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9D7E0><colcolor=#000>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의 국서 헨리크 공 Henrik, Prinsgemal af Danmark | ||
이름 | 프랑스어 | 앙리 마리 장 안드레 드 라보르드 드 몽페자 (Henri Marie Jean André de Laborde de Monpezat) |
덴마크어 | 헨리크 마리 한스 안드레아스 (Henrik Marie Hans Andreas) | |
출생 | 1934년 6월 11일 프랑스 제3공화국 지롱드 탈랑스 | |
사망 | 2018년 2월 13일 (향년 83세) 덴마크 프레덴스보르 궁전 | |
신체 | 187cm | |
배우자 | 마르그레테 2세 (1967년 결혼) | |
자녀 | 프레데리크 10세, 요아킴 | |
아버지 | 안드레 드 라보르드 드 몽페자 | |
어머니 | 르네 이본 두르세농 | |
형제 | 누나 프랑수아, 모리 남동생 에티엔, 장밥티스트 | |
종교 | 가톨릭 → 루터교회 (덴마크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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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의 국서.2. 작위
- 덴마크의 헨리크 공 전하 Hans Kongelige Højhed Prins Henrik af Danmark (1967년 6월 10일 – 2005년)
- 부군 전하 Hans Kongelige Højhed Prinsgemalen (2005년 ~ 2016년 4월 14일)
- 덴마크의 헨리크 공 전하 Hans Kongelige Højhed Prins Henrik af Danmark (2016년 4월 14일 ~ 2018년 2월 13일)
3. 생애
영아기 시절 |
1938년 하노이에서 |
청년기[2] |
1962년 잠시 프랑스 외무부 아시아과에서 근무했고, 1963년부터 1967년까지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서 대사관 비서관으로 재직했다. 1965년 어느 봄 날 저녁, 런던에 있는 친구들의 집에서 열린 디너 파티에서 당시 왕세녀였던 마르그레테 2세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67년 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어서 스코틀랜드에서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들은 나란히 앉게 되었고, 그 후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 회의에 대해 자서전 "Skæbne Forpligter"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그녀가 좋아했던 그 선언.”
하지만 결혼 기간 내내 자신이 첫째 아들인 프레데리크 왕세자에게 밀릴까 봐 불만을 표출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로 도망치기도 했다.(...)
1972년 장남 프레데릭 왕세자와 함께 | 두 아들과 함께 |
1970년대 가족사진 |
2015년 12월 31일 공무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망 1년 전인 2017년 8월에는 자신이 국서로서 격이 낮은 칭호[4]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사후 마르그레테 2세 옆에 묻히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1559년부터 시작된 전통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마르그레테 2세는 헨리크의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졌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폐 감염 치료를 위해 입원하였으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평창 동계올림픽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 중이던 프레데릭 왕세자가 개막식에 불참했고 급히 귀국했다. 그러나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헨리크 공의 뜻에 따라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 프레덴스보르 궁[5]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2018년 2월 13일 화요일 오후 11시 18분 만 83세로 사망했다. 마르그레테 2세와 두 아들들이 임종을 지켰다고 한다. 유언 대로 유해는 화장되어 절반은 덴마크 해역에 뿌려졌고 절반은 프레덴스보르 궁의 개인 정원에 묻혔다.
4. 가족관계
4.1. 자녀
2017년 첫 손주 니콜라이 왕자의 18세 생일을 맞아 공개된 가족사진[6][7] |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레데리크 10세 (Frederik X) | 1968년 5월 26일 ([age(1968-05-26)]세) | 메리 도날드슨 슬하 2남 2녀[8] |
2남 | 요아킴 왕자 (Prince Joachim) | 1969년 6월 7일 ([age(1969-06-07)]세) | 슬하 2남[9] |
마리 아가시 오딜 카발리어 슬하 1남 1녀 |
5. 여담
- 스포츠광으로 유명했으며, 승마, 사냥, 테니스, 항해를 즐겼다.
- 시인과 조각가로도 활동했다. 시집이나 요리책을 출간한적이 많았다.
- 아들들에게 매우 엄한 아버지였다. 68혁명이전의 프랑스 사회는 '세속적 도덕관(morale laïque)'이라 하여 세속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도덕과 윤리를 추구하는 다소 보수적인 사회였었는데, 헨리크 역시 프랑스에서 살면서 이런 관념을 그대로 배운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기자회견에서 '아이들이 길들여지길 바랬다'며 아들의 뺨을 때린 적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해 경악에 빠뜨리기도 했다.
[1] 현재의 베트남.[2] 1960년대에 촬영되었다.[3] 34번째 생일 하루 전이다.[4] Kongegemal(King consort)이 아닌 Prinsgemal(Prince consort)[5] 헨리크 공이 생전 좋아하던 장소이다.[6] 유일하게 장남 프레데리크만 빠져있다.[7] 뒷줄 왼쪽부터 둘째 손자 펠릭스, 며느리 마리, 차남 요아킴, 첫 손자 니콜라이, 전 며느리 알렉산드라, 맏며느리 메리, 5번째 손자 헨리크, 막내 손녀 아테나, 아내 마르그레테, 본인이 안고있는 쌍둥이 손주 요세피네, 빈센트, 장손 크리스티안, 4번째 손녀 이사벨라[8] 크리스티안 왕세자, 이사벨라 공주, 빈센트 왕자, 요세피네 공주[9] 니콜라이 백작, 펠릭스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