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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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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브 1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블라디슬라프 1세 라두 1세
단 1세 미르체아 1세 블라드 1세 미르체아 1세
미하이 1세 라두 2세 단 2세 라두 2세
단 2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 블라드 2세 미르체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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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7세 세르반 딘 이즈보라니 라두 7세 라이오타 바사라브
라두 7세 미르체아 5세 라두 8세 미르체아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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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틸라 알렉산드루 2세 미르체아 미네아 2세 페트루 2세
미네아 2세 슈테판 수르둘 알렉산드루 3세 첼 라우 미하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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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두 10세 라두 9세 라두 10세 라두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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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셰르반 게오르게 기카 그리고레 1세 기카 라두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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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슈테판 칸타쿠지노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 이오안 마브로코르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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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루 모루지 미하이 수추 알렉산드루 수추 콘스탄틴 입실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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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2위3위4위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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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7위8위9위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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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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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블라드 3세 조지 비칼리 헨리 코안더 게오르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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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루카 카라지알레 니콜라에 이오르가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 제오르제 에네스쿠 그레고리안 비볼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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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렐 러도이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 니콜라에 티툴레스쿠 페르디난드 1세 미하이 1세
26위27위28위29위30위
데케발루스 트라이안 버세스쿠 게오르그 뮤레산 이온 I. C. 브라티아누 러즈반 루체스쿠
31위32위33위34위35위
니콜라에 파울레스쿠 이울리우 마니우 이울리우 호수 에밀 시오랑 아브람 이안쿠
36위37위38위39위40위
부레비스타 에든버러의 마리 공녀 페트레 투테아 코르넬리우 코포수 아우렐 블라이쿠
41위42위43위44위45위
이오시프 트리파 니키타 스터네스쿠 이온 크레안거 마델리나 마놀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
46위47위48위49위50위
트라이안 부이아 루치안 블라가 조지 에밀 퍼레이드 아나 아슬란 아드리안 무투
51위52위53위54위5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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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위77위78위79위8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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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위82위83위84위85위
두미트루 코르닐레스쿠 그리고레 모이실 클라우디우 니쿨레스 플로렌틴 페트레 마리우스 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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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에 스타인하트 로라 스토이카 커털린 흘단 안겔 살리그니 이반 피차이진
91위92위93위94위95위
마리아 터나세 세르지우 니콜라에스쿠 옥타비안 팔러 무명용사 치프리안 포룸베스쿠
96위97위98위99위100위
니쿠 코바시 두미트루 프루나리우 후녀디 야노시 콘스탄틴 노이카 바데아 카르탕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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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라키아 공국 제16대 보이보드
Vlad III | 블라드 3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lad_Tepes_002.jpg
<colcolor=#fff><colbgcolor=#000> 본명 블라드 3세 드러쿨레아
Vlad III Drăculea
이명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1]
블라드 디 임페일러(Vlad the Impaler)[2]
부친 블라드 2세 드라쿨(Vlad II Dracul)
모후 유프락시아[3]
종교 루마니아 정교회가톨릭
출생 1428/1431년 11월 10일
사망 1476/77년 (향년 44~49세)[4]
재위기간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colbgcolor=#f5f5f5,#2d2f34> 1차 1448년 10월 ~ 1448년 11월
2차 1456년 4월 15일 ~ 1462년 7월
3차 1475년 6월 ~ 1476년 12월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2.1.1. 시기쇼아라에서2.1.2.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아들로2.1.3.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동생으로
2.2. 볼모 생활2.3. 가시공 1차 재임기, 1448(18세)2.4. 도피 생활2.5. 가시공 2차 재임기
2.5.1. 집권 당시의 상황2.5.2. 요새 축조2.5.3. 권력 강화2.5.4. 핵심 통로 장악2.5.5. 공정한 공포정치2.5.6.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2.5.7. 브라쇼브 침공2.5.8.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
2.5.8.1. 사절단 처형(1459, 29세)2.5.8.2. 오스만 제국의 1차 원정2.5.8.3. 영토로 침입2.5.8.4. 메흐메트 2세의 친정2.5.8.5. 타르고비슈테 점령2.5.8.6. 포에나리 요새에서의 패배
2.6. 15년간 트란실바니아로의 피신
2.6.1. 스칸데르베그 사망2.6.2.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의 요청에 의해 풀려남
2.7. 가시공 3차 재임기(1476)2.8. 1477(47세)죽음
3. 왈라키아 공작 재임기 정리4. 가족관계5. 평가6. 여담
6.1. 흡혈귀 이미지
7. 대중문화에서
7.1. 소설7.2. 다큐멘터리7.3. 게임7.4. 영화7.5. 만화7.6. 그 외7.7. 기타 영향을 받은 캐릭터들
8. 참조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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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마니아의 민족 영웅. 로마를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정복자' 메흐메트 2세에게 맞서 싸웠던 전쟁 영웅이었다.

15세기에 중세 동유럽용공(龍公)이라 불린 블라드 2세의 뒤를 이어 왈라키아(Wallachia)공국[5]공작(제후, 군주. 영어로는 'prince'. 원어는 voivode)으로 즉위했다. 바사라브 가문의 드라큘레스티 혈족이다. 왈라키아 공국은 현재 루마니아왈라키아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로 민족은 루마니아인이었다. 따라서 블라드 가시공도 루마니아인, 즉 라틴족이다.

"평생을 싸웠다."고 평해도 무리가 없을 인생을 살았고 그로 인해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편에서 아버지 블라드 2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귀족 계급과 싸웠고 공작이 된 후에는 아버지의 원수 중 하나였던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와 힘을 합해 오스만과 싸웠다. 후에는 오스만의 편이 된 동생인 라두 3세와 싸웠다. 사후에는 이복형블라드 수도공이 정권을 잡고 가시공과는 정반대로 귀족에게 친화적인 정치를 했다.

동생은 오스만과 협력했고 형은 귀족들과 손을 잡았지만 본인은 밖으로는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스만에게 맞서고 안으로는 왈라키아의 경제 시스템을 장악하던 귀족과 독일인, 즉 색슨족들을 탄압하며 사방에 적을 만들고 끝없이 싸우는 희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 덕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본명이나 공식적인 이명인 '용의 아들'보다는 별명인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가 훨씬 유명하다. '체페슈'는 단순히 가시나 꼬챙이가 아닌 그것으로 무언가를 '꿰뚫는 자'를 칭하는 호칭으로 직역하자면 '(가시나 꼬챙이로)꿰뚫는 자 블라드'이며 더 간단히 하면 '블라드 가시공'(公)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페슈'라는 별명은 말년에 꼬챙이형을 자주 집행해 얻은 악명 때문에 생긴 별명이고 실제 본인은 드라큘라의 모티브인 드러쿨레아'(Drăculea=용의 아들)[6]Son of the Dragon란 별명으로 주로 불렸으며 블라드 본인도 이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의 친필로 보이는 서명 중에서 'Wladislaus Dragwlya'가 발견되기도 했다.

여타 작품에서 체페슈라는 이름이 나온다면 십중팔구 이 사람이 원조다. 드라큘라드라큘라 백작 모티브로 유명하며 악명은 악명이지만 그만큼 나라 하나는 최대한 철저히 지켰던 인물인 덕인지 루마니아에선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아직까지도 숭배받기도 한다. 한국을 포함한 외국에선 주로 블라드 가시공, 블라드 3세, 드라큘라, 블라드 체페슈[7], 블라드 대공 등 다양하게 불리는데 이 중에서 드라큘라는 그가 모티브인 가상인물 겸 설화를 말하는 경우가 많고 블라드 가시공 본인을 칭할 거면 드라큘라가 아닌 '드러쿨레아'정도가 비교적 정확한 발음이다.

루마니아 대도시에서는 블라드 3세와 관련된 기념품이 자주 눈에 띄며 관련된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브란 성[8]포에나리 요새[9]가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2.1.1. 시기쇼아라에서

아버지 블라드 2세헝가리 왕국드래곤 기사단[10] 소속이었기 때문에 블라드 드라쿨(Vlad Dracul, Vlad the Dragon)이라고 불렸는데 드라쿨(드래곤)을 의미하므로 번역하면 블라드 용공(龍公)이 된다.[11]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라고 하지만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형제 관계는 장남인 블라드[12]와 차남 미르체아, 3남인 블라드 자신, 그리고 남동생 라두 이렇게 넷이었다. 1436년까지는 왈라키아가 아닌 트란실바니아에 위치한 게르만족의 일파였던 색슨족들이 모여 살던 시기쇼아라에서 자랐다.[13]

블라드 2세가 이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가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실재로 시기쇼아라의 성벽은 당시 옛 루마니아의 성채 중 가장 견고했다. 훗날 권좌에 오른 블라드 3세는 색슨족들과 같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또다른 색슨족의 도시인 브라쇼브를 공략하는데 써먹었다.

2.1.2.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아들로

그가 6살이 되는 해 그의 아버지가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블라드는 자신이 아버지를 이은 왈라키아 공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드라쿨(Dracul)+아들이라는 뜻의 단어(a)를 붙여 스스로를 드러쿨레아(Drăculea)라고 불렀는데, 이 별명이 바로 블라드 가시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결국 드라큘라(드러쿨레아)란 도바킨'용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2.1.3.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의 동생으로

그가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왈라키아 공의 직위를 그의 둘째 아들 미르체아 2세에게 넘기고 퇴위했다. 그러나 그의 형의 치세는 1년밖에 가지 못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후원으로 바사라브 2세가 즉위하게 된 것이었다.

2.2. 볼모 생활

결국, 블라드 가시공의 청소년기인 1442년(11살), 아버지가 헝가리의 후원을 받는 정적인 바사라브 2세를 물리치고 왈라키아 공에 복위하기 위해 숙적인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맺게 되자, 셋째 아들이었던 '블라드 가시공'과 넷째 아들인 '라두'가 오스만 술탄국의 왕실에 인질로 보내지게 된다.

당시 왈라키아는 블라드 3세의 증조할아버지였던, 공작 라두 1세(재위: 1377~1383)의 장남 단 1세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다니스티)차남 미르체아 1세(이 사람이 가시공의 조부였다.)의 후손을 지지하는 파(드라큘레스티)로 갈려, 수시로 공위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발칸 반도의 두 강국인 오스만 술탄국헝가리는 왈라키아를 서로에 대한 완충지대로 인식하여,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공작을 즉위시키려 하고 있었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자다가 일어나면 공작이 교체되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또한 1436년(그가 5살)에 즉위하여 7년의 통치기간 후인 1442년(그가 11살)에 퇴위, 둘째 아들 미르체아 2세에게 자리를 넘겼으나, 1442년(그가 11살)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보이보드로 임명된 후녀디 야노시의 공격을 받고 축출되었다가, 같은 해 오스만 술탄국과 조약을 맺고 지원을 받는 대가로 블라드 3세(11살)와 라두 3세(5살)를 오스만 술탄국에게 보내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복위(1443 ~ 1447)에 성공했지만, 이 아버지의 2차 재임기간인 5년 동안 블라드 3세는 한 살 어린 오스만 술탄국의 왕태자 메흐메트(훗날 '정복자'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트 2세에게 많은 희롱을 당했고[14] 감옥에서 감금 생활을 당하는 등, 어린 나이에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기에 그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염세주의자가 된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2.2.1. 바르나 전투(1444)

이시기 블라드 3세(14세)는 오스만 술탄국에 온 지 1년이 지난 때였고, 이곳에서 바르나 전투의 소식(오스만 승, 바르나 십자군 패)을 들었다. 이 때 블라드 3세의 형인 미르체아 2세가 이 바르나 전투에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대신 참전했지만[15], 큰 손실 없이 퇴각할 수 있었고, 되려 패배한 후 도망가는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38세)를 아버지 블라드 2세와 함께 모의하여 잡아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2.2.2. 제르지 카스트리오티

2.3. 가시공 1차 재임기, 1448(18세)

더구나 그가 청년이 된 후 동생 라두는 철저히 '골수 오스만 신봉자'가 되어 관직까지 얻게 되었고, 인질 생활을 하던 중인 1447년에 헝가리와 반대파 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아버지 블라드 2세 '용공'과 형 미르체아 2세가 참살[16]관 속에서 관뚜껑을 손으로 마구 긁은 자국이 발견되었다.]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군사를 얻어 왈라키아로 진군, 1448년에 공작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아버지와 형의 원수인 헝가리의 반격으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2.3.1. 2차 코소보 전투(1448)

2.4. 도피 생활

2.4.1. 몰다비아에서

헝가리의 공격으로 폐위된 뒤 블라드 가시공은 외숙 보그단이 있던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난했다.[17] 블라드는 이 곳에서 외숙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 때 르네상스식 교육을 3년간 받으며 지냈는데 가혹한 볼모 생활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대부분인 그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후 거의 영구적으로 동맹 관계가 될 사촌 슈테판 3세와 친교를 쌓은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몇년 뒤 외숙부 보그단이 암살되고 몰다비아 공국이 혼란에 빠지자 블라드 가시공은 몰다비아를 떠났다.

2.4.2. 트란실바니아에서

몰다비아에서 사라진 블라드 가시공이 다시 나타난 곳은, 헝가리 왕국의 영역인 트란실바니아였다. 헝가리에 온 그는 헝가리의 섭정이자 "그리스도 세계의 방패", "백색 기사"로 불린 명장 후녀디 야노시를 찾아갔다. 후녀디 야노시는 대패로 끝난 바르나 십자군의 뒤처리 과정에서 블라드 가시공의 아버지인 블라드 2세와 다투었고, 결국 그가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즉, 후녀디 야노시는 아버지의 원수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블라드 3세는 그를 찾아간 것이다. 이는 가시공이 오스만 술탄국을 얼마나 싫어했는지를 보여준다. 찾아온 블라드 3세에 대한 후녀디의 반응도 놀라운데, 그는 블라드를 환대하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이 시기 동안 블라드 3세는 후녀디 야노시로부터 전략, 전술을 배울 수 있었다.
2.4.2.1. 베오그라드 공방전과 합동작전
1453년, 젊고 야심만만한 메흐메트 2세(21세)는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성공했고 1456년, 블라드 가시공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성공으로 기세등등한 메흐메트 2세와 싸우려고 베오그라드 공방전에 참전하는 후녀디 야노시(50세)가 블라드에게 오스만 제국 측에 가담한 배신자 블라디슬라프 2세를 토벌하고 왈라키아 공위에 오를 것을 명령한 것이다. 블라드 가시공은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 공국으로 돌아가 블라디슬라프 2세를 죽이고 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녀디 야노시베오그라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후, 50세에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된다. .

2.5. 가시공 2차 재임기

파일:external/34c449168344cd2701f2a93da4559bb3a53f3c040af14099c7f9a07a140c217d.jpg
독일계 정착촌을 습격한 뒤 포로들을 처형하는 블라드 가시공을 묘사한 그림. 1460년.

2.5.1. 집권 당시의 상황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이 즉위했을 당시 왈라키아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의 절정에 있었다. 15세기 유럽은 지도자 갈아치우기가 연례행사 수준으로 벌어졌고 왈라키아 공국의 공위는 허약하고 반란을 규율하는 법이 허술하기 그지없어서 귀족들(보야르)이 공작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시해하는 하극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경제 상황 역시 상당히 좋지 못했는데 특히 상권을 쥐고 있는 잉글랜드계와 독일계 상인들이 자기 배만을 불리고자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물건을 팔고 있었기 때문에 물건을 제대로 살 수가 없는 왈라키아 주민들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으며 범죄율이 엄청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난리법석에다 썩어빠진 상황에 골머리를 썩힌 블라드 3세는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씩 계획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블라드 3세의 할아버지 미르체아 1세 이후 공작의 임기가 7~8년이면 오래 집권한 쪽에 속했고 심하면 1, 2년만에 갈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나마도 년도상으로만 1~2년이지, 파벌 다툼으로 인해 실제로는 2~3달도 못채우고 쫒겨나거나 죽기 일쑤였다.

아무튼 집권하면서 블라드 3세는 보야르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 뒤 수백년에 걸쳐 블라드 3세의 악명을 드높일 사건(그리고 드라큘라를 위시한 여러 창작매체에서 그를 묘사하는 '가시공'으로서의 사건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이때 블라드 3세는 잔치에 초대한 보야르들에게 살면서 본 왈라키아를 다스린 공작이 몇 명이였냐고 물어보았는데, 가장 연로한 귀족이 50명이라 말했고 대체로 30명 내지는 수십 명의 공작을 보았다고 말했으며, 가장 젊은 귀족은 7명이라고 말했다. 이에 블라드 3세는 그토록 많은 공작들이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라며, 잔치에 참여한 약 500여명의 귀족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자비롭게 모조리 말뚝에 박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들과 관련된 다른 귀족들마저 부활절 만찬 도중 모조리 붙잡아 요새를 짓는데 보내 끔찍한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2.5.2. 요새 축조

가시공의 치세는 성채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자신의 왕궁부터 요새급으로 증축했고, 수도 타르고비슈테의 방어를 위해 남쪽에 부쿠레슈티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

2.5.3. 권력 강화

또한 강력한 권력을 확보한 후 가시공의 아버지 블라드 2세 '용공'과 형 미르체아 2세를 잔인하게 죽인 보야르들에게도 참혹한 방법으로 복수했다. 보야르를 연회에 초청하여 문을 잠군 뒤 산채로 불태워 버리거나 500명의 보야르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파게 하고 거기에 묻어 죽인 것이다. 그나마 생존한 귀족들은 포에나리 성터로 잔치의상을 입은 채 그대로 끌려가 포에나리 성을 세우는데 강제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성이 건설되는 마지막 순간엔 옷이 아주 해지다 못해 나체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해에 블라드 3세는 슈테판 3세를 도와 그가 몰다비아 공국의 공위에 오르도록 했다.

또한 이 해, 알바니아의 위대한 민족 영웅 스칸데르베그(53세)가 알불레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 8만명 중 3만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으면서 최대의 승리을 거두었다.

2.5.4. 핵심 통로 장악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와의 접경지대에 포에나리라는 요새를 축조한 것도 가시공이었다. 이는 히스토리 채널다큐멘터리 '사라진 문명' 에서도 다룬 바 있다.[18]

2.5.5. 공정한 공포정치

블라드 가시공은 가혹한 인질 생활로 인한 성격 파탄 증세주변의 더러운 상황이 더해져, 전쟁포로와 범죄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항문을 꼬챙이에 끼우고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을 도입, 잔혹한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체페슈(Ţepeş, 가시)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인류에 도움이 안 되는 자들'은 모조리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이렇게 잔혹하기는 했어도 공정함 또한 대단히 강조하였다. 사소한 범죄나 하다못해 게으름이라도 엄단했으므로 그 공포심 때문에라도 범죄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 시대의 일화에서는 황금컵을 마을 광장에 놔두어도 가져가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19][20] 대표적인 일화로 어떤 상인이 금화를 한가득 싣고 가시공의 영토를 지나가던 적이 있었다. 그는 가시공이 시키는대로 궁 앞에 마차를 대놨는데, 밤중에 누군가 금화를 훔쳐갔다. 이에 가시공은 도둑을 잡아오라고 하였고, 도둑이 잡히지 않자 포고를 내려 상인의 짐을 돌려놓지 않으면 마을 전체에 벌을 주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렇게 간 큰 도둑이 붙잡혀서 금화가 돌아왔는데, 가시공은 금화 하나를 슬쩍 거기에 넣어놨다. 상인은 되찾은 짐을 확인하고 금화를 잘 세어본 다음, 가시공에게 그의 사건 처리를 찬양하면서 그런데 금화가 한 닢이 더 있더라면서 내놓았다. 그러자 가시공은 "네가 그 금화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널 그 도둑 다음으로 가시에 꿰어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가서 자신의 공정함에 대해서 세상에 널리 알리라고 했다고 한다(...).

그밖에 이 양반의 똘끼를 보여주는 일화로 지나가던 3명의 영국인 수도자들을 구금한 뒤 면담을 했다. 이때 한 명 한 명에게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갈 거 같냐, 지옥에 갈 거 같냐?-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고 물어봤다고 한다. 첫번째 수도자가 "공작께서는 나라를 안정시키시고 투르크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셨으니 천국에 가실 거다" 라고 대답하자 바로 죽여버렸다. 2번째 수도자가 "당신은 폭군이자 악마다. 네놈의 영혼은 분명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라고 분노에 차 말하자 블라드 3세는 이 수도자도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1명에게도 똑같이 물었는데 이 마지막 수도자가 한 대답은 알려지지 않았다.[21]이 수도자는 블라드를 영접하고도 살아 남았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서 쓴 블라드 3세의 이야기로 인해 서유럽에도 이 양반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2.5.6.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

블라드 가시공의 종교적 신앙심은 대단해서 대부분의 정적들을 죽인 후에는(설령 미워했던 원수라 하더라도) 그들이 천국[22]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었으며 곳곳에 정교회 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를 자신의 악행을 신앙심으로 메꾸려는 시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시 동유럽은 동로마 제국 멸망(1453) 전후, 불가리아 제2제국(1371)과 세르비아 공국(1456)마저 멸망해 왈라키아 공국동방 정교회 최후의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라는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이후 동방 정교회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고, 지금도 동로마 제국이 망하고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인 16세기에 지어진 흔치 않은 유서 깊은 정교회 성당들이 많은 곳이다.

2.5.7. 브라쇼브 침공

당시 왈라키아 공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던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와 시비우의 색슨족, 즉 독일계 상인들도 공격했는데, 이는 브라쇼브가 단 3세(블라디스와프 2세[23]의 형제)를 지지하고 있었고, 시비우는 블라드 가시공의 배다른 형인 블라드 수도공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싸움은 1458년 헝가리 왕국의 국왕에 선출된 명군 마차시 1세가 시비우의 시민들에게 블라드 3세와 평화를 유지하라고 중재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다.

하지만, 1459년에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공국의 상인들이 사려던 철이 압수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년 후에는(1460년 4월 22일, 30세),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자리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 단 3세와 싸워서 이긴 후 그를 처형하고, 브라쇼브를 파괴했다. 이후, 7월 26일 황폐화된 브라쇼브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순간 경제적 특권을 잃은 독일계 상인들은 이후로 블라드 가시공을 증오하게 되어 그의 만행을 과장하거나 날조하여 선전하였고, 관련 인쇄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유럽에 퍼뜨렸다. 이후에 생겨난 잔학한 가시공의 이미지는 실제로 가시공이 잔인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기인하는 바 또한 크다.

2.5.8. 오스만 제국과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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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3세의 일생은 내부적으로는 귀족들과 상인들과의 대결, 외부에서는 오스만과의 대결이 중심이었다.
2.5.8.1. 사절단 처형(1459, 29세)
한편 블라드 3세는 즉위하자마자 원수인 헝가리 왕국과 우호관계를 수립하고, 아버지 블라드 2세가 오스만 제국에 바치기로 약속했던 연공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복위 4년째인 1459년에 오스만쪽에서 연공을 바치지 않는 이유를 따지고 메흐메트 2세가 그를 만나고 싶다는 명령을 전하기 위해 사절 2명을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가시공은 수도였던 타르고비슈테에서 오스만측 사절들과 만나면서, 감히 공작인 자신의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는다는 이유[24]로 모자를 쓴 머리에 그대로 대못을 박아 죽이라고 명령해 사절들은 전부 끔찍하게 처형되었다. 더 큰 문제는 거기에다 신발을 같이 못질했으며 그걸 또 코스탄티니예까지 실어 보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신발투척이 최대 모욕 중 하나일 정도로 신발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이슬람권에 속한 오스만 제국 입장에선 빡이 안 돌 수가 없었다.
2.5.8.2. 오스만 제국의 1차 원정
격노한 오스만 제국은 2년 후 쳐들어왔고, 이로써 소국 왈라키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과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블라드 가시공은 1차 원정을 온 함자 파샤의 오스만 군대를 대상으로 매복한 뒤 일제 사격하여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함자 파샤를 비롯해 포로로 잡힌 오스만군을 모조리 꼬챙이에 꽂아 죽여버렸다. 특히 오스만군의 총사령관인 함자 파샤는 지위에 걸맞게 특별대우하기로 결정했는데, 꼬챙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꼬챙이에 꽂은 것이었다.

이 전투로, 블라드 3세는 유럽의 군주들 가운데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총기를 사용한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
2.5.8.3. 영토로 침입
같은 해, 가시공의 선공에 의해, 도나우 강 남쪽 너머의 불가리아 일대의 오스만군 진지가 파괴되었고, 불가리아에 남아있던 기독교도들이 왈라키아 공국으로 이탈했다. 이때 가시공은 헝가리 왕국의 왕이 된지 4년차였던 마차시 1세(19세)에게 자신이 23,884명 이상의 오스만군과 불가리아군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왈라키아의 항구 파괴를 목적으로 나선 오스만 제국 재상 마흐무드 파샤도 실패하자, 결국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15만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친히 왈라키아를 정벌하기로 결심했다.
2.5.8.4. 메흐메트 2세의 친정
결국 1462년 6월 4일, 15만명의 오스만 제국군이 다뉴브 강을 건넜다. 하지만 이에 맞선 블라드 가시공의 전략은 매우 뛰어났는데, 청야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했고, 본인이 직접 기병대를 이끌며 오스만 진지를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는 공포의 밤 전투로 불렸으며 1462년 6월 17일에 벌어졌다. 루마니어어로 'Atacul de noapte'(영어로 해석하면 'The Night Attack')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이날 하룻 동안에만 1만 5천여 명의 오스만군이 죽었다고 한다. 야습의 목적은 메흐메트 2세의 목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실패했다.

또한 오스만군이 진군하는 곳마다 오스만군 포로들의 시체를 걸어놔[25] 용맹스러운 예니체리(오스만 정예 보병대)와 시파히(오스만 기병대), 실라흐타르(술탄의 용기병대)들도 겁을 먹게 만들었다.
2.5.8.5. 타르고비슈테 점령
애초에 전투 양상 자체가 소부대를 습격해 잡아다 꼬챙이에 꽂아놓는 식이라 오스만군이 초대형 대열로 뭉치기 전에는 정상적인 전투 임무 수행을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절정은 수도 타르고비슈테 성채를 둘러싼 꼬챙이 무더기였다. 잡을 때마다 시체고 산 사람이고 다 꽂아서 전시해대니 질리는 게 당연지사. 물론 잔혹하기로는 블라드 가시공 못지 않은 메흐메트 2세가 겁먹은 병사들을 줄줄이 목 쳐가며 대응해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저항하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이번에는 전염병에 걸린 병사나 시신을 오스만 군 진영에 보내어 병을 퍼트리는 일종의 생화학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오스만군은 블라드 가시공의 전술로 피해가 커지고 부대가 갈수록 소극적으로 변해가자, 왈라키아의 수도 타르고비슈테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퇴각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 블라드 3세의 동생이자 친오스만파인 라두 3세는 왈라키아의 영토에 남아있게 되었다.
2.5.8.6. 포에나리 요새에서의 패배
하지만 이러한 블라드 가시공의 노력도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한 차례 패배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후일 헝가리를 넘어 빈을 위협할 정도로 막강했으며[26], 블라드 가시공이 동원한 왈라키아군은 외국 용병에 보통 징집 대상이 되는 나이의 남자는 물론 아녀자들까지 긁어모아도 30,000명에 불과했다.[27] 그런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오스만군에게 수도까지 함락되어 파괴되었던 만큼 왈라키아 공국의 피해도 적지 않았고, 동생인 라두 3세를 앞세운 오스만군이 가시공의 요새이던 포에나리를 함락시키자 이번엔 불만에 가득차있던 왈라키아 귀족들이 블라드 가시공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28]

결국 블라드 3세는 1462년, 귀족들의 반란 + 동생 라두 3세[29]를 앞세운 오스만 제국의 3차 원정군 앞에 무너지고 말았고, 라두가 라두 3세(Radu III)로서 후임 왈라키아 공작으로 취임했다.[30]

2.6. 15년간 트란실바니아로의 피신

결국 블라드 3세는 동맹이었던 헝가리로 피신하여 자신과 동맹을 맺었던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인 마차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마차시 1세는 그를 돕기는커녕 포로로 잡아 장기간[31] 감옥에 가두었다. 이는 당시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어서, 양면 전쟁을 벌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두번째 아내를 맞이했다.

2.6.1. 스칸데르베그 사망

그가 일로나와 결혼해서 감옥에서 풀려난 지 2년이 지나 38세가 된 해, 오스만 제국에 20여년이 넘도록 맹렬히 저항하여 매번 알바니아를 방어하는데 성공해왔던 제르지 카스트리오티(62세), 일명 '스칸데르베그'가 메흐메트 2세의 3번에 걸친 총력전을 모두 막아낸 후, 말라리아에 걸려서 사망했다.

2.6.2.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의 요청에 의해 풀려남

2.7. 가시공 3차 재임기(1476)

그 후[32] 마차시 1세의 친척인 일로나와 결혼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 그리고 왈라키아 귀족들 가운데 일부의 협력을 얻어 당시의 공작 바사라브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블라드 3세는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때 동생 라두 3세는 이미 치세 말에 바사라브 3세와 공작 자리를 놓고 빼앗고 빼앗기는 내전을 벌이다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2.8. 1477(47세)죽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드 3세는 오스만군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서기 1476년 12월. 또는 1477년 1월의 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군이 그의 시체에서 수급을 벤 후 꿀에 절여서[33] 이스탄불까지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가 죽은 곳은 부쿠레슈티와 지우르지우(Giurgiu) 사이의 어느 지점이라고 추정될 뿐, 죽음에 대해서도 오스만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부터 사냥 중에 사고로 죽었다는 설, 협력하기로 약속한 귀족에게 배신당했다는 설, 부하의 실수로 죽임을 당했다는 설까지 다양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3. 왈라키아 공작 재임기 정리

블라드 가시공의 왈라키아 공 재임기는 다 합쳐봐야 7년도 채 되지 않으며(약 6년 반 가량 된다.), 그마저도 세 차례에 걸쳐 집권하고 쫒겨나기를 반복했다.

4. 가족관계

아버지: 블라드 2세
배다른 큰 형: 블라드 수도공
둘째 형: 미르체아 2세
막내 동생: 라두 3세
배다른 여동생: 알렉산드라

첫번째 부인: 후녀디 야노시의 서출 딸, 아나스타시아 홀산스카(Anastasia Holszanska)[34][35][36]

첫째 아들, 미네아 1세(생몰년: 1462 ~ 1510, 왈라키아 공 재임기: 1508 ~ 1509)
둘째 아들, 블라드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둘째 아들은 1486년 이전에 살해당했다.
셋째 아들, 블라드 드라클리야(Vlad Drakwlya)는 친모가 아나스타시아 홀산스카가 아닌 걸로 추정된다.

두번째 부인: 후녀디 야노시의 아들인 마차시 1세의 사촌, 실라지 유스티너(horogszegi Szilágyi Jusztina)[37](1455 ~ 1497, 43년)와 1475년(블라드가 45살, 유스티너가 21살 때)에 결혼. 둘 사이에 자녀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5. 평가

현대까지도 블라드 3세에 대한 평가는 외부의 적들을 상대한 것과 내부를 관리한 것 중 초점이 어디로 가냐에 따라 극도로 갈린다.

단 평가가 갈리는 건 루마니아가 아닌 타국에서의 이야기로, 루마니아에서는 현재까지도 잔혹한 면을 부정하진 않지만 항상 서민들의 편에서 외적 오스만을 상대로 대항했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세상을 잃더라도 옳음을 실행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 격언인 'Fiat justitia, Pereat Mundus'의 상징이자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인물로 여기면서 그가 통치하던 시기를 (공포정치라곤 하지만) 부정적이고 오만한 사람(부패관리)이 존재하지 않은 '정의의 시대(루마니아어: un timp al drepatatii)'로 극찬하고 있다.

루마니아 이외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의견이 있지만 이에 반발하는 의견으로는 결국 공포정치는 공포정치일 뿐이란 것과 사적인 분노[38]를 정치에 상당히 끼워넣었다는 것에 대해서 지적한다.

다만 블라드공의 잔인한 일면도 왈라키아를 지키기 위한 방책이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 왈라키아 공국은 헝가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낀,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소국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침략 위험을 가지고 있었는데 블라드공이 포로들과 죄수들을 잔인하게 죽임으로서 적들로 하여금 "나는 마귀와도 같이 잔인하며 사악하다, 네놈들이 날 죽이려면 말뚝형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할 거다"라는 식으로 공포감을 심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6. 여담

6.1. 흡혈귀 이미지

블라드 가시공이 죽은 후 얼마 뒤 공교롭게도 인쇄술이 발달했다. 대체로 블라드 가시공의 잔학함을 비난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민담집이 독일 일대에서 인쇄술의 초기 저작물로서 퍼졌다. 사실 이때만 해도 유달리 잔혹한 폭군 정도의 이미지 정도만 있었다. 굳이 독일에서 이런 민담이 퍼진 것은, 가시공에게 된통 당한 독일 상인들의 피해 사례 보고집의 이미지도 없잖아 있었을 것이다.

파일:vlad-the-impaler-eating.jpg

꼬챙이로 꿴 희생자들의 시신 사이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는 블라드 가시공을 묘사한 당대 독일의 판화. 1499년.

단 웃긴 점은 루마니아 민담에서의 블라드 가시공과 흡혈귀전혀 관련이 없다.[43] 현재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브란 성'은 사실 블라드 가시공 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일절 없는 곳으로[44], 그냥 소설드라큘라》에 나오는 드라큘라 성의 모티브가 되었을 뿐이다.

블라드 가시공이 흡혈귀 전설과 연관된 건 1897년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처음이었다. 스토커의 초고에서는 제목과 흡혈귀의 이름도 왐피르 공(Prince Wampyr)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브람 스토커가 작품을 위해 조사를 하다, 블라드 가시공의 별명 '드라큘라'가 간지폭풍이라고 여긴 나머지[45] 흡혈귀의 이름을 드라큘라로, 출신지를 루마니아로 정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드라큘라》의 흡혈귀와 블라드 가시공간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작위부터 공작(보이보드)이 아니라 백작(카운트)이며, 소설에서 언급되는 성장과정도 블라드 가시공과 딴판이다. 무엇보다 유명한 말뚝형이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중에서 반 헬싱이 조사를 한 후, "이 놈은 오스만 제국과 싸운 그 드라큘라인 것으로 보인다."는 언급을 했다.[46] 다만 드라큘라 백작 항목에서도 언급되듯이 백작은 블라드 3세가 아니라 그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설 《드라큘라》가 엄청난 대박을 치고 기존의 흡혈귀 소설 및 민담들을 완전히 뛰어넘어 흡혈귀의 전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상황에서 드라큘라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블라드 가시공에게 이 이미지가 덧씌워져 버렸다. 결국 1975년 프레드 세이버헤이겐(Fred Saberhagen)이라는 작가가 소설 《드라큘라 테이프》에서 "블라드 가시공이 바로 그 소설 드라큘라의 드라큘라다!"라고 한 후에 동시다발적으로 블라드 가시공=드라큘라 백작이라는 창작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그 중 유명한 것만 봐도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영화, 히라노 코우타의 만화 《헬싱》, TV 드라마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의 한 에피소드, 엘리자베스 코스토바의 소설 《히스토리언》의 '체페슈'라는 캐릭터 등등이 있다.

이것뿐이라면 모를까 중세때부터 드라큘라는 흡혈귀로 유명했다거나 스토커가 철저한 조사를 통해 드라큘라를 흡혈귀로 설정한 것이라는 역사 왜곡 수준의 학설이 나오는 판이 돼서 골머리를 앓는 학자들도 있었다. 오죽하면 오역된 시를 두고[47] "거봐, 블라드 체페슈는 흡혈귀였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나온 판이었다. 드라큘라와 체페슈 백작을 동일시하는게 왜 말이 안되는지를 설명하는 글

당연히 루마니아인들은 서구의 온갖 매체들이 만들어낸 흡혈귀로서의 블라드 가시공의 이미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에는 소설 《드라큘라》나 드라큘라 관련 영화가 출판금지되는 등 서구권의 왜곡에 맹렬하게 항의했던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에 루마니아가 외채난에 빠지면서 결국 차우셰스쿠 패거리도 드라큘라 호텔의 건설허가를 내 주었다. 1980년대 《소년경향》 지에서 이걸 다루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공산국가 루마니아가 금기시하는 상황임에도 다뤘을 정도였다. 해당 기사는 이로마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종업원들이 검은 옷차림이라든지 망토 차림으로 관에 누워 나오기도 하고 주로 해외 관광객을 전문으로 하는 호텔이었다.

이후 공산주의가 망하고 《드라큘라》의 유명세를 이용해서 더 크게 관광산업을 개발하는 중... 이래저래 돈이 된다.[48]

그나마 블라드 가시공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흡혈귀 드라큘라의 명성 덕에 덩달아 블라드 가시공의 명성도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블라드 가시공은 그와 마찬가지로 당대 메흐메트 2세오스만 제국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던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 메흐메트 2세에게 대승을 거뒀으며 블라드 가시공과 관련이 깊었던 헝가리후녀디 야노시마차시 1세 부자, 어쩌면 메흐메드 2세 본인보다도 세계적으로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다만 악명으로 더 남았다는 점이 문제지만... 루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빨아먹었다든지 잡범까지 꼬챙이에 뚫어 세워둬서 천천히 죽어가는 걸 보고 술을 마신 미치광이 군주라느니 별별 악명도 여전히 남아 있다. 《퇴마록》 <세계>편에서 그의 영혼과 대화를 하는데 "난 내 나라를 지키려 했는데 후세에선 피에 미치고 학살에 미친 인물로 길이 남게 되었소...."라고 씁쓸해한다. 그래도 명성이 퍼지는 만큼 목숨까지 바쳐가며 오스만에 맞서 최후까지 싸운 그를 재평가하는 의견도 점점 늘어가고 있으니 약간이나마 다행인 일이다.

낮은 신분의 애인과 관련된 야사를 생각해보면 흡혈귀 특유의 로맨틱함도 갖추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실제로도 그랬는지에 대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애초에 불륜이다

이 흡혈귀 이미지 때문인지, 아니면 이름과의 유사성 때문인지 한국 커뮤니티에서는 블러드 체페슈라고 오기한 사례가 있으며, 아예 이름 자체를 블러드(Blood)로 개명해서 각색한 사례도 있다.

7. 대중문화에서

위 문단에서도 말했듯 흡혈귀에 얽힌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현재까지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하고 있지만 생전의 업적들이 알려지면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형 마왕물이나 위악자 혹은 다크 히어로 이미지로 재평가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7.1. 소설

7.2. 다큐멘터리

7.3. 게임

7.4. 영화

7.5. 만화

7.6. 그 외

7.7. 기타 영향을 받은 캐릭터들

8. 참조 서적


[1] 직역하면 꿰뚫는 자 블라드. 루마니아어에서만 쓰이는 로마자 Ș와 Ț는 1999년에야 유니코드에 포함된 탓에 오랫동안 Ş, Ţ로 대신해서 써 왔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Ţepeş라고 쓴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2] 블라드 디 임페일러, 꿰뚫는 자 블라드. 영어로 'Impale'은 '(말뚝)'에 꿰뚫다' 또는 '박아놓는다'란 의미다. 단순히 찌른다란 의미가 아니다.[3] 유프락시아(Eupraxia) Eupraxia of Moldavia 외에 바실리사 무샤트(Vasilisa Mușat), Cneajna of Moldavia, Vasilisa Maria of Moldavia 등의 이명으로도 알려져 있다.[4] 출처[5] 왈라키아는 루마니아어 표기인 '발라히아(Valahia)', 혹은 '문테니아(Muntenia)'라고 부르는 것이 옳으나 지명도 등으로 유명한 '왈라키아'로 표기한다.[6] 그의 아버지의 별명이 '용공', 즉 용 공작이란 별명이었던 만큼 그에게서 태어난 블라드 3세는 별명대로라면 '용의 아들'이 되는 셈이다.[7] 일본 창작물의 영향을 받은 경우 '블라도 체페시' 또는 '브라도 체페시'라고 표기한다.[8] 성 자체는 크게 대단하지 않은데 드라큘라성이란 별명을 갖는 바람에 관광객에게 잘 알려진 곳들 중 하나다. 다만 입장료가 지나치게 비싸서 비판을 받고 있다.[9] 외딴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해서 찾는 이가 적다. 볼건 없지만 브란 성과 비교해 입장료는 저렴하다.[10] 헝가리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1408년에 창설한 기사단으로, 오스만 술탄국에 맞선다는 명분을 내걸고 설립했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상서롭게 여긴 동물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악한 존재로 여긴 ''을 상징으로 삼은 것은 조금 의아한 부분이지만 15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번성했다.[11] 혹은 용의 사악함에 빗대어서 '악마공'(惡魔公)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고 하지만(실제로 현대 루마니아어에서 'Dracul'은 '악마'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블라드 2세 자신은 딱히 '사악' 하다고 볼 수 있는 행적을 남기지 않았을 뿐더러 드래곤 기사단에 가입하면서 지기스문트로부터 '드라쿨'이라는 별명을 하사받은 것인데 만약 악마공이라고 번역한다면 지기스문트는 자신의 신하이며 한 기사단을 맡는 기사단장이자 공국의 군주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12] 블라드 3세와 동명이인으로 이 사람은 블라드 수도공이라는 별칭을 갖는 사람이다.[13] 트란실바니아는 900년 가까이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던 곳으로 12세기부터 헝가리는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트란실바니아 남동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켰다. 이 독일인들은 루마니아어로 '색슨족'이라는 뜻에서 사시(Sași)라고 불렸다. 위에서 설명하는 색슨족, 즉 사시가 바로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으로 이후 수백 년 동안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지배 계급으로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다른 동유럽 독일인과 다르게 추방당하지는 않았으나 공산권 붕괴 이후 대부분이 독일로 이주해서 현재 극소수만이 트란실바니아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 참고로 2017년 현재 루마니아 대통령클라우스 요하니스가 트란실바니아 독일인이다.[14] 가시공은 죄수의 항문에 말뚝을 꽂아 죽이는 형벌로 유명해지는데 이 형벌은 사실 양성애 성향이 있던 메흐메트 2세에게 항문성교를 당했던 기억이 남아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15] 블라드 2세는 이 전투를 반대했다. 아마도 아들 때문에 그런 것 같다.[16] 형 미르체아 2세가 특히 끔찍한 죽음을 당했는데, 산 채로 눈이 뽑히고 매장당했다. 형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파봤더니[17] 상술했듯 가시공의 친모는 불명이다. 그러나 이런 가시공의 행동이 그의 친모를 몰다비아 공국의 귀족 집안 출신 여성으로 추측하게 하는 근거이다.[18] 이후 왈라키아투르크에 복속되면서 성채 축조는 금지당했다고 한다.[19] 다만 그 처벌 강도가 너무나 높았으므로 제대로 된 의미의 치안 확립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힘들다. 게다가 한 사람이 잘못해도 마을 전체가 책임져야 하는 면도 있었기에 더더욱. 스탈린 치하 소련이 안정됐던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곪아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이 부분은 전근대의 시대적 한계도 감안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범죄를 예방하는 데는 형벌의 가혹성보다는 확실성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전근대의 제한된 기술 및 사회적 수준에서 "어지간한 범죄자는 법망을 피해 달아나기 어렵다"는 사상이 기본인 근현대 수준의 치안을 확립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범죄자를 다 붙잡아 처벌할 수 없다면 붙잡은 범죄자라도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만약 범죄를 저지르다 붙잡히게 되면 저렇게 가혹한 꼴을 당한다"는 공포심을 심어주는 방법으로 범죄율을 낮추려고 시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0] 한 사람의 잘못을 주변(마을 등)이 함께 책임지게 하는 연좌제 역시, 아무 이유없이 괜히 주변 사람들을 마구 괴롭히려는 목적이 아니라 당시 기술과 사회상의 한계상 공권력에 의한 감시망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으므로 마을과 같은 공동체에 치안 감시 역할을 강제한 측면이 있다. 영주의 가신들이 마을 하나하나의 사정을 다 알수는 없지만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들끼리는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 수 있으므로, 마을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면 감싸주거나 함께 이득을 챙기지 말고 고발하라(안 그러면 마을 전체에 범죄를 숨겨준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한 처벌을 통한 공포감 부여"나 "집단 책임을 통한 소규모 공동체의 감시기능 부여"를 통해 치안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대부분의 전근대 문명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근대 이후에나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하고 덮어놓고 "처벌 강도가 너무 높고 연좌제를 적용하니 제대로 된 치안 확립이 아니다"라고 접근하는 것은 현대적 관점을 무리하게 전근대에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21] 공식적으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록이 없다. 굳이 추측하자면, 그 수도자는 가시공이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는 주님만이 아실 뿐 자신은 알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몰?루가 정답이었다 기본적으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죽은 이가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실 뿐 우리가 쉽게 재단하고 판단할 수는 없고 다만 죽은 이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자비를 구할 수 있다는 정도로 선을 긋는다. 때문에 가톨릭정교회에서는 장례 때 그러한 기도를 올리며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고 지옥으로 가는 자는 사후에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 뿐이며 이미 원죄가 예수에 의해 사함 받았기 때문에 어떤 죄인이라도 하느님 곁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22] 정교회연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죽은 이들을 천국으로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기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23] 블라드 가시공이 죽인 이전 보이보드[24] 여기에서의 '모자'는 당연히 터번을 가리킨다. 이때 대사가 터번은 술탄 앞에서도 벗지 않는 것이 우리네 관습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양해를 구했고, 오스만에서 볼모 생활을 했었던 블라드 3세도 당연히 그런 관습을 알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잔인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25] 그것도 자국민들에게 행한 형벌을 그대로 채용, 꼬챙이에 꽂아 죽을 때까지 전시해 놓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대규모 대열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정찰하는 소부대를 급습한 뒤 포로로 잡은 자들을 꼬챙이에 꿰어 죽였다. 본대가 본격 도착해서 전투에 나서면 퇴각했지만 이 때는 이미 오스만군의 대열 앞에 수백 개의 꼬챙이 무더기가 생긴 뒤다. 기록에 따르면 수도 인근 꼬챙이 행렬 맨 뒤에 당시 포로로 잡혀 있던 오스만 제국의 국구를 똑같이 꼬챙이로 꿰어 놨으며,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술탄이 말에서 내려 알라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웬만큼 전쟁을 겪은 그가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일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을 것이다.[26] 파디샤가 친정하면 최대 10만명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 유럽은 군주가 친정해도 많아봐야 수 만이지 10만명이 동원된 적은 없었다.[27] 현대 루마니아의 역사가 라두 플로레스쿠(Radu Florescu)의 분석인데 15세기의 왈라키아 인구는 50만명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28] 이 시기 블라드 가시공의 귀족 탄압과 무자비한 법 질서 확립에 귀족들의 불만이 가득 쌓여 있었다.[29] 블라드의 동생이자 예니체리 군단장[30] '라두 셀 프루모스(Radu cel Frumos)'. 즉 '미남공(美南公) 라두'라고도 한다.[31] 정확히 몇년 동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인 추측으로는 피신한 1462년부터 가시공이 일로나와 결혼하는 1466년(36살)까지.[32]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유폐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형태로든 용서를 받아서 감옥을 빠져나와 헝가리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왈라키아로 복귀하기 전까지는 부다페스트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33] 꿀에 강력한 살균 및 방부효과가 있다는 것은 당대에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고 소금에 절이는 것보다 원형이 더 잘 보존되기도 한다.[34] 루마니아식 이름이다.[35] Cneajna Bathory(바토리공작부인)이란 이명이 있어서 바토리 에르제베트와 연결 지으려는 《드라큘라》 팬들이 많고, 브램 스토커의 증조카 다크레 스토커(Dacre Stoker)는 2009년 후속작 《드라큘라, 언-데드(2009)》에 바토리 에르제베트를 등장시키기도 했지만 비슷한 시기에 트란실바니아Cneajna Bathory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36] 바토리 가문 자체는 헝가리 왕국 내에선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가문, 피렌체 공화국메디치 가문에 맞먹는 명문가였다. 참고로 예로 든 가문들처럼 왕국보다 이웃 왕국에 속한 공국이 더 잘 사는 사례는 많았다. 어쨌든 이 당시 헝가리 왕국 내 실권자들 중에선 바토리 가문과 혼인하지 않은 가문이 드물었기에 중세의 기록물들 중엔 바토리 가문 출신의 공작부인, 후작부인, 백작부인 칭호를 받은 사람들의 기록들은 흔하다.[37] 헝가리식 이름이다.[38] 아버지와 형을 죽인 귀족들에 대한 대처.[39] 아이를 죽인 다음 요리해 그 어머니에게 먹인다든가, 여자의 젖가슴을 잘라 남편에게 먹인다든가 하는 흠좀무한 내용도 많다.[40] 한 농민이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불러서 너 부인 없냐, 부인이 건강하지 못하냐, 하는 걸 물어보더니 "남편이 가족들을 굶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이 약한 것도 아니면서 왜 니 마누라는 자기 남편한테 허름한 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게 놔두냐?" 면서 그 아내를 잡아다 양손을 잘라 처형해 버리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맞게 했다고.[41] 무거운 짐을 실은 썰매를 힘겹게 끌던 그녀를 가시공이 도와줬다고 전해진다. 당시 카타리나는 17살이었다고. 덧붙여 금발벽안+길게 땋은 머리의 미녀였다고 한다.[42] 정략결혼이라도 아내에게 충실했다거나, 블라드 3세의 치부를 보이기 싫은(...) 버전에서는 그냥 목걸이만 선물해준 후 아쉬움을 접은 채 떠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43] 이건 다른 흡혈귀의 대명사격인 질 드 레(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피와 관련된 흡혈귀 실존인물은 헝가리의 에르체베트 바토리뿐이다.[44] 차라리 브란 성은 블라드 3세의 정적과 크게 연관이 있다고 말하는게 좋을 성이다.[45] 사실 《드라큘라》 초반의 -드라큘라의 손님- 챕터가 짤린게 너무 일찍 흡혈귀의 존재가 드러난다는 이유도 있었는데, "왐피르 공"이란 이름은 나 흡혈귀요라고 광고하는 이름이라 (밤피르를 살짝 변조한 것이다. 보통 W은 독일어 등에서 'ㅂ' (영어의 v)으로 발음된다. 즉, 왐피르나 밤피르나 그게 그것이다.) 괜찮은 대체제로 '드라큘라'란 이름이 여겨진 것이다. 더불어 이 왐피르 공은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 출신으로 되어 있었는데, 드라큘라보다 이전의 히트작 흡혈귀 소설이었던 《카르밀라》의 무대가 오스트리아의 스티리아였다. 즉, 왐피르 공이라는 초반 설정으로 갔다가는 《카르밀라》의 짝퉁 취급을 당할 위험도 있었다. 실제로 스토커의 노트를 보면 집필 초반에는 왐피르 공이라고 쓰다가 드라큘라로 이름이 바뀌고, 캐릭터 리스트에도 왐피르 백작이란 이름에 줄을 긋고, 드라큘라로 바꾼다.[46] 드라큘라 챕터18, He must, indeed, have been that Voivode Dracula who won his name against the Turk, over the great river on the very frontier of Turkey-Land.[47] 시의 내용이 "블라드 체페슈는 적의 피에 빵을 적셔 먹었다"고 오역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블라드 체페슈는 적의 피로 손을 씻었다"였다.[48] 만화가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 《현대문명진단》에서 드라큘라를 보면서 무서워하기는 커녕 $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도리어 드라큘라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흡혈귀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가 드라큘라의 피를 빨아먹으려 드라큘라를 쫓아다니는데 드라큘라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 좀 그만 빨아먹어라"'며 도망다니면서 신세한탄을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49] 상술한 바와 같이 블라드 가시공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하면서 드라큘라를 그저 괴물이 아닌 '세태와 당시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괴물이 되고 말았다'란 설정을 첨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또한 블라드 3세와 드라큘라는 사는 곳만 같을 뿐, 드라큘라와는 동일인물이 아니란 이야기 역시 존재하며 무엇보다 브람 스토커는 드라큘라란 이름 자체를 알기 전에 그저 '언데드(Undead)'란 이름으로 제목을 구상했었다.[50] 다만 잔혹함과는 별개로 옳은 길이라면 절대 타협하지 않는 원 역사에서의 원리원칙적 성격은 그대로 있다.[51] 참고로 크로커스는 블라드공이 죽인 보얄 중의 한 명. 그런 크로커스의 영혼을 코제트가 크로커스의 관을 찾아 옮겨놓아 흡혈귀로 만든 것임[52] 블라드의 말뚝형이 광기에서 비롯했다는 주장은 보통 볼모생활 당시에 오스만과 양성애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메흐메트 2세의 학대를 원인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터키에서 제작되어 영웅시되는 메흐메트 2세의 양성애 성향이나, 오스만이 볼모를 학대했다는 주장을 할리 없으므로 이렇게 순화해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블라드가 볼모시절 학대당했다는 주장은 역사학계에 꽤나 통설로 이야기된 부분이라 소개하고 넘어갈만도 한데, 원체 영웅시되는 인물이라 그런지 언급도 안한다.[53] 만일 형제 운운하는 게 단순히 볼모 생활을 했다는 이유라면, 신하국의 군주나 지방 유력자의 아들을 볼모로 잡고 교육한 것은 오스만 제국이 흔히 시행하던 정책이다. 블라드 외에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는 스컨데르베우도 같은 길을 밟았다. 또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로마 제국이 시행했던 정책이기도 하다.[54] 실제로 영상에서 묘사되는 바를 보면 블라드도 동생에 대한 정이 남아있으며 라두 역시 오스만-왈라키아 전쟁 초기만 해도 형을 최대한 쉴드 쳐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왈라키아와 형수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라두는 이것이 형의 아집 때문에 벌어진 쓸데없는 희생이라 여겨 형에게 환멸을 느꼈고 결국 마지막화에서 완전히 돌아선다.[55] 오스만과 경쟁국인 국가와 동맹 - 오스만 수도 전쟁 중 함락 미션. 발동시 해당 시점의 오스만의 군주, 후계자, 배우자, 섭정을 남김없이 죽인다. 왈라키아보다도 이게 가장 절실한 국가가 바로 풍전등화의 로마 제국.[56] 자신이 생전에 한 행동으로 인한 악명은 긍정하지만 19세기 영국에서 뜬금없이 뒤집어 쓴 오명이라 혐오한다. 게다가 흡혈귀 드라큘라로서의 기억이 강제로 섞여있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57] 일어판을 발음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추정된다.[58] 처음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낮에는 손님을 받지 않으니 밤에 다시 와 달라고 하는데, 두번째 방문했을 때 백작이 이왕 손님으로 왔으니 저녁식사를 대접하겠으니 같이 먹자고 권하는 선택지가 뜬다. 식사를 먹는다고 선택하면 주인공은 그날 밤에 백작의 야식으로 전락하며 바로 게임오버(...)가 뜬다. 저녁을 거절하면 왜 찾아왔냐고 물어보며 세가지 선택지가 뜨는데, 백작을 쓰러뜨리러 왔다는 선택을 하면 바로 일기토로 넘어간다.[59] 부관을 시켜 싸울 경우 천하의 로꼬라도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력까지 감안하면 체력 100에 무력 98인 바르바로사 하이레딘이 가장 세다. 물론 롱기누스의 창에 신전기사단 갑옷이면 둘 다 그냥 눕는다[60] 내러티브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게 이 게임에서 비잔틴 잔당이 템플러고 오스만 제국에 암살단 협력자들이 있다. 그리고 쉴레이만 1세와 친분이 있다.[61] 현재는 매우 약한 보스다...