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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7:34:58

유럽 군주들의 의전서열



1. 개요2. 역사
2.1. 배경2.2. 서열 제정2.3. 계속되는 분쟁2.4. 해결: 빈 회의
3. 관련 문서

1. 개요

유럽 군주들의 의전서열.

국가의 자존심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유럽 역사 내내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들 중 하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로 1,000년이 넘도록 중요한 외교 사안이었으나 1815년 빈 회의 이후부터는 의미를 잃고 사라졌다.

2. 역사

2.1. 배경

기존 서유럽의 황제국이던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한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은 동쪽에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한 부류나 아예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외교관계조차 맺지 못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서유럽은 한동안 분열되어 있다가, 약 300년이 지나서야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왕조가 800년에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어느 정도 통일하며[1] 그제서야 다시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잠시 동로마 제국프랑크 왕국 사이의 우위 논란이 불거지긴 했지만, 곧 두 국가 사이의 접경지가 사라지며 접할 일 자체가 줄어들었기에 이 논쟁도 얼마 못가 사그라들었다. 800년대 카롤루스 왕조의 패권이 붕괴하면서 서유럽에 무주공산의 시대가 열리자 새롭게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여러 서유럽 국가들 중 누가 더 의전상 우위에 있냐의 문제였다.

가장 먼저 불거진 의전 문제는 프랑크 왕국의 두 직계 후신인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왕국 사이였다. 그러나 10세기 경 프랑스 카롤링거 왕조의 왕들이 로베르 가문의 위협에 맞서 독일 오토 왕조의 도움을 받는 바람에,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신성 로마 제국보다 의전 서열이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엇다. 프랑스의 루이 4세가 947년 아헨오토 1세 황제의 궁정에서 부활절을 보낼 때, 로테르가 980년 마르구트에서 오토 2세 황제와 조약을 맺을 때나 항상 프랑스 국왕은 의전상으로 황제에 밀리는 콩라인 위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국력이 비등해지면서, 11세기부터는 둘 사이의 관계가 거의 동등해졌다. 신성 로마 황제와 프랑스 국왕은 양국 간의 국경인 뫼즈강 부근에서 완전히 동등한 자격으로 만나 조약을 맺곤 했다. 1006년과 1023년 로베르 2세하인리히 2세, 1033년 앙리 1세콘라트 2세, 1043년, 1048년, 1056년 앙리 1세하인리히 3세가 만날 때 모두 양측이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를 예우했다.

파일:Charles_V_le_Sage_et_l'empereur_Charles_IV.jpg
프랑스 샤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 카를 4세를 동등하게 묘사한 그림.

결국 프랑스 의전관들은 1300년대 초반에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와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Rex est imperator in regno suo).'라고 선포하며 최소한 프랑스 내부에서 프랑스 국왕과 신성 로마 황제의 서열이 동격이라는 주장을 명문화했다. 137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와 그의 아들 벤첼파리를 방문했을 때, 프랑스 화가들은 철저하게 주군이자 프랑스 국왕인 샤를 5세와 황제를 동등하게 묘사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만남의 장소가 프랑스 땅이었기에 해당 영토의 주권을 상징하는 백마는 오직 프랑스 왕만이 탔고 황제는 백마 대신 흑마를 탔다. 또한 황제가 탄 말에 프랑스의 색깔인 푸른색과 백합 상징을 입혀 묘사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의전서열 문제는 굉장히 첨예한 문제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나 1431년 바젤 공의회 등지에서도 주요 논란이 될 정도로 엄청난 불쏘시개였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동의했던 사항은 교황이 의전서열 맨 꼭대기에 있다는 점이었다. 교황청은 모든 갈등의 최종 중재자였고 교황의 사절은 사절단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톨릭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어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종교 개혁이 일어난 1500년대 이후의 개신교 국가들 역시 교황의 특별한 지위를 부정하고 그저 여러 세속적 통치자들 중 하나로 취급했다.[2]

2.2. 서열 제정

유럽 군주들 사이에서도 의전서열을 두고 티격태격 갑론을박이 그치지 않자 교황 율리오 2세는 1504년 공식적인 의전서열을 정해 못박아두기로 결정했다. 교황청은 나라가 얼마나 오래됐는지,[3] 국력이 얼마나 강한지 하나하나 상세히 따져서 유럽 주요 국가들에 서열을 매겼다. 이때 기존의 암묵적인 서열을 반영하여 신성 로마 황제를 교황 바로 아래, 군주들 중 최고 서열로 두었고 '교회의 장녀'라고 불리던 프랑스 국왕을 그 다음 순위로 책정했다. 완성된 의전서열 목록은 율리오 2세레오 10세의 의전관이었던 파리스 데 그라시스의 일기에 작성되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만일 한 군주가 동군연합으로 여러 국가의 왕위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면 개중 가장 높은 직위의 격에 맞추어 대우했다. 예를 들어 1501년에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는 나폴리 왕위를 획득했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페란도 2세는 보유한 직위들 중 가장 높은 아라곤 국왕(훗날의 스페인 국왕)의 의전을, 울라슬로 2세는 헝가리 국왕의 의전을 받는 식이었다.[4] 또한 아래 서열에 있는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은 공식적으로는 공화국이었으나 그 국력이 워낙에 무시못할 수준인 덕에 일부 공국보다도 높은 대접을 받았다.

율리오 2세가 정한 1505년 기준 유럽 군주들의 의전서열은 아래와 같다. 교황을 상위 권력으로 인정한 국가들만을 목록에 넣었기 때문에, 정교회를 믿는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 같은 국가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웨덴은 1521년 구스타브 바사가 중심이 되어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1505년 기준인 이 목록에는 나오지 않는다.[5]
1505년 기준 유럽 군주들의 의전서열
순위 문장 직위 당대 직위 보유자
1위 파일:교황 문장.svg 교황 율리오 2세
2위 파일:550px-Holy_Roman_Empire_Arms-double_head.svg.png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독일왕)
막시밀리안 1세
3위 파일:프랑스 왕국 문장.png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4위 파일:Spain_coat_of_arms.png 스페인 국왕 페란도 2세
5위 파일:CoA_of_Portugal_(1485-1570's)_uncrowned_shield.svg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
6위 파일:Royal_Arms_of_England_(1399-1603).svg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
7위 파일:the-coat-of-arms-of-kingdom-of-sicily-v0-btjdiqdyuzq81.webp 시칠리아 국왕 당시 스페인(아라곤 왕국)과 동군연합
8위 파일:Royal_Arms_of_the_Kingdom_of_Scotland.svg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
9위 파일:Coa_Hungary_Country_History_(14th_century).svg 헝가리 국왕[6] 울라슬로 2세
10위 파일:Arms_of_Navarre-Coat_of_Arms_of_Spain_Template.svg.png 나바라 국왕 카탈리나 1세
11위 파일:Coat_of_Arms_of_the_House_of_Lusignan_(Kings_of_Armenia,_Cyprus_and_Jerusalem).svg 키프로스 국왕 공석[7]
12위 파일:Small_coat_of_arms_of_the_Czech_Republic.svg 보헤미아 국왕 당시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동군연합
13위 파일:0c85f362545d7051d13c5a39bd7e.webp 폴란드 국왕[8]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14위 파일:National_Coat_of_arms_of_Denmark_no_crown.png 덴마크 국왕 한스[9]
15위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16위 파일:2000px-Arms_of_Eudes_de_Bourgogne2017.png 부르고뉴 공작 당시 스페인과 동군연합
17위 파일:800px-Arms_of_the_Electoral_Palatinate_(Variant_2).svg.png 팔츠 선제후 필리프 1세
18위 파일:작센 선제후국 국장.svg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19위 파일: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문장.png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20위 파일:오스트리아 공작 방패.svg 오스트리아 대공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임
21위 파일:사보이아 가문 문장.svg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
22위 파일:Augmented_Arms_of_Medici.svg 피렌체 곤팔로니에레 피에로 소데리니
23위 파일:밀라노 공국 국장.svg 밀라노 공작 당시 프랑스와 동군연합
24위 파일:Venice coat of arms.png 베네치아 도제 레오나르도 로레단
25위 파일:Wittelsbach_Arms.svg 바이에른 공국 알브레히트 4세
26위 파일:로렌 공국 국장.svg 로렌 공작 르네 2세
27위 파일:Blason_comte_fr_Clermont_(Bourbon).svg 부르봉 공작 수잔
28위 파일:Arms_of_the_Dukes_of_Orléans.svg 오를레앙 공작 프랑스 왕위에 합병
29위 파일:Coat_of_arms_of_Republic_of_Genoa_(early).svg 제노바 도제 공석[10]
30위 파일:Arms_of_the_house_of_Este_(1).svg 페라라 공작 에르콜레 1세

2.3. 계속되는 분쟁

율리오 2세가 일단 의전서열을 정해놓긴 했지만 당연히 모든 군주들이 이 서열에 만족할 리가 없었고, 정해진 교황 의전서열을 바꾸고 싶어하는 군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은 자국을 총애하던 알렉산데르 6세의 힘을 빌려 트리엔트 공의회를 틈타 자국을 프랑스와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려 시도했지만 비오 4세가 거절하면서 실패했다. 잉글랜드 국왕 역시 자신의 서열을 포르투갈 왕국과 동등하게 끌어올리려 시도했으나 교황청에게 거부당했다. 다만 이 것은 국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탓이 더 컸다.

군주들은 자신이 저 서열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의전 문제는 여전히 로마의 교황청, 가끔씩 열리는 공의회, 각지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항상 불거지는 문제였다. 1500년대 중반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서로를 동등한 의전 상대로 상호인정한 것에서 시작해, 유럽 국가들은 점점 모든 왕들을 동등한 의전으로 대접하자는 방향으로 타협해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 국왕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 서열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보다 낮다는 데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허울상으로나마 옛 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차마 본인이 황제와 완전히 동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제위는 교황이 부여한 것이기에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이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힘든 노릇이었다. 이에 프랑스 국왕들은 1519년 황제선거나 1658년 황제선거에 참여해 제위를 얻어보려고 시도했으나 선제후들에게 거부당하면서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스페인은 자국이 프랑스보다 서열이 낮은 것에 불만이 컸다. 특히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서 프랑스보다 지위가 높았던 카를 5세 시기를 거치면서 이같은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당시 한창 열리고 있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의전 문제가 터지자, 펠리페 2세는 1560년에 숙부인 페르디난트 1세와 함께 공의회에 공동 대표를 보내는 편법을 써 스페인 대표를 프랑스 대표보다 서열이 높게 만들 정도였다. 펠리페 2세는 한창 세가 치솟던 스페인 제국의 국력을 이용해 1562년, 1583년 2차례나 인도 제도의 황제를 칭할 생각까지 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파일:Louvre_Desjardins_Ambassador.jpg
루이 14세 앞에서 프랑스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스페인의 푸엔테스 백작.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굴하지 않고 수 백년 동안이나 프랑스와 동등한 의전 대우를 받고자 애썼다. 어찌나 갈등이 치열했던지 제3국은 의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자 프랑스와 스페인 대사를 한 방에 같이 두는 일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런던에서는 1661년 프랑스와 스페인 대표들이 예식 행렬 자리를 놓고 싸우는 바람에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였던 푸엔테스 백작이 루이 14세에게 사과해야 했는데, 프랑스 입장에서는 어찌나 통쾌했던지 이 사과 모습을 루이 14세 기념비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동격으로서 조각을 새겨서 남기기까지 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끈질긴 갈등은 이후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끝에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펠리페 5세스페인 국왕이 되자 1761년 가문협약을 맺으면서 완화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스페인 외에도 여러 국가들이 서로 의전 서열을 두고 다투었다. 잉글랜드와 스페인,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덴마크와 스웨덴, 스웨덴과 폴란드(+리투아니아), 폴란드와 헝가리(+크로아티아), 폴란드와 포르투갈 등이 죄다 서로 누가 더 높니 낮니를 두고 싸워댔다. 보통 더 오래된 국가가 더 의전이 높아야 한다는 상식 탓에, 스웨덴은 아예 자국의 역사를 위조하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혹은 굳이 역사가 누가 더 오래됐는지 따질 필요 없이, 국력이나 정세 탓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는 프랑스가 스웨덴의 요구를 받아들여 스웨덴을 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해주었다.

15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이, 17세기에는 루스 차르국이 급성장하면서 의전서열 문제는 더욱 치열해졌다.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 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모든 유럽 군주들이 오스만 제국보다 아래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권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가 유럽의 왕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보다 높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절정에 달한 1533년 코스탄티니예 조약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쉴레이만 1세가 신성 로마 황제였던 카를 5세를 '스페인 국왕'이라고 모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1606년 지트바토로크 조약에서야 신성 로마 제국을 자국과 동등하다고 인정했다.

러시아의 경우 차르는 어디까지나 러시아인의 고유 칭호로 여겨졌을 뿐 유럽 중심지에서는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8세기 대북방전쟁에서 루스 차르국이 스웨덴을 꺾고 북방의 대국으로 떠오르자 그제서야 1721년 프로이센, 네덜란드, 1723년 스웨덴, 작센 선제후국, 1741년 오스만 제국, 1742년 영국, 1745년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스페인, 176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인정을 받고서 완연한 황제국으로 인정받았다.

2.4. 해결: 빈 회의

1,400년에 걸쳐 유럽 국가들의 골치를 썩여온 의전 서열 문제는 1815년 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해결된다.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인 2개 국가가 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815년 3월 19일 조인된 '외교관의 우선 순위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이제 각국 대사들의 의전서열은 대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재임했는지에 따라서만 결정됐다. 오래 재임했을수록 의전 서열이 높아졌다. 대사의 재임 기간은 수도에 도착했다는 공식 통지 날짜 기준으로 계산했으며 교황의 사절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이 규정은 150년 가까이 쓰이다가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으로 성문화된다.

3. 관련 문서


[1] 물론 아스투리아스 왕국, 브르타뉴, 브리튼섬의 기독교 왕국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당시에는 딱히 두각을 드러낼 정도로 강한 왕국들도 아니었고 사실상 어느 정도 강력한 세력들은 모두 카롤루스 왕조 아래 통합되었다.[2]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을 선포하여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는데, 이는 교황의 승인을 받지 않았음에도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어차피 개신교 국가여서 교황과는 백만광년 떨어져있었고 봉건제상 상위 군주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돕는 대가로 칭왕을 승인했기 때문이다.[3] 나라가 오래될수록 중세 유럽세계의 근간이 된 옛 로마 제국 및 기독교와의 연관이 깊었고, 당연히 그 연관성이 깊을수록 서열이 높아졌다.[4] 보헤미아 왕국은 어쨌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영방국가 중 하나였고, 크로아티아 왕국은 라슬로 1세부터 헝가리 국왕이 동군연합으로 겸해왔다. 다만 동군연합의 특성상 헝가리 국왕이 크로아티아 국왕 노릇도 하는 것이지 헝가리 왕국이 크로아티아 왕국을 지배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헝가리 왕국 관점에서 크로아티아 왕국은 어디까지나 헝가리 국왕 개인의 사유지였다.[5] 어차피 스웨덴은 독립 직후 종교 개혁을 시행하여 가톨릭과 결별했다.[6] 크로아티아 국왕 겸임[7] 키프로스 왕국은 1489년 마지막 여왕 카타리나 코르네르가 강제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나라를 양도하며 멸망했다. 하지만 사보이아 공국은 키프로스 왕가와 혼인했으며 카를로 1세작위를 매입했음을 근거로 지속적으로 키프로스 왕위를 요구했고, 몇 백년 간의 끈질긴 요구 끝에 결국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명목상이나마나 키프로스 왕위를 칭하는데 성공했다.[8] 리투아니아 대공 겸임[9] 이 당시의 덴마크는 칼마르 연합의 종주국으로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핀란드 포함) 3개 스칸디나비아 국가를 동군연합으로 겸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왕권은 덴마크에서만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덴마크 국왕에게 저항하는 섭정들 때문에 이름만 왕인 상황이었다.[10] 당시 제노바는 프랑스에 점령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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