Britannia)를 설립했으며, 주요 로마 도시로 런디니움(현재 런던), 에보라쿰(현재 요크) 등이 건설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Princeps'라는 'Princeps'는 황제 개인의 칭호가 존재했으나 이 개념이 브리튼 지방 지도자에게 확장된 흔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410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브리튼에서 로마군 철수를 명령하면서,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브리튼에서 로마가 철수한 후, 브리튼은 다양한 게르만족(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에게 점령되었다.
- 앵글로색슨 시대(5~11세기)
로마가 물러난 후,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족의 지배 아래 놓였다. 이 시기에는 중앙집권적인 봉건 체계가 자리 잡지 않았고, 여러 독립적인 왕국들(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등)에서 각각의 군주 체계가 운영되었다. 이 시기에도 Prince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고 앵글로색슨 문헌에서 라틴어 princeps가 드물게 등장했지만, 이는 왕족 칭호가 아닌 "지도자"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나마 Prince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어는 Ætheling로 "고귀한 혈통"을 의미하며, 왕자 또는 왕위 계승권자의 역할과 유사했다.
- 노르만 정복 이후(11세기~13세기)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노르만족은 바이킹의 후예이긴 하지만 이미 노르망디에 정착한 지 200년이 흘러 그 정체성과 혈통, 언어, 풍습, 문화, 종교는 프랑스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영향으로 오랫동안 영국 왕실과 주요 귀족층은 프랑스어를 썼으며, 대표적인 예시로 그 유명한 사자심왕 리처드 2세도 평생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를 구사했다.[31]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족이 잉글랜드에 프랑스 봉건 체계와 작위 제도를 도입하면서 'Prince'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prince'라는 단어는 왕실 작위를 지칭하는 데 점차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왕족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특정 계승자를 지정하지는 않았다.
- 'Prince of Wales' 칭호의 시작(1284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정복한 후, 그의 아들 에드워드(후일의 에드워드 2세)를 'Prince of Wales'로 임명하며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칭호로 자리 잡았다. 이는 독립적인 세력이었던 웨일스를 잉글랜드 왕실이 흡수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고, 이후 왕실에서 왕위 계승자의 작위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 백년전쟁(1337년~1453년)
14세기 중반,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가 'Prince of Wales'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실 작위로서의 'Prince'의 상징적 위상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자로서 군사적 지도자로도 유명해지며, 'Prince'의 역할이 단순히 혈통적 지위를 넘어 정치적·군사적 리더십을 포함하게 되었다.
- 튜더 왕조(15~16세기)
튜더 왕조 시기에는 왕실의 지위와 작위가 더욱 체계화되었고, 'Prince'의 역할과 위상이 강화되었다. 헨리 8세 시기에는 왕실 남성의 작위를 외교적 상징으로도 활용하며 유럽의 다른 왕실과 동등한 위치를 강조했다. 이 시기부터 왕위 계승자는 반드시 'Prince of Wales'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는 왕실 작위 체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 근대 영국(17~19세기)
17세기 스튜어트 왕조와 이후 18세기 하노버 왕조에 이르러, 'Prince'는 직계 왕족을 나타내는 공식 칭호로 정착되었다. 19세기에 이르면 다른 유럽 대륙의 왕실에서도 직계 왕족을 대상으로 'Prince' 칭호를 공식 수여하는 사례가 일반화 되었다. 이 시기의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인 앨버트 공에게 영국의 어떠한 공적 지위도 주길 반대하던 의회를 설득하여 공식적으로 'Prince Consort' 칭호를 수여하는 데 성공했다.[32] 이 시기에는 왕실 작위와 관련된 대중적 상징성이 강화되었다.
- 현대 영국(20~21세기)
현대 영국에서는 'Prince' 작위가 왕의 직계 남성 후손들에게만 주어지며, 왕위 계승 순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Prince of Wales'는 여전히 왕위 계승자를 나타내는 공식 작위이며, 현재 찰스 3세의 장남 윌리엄 왕자가 이를 보유하고 있다.
4.4. 슬라브권 칭호의 번역
4.4.1. 크냐지
<colbgcolor=white,#505050> 슬라브조어(재구) | [ruby(kъnędzь, ruby=kŭnędzĭ)] | |
고대 동슬라브어 | [ruby(князь, ruby=knyazĭ)] | |
러시아어 | [ruby(Князь, ruby=Knyaz)] | |
폴란드어 | książę | |
체코어 | kníže | |
슬로바키아어 | knieža | |
크로아티아어 | Knez | |
세르비아어 | [ruby(Кнез, ruby=Knez)] | |
불가리아어 | [ruby(Княз, ruby=knyaz)] |
러시아어를 기준으로 '크냐지(Князь)'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게르만조어)의 'kuningaz'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어원상으로는 현대 독일어의 König(왕)이나 영어의 King과 같으며, 핀란드어나 에스토니아어 등에서도 이에 맞춰 번역되고 있다.
본래 이 칭호는 고대부터 슬라브권에서 대족장급 통치자가 사용하는 칭호였다. 중세 유럽에서는 라틴어로 옮길 때 Rex(왕), Dux(공작), Princeps(프린스) 등으로 번역했으나 점차 프린스로 번역하는 것이 통용되었다. 이는 중세 가톨릭 세계관에서 'Rex(왕)'는 황제나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칭호로 여겨졌으며, Princeps(프린스)를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은 통치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 왕국처럼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은 군주는 'Rex(왕)'로 공인되기도 했다.
중세에는 군소 크냐지들을 통합하여 '벨리키 크냐지([ruby(Великий, ruby=Velikii)] [ruby(князь, ruby=Knyaz)])' 칭호를 내세우는 통치자들도 등장했다. 해당 칭호는 그 당시부터 라틴어로는 'Magnus Dux(영어: Grand Duke)'로 번역되는 것이 통용되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주로 '대공(大公)'으로 번역되고 있다. 벨리키 크냐지에 복속된 기존의 크냐지들은 본래의 세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 칭호 또한 그대로 유지된 경우가 많았다. 근세 유럽에서는 점차 벨리키 크냐지를 군주 개념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해서, 동유럽의 사례를 근거로 군주 개념으로 '대공' 칭호를 도입하는 사례가 서유럽에서도 생겼다.
4.4.1.1. 러시아
러시아 왕족 칭호의 변천 | |||
<colbgcolor=white,#505050> 도입 시기 | 남성형 | 여성형 | 비고 |
16세기 | 차레비치([ruby(Царевич, ruby=Tsarevich)]) | 차레브나([ruby(Царевна, ruby=Tsarevna)]) | 군주의 차르([ruby(Царь, ruby=Tsar)]) 칭호 도입에 따름. |
1797년 | 체사레비치([ruby(Цесаревич, ruby=Tsesarevich)]) | 체사레브나([ruby(Цесаревна, ruby=Tsesarevna)]) | 황태자 부부 전용 칭호. |
벨리키 크냐지([ruby(Великий, ruby=Velikii)] [ruby(князь, ruby=Knyaz)]) | 벨리키 크나즈냐([ruby(Великая, ruby=Velikii)] [ruby(Княжна, ruby=Knyaginya)]) | 황태자 이외의 황족에게 수여한 대공 작위. | |
1866년 | 체사레비치 | 체사레브나 | 황태자 부부 전용 칭호. |
벨리키 크냐지 | 벨리키 크나즈냐 | 황자 및 황손에게 수여한 대공 작위. | |
크냐지(князь) | 크냐즈냐(Княжна) | 황제의 증손자 이하인 황족에게 수여한 공작 작위. | |
번역어 | 크냐지 | 크냐즈냐 | 군주나 제후의 프린스(Fürst) 칭호. |
프린츠([ruby(Принц, ruby=Princ)]) | 프린체사([ruby(Принцесса, ruby=Princessa)]) | 통치 가문 구성원의 프린스(Prinz) 칭호. |
- 키예프 루스(9세기~13세기 초)
현대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키예프 루스가 원래 봉건제 국가가 아니라, 키예프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Киевский)을 중심으로 여러 크냐지(Князь)들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연맹체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10세기 이후 키예프 대공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지방 크냐지들은 키예프 대공에 종속되었으나, 여전히 자신의 영역에서는 자치적 통치권을 행사했다. 키예프 대공의 권력은 11세기 중엽에 정점을 이뤘으나,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흑해 무역로의 쇠퇴로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12세기부터는 대공위 계승권자끼리 내전을 벌이며 정치적인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었고, 그러한 틈을 타서 지방 크냐지들도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전반에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루스는 완전히 붕괴하여 몽골에 복속되었으나, 몽골인들은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기보단 해당 지역의 크냐지들에게 조공을 받거나 징병 의무를 부과하는 간접적인 통치를 시행했다.
- 모스크바 대공국의 등장(1283년~1547년)
몽골의 지배기간 동안 블라디미르-수즈달에서 기원한 모스크바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Московский)이 초창기에는 몽골 킵차크 칸국의 통치에 협력하며 점차 루스족 세력을 규합하는 위치로 성장했다.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이 약화하는 틈을 타면서 본격적으로 몽골과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16세기 초에 이르러 몽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 주변 루스족 국가들을 통일하게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에 합병된 기존 루스족 국가의 통치자들은 그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대공의 봉신인 '크냐지(Князь)'로 편입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몽골의 지배기간 동안에 루스족 지도자들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지위는 킵차크 칸국의 승인(야를리크)을 받아야 했었기에, 몽골에게서 독립한 이후에는 점차 해당 칭호의 사용을 꺼리게 되었다. 때문에 이반 3세는 대외적으로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차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반 4세 때부터는 공식적으로 차르 칭호를 채택하여 러시아 군주의 대공 칭호는 폐기되었다.
- 루스 차르국(1547년~1721년)
차르 칭호가 공식적으로 채택되면서, 남성 왕족은 '차레비치(Царевич)', 여성 왕족이나 정실부인은 '차레브나(Царевна)'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로마 황제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황제격 칭호인 '차르'를 도입하였음에도, 유럽권에서는 단순히 슬라브족의 군주 칭호로 취급했을 뿐 실제 황제격 칭호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었다.
표트르 1세는 러시아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낙후된 현실을 인정하고 서구화 개혁을 추진하여 국력 향상을 꾀했다. 이에 따라 서유럽 귀족 작위 체계가 도입되기도 했다. 유럽에서 백작([ruby(Граф, ruby=Graf)])과 남작([ruby(Барон, ruby=Baron)]) 개념을 수입해 왔으나, 공작(Duke, Herzog) 개념 대신 기존의 크냐지 칭호를 공식 작위 체계로 편입시켰다.[33] 기존의 크냐지들을 포함해 군소 영주인 보야르들에게 작위가 수여되었고, 이를 계기로 보야르 칭호를 완전히 폐기했다. 서구화 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대북방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차르 칭호를 '임페라토르([ruby(Император, ruby=Imperator)])'로 고치면서 결국 황제 지위의 대외적 승인까지 받아냈다.[34]
- 1797년 파벨 1세의 황실 개혁
18세기까지 제위 계승을 두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었기에, 1796년에 즉위한 파벨 1세는 살리카법의 원리를 도입해 승계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그 결과로 황태자와 황태자비만이 '체사레비치(Цесаревич)' 및 '체사레브나(Цесаревна)'로 불릴 수 있도록 개정되었고, 그 이외의 황족들은 원래 군주의 칭호였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작위를 받게 된다.
- 1866년 알렉산드르 3세의 황실 개혁
방계 황족들이 항렬의 제한 없이 모두 대공 작위를 받는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이 이어지자, 이제는 대공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게 되어 황실 재정에 부담을 주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결국 대공 작위의 수여 범위를 황제의 손자 항렬까지로 제한하고, 그 이외에는 일반 공작(Князь) 작위를 수여하도록 바뀌었다.
4.4.2. 주판
주판(Жупан / Župan)은 중세 슬라브권에서 사용된 칭호다. 크네즈(Кнез: 크냐지)와 똑같이 한국어로는 공작으로, 영어로는 Prince로 번역되는 칭호이나, 군주를 뜻하는 칭호인 크네즈와는 달리 부족장이나 영주, 제후를 뜻하는 칭호이다. 세르비아 대공국의 공작도 원어로는 주판이라고 한다. 참고로 중세 초의 세르비아 공국이나 모라비아 세르비아 공국, 근대 세르비아 공국에서의 공작은 크네즈다.크로아티아의 광역 행정구역인 Županija(주)[35]와 그 수장인 Župan(주지사)도 주판 칭호에서 유래했다.
4.4.3. 보이보드
한편 슬라브권에서는 "보이보드(Voivode)"라는 칭호도 쓰였는데, 왈라키아 공국처럼 군주의 칭호로 쓰인 경우도 있고,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토착 지배자의 칭호로 쓰인 사례도 있다. 이런 경우에 서유럽권 언어로는 대체로 프린스로 번역되었다.하지만 슬라브권에서 보이보드는 총독이나 원수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 제국의 보이보다([ruby(Воевода, ruby=Voevoda)])나 헝가리 왕국의 보이보드는 지방 총독 개념의 관직이었다. 보스니아 왕국의 'Veliki Vojvoda Bosanski(보스니아 대공, 영어: Grand Duke of Bosnia)'는 작위 성격의 칭호가 아닌 최고 군사 지휘관 개념인 관직이었다.[36] 현대에도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들에선 보이보드가 최고위 군사 계급 칭호로 쓰인다.
5. 관련 문서
[1] 한국에서 역사적으로 사용된 왕족의 칭호로 간주하기에 사용되는 번역어이다. 본래 군(君) 칭호는 고구려나 고려 초기에 왕족들이 사용한 특수한 칭호였으나, 오등작 체계가 정비되면서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요구로 제후국의 격식에 맞는 관제를 도입하면서 부활하고 제후가 책봉하는 작위 칭호로 격이 낮아졌다. 또한 외국의 작위들은 보통 오등작 체계에 맞춰 번역하는 관례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군(君) 칭호로 번역하는 경우는 드물다.[2] (특히 영역의) 통치자를 일컫는 말로 쓸 때 사용한다. 맥락상 군주론처럼 독립적 통치자 성격을 강조하면 '군주', 영역제후 성격을 강조하면 '제후'로 번역한다.[3] 현대 유럽의 소규모 독립 군주국의 군주에 대한 역어로, Grand Duke 등과 Prince를 포괄한다.[4] 고대 로마사에서는 당연히 황제 및 초기 제정(원수정)을 가리킨다. 중세사에서도 문맥에 따라서는 종종 학술용어로서 중세 성기에 출현한 하부 통치계급인 성주층(castellan)에 대비되어 중세 초기부터 존재해 온 상부 통치계급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5] 프린스 오브 웨일스(Prince of Wales; Fürst von Wales)처럼 영역제후 작위에서 비롯한 경우는 Prinz라고 옮기지 않으니 주의.[6] 원래는 공작(Herzog)보다 낮은 변경백·방백 등의 영역제후들을 폭넓게 일컫는 통칭이었으나, 16세기 무렵부터 공작보다 낮은 여러 작위를 Fürst 단일 작위로 통합하는 것을 황제에게 승인받는 형태로 공식 칭호로 사용하는 제후들이 등장했다. 전자는 그냥 '제후'로 번역되며, 후자는 서열상 공작보다는 아래이므로 후작이 적절하나 어원상 원래 그냥 '군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문제로 인해 '대공'이나 '공작', '후작' 등 중구난방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그냥 아예 '퓌르스트' 혹은 영어식의 '프린스'로 그대로 음차하는 경우도 있다.[7]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왕세자가 아닌 국왕의 자녀나 손주들에겐 인판테(Infante) 또는 인판타(Infanta) 칭호를 수여한다. 부르봉 왕조에서도 손자 항렬까지는 프린스가 아닌 별도의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다만 관례상 직계 왕족을 상대로 Prince로 부르는 것이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아니다.[8] 어원적으론 Primus(맨 앞)와 -ceps(움켜쥐는 자, 취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다. 흔히 제1시민으로 번역되지만, 어원을 그대로 직역하여 수령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9] 이외에도 같은 유래의 단어로 산스크리트어의 프라타마(prathama), 그리스어의 프로토스(prōtos)가 있으며 더 근원을 거슬러 가면 모두 궁극적으로는 인도유럽조어의 어근인 *per-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10] 개요에 정리된 언어별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실제로 서유럽권의 언어에서 Fürst와 Prinz를 구분하는 어휘는 없다. 이를 엄밀하게 구분할 때에나 별도의 수식어를 붙인다.[11] 이는 동아시아권에서뿐만 아니라 서유럽권 언어의 화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어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권에서나 Fürst와 Prinz가 구분된다.[12] 이는 백년전쟁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 프랑스 국왕과의 봉신 관계를 청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군주 지위를 승인받지 못해서 왕국으로 승격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프랑스로 합병되어 버린 사례와 대비된다.[13] 필립 공의 칭호 번역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사례로는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대공(Prince Consort),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적절한 번역인지는 불확실), 왕공(Prince Royal), 공(Prince) 등이 있었다. 여기서 Prince Consort를 번역한 대공은 일반적인 대공 작위가 아닌 유럽 여왕의 국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이라고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필립 공의 공식 칭호는 'Prince Consort'가 아닌 'Prince'이다.[14] 아마도 한자 '작(爵)'이 '벼슬'을 의미하기에 이를 신하적 칭호로 여기는 논리로 보이나, 사실 유럽 또한 중세에는 황제나 왕 만이 정당성 있는 군주의 칭호로 여겨졌다. 근세에 종교의 정치적 권위가 약화하고 주권 개념이 등장함에 따라 공작(Dux)이나 프린스 등도 주권을 인정받는 사례들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Dux라고 해서 다른 군주의 신하 신분인 Dux와 별개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도 아니었다. 언어적 차이를 감안하여 군주 성격을 갖는 경우에 한정해 '공작'이라 하지 않고 '공'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다고 해서 Dux를 '공작'으로 옮기는 것을 오역으로 치부할 수 없듯이, 독일의 Fürst를 '후작'으로 옮기는 것을 오역이라 할 수는 없다.[15] Fürst(erz)bischof은 한국어로 (대)주교후로 번역되며 주교제후나 (대)주교공으로 번역하는 사례도 있다. 영어로는 Prince-(arch)bishop으로 번역된다. 주교후 목록[16] 성직 제후 중에서는 마인츠, 쾰른, 트리어 대주교후가 선제후로 공인되었다.[17] 제국제후 신분이 공인되었으나 Fürst 칭호를 공식화하지 않은 백작(Graf)이라면, 'gefürsteter Graf'로 분류된다. 다만 작위나 그 보유자를 이렇게 호칭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그 영지의 지위를 구분할 때 'gefürstete Grafschaft'로 명기하면서 쓰이는 편이다.[18] 루이 15세는 왕녀 모두에게 순번을 매긴 '마담' 칭호를 수여했다. 장녀는 'Madame Première', 차녀는 'Madame Seconde', 삼녀는 'Madame Troisième' 라는 식.[19] 소속 가문의 이름과 연관되는 작위가 있다면, 작위의 서열 관계를 무시하고 해당 작위를 최우선으로 쓰기도 한다.[20] 사실 이 시점엔 프랑스 귀족 사회에서 작위를 사칭하는 일이 빈번하기도 했다.[21]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퓌르스트(Fürst)였다가 프랑스로 편입되면서 프랑스어 번역어인 Prince로 기존의 칭호를 유지한 사례들이 있기에, 그와 유사한 지위로 본 것이다.[22] 그 이전의 프랑스에서 Baron은 원래 국왕 직속 봉신들을 통칭하는 어휘였다.[23] 프랑스에서 전국 차원의 징세는 정기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그 과정과 절차도 굉장히 복잡했기에 징세가 실현되더라도 재정을 즉시 확보할 가능성도 적었기 때문이다. 종래 백작 이상급 작위처럼 실질적인 통치권을 부여할 의도까진 없었기에, 판매되는 남작 작위는 명목상의 지위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17세기에 이르면 루이 14세가 여러 차례 엄청난 규모의 매작을 단행했기에, 아예 명목상의 남작령조차 없는 경우마저 발생했다.[24] 특히 프랑스 왕국의 경우, 다른 외국처럼 왕실에서 휘하 봉신들의 작위를 엄격하게 관리하진 않았기에, 작위의 사적인 매매도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대놓고 작위 수집가(...)로 활동하는 귀족들도 있어서, 본래 주교에게 봉헌된 영지들의 관리인이었으나 주교를 통수치고 국왕에게 영지를 바쳐서 명목상 국왕 직속 봉신 신분을 얻은 것에서 유래된 비담(Vidame) 작위가 그 희소성 덕분에 어지간한 백작 작위 뺨치는 수준의 거액으로 거래된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이런 환경에서 공식적인 매작까지 성행하자, 17세기 후반부터는 아예 작위를 사칭하는 귀족들이 많아지게 되었다.[25] 11세기 초에 등장한 성주 출신 가문으로 백작을 자칭했으나, 1155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영토는 부르군트 왕국 소속이었으므로 원래 신성 로마 황제의 봉신이었으나, 중세 후기에 이르면 프로방스와 함께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었다.[26] 사실 반란이 너무 맥없이 진압되어서 그렇기도 하다. 자신이 블루아 성에 유폐시켰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와 화해한 것도 있고[27] 명목상 이들은 '주권'을 가진 독립국의 군주였으나, 나폴레옹이 실질적으로 그런 지위를 인정해 준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왕으로 세웠으나, 실제로는 본인이 스페인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물론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현지 사정에 무지했고, 억압적인 통치의 결과로 스페인 사람들의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결국 보다 못한 조제프가 스페인의 상황을 수습하고자 나폴레옹에게 충언을 겸해 필요한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더니, 나폴레옹은 이에 불만을 표하며 "왕관을 줬더니 왕 노릇을 한다!"라고 비꼰 일화가 있다. 결국 조제프의 충언마저 무시한 나폴레옹의 스페인 통치는 폭망했다.[28]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랑크푸르트 대공이 작위를 포기하면서 실제로 라인 동맹의 수석군주(Fürstprimas)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 지위를 승계하기도 했다. 사실상 라이프치히 전투가 나폴레옹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하고, 해당 시점에는 라인 동맹과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이 사실상 해체된 상태라 거의 언급되지는 않는다. 당시 외젠은 나폴레옹의 친형제마저 뒤통수를 치는 상황에서, 반프랑스 동맹 측으로부터 이탈리아 국왕을 시켜줄 테니 나폴레옹을 배신하라는 회유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거절하며 나폴레옹과의 의리를 지켰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나폴레옹이 "나를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가족"이란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장인 바이에른 국왕이 수여한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 되어 여생을 보냈다.[29] 애초에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주요 전장은 프랑스 국외에 위치해있다.[30] 이러한 서열 구분은 사실 공식화된 적도 없거니와, 승리 칭호를 받은 백작이나 괴뢰국의 후작(Marquis)·자작(Vicomte) 같은 특이 사례까지 대입하면 굉장히 난감해진다. 단순히 특정 작위를 받은 인물의 지위가 대강 어땠는지 참고하는 용도로만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31] 그래서 영국-프랑스 라이벌 관계를 들먹일 때 노르만 정복은 사실 프랑스의 잉글랜드 정복이었다는 떡밥은 양국 국민들의 불타는 주제이기도 하다.[32] 원래 여왕이 주고자 했던 칭호는 'King Consort'이었으나 의회의 반발로 인해 격을 낮춰가며 겨우 'Prince Consort'나마 수여한 사례다. 후일 앨버트 공처럼 엘리자베스 2세의 국서가 된 필립 마운트배튼의 경우, 어든버러 공작(Duke of Edinburgh) 작위 같은 영국 왕실의 공적 지위를 무난히 받았으며, 공식적인 칭호 또한 'Prince Consort'가 아닌 'Prince'로 받았다.[33] 한자어로 '후작'이나 '자작'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서유럽의 작위들은 본래 '백작'의 파생 작위 개념이다.[34] 당시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의 실력 앞에서 외교적으로 황제 칭호를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내심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 어떻게든 그들을 '황제'로 부르지 않고자 내부적으로는 이전에 내세웠던 대표 칭호였던 술탄이나 차르 등을 그대로 사용해 나갔고, 이러한 언어적 관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5] 영어로는 County로 번역된다. 대한민국에서는 County가 군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County는 원래 영어권에서 광역 또는 중간 계층의 행정구역 단위로 쓰이는 어휘라서 자치행정의 최하 계층인 기초자치단체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인 군과는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 보다는 광역 행정단위인 주 개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합하다. 사실 원래는 군이 시보다 상위 등급의 행정구역이었는데, 군이 시와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면서 번역에도 모순이 발생한 것.[36] 종신직이긴 했으나, 영지가 수반되지 않고 세습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작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수(元帥)'가 아닌 '대공(大公)'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보스니아 왕국의 공작(Vojvoda) 지위 중 하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전근대에는 이처럼 작위와 관직의 성격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한자문화권도 마찬가지로 대표적으로 청나라의 작위는 팔기군의 지휘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